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는 하기 싫은 알콜 중독자의 절주일기 #06
뭐든 처음 시작할 때가 가장 두렵다. 고난이 훤히 보이는 일은 더 그렇다. 주사도 맞기 전이 제일 무섭고, 롤러코스터도 올라가는 길이 제일 무섭다. 영어공부도, 다이어트도, 미라클모닝도, 금주도 시작하기 전이 제일 무서웠다.
지난 몇 년간 절주를 시도할 때마다 날 괴롭혔던 고비들이 있었다. 크게는 2가지였다. 하나는 저녁을 먹은 직후에 오는 고비다. 매일 저녁마다 배가 부르면 탄산 가득한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해진다. 이런 경우 두세 시간을 견뎌 밤이 되면 참을 만해진다. 두 번째 고비는 그렇게 맥주를 잘 참은 다음 날에 온다.
‘하루 참았으니 오늘은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이틀에 한 번씩 마시는 정도면 벌써 절반으로 줄인 셈 아닌가?’
이런 유혹에 넘어가 하루 참고 다음 날 마시고, 하루 참고 이틀을 마시고, 하루 참고 나흘을 마시고… 그러다가 하루 이틀 참은 뒤 한 달 내내 매일 마시게 되며 금주가 자연스레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금주도 결심이 어려웠다. 절주도 이렇게나 힘든데 금주는 도대체 얼마나 힘들까. 두 달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까마득하게 느껴질까. 분명히 어느 날은 맥주가 미칠 듯이 먹고 싶어 질 텐데 그날은 도대체 어떻게 견뎌야 할까. 매일 밤 맥주를 먹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너무 쉽게 그려졌다. 당연히 이번 금주도 술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는 것이 가장 어려울 줄 알았다.
막상 금주를 시작하니 의외로 맥주를 먹지 않는 시간에는 쉽게 적응했다. 매일 저녁 맥주를 마실지 참을지 고민해야 했던 절주와 달리 아예 마시지 않는다고 못 박아두니 마음의 갈등이 오히려 덜했다. 두 달만 참으면 맛있는 맥주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 달쯤 지나자 금주 기간을 조금 더 늘려 아예 크리스마스까지 참아보겠다는 결심도 들었다. 가끔 맥주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는 밤을 어렵지 않게 보내는 몇 가지 요령도 생겼다. 나를 지레 겁먹게 했던 여러 걱정들은 그 다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다.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먹고 치우고 씻고 집안일을 마쳤다. 이제 할 일은 잠에 드는 것뿐인데 졸리지가 않았다. 이제 겨우 8시였다. 잘 시간 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금주를 시작하기 전에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한 캔 땄다. 맥주를 즐기다 보면 금방 잘 시간이 되었다. 금주를 시작하고 마주친 예상치 못한 고비는 너무 긴 저녁 시간이었다. 도대체 남은 4시간은 뭘 하며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운동, 공부, 빨래같이 해야만 하는 일은 하기 싫었다. 도대체 뭘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하지? 맥주 말고 재밌는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저녁에 뭐 했지?’
아주 어릴 땐 이미 잤을 시간이고 그다음엔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 아빠와 수다 떨며 놀았을지도 모른다. 좀 더 커서는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고, 성인이 되고는 내내 술을 마셨다. 저녁을 즐기는 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저녁을 즐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누워서 유튜브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시간을 금방 보내게 해 주었다. 며칠은 재밌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재미있는 영상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알고리즘이 끝난 것 같았다. 누워서 핸드폰만 보고 있으니 편두통도 다시 생겼다. 저녁 시간을 통째로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크게 들었다.
하루는 원데이 미술 수업을 들었다. 그림에 취미를 붙여보겠다며 다이소에서 아크릴 물감과 미니 캔버스를 사 왔다. 가로 세로 10cm씩 하는 작은 캔버스를 채우는데 5시간이 걸렸다. 어깨와 목 통증이 너무 심해져 하루 만에 그만뒀다.
하루는 책을 좀 읽어보려고 했다. 몇 년째 독서모임을 다니고 있지만, 모임일이 임박해서 겨우겨우 책을 다 읽고 가는 나이롱 멤버다. 심지어 모임을 가는 지하철에서 부랴부랴 읽는 날도 허다하다. 금주를 하고 정신이 멀쩡한 상태니 이 참에 책 읽는 습관을 들이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도서관에 가서 재밌어 보이는 책을 7권이나 빌려왔다. 막상 집에 와서 읽으려고 하니 재미가 없었다.
하루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고 했다.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책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루는 마블 영화를 틀었다가 10분 만에 끄고, 하루는 드라마를 틀었다가 5분 만에 껐다. 디즈니 플러스에도 넷플릭스, 쿠팡플레이에도 나의 시간을 빠르게 돌려줄 영화와 드라마는 없었다.
