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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유 Apr 25. 2020

시작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그날 아침도 눈을 뻐끔 뜬 채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나이가, 살아온 인생이, 살아갈 시간이 두려웠다. 영영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무서웠다. 어릴 때는 몰랐던 삶의 무게가 나를 삼킬 듯이 덮쳐왔다.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미국 대학원 생활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마치 겉모습만 멀쩡한 썩은 달걀과 같았다. 누구든 마주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오면 미래에 대한 계획이 다 준비되어있는 양 꾸며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가 않았다. 스스로의 의지로 당차게 선택했던 길이 사실은 내가 갈 수 없는, 나에게 맞지 않는 길임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작고 미약한 인간인 나 하나쯤 알맞게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그때의 나를 젖은 수건 짜듯이 돌돌 말아 짜내면 자기 비하와 자기 불신만이 남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 진로를 택했던 과거의 고집을, 어떻게든 유학생활을 버텨내지 못한 나의 나약함을 비난했고, 급기야는 유학을 중단했던 선택마저도 신뢰하지 못했다. 바다 건너에선 유학을 그만두고 돌아와야 하는 이유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더니 막상 볼품없는 백조가 되어 한국에 착륙한 후에는 많고 많았던 이유 중 그 어떤 것도 분명하거나 확실한 것 같지 않았다.


꽤 지독한 우울이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어떤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가능성 없는 일은 없음을 감안하면 나는 어떻게든, 어찌하면,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채로 세상 밖에 나올 엄두일랑 내지 못했던 나를 끄집어낸 것은 내가 완전한 무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살아온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잘못된 밑그림은 지우고 다시 그리면 될 일이고, 어울리지 않는 색을 칠했다면 물을 섞어 옅게 하거나 다른 색으로 덧칠을 하면 그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그려지고 칠해진 그림은 깊이가 없다. 나는 살아온 경험을 바탕에 깔고 다시 그림 그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지나온 시간들은 다른 이들은 갖지 못하는 나만의 색이 되리라.


먼지투성이인 이불을 치워내고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알알이 들어찬 눈곱에 기름진 머리까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깨끗이 씻고 집 밖에 나서니 살갗을 스쳐오는 바람이 싱그러웠다. 모든 것이 불명확한 가운데 한 가지만이 확실했다. 이 시작이 처음이 아니고 또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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