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Jun 28. 2023

잊지 말아요

기억나


 나는 남을 잘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친구가 남편 이야기를 할 때면 그때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친구 남편은 친구에게 화 한 번 내지 않는다고, 친구의 기분에 따라 집의 분위기가 좌지우지된다고 했다. 늘 일방적으로 친구만 화를 내고 남편은 혼나기만 한다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어찌나 부럽고 신기하던지 친구를 만날 때마다 아직도 너만 화 맘껏 내냐고 묻는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연하 남편이야기가 나와 친구네 얘길 꺼냈다. 그런데 연하 남편을 둔 한 멤버가 본인 집도 친구네랑 똑같다는 것이다. 연하 남편의 특징일까? 살면서 연하를 한 번도 남자로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대체 왜 그렇게 편협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너무 부러웠다.

 다섯 살 연상인 내 남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본인만의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절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11년째 같이 살면서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맘껏 화를 내지 못한다. 화낼만한 상황에서도 몇 번 화내고는 정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내고 싶은 만큼 충분히 화내지 못한 채, 스스로 화를 다스려야 한다. 그런 나에게 연하 남편의 이야기는 귀가 솔깃할 정도로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연속으로 연하 남편이야기를 듣고 집에 온 나는 ‘화를 내고 싶은 만큼 어흥 낸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며 부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남편에게 티를 냈다. “그래?” 별 감흥 없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에게 타격감은 제로였다. 나 역시 기대감이 제로이기 때문에 타격을 주려고 이야기했던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너무너무 부러워서 입이 근질거렸을 뿐이다. 며칠 후, 친정에서 친척동생의 썸남이 연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체 없이 나의 입이 터졌다. 연하남이 좋다더라, 연하는 다 받아준다더라, 너무 부러웠다, 나는 연하를 왜 안 만나봤을까? 한참을 연하 남자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는 아차 싶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이 그제야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역시나 별 감흥은 없어 보였지만 워낙 티를 안 내는 성격이니 살짝 신경이 쓰였다.   

 “혹시 아까 내가 연하 남자 이야기 계속해서 기분 별로였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의 질문에도 남편의 얼굴은 아주 여유로웠다. 전혀 아니라고 하며 너는 다 잊어버린 거냐고 도리어 물었다. 네 마음대로 굴 수 있고, 뭐든 다 받아주고 맞춰주는 남자가 정말 너한테 매력 있는 사람이 맞느냐고 했다.

 기억이 났다. 나는 연하는 아니었지만 나만 일방적으로 맘껏 화를 낼 수 있는 연애를 많이 해봤다. 자꾸만 나에게 일방적으로 맞추는 상대방에게 점점 매력이 떨어져 미련 없이 끝내는 연애. 그리고 남편과 나는 대학생 때, 서로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과거를 나누던 절친한 오빠동생 사이였다. 남편은 내가 처음으로 연하 남편이 부럽다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별로 감흥이 없었다고 했다. 그냥 순간 부러웠다보다 했는데, 친척동생한테 하는 이야기를 듣고 까먹었구나 싶었다고 했다.    

 우리가 연인사이였을 때, 남편은 데이트 중 내가 화나서 집에 간다고 일어나면 한 번 붙잡아보고 그 이상은 안 잡고 본인도 집에 가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난다고 자존심 세우며 본래의 마음을 숨기고 다르게 뱉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나는 다 받아주는가 싶다가도 어느 선부터는 절대 받아주지 않는, 잡은 건지 잡힌 건지 잘 모르겠는 남편 같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최근에 ‘너를 닮은 사람’이라는 드라마에 푹 빠졌다. 아내, 엄마라는 역할을 잊고 연하남과 잠시 욕망을 쫓았던 여자의 이야기였다. 근데 불륜 남인 서우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이런 고혹적인 남자가 흔들면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하고 늘 차분한 남편 안현성과 반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연하남 서우재. 드라마에 과하게 몰입한 나는 남편에게 서우재 이야기를 했다. 불륜 안 좋아하는데 근데 서우재가 너무 매력적이라 납득이 가더라, 좀 저돌적이고 무모하긴 한데 그게 또 멋있는 것 같아, 둘이 결국 어떻게 될까? 했더니 남편은 또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한다.

“그 여자가 무모한 남자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기억 안 나?”  

 기억이 난다.

작가의 이전글 지진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