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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14

Lorca→Villamayor de Monjardín

by 안녕
Day 12.
Sunday, June 7


눈을 뜨니 7시 반이다. 어제는 낮잠을 충분히 잤고 20시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12시간을 내리 잔 것을 보니 힘들긴 했었나 보다. 서둘러 준비하고 8시쯤 출발했다.

몸이 완쾌되진 않아도 하루 푹 쉰 덕분에 점점 좋아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에스떼야까지만 가야 할 것 같았다.




로르까를 나오는 길은 마을 출구의 N-11 고속도로와 연결되기 이전 왼쪽으로 나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이후 왼쪽으로 몬떼후라를 바라보며 자동차 도로 아래의 밭길을 지나게 된다. 지나온 마을들에 비해서 상당히 커다란 마을인 비야뚜에르따로 들어가기 전에는 지친 발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매력적인 숲이 이어지고 차가운 샘물과 빵 가게와 레스토랑, 약국이 있는 두 개의 광장을 가로지르면 마을에 도착한다. 고속도로 밑으로 나 있는 터널을 통과하여 산 히네스 도로를 따라 걸으면 13세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다리가 보인다.

마냥 걷다 보니 어느새 비야뚜에르따를 지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의 사진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작은 굴다리가 멀리 보였고 다가가니 반대편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이가 아무도 없어 조금은 무서웠다. 많은 이들이 새벽에 출발하는데 늦게 출발한 나는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기에 주변에는 늘 사람이 없다. 내 걸음이 늦어지고 오후까지 걷다 보면 내가 떠나온 마을의 전 마을에서 출발한 이들이 나를 앞지를 때쯤 가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중세의 로마인들의 주거지이기도 했던 Villatuerta (428M)는 성직자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비야뚜에르따가 거주지였던 이유는 이란수 강이 주는 풍요로운 자원과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현재도 비야뚜에르따의 주민들은 이란수 강의 양 옆에 나뉘어 살고 있는데 로마인들이 이 구불거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Vilatorta 라고 부른 데에서 마을의 어원이 생겼다고 한다. 비야뚜에르따의 밭은 매우 풍성해서 레스토랑에 가면 이 지역에서 생산된 재료로 만든 음식과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케이크와 후식을 맛볼 수 있다. 또한 투우에 관심이 있으면 비야뚜에르따 에스떼야 출신 투우사인 빠블로 에르모소 데 멘도사의 황소 목장을 둘러볼 수도 있다. 과거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향하는 까미노는 비야뚜에르따에서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는 사라뿌스 수도원으로 그리고 다시 이라체 수도원으로 에스떼야를 지나지 않고 곧장 이어져 있었다. 1090년에 산초 라미레스가 넘쳐나는 야고보 길의 도보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스떼야를 세우면서부터 까미노 길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비야뚜에르따는 예전의 까미노 길에 그대로 남아 있다.

Iglesia de La Asunción
성모승천 성당은 13세기 초반에 지어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1200년에 지어진 아름다운 종탑이 있으며 성당의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고 신비로운 벽화가 남아 있다. 14세기 후반에 구조가 바뀌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나 여전히 아치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주두는 체스판 무늬로 장식돼 있다. 성당 측면의 로마네스크식 정문은 이웃한 산 로만 성당의 영향을 받았다. 성당의 앞에는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성 베레문도의 상이 서 있다.

Ermita de San Miguel
이 오래된 수도원의 유적에 대한 자료는 1062년에 산초 데 뻬냘렌 왕이 산 살바도르 데 레이레에게 이곳을 바쳤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에스떼야로 향하는 길의 내리막이 시작되기 직전에 위치해 있는 이 성당은 여러 번 개축되어 정확한 건축 시기를 알기 어렵다.

성 베레문도의 고향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성 베레문도의 고향은 확실하지 않다. 예전부터 비야뚜에르따와 인접한 아레야노(Arellano) 사람들은 성 베레문도의 고향이 자기 마을이라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인의 유해는 5년마다 번갈아 가며 두 마을에서 보관한다. 그렇지만 매월 3월 8일에는 모두 성 베레문도의 날을 기원한다.




