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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15

Villamayor de Monjardín→Viana

by 안녕
Day 13.
Monday, June 8


부지런한 사람들로 인해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떴고 깜깜한 새벽에 모두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오늘은 산솔까지 갈 계획이라 늑장을 부려도 되는데 아직 해가 뜨지 않은 6시, 다들 떠나고 텅 빈 방 안에 그렇게 홀로 남아있었다.

비아나까지 가고 싶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참이라 서둘러 볼까 생각을 했었다. 만약 오늘 비아나까지 간다면 원래 일정에서 밀린 이틀 중, 하루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게 되니까. 일정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뒤처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터였다. 어차피 일찍 출발하게 되었으니 걸으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6시 반쯤 출발하는데 조금은 싸늘한 아침이었다.




오늘은 끝날 것 같지 않는 까미노를 따라 어제 헛걸음하느라 한번 다녀왔던 그 포도밭 사이로 내려가야 한다. 우르비욜라와 N-111 도로를 검정 버드나무 숲의 왼쪽으로 보면서 걷기 시작하는 이 길에서는 까미노 사인이 잘 표시되어 있으며 직진으로 나가는 넓은 농지를 지나기 때문에 로스 아르꼬스까지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렇지만 3시간 넘게 탁 트인 공간을 침묵과 함께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집 생각이 날 수도 있고 지난 시간의 어려움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 길을 가기 전에 물통을 채울 수 있는 기회는 Urbiola에서 Olejua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와 만나는 교차점에 있는 우물이다. 로스 아르꼬스에 도착하기 약 2km 전 왼쪽에 있는 소나무 숲 이외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할 그늘조차도 없으니 해가 따가운 시간은 가급적 피하자.

로스 아르꼬스로 가는 길은 지루하고도 끝없는 길이 이어졌다. 12km나 되는 거리를 걷다 보면 그냥 멍하니 걷게 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이 길에서 작은 회오리를 만났다. 오즈의 마법사가 생각났다. 첫 번째는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두 번째는 제대로 된 회오리바람이어서 순간 긴장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마냥 서있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에서 만난 꼬마 회오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10시, 로스 아르꼬스 초입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지나칠 마을이라 벤딩머신 쉼터에서 한 시간 정도 쉬었다. 물이 없는 상태로 걸었지만 목이 마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카콜라의 유혹은 견디기 힘들었다.




덤불과 로즈마리, 침엽수가 있는 언덕 발치에 위치한 마을인 Los Arcos (447M)는 조그만 농업 도시다. 옛날부터 까스띠야와 나바라 왕국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로 현명왕 산초가 발데곤 전투 후에 쿠르노니움의 로마 시대 마을이 남아 있던 곳에 로스 아르꼬스를 건설했다. 도시가 건설되고 왕은 마을 사람들의 용기를 치하하여 활이 그려진 그림을 하사하며 이 마을을 Arcos (활 모양)이라고 불렀다.

그 후 프랑크 왕국의 상인이나 환전상 등 유대인이 이곳에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2, 3층으로 석재와 벽돌로 만들어진 집에 살았다. 이 집들은 모두 발코니가 있으며 문장이 새겨져 있고 난간이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로스 아르꼬스는 까를리스따 전쟁, 독립전쟁까지 수많은 군대가 지나간 곳이다. 리베르 페레그리나티오니스라는 책에서는 로스 아르꼬스에 대해 에스떼야와 관계가 안 좋고 오드론 강의 물은 마시면 안 된다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쓰여 있다. 펠리페 2세(Felipe II)의 호위병이었던 엔리께 콕이란 사람은 1592년에 이곳을 “포도주, 빵, 과일, 사냥, 전투, 상업의 땅”이라고 묘사했다.

