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의 오늘은 무언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나 보다.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가장 예의 바르고도 잔인한 방법이 무관심이라고 일기를 썼다. 대체 누가 그렇게 신경 쓰였고,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싶었을까? 지금은 기억조차 없는 별 거 아닌 사건이었을 텐데 그때의 나에겐 꽤나 스트레스를 줬나 보다. 밖으로 표현하면 내가 더 약해질까 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있다고도 쓰여 있는 걸 보면.
2007년의 오늘은 정역학 공부로 밤을 새웠었나 보다. 이번 시험은 확신이 없다며
Don't you give up. Don't be afraid, when things go wrong, just be strong.이라고 일기를 썼다. 갑자기 나온 영어에 순간 움찔했지만 그 시절 내가 좋아하던 Mocca의 'Happy!'라는 노래의 가사라는 걸 알아챘다. 아무튼 이 날은 기억이 난다. 밤새 공부한 결과, 문제를 풀 수는 있는데 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불안했다. 그래도 노력이 배신하지 않아 제시간에 잘 풀고 나왔다. 참 열심히 공부하고 착실한 학생 시절이었다. 정역학 공부를 하면서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계속 붙들고 풀려고 노력하면 결국은 풀린다는 것을 배웠다.
2008년의 오늘도 위생공학 공부로 밤을 새웠었나 보다. 아무래도 이맘때가 시험기간이었던 것 같다. 위생공학 교수님은 커닝하라고 시험 시간 대부분을 아예 대놓고 딴청을 부리곤 하셔서 같은 과 오빠들에게는 비교적 쉬운 시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커닝을 하고 싶지 않아서 밤새 공부해야 한다며 억울한 마음이 가득한 일기를 썼다. 그리고 일기 마지막에는 촛불 집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썼는데 바로 광우병 촛불 집회였다. 하필 위생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미국산 소고기 찬양을 하시던 분이라 더욱 시험공부가 거북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한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읽다 보니 문득 국회의원들이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며 한우보다 훨씬 맛있다는 말을 해서 기가 찼던 뉴스 장면도 생각났다. 정권이 바뀐 뒤, 갑자기 미국 소 안 된다며 태도를 180도 바꿨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던 기억까지도.
2009년도 시험공부에 허덕이는 일기를 썼고, 2010년 오늘의 일기엔 Marte Doctor가 떠나셔서 아쉽다고 써져 있다. 그동안 윗사람한테는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고 당당하게 손 흔들며 “Hi~" 해서 죄송했다는 내용과 함께^^; 실장님과 협업하시던 마테 박사님이 잠시 한국에 오셨었는데 내가 주로 보좌했던 기억이 난다. 마테 박사님 방에 들어갈 때면 늘 심호흡을 하고 한껏 긴장했었다. 또 모든 집중력을 청각으로 보냈다. 실장님이 영어 잘하는 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 야속했지만 어쨌든 나름 눈치와 바디랭귀지로 마테 박사님과 하루하루 잘 보냈던 것 같다.
2011년 오늘의 일기는 점점 더 여유가 생기고 평온해서 기분이 좋다고 써져 있다. 뭐든지 열심히 하자고 다짐하며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라 즐겁다고 쓴 내용을 읽으니, 사회생활 2년 차의 열정 가득한 내 모습이 보였다. 무엇이든 하고 싶고, 할 수 있었던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내가.
2012년 오늘의 일기는 울고 있다. 1월에 결혼을 했고, 아이가 빨리 생겨야 한다는 압박감 속 6월 오늘의 나는 슬펐나 보다. 성당에서 기도드리는 내내 눈물을 흘렸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치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써져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이 났다. 이때의 내가 너무 가여워서. 결혼한 지 6개월 밖에 안 된 시점이고, 나는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단지 결혼을 했을 뿐인데, 1년 전의 일기와 상반된 내 모습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2013년 오늘의 일기는 남편이 가득했다. 1년 반 만에 드디어 남편의 습관이 바뀌기 시작해서 뿌듯하다는 내용이었다. 엎드려 자지 않고 똑바로 누워서 자고, 문고리도 닫고 들어오고, 발 꿍꿍 거리며 걷지 않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부터 갈아입고, 샤워하고 머리카락 싹 훔쳐서 나온다고! 내가 요구하는 게 많은데도 좋은 습관이라며 바꾸려 노력해 줘서 남편에게 고맙다고 써져 있었다. 1년 반이나 살뜰하게 반복적으로 이야기 한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나 되게 인내심 많은 부인이었구나. 게다가 노력해 주는 것 자체만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는 부분도 지금과 많이 달라서 놀랐다. 지금의 나는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싫고, 바뀌진 않고 노력한다고 말만 하는 것도 싫어하는 부인이다. 조금 반성하게 된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싫지만^^;)
2014년 오늘의 일기는 힘들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서 정화를 위해 떠난다.’는 한 줄만 써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디로 떠났는지 궁금해진 나는 사진첩을 뒤졌다. 사진을 보니 그 시기의 기억이 났다. 난임 병원을 다니며 맞은 호르몬 주사로 살은 계속 찌고, 그때는 보험 적용도 안 되던 터라 한 번 갈 때마다 몇 만 원씩 지출은 지출대로, 그리고 계속되는 임신테스트기 한 줄에 좌절과 패배감으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정신이 박살 나고 바닥을 친 와중에 남편과의 싸움이 나를 완전히 주저앉혔다. 그 길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용문사로 향했다. 그곳 사람들에게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이른 새벽에 108배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다 내려놓지 못하고 그곳에 있는 100년이 넘었다는 할머니 나무를 만지며 아이가 생기길 기대했던 가여운 내가 기억난다.
2015년 오늘의 일기엔 노래가사만이 적혀 있었다. 정인의 ‘오르막길’이라는 곡이다.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난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이 노래를 들으며 참 많이도 울었다. 난임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며 스스로 화살을 내 가슴에 꽂아 넣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우는 것 같다. 미래를 아는 나는 이때의 나에게 ‘이제 곧 예쁜 아기가 생겨! 몇 년 동안 마음고생 많이 했어!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며 토닥여 주고 싶다.
2017년 오늘의 일기는 온통 겸이의 기록이다. 아랫니가 3개 나고, 위에 송곳니가 하나 났으며 잡고 서기 시작했다고. 애착형성 시기라 엄마만 찾아 징징거리는 덕분에 집안일이고 씻는 거고 뭐고 아무것도 못해서 남편 퇴근 시간쯤이면 얼이 빠져 있다고 써져 있었다. 마지막엔 좀 더 힘내야겠고,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썼는데, 뭔가... 분명 고단함을 썼는데도 행복함이 느껴졌다. 힘듦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정신은 맑고 몸만 힘들어하는 느낌에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2017년의 내 정신은 1 급수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오염되었지? 지금 내 정신은 금방 탁해지고, 서둘러 정화시켜도 1 급수는커녕 2 급수는 되려나? 이런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2023년 오늘. 겸이와 좋은 하루를 보냈다. 목이 터져라 두 시간가량 책을 읽어주고, 숙제하는 겸이 옆을 내내 지켰다.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대화도 했고,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며 놀기도 했다. 우리는 매일 밤 감사기도 끝에 기쁨을 찾는다. 오늘 겸이의 기쁨은 엄마가 겸이 옆에 계속 있어서 기뻤다고 한다. 오늘 나의 기쁨은 내 일기를 더듬어 읽고 올라오며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그래서 겸이와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서 뭔지 모를 변화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길이 조금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