에스떼야를 향하는 좁은 길을 만날 때까지 성당의 언덕길을 올라야 한다. 왼쪽에 올리브 나무 사이로 산 미겔 성당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우르바사와 안디아 산맥이 보인다. 언덕을 다 올라가면 에스떼야를 향하는 가벼운 내리막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가면 2002년 산띠아고를 향하다 이 길 위에서 숨을 거둔 캐나다 사람인 캐서린 킴톤을 추모하는 페레그리나의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에스떼야를 통과하며 이후 리사라까지 순례자와 함께 걷게 되는 에가 강 위에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면 에스떼야에 도착하게 된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 에스떼야는 프랑크족의 수공업자가 모여들어 상업이 번성했던 산띠아고 길의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15세기에 산띠아고를 향하는 순례자들로 넘쳐났던 아름다운 에스떼야는 산초 라미레즈 왕에 의해 여러 개의 바위산 옆 만들어진 도시이다. 에스떼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은 3개의 고딕 양식의 사원과 아라비아식으로 된 큰 현관이 아름다운 산 뻬드로 데 라 루아 성당이며 이밖에도 나바라 왕궁과 대천사 미카엘 성당, 산또 도밍고 수도원과 성묘 성당의 아름다움이 순례자를 즐겁게 한다.




기념물이 많이 때문에 북쪽의 똘레도라고도 불리는 Estella/Lizarra (431M)는 1090년 산초 라미레스 왕이 에가 강가에 만든 계획도시였다. 에스떼야에는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다. 왕의 주도한 개발로 인해 도시는 항상 부유했는데 당시 번성한 상업과 수공업 때문에 에스떼야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칼릭스티누스 사본에서는 에스떼야를 가리켜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고기와 물고기가 넘쳐나고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는 도시’라고 기록했다.

에스떼야는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볼만하다. 중세식 발코니가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라 루아 거리, 산 니꼴라스 거리를 산책해 보고 푸에로스 광장, 산티아고 광장, 산 마르띤 광장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에가 강변의 야노스 공원을 즐길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에스떼야의 물과 음식은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레스토랑에서는 Menestra, Pochas라고 부르는 데친 채소 요리, 구운 새끼돼지 요리인 Carnes, 하몽으로 채운 송어요리 Pescados 등을 맛볼 수 있다. 후식으로는 초콜릿 크림을 곁들여 겹겹이 구운 Alpargatas, 개암나무 열매를 곁들인 초콜릿인 Rocas del Puy 등이 있다. 8월 첫째 주에는 La Bajadica del Puy, La Panuelada와 같은 전통 행사와 여자만 참가할 수 있는 소몰이 축제 등이 열린다. 7월 중순에는 중세 주간을 지내는데 화려하게 장식한 거리엔 중세식 시장이 서고 중세식 저녁을 먹는 이 축제는 산티아고 길에 이어 내려온 특이한 행사이다.

Palacio de los Reyes de Navarra
나바라에서 종교와 상관없는 건축물 중 유일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인 나바라 왕궁은 12세기 후반에 건설되었고 17세기에 작은 탑 두 개를 증축되었다. 네 기둥의 주두는 롤랑과 페라구뜨의 전투가 조각되어 있다. 현재는 에스떼야에 반해서 그림을 모두 기부한 화가 구스따보 마에추의 이름을 기념하여 구스따보 데 마에추 미술관(Museo Gustavo de Maeztu)으로 부르고 있다.

Iglesia de San Miguel Arcangel
대천사 미카엘 성당은 현명왕 산초의 보호 아래 1187년에 건축되었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북쪽 문이 아름다운데, 이 문은 스페인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 중 가장 화려하고 우아하며 사실적인 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성당 건물은 중앙의 신랑과 두 측랑, 반원 아치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랑의 천장은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Iglesia de San Pedro de la Rua
13세기 산 뻬드로 엘 마요르 성당(Iglesia San Pedro el Mayor)으로 명명된 이 성당은 나바로의 왕들이 선서를 했던 곳으로 현재, 산 뻬드로 델 라루아 성당으로 부른다. 12세기의 아름다운 회랑, 순례자들의 묘지가 있다. 현재의 건물과 회랑은 12세기 중반 이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기 시작해서 다음 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어진 증축과 보수로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다. 회랑엔 북쪽과 서쪽 복도만 남아 있는데 남쪽과 동쪽 복도는 16세기에 바위 위에 지어진 성이 무너지면서 붕괴되었다.