대신 연애 프로그램이 있었다. 넷플릭스에 있던 ‘블라인드 러브’와 ‘최후통첩’을 정주행 했다. 미국에서 만들어낸 연애 프로그램이었다. 그동안 내가 즐겨봤던 ‘나는 솔로’ 같은 연애프로그램은 그저 유교국가에서 만들어낸 순한 맛에 불과했다. 그 어떤 빌런이 나와도 기본 설정이 너무 순했다. 미국인들의 연애는 맵디 매운 것이었다. 며칠 동안 나의 도파민을 터트리고 시간을 배속으로 흘러가게 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 싸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졌다.
연애 프로그램마저 질리고 나니 더 이상 시간을 죽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저녁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의문이었다. 할 일거리를 찾아 유튜브와 책과 넷플릭스를 순차로 돌아가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리 유튜버가 눈에 띄었다. 미니멀리즘 책도 눈에 들어왔다. 넷플릭스에서도 리모델링과 정리 콘텐츠가 날 사로잡았다. 할 일을 찾아 헤매다가 내가 정착한 곳은 바로 정리였다! 내가 정리라니, 어지르기의 대명사인 내가!
어릴 때부터 덜렁거리는 기질을 타고나 온 물건을 여기저기 어질러두곤 했다. 핸드폰을 한 달에 두 번 잃어버린 적도 있고 변기통에 빠트려 영영 찾지 못하게 된 적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 엄마가 운영했던 카페에서 일을 도와드렸는데 같이 일하던 이모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다.
“도연이는 지나간 곳에 흔적이 남는구나?”
돌아봤더니 방금 내가 청소하다가 그대로 두고 까먹은 행주를 들고 계셨다. 그랬던 나도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나니 정리정돈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직도 청소는 최대한 미루어할 만큼 싫어하지만 정리는 취향에 맞았다. 특히 너저분하게 늘어진 물건을 쑤셔 박아 딱 떨어지게 들어가는 테트리스가 재밌었다.
처음에는 냉장고를 뒤져 유통기한이 지난 소스와 재료들을 찾아냈다. 한 번에 싹 버리니 쾌감이 들었다. 앞으로 먹지 않을 것 같은 음식도 치우고 수납 바구니를 사다가 냉동고에 어질러져있던 닭가슴살도 착착 담아 정리했다. 그 와중에 냉장고 맨 위칸에 있는 맥주 캔은 치우지 못하고 고이 모셔뒀다.
하루는 주방 찬장을 정리했다. 우리 집 주방 찬장 한 칸은 온전히 컵을 두기 위한 공간이다. 정확히는 컵보다는 잔을 위한 공간이다. 컵 하나에 잔이 3-4개쯤 되는 비율로 찬장이 꽉 차있었다. 잘 쓰지 않는 잔, 오래된 잔은 치우고 정말 쓸 것 같은 잔만 남겼다. 동거인이 쓸 위스키 잔과 소주잔, 내가 좋아하는 커피잔은 손이 잘 닿는 곳에 두었다. 금주 전에 내가 가장 자주 썼던 맥주잔들은 가차 없이 맨 위칸으로 올렸다. 언젠가 다시 손이 제일 잘 닿는 맨 아랫칸으로 내릴 것이다.
하루는 옷방을 정리하고, 하루는 창고처럼 쓰고 있는 선반을 정리했다. 정리만으로 거의 1-2주를 보냈다. 정리는 꽤 즐거운 취미였지만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취미는 아니었다. 워낙에 짐이 없는 동거인의 집에 필수품만 들고 얹혀 들어온 내가 살고 있으니 애초에 정리할 물건이랄 게 별로 없었다. 정리를 다시 해야 할 만큼 어질러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요즘은 이런저런 취미를 만들어두고 매번 바꿔가며 취미 유목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하루는 청소를 하고, 다음날은 사놓기만 하고 포기했던 책을 읽고, 또 다음날은 영어 공부를 하겠다며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원서로 읽다가 한 페이지만에 포기한다. 어느 날은 브런치에 글을 쓰겠다며 노트북을 붙잡고 있기도 하고, 어느 날은 기왕 금주를 시작한 거 더 건강해지겠다며 집 근처 공원에서 달리기도 한다. 새로운 게임을 다운로드해서 밤늦게까지 즐기기도 하고, 챗지피티랑 같이 인생 계획을 짜기도 했다. 네이버 부동산 어플에서 마음에 드는 아파트 구조를 발견하면 3D인테리어 사이트에서 미래의 가구배치를 해보기도 한다. 어제는 심리학 공부를 하고 싶어져 도서관에서 심리학 교재를 빌려왔다. 내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너..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 나 좀.. 의기소침해.”
본의 아니게 친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을 만큼 별의별 취미 활동을 다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할 일이 있어 심심한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유독 맥주 생각이 간절해진다.
금주는 맥주를 참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맥주가 없어도 즐겁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요즘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맥주를 제외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있다. 누군가 금주를 고민하고 있다면 술 말고 당신이 재미를 느끼는 다른 일들을 잔뜩 찾아두고 시작하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