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루 Feb 07. 2021

그렇다면, 싫어요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0. 경제 전문가도 아니니까…


전문가도 아니니, 부담 없이 공산당 선언에 대한 감상평을 가볍게 남겨보려 한다.

2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고 자본주의 모순성에 대해 처음 알아 아차 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나 미디어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였지만

실제로는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었다.


지금과 그때의 나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것은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라는 점이다.

아마 이점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 책을 다르게 읽는 차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한다.


1.  부정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특성에 관해 기술하지만, 별로 단점 같지 않았다.

아래는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P15, 하단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냉정한 “현금 계산” 외에는
어떤 유대관계도 남기지 않았다.


“적나라한 이해관계”가 차라리 “모호한 이해관계”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그 “정확한”이해관계의 표현형이 “현금 계산”일뿐

숫자로 표현되는 “성의와 관계”라곤 하지만

애초에 이해관계조차 따지고 싶지 않다면 주고받질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 정량화되지 않는 이상

관계 속에서의 “현금 계산”이 그렇게 냉정할 수 없단 생각이 든다.



P17, 하단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도구들을, 따라서 생산관계들을
따라서 전체 사회관계들을 끊임없이 혁명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낡은 생산양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들의 첫 번째 생존조건이었다.

생산의 지속적인 변혁, 모든 사회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정과 운동은
이전의 모든 시대들과는 구별되는 부르주아 시대의 특징이다.


계급 수준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수준에서의 동요

그로부터 요구되는 변화의 필요성은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가 아닐까?


사회 초년생인 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내 주변의 상태의 동요는 항상 날 움직이게 했고

그것은 최소한 어제보단 나은 오늘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설령 그 불안정이 부조리라 할지라도.



P21, 그것은 하나의 정보, 하나의 법률, 하나의 국민적인 계급 이익, 하나의 관세율을 가지게 된다.


마치 창문에 붙은 얇은 빗방울이 주변의 작은 물방울을 흡수해 커지고

이내 떨어져 바닥에서 다시 산개하듯이

필연적으로 무거워진 하나는, 개성을 잃고

하나의 부분들은 각자의 개성을 찾으려 흩어지려 한다는 것도 하나의 법칙이 아닐까.


다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는

흩어진 물방울을 손으로 모으냐

중력가속도를 받아 천천히

그리고 늘어나는 무게에 맞추어 가속도를 받아 빠르게 내려가냐의 차이이지 않나 싶다.




2. 동의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점에 대한 기술이다.

나도 동의한다.


P25

그 대신에 생산력들이 이 소유관계들에 대해 너무나 강력해지면
이 관계들에 의해 제동을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력들이 이 제동을 돌파할 경우, 즉각 전체 부르주아 사회는 혼란에 빠지며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가 위협받게 된다.
부르주아적 관계들을 자신들이 만들어낸 부를 흡수하기에는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이 공황들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옛 시장들을 더욱 철저히 착취함을 통해서이다.
이는 결국 무엇에 의해서인가? 그들이 더 전면적이고 더 강력한 공황을 준비함에 의해서
그리고 공황을 막을 수단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것에 의해서이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이란 종은 지구라는 환경을 개척하며 개체 수를 늘려간다.

또 이것과 동시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균은 인간의 사회성을 매개로 사람들을 전염시킨다.

인구밀도가 증가할수록 바이러스나 병균을 막을 근본적인 대책과는 멀어진다.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도 이와 동일하다.

자본주의 기반의 경제 시스템 또한 자기 증식적인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커지면 커질수록

생산력도 커지며, 이 생산력을 커버할 수 있는 세계 경제망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공황이 온다.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생산력을 파괴하거나

더욱더 깊은 곳까지 경제망을 침투시킨다. 그리고 더 강한 세기의 공황을 맞이한다.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망한 체제인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증명은 더 이상 경제망이 뻗쳐 나갈 수 없는 시기일까?

그렇다면 그 시기가 오긴 할까?


우주시대가 온다면…



P40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노예상태 내의 생존조차 보장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노예들로부터 부양받기는커녕
도리어 부르주아 계급이 노예를 부양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 노예를 빠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지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상당한 기간(100~200년) 동안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성급히 지배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고 본다.

인간의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그 시간은 짧지 않다.

자본주의가 불완전한 시스템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틀린" 시스템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다분히.. 선동적이며 단정적이라고 생각한다.



3. 에바(over)


여기서부터는

부정을 넘어서 에바라고 생각한다.


P47

임금노동은 자본이라는 일종의 재산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자본은 임금노동을 착취하며
또한 그것은 새로운 임금노동을 창출하여
그것을 다시 착취한다는 조건이 없으면
스스로 증식될 수 없는 재산이다.


시바 그럼 착취 아닌 게 어디 있나.


잉여자산과 인간의 질투와 이기심 자체가 자연발생적인 한

그가 말하는 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부분은 일종의 단어의 선택을 통한 선동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표현이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돈은 희망이다.


그 희망을 하나의 벡터로 본다면

늘어나지 않는 벡터의 크기는 0일뿐이다.


헛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P47, 그러므로 자본은 개인적인 힘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힘이다.


잉여 생산력의 증가가 개인의 능력과 집단의 생산력에 의존하는 한

자본 개인적인 힘인 동시에 사회적인 힘이다.

개인적인 힘을 부정한다면

생산력의 증가, 즉 사회의 활력은 두 바퀴 중 하나를 읽는 셈이 된다.


여기서 집단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점은

개인이 모인 집단은 실제 하지만

사회는 말 그대로 개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역전될 수 없다.



P60

한 개인에 대한 다른 개인의 착취가 폐지됨에 따라
마찬가지로 한 국가에 의한 다른 국가의 착취도 폐지된다.

국가 내부에서의 계급들 간의 대립이 소멸함과 더불어
국가들 상호 간의 적대적 입장도 소멸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물로부터 착취하며 삶을 이어간다.

새끼는 부모를 착취하며, 부모는 그 주위의 환경을 착취한다.


착취가 만들어 내는 서열 즉 계급은, 사회적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생의 특성에 가깝다.

그렇기에 생명의 중심에서 바라볼 때, 착취에 대한 도덕적 시선은 위선일 뿐이다.


그렇기에 착취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겠다면 그 부정은 그가 속한 사회 자체로 향한다.


사회에 대한 부정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부정은 수정되어야 하지만, 그 수정의 과정은 억지가 아니여야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억지가 과정을 무시한 결과만의 평등을 바랄 때,

그리고 그 사회가 그 억지를 단순히 많은 이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수용할 때,

그 민주주의 속의 국민 개인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4. 공산당이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난 이제부터 공산당이 싫다.


그렇다고 자본가도 될 순 없겠지만.






작가의 이전글 When Angels Cry, Janis I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