Iglesia del Santo Sepulcro
성묘 성당은 아름다운 파사드가 있는 13세기의 고딕 양식 성당이다. 까미노를 따라 에스떼야로 들어오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축물로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성묘 성당의 로마네스크 양식 후진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측면의 소성당이 기초만 남아 있는 반면 중앙의 소성당들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고딕 양식 문은 중세 조각의 아름다움을 남겼으며 당시 영국과 프랑스 궁정의 영향을 받았다.

Iglesia de Santa María Jus del Castillo
산따 마리아 후스 델 까스띠요 성당은 지금은 사라진 왕실의 성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이다. 후스 델 까스띠요는 ‘성 아래’라는 뜻이다. 예전 유대교 회당이었던 자리에 지은 성당으로, 가르시아 라미레스 왕이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이 기독교 성전을 보호해 주도록 1145년 빰쁠로나의 주교 돈 로뻬 데 다르따호나에게 선물했다. 성당의 신랑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후진은 반원형에 궁륭이 얹어져 있다.




쌍둥이 도시
에스떼야는 바스크어로 별이라는 뜻으로 도시의 문장에도 별이 하나 그려져 있다. 이 별은 사도 야고보가 잠들어 있는 꼼뽀스떼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지금은 도시의 크기가 줄었지만 에스떼야는 나바라와 스페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거 나바라의 왕은 왕위를 받을 때 에스떼야의 성당에서 선서를 했으며 에스떼야의 로마네스크 양식 궁전에서 살았다. 14세기에 유대인들을 학살한 잔인한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까를리스따 전쟁 동안 비운의 왕자 돈 까를로스가 왕이 되길 바라는 추종자들의 본거지였다. 현대에는 에스떼야 법령(Estatuto de Estella, Pais Vasco의 첫 번째 자치 법령)이 이곳에서 입안되고 에스떼야 협정이 이곳에서 합쳐졌다. 프랑스 도시와 닮은꼴 도시 에스떼야는 나바라에 있는 작은 프랑스라고도 불린다. 이 도시는 특히 산띠아고까지 가는 프랑스 길의 또 다른 시작점인 르 퓌(Le Puy)와 닮은 점이 매우 많다. 두 도시에 모두 뿌이의 성모에게 봉헌된 성당이 언덕 위에 있고 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의 피부도 모두 검으며, 두 도시의 수호성인도 모두 성 안드레아다. 비슷하게 생긴 강의 구부러진 곳에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두 도시의 평면도를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반대로 뒤집어서 겹쳐놓으면 도시의 배치가 똑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1, 12세기에 프랑스의 인구가 늘어나자 베즐레이 사람들이 이곳 에스떼야에 정착했으며 고향을 그리워하여 르 퓌와 비슷하게 에스떼야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잊힌 묘지의 전설
산 뻬드로 데 라 루아의 회랑에는 전설적인 묘지가 있다. 가장 작으면서 묘지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묘지는 떼오발디꼬라는 아기의 무덤이다. 그는 나바라의 왕 떼오발도 2세의 조카로 생후 아홉 달이 되었을 때 유모의 팔에서 미끄러져 라 아딸라야 성의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떼오발도 2세에게는 후손 없었고 오로지 조카 떼오발디꼬만이 있었다. 결국 이 아기의 죽음은 참파냐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전설에 따르면 유모도 아이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하는데 떨어지는 아이를 구하려다가 죽은 것이라고도 하고 다가올 벌을 받기가 두려워 절망한 나머지 자살했다고도 한다. 다른 묘지 하나는 그리스 파트라스 주교의 무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성 안드레아의 견갑골을 가지고 산티아고로 향한 순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에스떼야에서 병이 들어 죽어, 순례자의 넝마 옷을 입은 채로 산 뻬드로 성당의 묘지에 무명 씨로 기록된 채 매장되었다. 그러자 이틀 밤 동안 그의 무덤 위에서 이상한 빛이 너울거렸고 이 빛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다시 파내서 성인의 유해와 주교의 지팡이, 은으로 만든 성수병을 발견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유물은 현재까지 이 성당에 보관되었고 그는 주교답게 다시 매장되었다.

