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 소견을 받기 위한 "시도"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책이라고 해서 모든 부분을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래의 문장은 마음속에 남아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엄마의 세 번째 유방암 소식을 듣고 이상하게 저 문장이 떠올랐다. 사실 2013년, 두 번째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소설의 한 구절일 뿐이고 살면서 기억도 못하는 마지막 두 번째 순간도 많기에 애써 잊고 살았다. 웃기게도 당분간 이 책은 못 읽겠다,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_
슬프지만 세 번째 암투병이 시작되었고 이제는 어린 딸이 아니라 보호자의 입장으로 엄마 곁에 단단히 서있어야 했다. 서울 병원으로 가자마자 암입니다, 바로 치료에 들어가시죠.라고 속 시원한 진료를 시작하지 못했다. 우선 조직 검사를 통한 "확진"이 필요했다. 엄마의 재발 위치는 오른쪽 림프절이었다. 암에 있어서 좋은 위치가 어디 있겠냐만 림프절은 그중에서도 안 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온갖 신경이 몰려있는 림프절은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가 어려운 위치이다. 나아가 조직 검사 또한 쉽지 않았다.
지방의 대학 병원에서는 MRI를 통해 암의 가능성이 높다,라고 판단했으나 위치가 좋지 않아 조직 검사를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온갖 고생 끝에 서울로 진료를 받으러 갔지만 그곳도 입장은 비슷했다. 영상을 판독해 보니 암 같으나 조직 검사 전까지는 확언할 수 없고, 어떠한 암인지 알아내기 위해 조직검사를 시도해 보자고 했다. 위치가 좋지 않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영상 담당 선생님들이 우선 '시도'해본다고. 의료진은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기다리는 환자와 가족 입장은 답답했다. 하지만 나의 입장은 을도 아니고, 갑을병정의 정 수준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수긍과 희망뿐이었다.
_
첫 진료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조직 검사 일정이 잡혔다. 검사 대기실은 환자와 그 가족들로 가득했다. 이 큰 병원에 이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다니. 대한민국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 걸까.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대기실에서 조용히 수다를 떨었다. 그때 나는 유난히 밝은 소리를 많이 했다. 인터넷에서 읽은 재밌는 이야기,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쇼츠, 회사에서 있던 웃긴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최대한 엄마를 즐겁게 하는데 집중했다. 갑자기 옆 자리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따님이 말을 참 재밌게 하네요."
"우리 딸이라 그런 게 아니고, 얘가 참 말재주가 있어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아주머니는 딸이 지금 검사실에 딸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
"우리 딸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쩌다가 이런 병에 걸려서... 내가 진짜 마음이 안 좋아. 그렇지만 이 큰 병원에서 뭐라도 해주지 않겠어요, 그쵸?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병원이잖아. 잘 되겠지요?"
나와 엄마는 그럼요, 당연하죠, 젊어서 금방 회복할 거예요,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그렇지만 우리 셋의 동공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에게 확신과 희망만을 건네기에는 이 공간과 우리의 현실과 앞으로 다가올 치료가 각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주머니, 우리 엄마도 괜찮겠죠?
"어이구, 저기 나오네."
대답할 틈도 없이 아주머니는 멀리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딸을 부축했다. 내 또래 같아 보였다. 어쩌면 더 어렸을지도. 대기실 밖으로 아주머니와 따님은 사라졌고 엄마와 나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000님, 검사실로 들어오세요."
어느 순간 엄마의 이름이 불렸고 나는 아까 아주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대기실 의자에서 엄마의 검사가 무사히 잘 끝나기만을 바랬다. 검사실에 들어가야 조직 검사 가능 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기껏 몇 시간 기다리고 바늘에 찔려도 조직 검사가 안될 수도 있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보호자님은 데스크로 오라는 안내를 듣고 간호사를 만났다.
"오늘 조직 검사는 잘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는 0월 0일에 나오고, 이때 교수님 진료 일정 잡아서 같이 들어보시는 걸로 할게요."
고작 검사를 받은 것뿐인데 눈물이 나왔다. 다행이다. 조직 검사가 되어야 엄마가 어떤 암인지, 치료 방향은 어떻게 잡힐지, 어떤 약제를 쓸지 알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암 환자라면 익숙한 산정특례 대상이 되어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된다.
돌이켜보면 일희일비하는 날이었다. 대기실에서 환우 가족과 얘기하며 눈물짓다가, 조직 검사 성공에 웃기도 하는. 이왕 사는 거 비보다는 희가 많기를 바라며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