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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May 09. 2019

슬퍼하는 자, 그리고 자기자신을 다루는 자

법구경 현철품, 윤동주 팔복


마태복음 5장 3~12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팔복(八福), 윤동주


그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했을 때의 나이가 스물일곱

그리고, 저에게는 형이기만 했던 그가

올해 저의 동갑내기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좋아

그의 시들을 찾아 읽다가

만났던 발자취 중 하나가

이 팔복이라는 시였습니다.


쉽게 외울 수 있는 이 시를

입으로 외우다 보면

그 끝에 가서는 답답함과 억울함에 사무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마지막 구절이 한탄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슬퍼해야만 복이 있다는 말은

그때의 저에게는

개소리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들이

비겁하고, 무책임하여

시속의 화자 역시

그 말을 해주는 어떤 님에게


"슬퍼해야만 복이 있다고요?"

"그래서 지금 하염없이 슬픈 현실이 사실은 복이 있는 것이라고요?"

"그래요. 당신 말대로, 당신이 원하는 데로, 제가 영원히, 영원히 슬퍼보겠습니다."

라며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구글 이미지, 윤동주 팔복




법구경, 김달진 옮김, 현철품, 80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다루며
물 대는 사람은 물을 끌고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지혜있는 사람은 자기를 다룬다.

"나는 자기 자신을 다루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시는 부처님의 말에서

팔복의 "슬퍼하는 자"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루는 자와

슬퍼하는 자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졌습니다.


나아가

"왜 슬퍼해야만 복이 있느냐"라고 따지기에 앞 서

했어야 할 당연한 질문을 기억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무엇을 슬퍼하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그 답이

"자기 자신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넌지시, 미소짓고 있는 동주에게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구글 이미지, 슬퍼하는 자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생명으로서 지켜야 할 "계"를 지키지 못하여

스스로를 아프게 하여

남을 아프게 하는

자기 자신


슬퍼해야 할 것에

슬퍼할 줄 모르는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슬퍼해야 하는 것에

슬퍼할 줄 알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님은 말해주시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는

슬퍼해야만 하는 숙명을 껴안고

이제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님을 찬탄하고

스스로 "슬퍼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장면이 아닐까.


여전히 동주는 저의 읊조림에 말이 없습니다.

내년이면 동주보다 나이로는 형이 될 텐데


저는 아직 그보다 형이 되기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구글 이미지,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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