롤랑과 페라구뜨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인 나바라 왕궁은 에스떼야의 산 뻬드로 성당 앞에 있는데 여기에서 롤랑과 페라구뜨 사이의 전투를 표현한 부조를 볼 수 있다. 이 전투는 에스떼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헤라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위치를 바꾼 아기 예수
에스떼야를 빠져나가는 길에 있는 로까마도르 성당 입구의 문 위 벽감에는 조금 색다른 모습의 성모상이 있다. 이 성모상은 다른 성모상과 달리 아기 예수가 성모의 왼팔이 아니라 오른팔에 안겨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한 순례자가 산티아고 축일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발되었다고 한다. 순례자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처형대 위에서 순례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말하며, 그 증거로 로까마도르 성모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의 위치가 바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성당으로 달려가서 이를 확인하고 이 기적을 찬미했다고 한다.

뿌이의 성모상
뿌이 성당에는 이웃 마을 아바르수사의 목동들이 ‘찔레나무, 가시나무, 엉겅퀴 사이에서’ 1085년에 발견한 성모상이 있다. 이는 기록에도 남아 있으며 에스떼야 지방의 축제에서 부르는 민요에서도 이 내용이 담겨 있다. 1640년경 한 도둑이 뿌이 성당에 침입하여 성모의 보석, 옷, 값나가는 물건 등을 훔쳤다. 도둑은 밤새도록 지칠 때까지 도망을 갔는데 동이 터 정신을 차려보자 성당 문 앞에 서 있었다. 도둑은 밤새도록 성당 주변을 뱅뱅 돈 것이었다. 도둑은 즉시 체포되어 손이 잘리는 벌을 받았고 잘린 손은 성당 입구의 나무 기둥에 매달았다. 훗날 나무기둥은 돌기둥으로 대체되었고 잘라진 손 대신 라틴어 문구가 새겨졌다. 이 성당 뒤편에는 첫 번째 까를리스따 전쟁이 끝나갈 무렵 평화안에 찬성하지 않은 까를리스따의 장군 다섯 명이 마로또에 의해 총살당한 곳으로 남겨진 명판이 있다.




11시쯤 에스떼야에 도착했지만 이른 시간이라 일단 마을 입구 성묘 성당 부근 벤치에 앉아서 쉬는데 푹 자서 그런지 발걸음도 가볍고 더 걸어도 되겠다 싶었다. 알베르게는 오픈 전이라 일단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마침 미사 시간이라 이끌리듯 성당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인지 매주마다 주일 미사를 참석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기회는 언제든 환영이다. 미사가 끝나니 12시 반이다. 조용해진 성당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내부를 구경하고 나왔다. 광장 바닥에 꽃을 깔아서 장식을 해두었고 성당에서부터 꽃잎을 뿌려둔 것을 보니 꽃을 밟고 지나가는 무슨 행사를 하는 것 같았다. 슬쩍 다가가니 아주머니가 쫓아내셔서 그냥 돌아섰다. 마침 알베르게 오픈 시간이 되어 들어가서 세요를 받았지만 그냥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걸어야 할 것 같았다.

13시, 다시 출발했다.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지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뿐했다. 2인실이라 새벽의 어수선한 인기척이 없으니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은 19세기 전통주의자들이 까를로스 7세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전투를 치렀던 에스떼야 분지의 비탈길이다. 이라체 수도원으로 이르는 숲길은 생장 삐에드뽀르에서 론세스바예스에 이르는 피레네 산맥의 언덕을 떠올리게 한다.

에스떼야에서 아예기까지는 아주 가까웠다. 에스떼야의 알베르게를 나와 직진하면 두 개의 주유소와 아름다운 성당 건물을 지나고 나면 도시를 빠져나오게 된다. 포장된 도로의 오르막길을 오르면 에스떼야와 거의 붙어있어서 도시의 일부로 여겨지는 아예기에 도착하게 된다.




산초 가르세스 4세의 양도로 이라체 수도원에 소속된 중세 교회의 영지였던 Ayegui/Aiegi (486M)는 이웃한 에스떼야의 도시화에 밀려나지 않고 전원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근처에 에스떼야가 있고 몬떼후라, 이라체 수도원 등이 있고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있다. 특히 이라체 포도주 창고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는데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한 잔의 포도주는 힘든 길을 걷는 순례자의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게 해 준다.

