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금주를 외치다 (4)

금주는 하기 싫은 알콜 중독자의 절주일기 #05-4

by 도이어리

4. 제일 친한 친구들에게 외치기


“와, 오늘 진짜 춥더라.”

“내일은 더 춥대”

“어제 러닝 하려다가 바람이 살벌해서 못 나갔음”


한파가 몰아친 이튿날 아침. S와 L, 그리고 나까지 총 3명이 있는 단체 채팅방의 알람이 울렸다. 시간은 오전 8시 15분. 친구들이 출근길 지하철에 탄 모양이다. 신년을 맞아 같이 건강해지자는 약속 아래 달리기를 시작한 지 딱 한 달째다. 각자의 달리기 기록과 목표, 현황, 오늘의 후기 등을 공유하며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나도 출근길 지하철에서 짧은 답장을 보낸다.


“지금 영하 10도야. 미친.”


S와 L은 베스트 프렌드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 출신이다. 20살 때 만나 천천히 친해지다가 정신 차려보니 일 년에 한 번씩 함께 여행을 가는 10년 지기 친구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매년 9월 함께 여행을 간다. 셋의 생일은 각각 일주일 간격으로 모두 9월에 있다. 아직 학생이던 시절, 서로 거창한 선물을 하기는 부담스러우니 모여서 S의 집에 모여 조촐하게 케이크나 나눠먹으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자 했던 것이 여행으로 발전했다. 합동 생일파티가 생일 여행이 된 지는 벌써 4년째다.


첫 해에는 천안에 갔다. 그전에는 셋이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뚜벅이 셋이 1박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여행지였다. 그다음 해에는 대전에 갔다. 빵과 만두를 먹기 위해서였다. 다음에는 포항에 갔다. “포항”하고 말할 때 입술 끝에서 바람이 슈웅 빠지는 듯한 발음이 귀여워서였다. 그다음에는 전주에 갔다. 경상도에 한번 갔으니 전라도에도 한번 가보자는 이유였다.


그렇게 벌써 4번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에 술이 빠지는 법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셋이 모였을 때 과음하는 일은 잘 없다. 셋의 음주 취향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작년 9월 전주 한옥마을로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사람들은 가봤자 별거 없을 거라고들 했다. 그 말이 우습게 전주에는 즐길거리가 넘쳤다. 어느 한옥에서는 무료로 독립영화를 상영해주고 있었다. 어느 호수 위에 있던 예쁜 한옥에서는 전주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창문 너머로 비 오는 호수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미식의 도시답게 내가 사랑하는 육전도 너무 맛있었다.


하지만 전주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가맥집이었다.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답지 못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까지 가맥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간단한 안주에 맥주를 마시는 곳인 줄 알았는데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를 직접 가져다 먹는 곳이었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시스템에 갑작스레 흥분되었다.


“와!! 나 오늘은 그냥 편하게 마신다?!!”


신나서 외치며 맥주를 가지러 갔다. 냉장고 안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가 들어있었다. 어떤 맥주를 먼저 고를지 고민되었다. 고민조차 행복했다. 친구들과 나눠먹으니 한 병이 다 비워졌다. 바로 다음 맥주를 가지러 갔다.


“나 그냥 편하게 먹고 싶은 거 가져올게?!”


친구들은 맥주를 보고 흥분한 나에게 ‘너 먹고 싶은 걸로 가져와.’라며 모든 선택권을 양보해 주었다. 이번에는 냉장고에 달려가 다른 맥주를 들고 왔다. 내 맥주잔을 꼴꼴 채웠다. 친구들의 맥주잔은 아직 비워지지 않았었다. 건배를 하고 맥주를 꼴깍꼴깍 넘겼다. 맥주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갈 때 청량하고 시원한 감각에 ‘캬’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근데...”


또 다음 맥주잔을 채우는데 L이 입을 열었다.


“왜 자꾸 편하게 마신다고 해? 원래 우리랑 마실 때 불편했어?”


순간 S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방금 ‘편하게’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더라? 왜 그런 말을 했더라?


“아니, 그냥. 내 페이스대로 마시겠다는 뜻이었어.”

“아, 그렇구나. 얼마든지 편하게 마셔!”


L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둘러댄 말이었다. ‘편하게’는 말은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다. 그때는 내가 왜 ‘편하게’라고 자꾸 말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뒤늦게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막연히 느껴왔던 미묘한 불편함이 떠올랐다. 이때쯤엔 사실 술을 마시는 것이 편하게만 느껴지진 않을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술 자체를 즐겼다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솔직히 우리는 주량도, 선호하는 주종도 모두 다르다. S는 내 주량의 2배쯤 되고, L은 내 주량의 절반쯤 된다. S는 탄산의 배부름을 싫어해 맥주를 얼마 마시지 않는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 재채기가 나는 이상한 증상이 있어 조금씩 홀짝거리는 정도다. L은 주량이 약해 모든 술을 한두 잔 정도만 마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같이 술을 마시는 일도 자주 있진 않았다. 한 명이 좋아하는 술을 마시면 나머지는 가볍게 목만 축이는 정도다.


둘 다 나만큼 술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취기가 올라오면 눈치가 보였다. 혹시 나 혼자만 취해가는 게 민폐가 될까 봐, 혹은 내가 너무 가벼워 보일까 봐 종종 신경 쓰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싶은 만큼 충분히 마시지 못하고 적당히 끝낸 적이 많았다. 신나게 마시려고 마음을 먹어도 나 혼자 취하면 친구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데 날 위해서 그냥 앞에 앉아있어 주는 걸까, 혹은 날 알콜 중독자로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런 날은 집에 가서 혼자 캔맥주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가맥집에서 발견한 맥주 가득한 냉장고는 순간 나의 고삐를 풀었다. 내 심장이 맥주를 강렬하게 원했다. 저 냉장고 안의 맥주를 다 먹겠다! 오늘 이 여행의 마지막 밤만은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즐기겠다! 나도 모르게 ‘편하게’ 마시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결국 그날 정말 편하게 마시지는 못했다. 술보단 함께 있는 사람들이 중요했고,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만 마시고 끝냈다. 또 친구들이 아무리 편하게 마시라고해도 내 안에 잠들어있는 불안과 걱정은 맥주잔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여행이 끝나고 4일 뒤, 금주를 시작했다. 맥주와 작별할 줄 알았으면 그날 정말 편하게 마실걸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금주가 거의 끝나갈 때쯤, 우리도 신년회 일정을 잡게 되었다. S는 이미 나의 금주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L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특별히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금주를 시작한 이후로 아직 L을 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L은 언제나 회사 일에 치여(...) 연락이 잘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L이 술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금주 소식을 알리지 않아도 우리의 만남에 큰 변화는 없을 터였다. 사실 알리지 않았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나 금주 중이라고 말했나?”

“몰랐어! 금주 중이야?”

“실패하면 머쓱할까 봐 말 안 했나 봐. 혹시 신년회 때 우리 음주하게 되면 난 무알콜 먹을게!”


그러자 S와 L도 알코올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번에는 아예 음주가 없는 신년회를 하기로 정했다. 이전까지는 술을 마실 때도 안마실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미리 정하고 만나지는 않았다. 토요일 오후에 만나 저녁을 먹고 카페에 들렀다가 헤어졌다. 고작 8시였다. 집에 가는 지하철 안, 금주를 성공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다는 뿌듯함과 함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편하면서도 마냥 편하지는 않았던 복잡 미묘한 신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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