Iglesia de Santa Maria
산따 마리아 성당은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는 변화가 느껴지면서 조화를 이루는 성당이다. 십자가 평면의 성당은 그리스와 로마식 신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세기에 보수되어 성당의 일부 요소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반종교개혁으로 내부의 장식이 변화되었으며 나바라 왕국이 가지는 바로크 양식의 풍성함과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외부에는 거대한 쿠폴라와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아름다운 르네상스 풍의 탑이 있다. 팔각형의 이 탑은 산띠아고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가장 높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탑 중 하나다. 성당의 내부를 장식한 벽화들은 부르고스의 출신의 끄리스또발 곤살레스의 작품인데 꼬르도바 가죽 가공을 차용하여 나무와 은 위에 벽화를 그렸다. 1561년에 만들어졌다는 바로크 장식이 아름다운 합창대의 각석과 그 아래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회랑은 순례자를 위한 저녁 미사를 마친 순례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한다.

Puerta de Castilla
산따 마리아 성당 옆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까스띠야 문은 17세기에 만들어졌고 1739년 펠리페 5세에 의해 보수되었다. 로스 아르꼬스를 나설 때는 이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문을 나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알베르게를 찾을 수 있다.

일 년에 한 번 볕을 쬐는 성모상
산따 마리아 성당의 아름다운 복도 한가운데에는 그늘에서 보관중인 성모상이 있다. 이 성모상은 6월 15일에만 햇빛에 내놓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통은 산 후안 데 오르떼가의 수태고지 주두와 유사하다.




로스 아르꼬스는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면서 가스띠야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로서 두 왕국 어느 곳에도 세금을 내지 않으며 두 왕국의 상업적 특성을 잘 이용해 부를 축척했던 마을이었다. 발코니가 있는 아름다운 집들 사이의 조그만 골목길을 지나다 보면 길은 어느새 조그만 광장 왼쪽으로 산따 마리아 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에는 6월 15일에만 햇빛에 내놓는 성모상이 있다.

성당을 지나 까스띠야 문을 통과했다. 알베르게는 무네스로 향하는 도로를 건너 조그만 콘크리트 다리를 지나면 정면에 보인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로스 아르꼬스 알베르게에 가보니 리셉시온이 열려있어서 세요를 받고 11시쯤 다시 출발했다. 마을에 식수대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식수대란 것을 이때는 몰랐다.

로스 아르꼬스를 떠나는 순례자는 N-111 고속도로를 왼쪽에 두고 산 라사로의 묘지와 성당 건물 사이의 길을 따라서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다. 산솔까지는 순례자의 눈 가득히 포도밭이 펼쳐져 있어 어제의 길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편안하고도 쓸쓸한 길을 걸어야 한다. 산솔을 향하는 마지막 구간은 가벼운 오르막 길로 Desojo를 향하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등지고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전쟁과 전설의 역사를 가득 담고 있는 나바라 왕국의 오래된 까미노를 걷는 이 길은 상당히 쉬운 편이지만 산솔까지의 길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길고 긴 포도밭이 계속 이어진다.




산솔을 나와 N-111 도로를 조심해서 횡단하여 바로 Lazagurriá와 Elizagirria를 지나는 자동차 전용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좁은 길을 내려와야 한다. 산솔에는 순례자를 위한 편이 시설이 충분치 않으므로 필요한 물품은 다음 마을인 또레스 델 리오에서 구입하는 것이 좋다.




Sansol (479M)은 원래 산 소일로 수도원(Monasterio de San Zoilo)의 영지였다. 마을과 수도원, 성당의 이름은 순교한 코르도바 출신의 성인 산 소일로(San Zoilo)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유해는 현재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Iglesia de San Zoilo
산 소일로 성당은 17세기 후기 바로크 시대의 석조 건물로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십자가상과 합창단 석에 위치한 거대한 성 베드로 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지금은 사라진 성 베드로에게 봉헌된 수도원에 있던 것이다. 성당의 외부에는 사각형의 높은기둥과 종이 있는 날씬한 탑이 돋보인다.