아예기에서는 포도주 수도꼭지로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이 가깝다. 아예기는 순례자에게 특별한 알베르게 체험을 하게 해 준다. 바로 까미노의 첫 100km를 해냈다는 증명서를 무료로 제공해 주는 것이다.




Bodegas Irache에 도착하면 포도주의 땅으로 들어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한 잔의 포도주와 한잔의 샘물은 순례자의 마음을 풍족하게 적셔주는데 어쩌면 이러한 것은 까미노를 빙자한 포도주 마케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세시대 이 길을 힘없이 걸어야 했던 굶주린 순례자에게 한 조각의 빵과 한 잔의 포도주는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 보자.

이곳의 전성기는 11세기에 수도원장 베레문도가 이곳을 순례자를 위한 병원으로 바꾸었을 때였는데 이것이 바로 순례자를 위한 나바라의 첫 번째 병원이었다. 12세기에 현재의 성당 건물을 짓기로 계획하면서 전성기는 계속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12세기 중반에 후진과 십자가상도 완성되었다.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수도원 건물엔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었는데 성당 동쪽에 붙어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이 추가되었고 다른 건물들도 생겼다. 17세기 초에 베네딕토 수도회의 학교가 생겼고 대학교로 바뀌었다.

이곳은 까를리스따 전쟁 중에는 전시 병원이었고 몰라 장군이 주재한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수도원 건물은 방치되었으나 1885년엔 유럽의 스꼴라 철학 단체가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은 국영 호텔인 빠라도르로 활용되고 있다. 마드리드의 산 로렌조 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커다란 탑은 에게라 스타일이며 3개의 회랑은 17세기에 만들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이라체 수도원의 플라테레스코 양식 회랑은 독특함을 갖고 있다. 회랑의 처음 반은 트리엔트 공의회 직전에 지어졌고 나머지 반은 공의회 직후에 지어졌다. 반종교개혁이 진행된 이 공의회에서는 주두 장식을 제한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회랑의 처음 반은 누드 인물화도 자주 나타나고 해부학적으로 세심하게 묘사된 주두가 있으며 나머지 반은 완전히 종교적인 장면으로만 가득하다.

Monasterio de Santa María de Irache
몬떼후라 산자락에 위치한 베네딕토 수도회의 오래된 수도원인 이라체 수도원에 대한 기록은 958년부터 존재한다. 공식 명칭이 산따 마리아 데 이라체 수도원인 이 수도원은 근처의 에스떼야와의 연결로 점점 규모가 커졌다.

Fuente del Vino
와인의 샘이라고 하는 이 수도꼭지는 보데가스 이라체라는 와인 제조업체가 만들었다. 네모난 돌 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처럼 산티아고에 힘과 활기를 가지고 도달하고 싶은 이에게 여기 있는 포도주 한 모금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까미노의 수호성인 성 베레문도
San Veremundo는 11세기에 이라체에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사가 되고 싶었으나 거절당한 후 수도원의 문지기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수도원에서 나오는 빵 조각을 조금씩 모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수도원장이 옷 속에 감춘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린 베레문도는 약간의 빵 조각이라고 대답했는데, 그가 그 빵 조각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때마다 빵 조각이 커져서 나왔다고 한다. 성 베레문도는 순례자를 돕고 흑사병을 퇴치하기 위해서 힘썼다는 내용이 많이 전해진다. 전하는 이야기 중 많은 내용은 그가 순례자들이 걷는 길을 개선하기 위해 많이 애썼고 나바라 정부가 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수도원, 병원을 세우고 까미노가 지나는 지역에 사람들을 거주하게 했다는 내용도 있다. 성 베레문도는 Santo Domingo de la Calzada, San Juan de Ortega와 함께 순례자를 위해 헌신했던 동시대의 3대 까미노 성인 중 하나다. 그들 덕에 순례자가 지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많이 좋아졌다고 전해진다.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수도원을 나오다 보면 까미노에서 가장 특이한 수도꼭지가 있다.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한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나오지만 다른 수도꼭지에서는 와인이 나온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다녀온 순례자라면 누구나 여기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한 잔의 와인을 맛보았을 것이다.

