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를 왓챠에서 감상한 후 작성했습니다. 철저히 관람자로서의 주관적인 관점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잭 블랙 주연의 영화 <스쿨 오브 락>에도 출연했던 마이크 화이트. 그가 감독한 영화 <Brad's status>가 한국에서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라는 뜨뜻미지근한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영미권 포스터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Status.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신분 또는 자격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 조금 풀어쓰자면 개인의 사회적인 위치나 계급, 또는 그에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Brad's stauts>라는 제목은 사뭇 무겁고 진지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면, 비영리법인을 운영하며 적당한 삶을 사는 브래드 씨와 그의 가족들이, 사회적-경제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고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 대학 동창들 사이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솔직하게 담아낸 이야기이다. 물론, 모든 이야기는 브래드 씨의 관점에서 보여지고 해석된다.
이 정도만 운을 띄워도 왠지 영화의 줄거리는 물론 어떤 교훈을 남기려는 영화인지 눈치를 챌 것 같다면, 그래서 우리는어찌할 수 없는 한국인이 아닌가 싶다. 동창들의 성공에 가려진 자신의 처지를 마주하며 질투와 좌절을 느끼는 브래드 씨는 우리가 살아가는 눈치의 사회, 수치심의 사회에서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아주 보통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이 다소 뻔해 보인다고 해서 끝까지 무의미한 것은 절대 아니다. 아주 보통의 존재라는 것이 결코 정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기에.
매일 아침 마주하는 무기력함과 회의감
우리는 어떤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든 것으로 인식할까. 나는 그 감정을 '괴리감’이라 감히 단언하고 싶다.
나는 꿈을 굉장히 자주 꾸는 편인데, 그것도 굉장히 현실적인 배경과 상황에서 펼쳐지는 경우가 많아 가끔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기도 한다.
주로 한정된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주변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던가, 특정 인물과의 예전 기억을 되새기고는 한다.
꿈속에서 며칠이고 쫓기다가 눈을 떠 멀쩡히 침대 위에 누운 나를 확인하면 안도감으로 마음을 씻어내리기도 하지만,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복한 이야기를 써내리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좁디좁고 보잘것없는 원룸의 천장을 바라보며 '현타'를 느끼기 마련이다.
현실과 이상, 감정과 이성, 욕망과 절제, 물질과 가치 등등. 양가적인 속성을 지닌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산다. 그러다 그 균형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무너지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괴리감이라는 놈이 마음속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 각자 중요한 가치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막연하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 화목한 가정, 신앙과 믿음, 자아실현, 만족감, 지혜로움, 사명감과 충성심, 또는 사랑하는 마음처럼.
하지만,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된 인류 문명의 보편적 본능에 따라, 막연한 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지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지표들의 크고 작음은 너무나 가시적이고 직관적이어서, 비교하는 행위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내 통장에 찍히는 돈의 자릿수부터 내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의 수,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닿는 범위, 내가 소유한 땅의 넓이와 건물의 높이, 내 이력서에 새겨진 경력을 증명할 서류들, 내가 읽은 책과 기록한 글의 페이지 수, 심지어는 내 남은 기대 수명까지도.
이런 거창한 것들까지 생각을 뻗치지 않더라도, 내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사람이 몇 명이고, 내 게시물에는 좋아요가 몇 개가 찍혀있는지만 생각해도 비교할 거리는 차고 넘친다.
비교하지 못할 가치가 비교할 수 있는 지표로 환산되고, 그 지표들을 비교하며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의 차이를 깨닫게 될수록,평정심은 무너지고 괴리감은 커지기 마련.
만약, <Brad’s Status>의 마지막 장면이 모든 속세의 굴레에서 해탈한 브래드 씨가 깨달음을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면, 나는 이 리뷰를 쓰기는커녕 한심한 영화였다며 가벼운 욕지기를 내뱉고는 내 지난 두 시간을 아까워하며 허탈한 마음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모든 것과의 비교를 멈추는 것이 과연 정답인가.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으면 행복한 것인가. 적당한 수준에서의 건강한 비교는 되려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할텐데.
허나, 자기 자신만 신경 쓰며 산다는 것은 얼핏 이기적인 삶으로 비난받아 마땅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런 삶의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어느 누구도, 내가 아닌 이상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주변의 누군가에게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 또는 내가 주변에 그런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굉장히 위선적이며 당황스러운 것이 된다.
전용기가 있는 억만장자 친구는 사실 큰 수술을 앞둔 딸과 언제 망할지 모를 사업 때문에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브래드의 행동이 나빴다고 할 수 있나? 브래드는 친구의 결혼식도, 교수님의 추모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이 나쁜 행동을 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식당을 박차고 나가는 브래드를 보며 친구가 짓는 당황스러운 표정에 있다.
당신 옆에도 이런 존재가 있나요
자기 자신만 신경 쓰는 것이 시작이고, 자기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을 신경 쓰는 것이 그다음이다. 그렇게 자기 기준이 확고하고 단단해져야 불필요한 불행에 빠지지 않을 단단함이 생기는 것이다.물론 그 기준이 맹목적인 것이 아닐때 말이다.
우리는 모두 괜찮다. “어제나 내일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러니까 짧게 말하자면,
가장 가까운 것, 앞이나 옆이 아닌,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하루를 살자.
글쓴이 두루 Do, rough
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1인 기획-편집-디자인 독립 잡지 「매거진 손」을 제작하고,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는 1인 출판사 [스튜디오 두루]를 운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