재앙을 물리친 성인의 전설
로스 아르꼬스와 산솔 사이에는 성 그레고리오 오스띠엔세 성당이 있다. 교황 요한 17세는 로마 사람인 그레고리오를 메뚜기 떼의 재앙을 겪고 있던 이 마을로 보냈다. 그레고리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도하며 참회하라고 전하고 성물을 들고 행진을 한 후 메뚜기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러자 기둥 모양으로 모인 메뚜기들은 하늘로 날아가 사라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레고리오는 병에 걸려 로그로뇨 근처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을 싣고 가던 노새가 한 곳에 멈췄으며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성당에 은으로 만든 함에 보관한 성인의 두 개골이 있으며 매년 5월에 성인의 두 개골 위에 물을 흐르게 한다. 이 물을 들에 뿌리면 메뚜기 떼의 재앙을 겪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은 산솔까지 걷기로 맘을 먹어서 휴식시간도 넉넉히 가졌지만 비아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진 못하고 있었다. 근데 뭉게구름이 보이더니 갑자기 날씨가 무더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빛나는 하얀 뭉게구름이 보이면 스콜 같은 소나기가 오곤 했다. 괜히 비 맞지 말고 오늘은 그냥 쉬어야겠다 싶어 욕심을 버리고 알베르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여서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없어졌단다. 없더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알베르게 리스트에는 여전히 이름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허탕을 치는 것 같다.

산솔에서 또레스 델 리오까지는 1km가 되지 않으며 좁은 길을 따라 계곡을 건너면 정면으로 마을을 찾을 수 있다. 또레스 델 리오는 까미노의 가장 독특한 성묘 성당이 언덕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에서 템플 기사단은 아랍의 건축양식을 차용하여 독특한 성당을 만들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도 마법사 후아니스와 악명 높은 도둑 늑대 후안의 전설이 숨어있는 늑대 후안의 길을 걸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언덕 기슭에 위치한 Torres del Río (471M)에는 그림 같은 풍경과 아름다운 전망이 숨어있다. 또레스 델 리오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함락되었다가 10세기 초반 산초 가르세스 1세가 몬하르딘에 이어 탈환했다고 한다. 까미노 길을 따라 있는 성당에는 여러 가지의 문화가 조화롭게 섞여 있다. 이곳은 순례자들이 휴식을 취하며 머물면서 이곳에서 나오는 포도주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좁은 길에는 파사드에 문장이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집이 가득하다.

Iglesia del Santo Sepulcro
성묘 성당은 12세기에 템플 기사단이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과 유사하게 만든 팔각형 평면의 성당이다.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으로 나바라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며 팔각형 평면에 건물 동쪽에는 단순한 반원형 소성당, 서쪽에는 원통형 탑이 있다. 8각형 평면은 템플 기사단의 특징이며 성묘 성당의 쿠폴라 정탑은 죽은 이들의 정탑이라고 불렸는데 이 탑이 길을 잃은 순례자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고 순례자가 죽으면 불을 켜서 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앙엔 별 무늬가 있는 쿠폴라가 있는데 꼬르도바의 메스끼따 이슬람식 건물과 닮아 있다. 성당 안의 공간은 두 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벽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이 붙어있고 위층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창문이 나있으며 주두에는 아름다운 조각이 있다. 외부는 3층으로 나뉜 구조이며 3층엔 각 면에 창문이 나 있다. 성당 내부에는 쇠로 된 솥이 있으며 못 네 개에 관을 쓰고 있는 그리스도의 로마네스크 양식 십자가 상은 매우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수피 교도의 종교 건축과 무데하르 양식과 비잔틴 양식에 영향받은 이 성당은 19세기까지 여러 기사단의 의식을 치르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에우나떼 성당처럼 이 성당도 순례자의 묘지 역할을 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순례자
어느 날 지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또레스 델 리오의 언덕을 넘던 순례자에게 화려하게 꾸민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악의에 찬 눈빛으로 순례자를 바라보며 죽을 때 영혼과 몸을 자신에게 넘기면 자기처럼 부유하게 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순례자는 그 남자가 악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몸은 영혼에, 영혼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넘겨줄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악마가 순례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순례자가 펄쩍 뛰어 공격하는 악마에게 그림자를 드리우자 악마는 그림자와 싸우다가 순례자의 그림자를 훔쳐 사라져 버렸다. 순례자는 그림자를 잃었으나 영혼은 구한 것이다.