순례자여!
산띠아고에 힘과 활기를 가지고 도달하고 싶은 이에게
여기 있는 포도주 한 모금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라체의 샘 / 푸엔떼 델 비노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꼭지를 통해 나온다는 와인은 경우에 따라 안 나올 때도 있다더니 오늘은 잘 나오고 있었다. 두 개 중, 하나에서는 물이 나오지만 나머지 하나에서는 와인이 나온다. 와인을 물병에 조금 받아 맛을 봤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서양인 몇명이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마시고 있었다. 입이 떨어지면 술이 새어버린다며 계속 빨아대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맛없는 음식은 먹어도 비위생적인 음식은 안 먹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따라서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예기에서 아스께따로 직접 가는 오른쪽으로 난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몬떼후라 산 가까이에 있는 이라체 수도원을 거쳐 아스께따로 가기 위하여 오래된 N-111 고속도로를 건너가는 직진 도로를 택한다. 아예기에서도 까미노 사인을 잃어버리기 쉬우므로 조심을 하는 것이 좋으나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는 것을 제외하고 두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라체 호텔 부근에서 다시 만나게 되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포도밭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걷다가 캠핑장 근처에서 문을 연 수뻬르메르까도가 있어 레체 한팩을 사서 마시는데 너무 고소하고 맛있어서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뭔가 여유롭다.




나바라의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 하나인 이라체 수도원은 평지에 있는 보데가스 이라체를 지나야 한다. 수도원을 지나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한 번쯤 머물고 싶은 이라체 호텔에 도착하게 된다. 호텔의 뒤 왼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산 미겔의 들판을 지나 자동차 전용 도로의 밑을 지나는 터널을 통과하면 까미노는 바위 투성이 산 위에 펼쳐진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숲으로 난 구부러진 길을 따라가면 이내 언덕 위의 작은 마을 아스께따에 도착하게 된다.




언덕 위, 농경지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 Azqueta/Azketa (576M)에서는 평온함과 조용함을 느낄 수 있고 로끼스 산, 우르바사 산, 몬떼후라 산, 몬하르딘 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아스께따와 인접해 있는 Fuente de La Pena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는 샘이 있다고 한다. 아스께따에는 순례자에게 개암나무 지팡이를 선물하는 Pablito 할아버지를 만나 볼 수 있다. 빠블리또 할아버지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의 이름만을 물어보면 친절히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Iglesia de San Pedro Apostol
산 뻬드로 아뽀스똘 성당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중세의 성당 건물을 16세기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바꾸어 재건축했다.




아스께따에서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까지는 1km가 채 되지 않는데 마을을 지나는 자동차 도로를 왼쪽으로 두고 마을을 나와 농장지대로 나서기 위해서 마을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포도밭으로 난 까미노를 따라 걷다 보면 두 개의 아치를 가지고 있는 무어인의 샘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중세에 만들어진 샘터를 지나고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에 도착하게 된다.




Villamayor de Monjardín (673M)은 몬하르딘 산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조용한 마을이며 산 에스떼반 성의 폐허가 남아 있다. 나바라의 산초 가르세스 1세가 이 성을 점령했었으나 이슬람의 왕 바누 까시에게 빼앗겼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에브로 강의 비옥한 분지를 차지하기 위한 레콩키스타가 시작되었다.

언덕 위에 솟아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조그만 까미노 마을로 성벽에 맞대어져 있는 바로크의 화사한 탑을 가지고 있는 성 안드레아 성당이 인상적이다.

Iglesia de San Andres Apostol
산 안드레스 사도 성당은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신랑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반원형 후진이 있다. 신랑의 천정은 궁륭으로 덮여 있고 반원주의 주두 장식은 양식화된 식물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관과 아치, 키로, 아름다운 주두 장식과 더불어 성 모자상, 기사들의 싸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거대한 탑은 18세기의 바로크 양식이다. 성당 안에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행진용 대형 십자가 은으로 싸인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다. 이 십자가는 나바라의 로마네스크 양식 금은 세공 작품 중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이다.

Castillo de Monjardín
9세기에 지어진 몬하르딘 성은 10세기엔 데이오 빰쁘로나 왕조의 요새로 10세기에 산초 가르세스가 이슬람교도를 물리친 요새이다. 산 에스떼반 데 데이오 성(Castillo San Esteban de Deyo)으로도 부르는 이 성은 14세기에 보수되었으며 현재도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Fuente de los Moros
무어인의 샘은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으로 들어오기 전 까미노 위에 있는 13세기 풍의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샘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마을로 들어서기 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십자가의 팔과 양치기 팔의 전설
산 에스떼반 성에서 이슬람인들을 정복했던 전투가 일어났던 날 새벽, 나바라의 왕 산초 가르세스 1세에게 아름다운 십자가가 나타났다고 한다. 왕은 전투가 어떻게 될지 확신이 없었고 혹시 이슬람교도들이 십자가를 빼앗길까 봐 십자가를 숨겨놓았는데, 전투가 끝난 후 왕은 십자가를 다시 찾지 못했다. 십자가는 그 후 한 목동이 염소가 가시나무 앞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까지 잊혀 있었다. 목동은 해로운 짐승이 숨어 있는 줄 알고 가시나무를 향해 있는 힘껏 돌을 던졌는데 자기가 던진 돌에 아름다운 십자가의 한쪽 팔이 부서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목동이 절규하며 “십자가에 돌을 던지기 전에 제 팔을 말라붙게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라고 하자 목동의 팔이 말라붙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십자가를 다른 장소로 옮겼으나 십자가는 계속해서 처음의 가시나무 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불리는 비야마요르 성당을 짓게 되었고 신앙심 돈독한 목동의 팔은 회복되었다.

샤를마뉴와 죽은 기사들의 전설
나바로의 장군 푸레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샤를마뉴는 하느님께 부하 중 누가 죽게 될 것인가를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를 들은 하느님이 샤를마뉴의 기사 150명의 갑옷에 빨간 십자가를 표시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이 기사들을 쉬게 하고 다른 기사들과 푸레를 물리치고 돌아왔으나 이미 그 150명의 기사들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까지는 은근히 힘들었다. 저 멀리 산은 보이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포도밭으로 난 까미노를 따라 걷는 길에 두 개의 아치를 가지고 있는 무어인의 샘이 덩그러니 있는데 중세에 만들어진 이 샘터를 지나면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이다.

16시쯤 마을 입구에 도착했고 가장 먼저 보이는 알베르게에 들어갔더니 공립이 아니었다. 그냥 나오려고 하니 공립 알베르게는 반대쪽이라며 먼저 알려주기에 내심 착한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려준 길로 따라갔는데 내리막이 이어진 길이라 이상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마을의 끝이었는데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의 헛걸음이라 화가 났다. 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올라가니 그 알베르게 바로 옆길로 공립 알베르게가 보였다. 거짓 정보가 없었으면 바로 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좀 더 살펴보지 않은 내 잘못도 있으니 누굴 탓할까 싶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쉬엄쉬엄 걸으니 여기까지도 오는구나. 스스로가 장했다. 등록하고 보니 로르카에서 보았던 한국인 일행 중 J가 혼자 있었는데 내일 로그로뇨에서 일행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며 오늘은 혼자 걸었단다. 다른 일행은 아마도 오늘 에스떼야에서 머무르나 보다. 오늘은 너무 고된 날이라 일찍 잠을 청했다.




Lorca→Villamayor de Monjardín 18.0km

○Lorca/Lorka (463M)
-Iglesia Parroquial de San Salvador
●Villatuerta (428M) 4.5km
-Iglesia de La Asunción
-Ermita de San Miguel
●Estella/Lizarra (431M) 4.1km
-Palacio de los Reyes de Navarra
-Iglesia de San Miguel Arcangel
-Iglesia de San Pedro de la Rua
-Iglesia del Santo Sepulcro
-Iglesia de Santa María Jus del Castillo
●Ayegui (486M) 2.0km
●Irache (520M) 0.4km
-Monasterio de Santa María de Irache
-Fuente del Vino
●Azqueta (576M) 5.3km
-Iglesia de San Pedro Apostol
●Villamayor de Monjardín (673M) 1.7km
-Iglesia de San Andrés Apostol
-Castillo de Monjardín
-Fuente de los Moros
-Castillo de San Esteban

652.3km/775.0km




Leche 1L -0.89€
Estella Misa -1.00€
Albergue de Villamayor de Monjardín -8.00€




믹스커피, 비스킷
우유


WIFI 불가능(띠엔다 부근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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