바르고따의 명랑한 마법사 후아니스 전설
또레스 델 리오에서 가까운 바르고따에서 태어난 마법사 후아니스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많다. 그는 살라망까 대학의 명망 있는 학자였으며 유명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후아니스에게는 에네미기요라고 부르는 모기 크기만 한 정령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을 바늘 통에 담아두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이 되면 에네미기요들이 통에서 나와 그의 머리 주변을 돌며 후아니스를 깨우곤 했다고 한다. 바르고따에 돌아왔을 때 후아니스는 통 뚜껑을 열고 에네미기요를 내보낸 다음 주변의 돌을 모두 모아 돌무더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돌들로 단 하루 만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을 완성하기에 돌이 하나 모자랐고 결국 아무도 마지막 돌을 끼워 넣지 못하여 집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마법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에게 해로운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기발하고 개구쟁이 같은 자신만의 발상으로 마법을 부리곤 했을 뿐이었다. 빰쁘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에 간 후아니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두 명의 사제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거만한 사제들이 그에게 불친절하게 굴자 후아니스는 그들에게 잘 자라고 인사한 뒤 자신의 머리를 몸에서 떼어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자 겁에 질린 거만한 사제들은 도망을 가버렸고 그는 침대를 혼자 독차지하게 되었다.




산솔에서 좁은 길을 따라 계곡을 건너면 바로 나오는, 아니 저만치에 보이는, 그래서 같은 마을이 아닐까 싶은 거리에 또레스 델 리오가 있었다. 오늘은 저기서 묵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여기도 공립 알베르게는 없단다. 땡볕에 한참을 서성였다. 공립 아니면 뭐 어때? 그냥 사립에 묵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1층이 띠엔따인 어느 알베르게 앞 그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어느 동양인의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무거울까 봐 책은 엄두도 못 냈는데 그런 여유를 가지고 챙겨 온 그녀가 새삼 부러웠다.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왠지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비아나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출발하기에는 비아나가 너무 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물은 없는데 식수대도 없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햇볕은 뜨겁고 날씨는 푹푹 찌고 발은 무거웠다. 14시 반인데 출발해도 될까?

마을을 빠져나오는 작은 오솔길은 끝이 없었고 이 시간엔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걸으면서 먹은 것도 없었지만 나온 것도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들렀다 올 걸 후회가 되었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다음 마을까지는 10km 이상을 걸어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풀길에서 처음으로 자연 화장실을 이용했다. 죄책감도 잠시, 이제 드디어 순례자가 된 거라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제야 한결 마음이 놓이고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마을을 나온 순례자는 비아나까지 샘물을 만나기 쉽지 않다. 중세에서부터 다리를 부러뜨리는 길이라고 불렸던 이 구간은 너덜지대의 자갈과 먼지투성이의 좁은 오솔길로 이어지면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된다. 그러다가 뽀요의 암자라고 불리는 16세기 고딕 양식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다가 첫 번째 오르막의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협곡과 언덕 사이를 반복해서 지나면 풍경이 다채롭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비아나와 에브로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내리막길을 통해 이어지는 발끝의 고통이 점차 밀려오기 시작한다. 만약 자전거 순례자라면 내리막길에서 상당히 주의를 해야 한다.

마침내 라 리오하로 이어지는 평야에 도착하게 된다.
이제 비아나는 그리 멀지 않다. 비아나는 오래된 성곽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의 도시다. 비아나의 까미노 사인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을 통해 궁전 같이 화려한 저택으로 가득 찬 도시의 내부로까지 올라가게 한다. 만약 비아나를 지나쳐 로그로뇨까지 이동할 경우 도시로 들어가지 않고 성벽의 주위를 따라 만들어진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서 쉽게 도시를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까스띠야와 나바라의 고대 왕국 사이에 튼튼하게 번성한 이 아름다운 도시를 놓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수도 있다.




산솔부터 비아나까지 높지 않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속으로 이어져서 전날의 외로움과 지루함을 떨쳐낼 수 있다. 그러나 언덕에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체사르 보르지아의 도시인 비아나가 손에 잡힐 듯 보이면서 순례자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도로와 나란히 이어진 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니 발에도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절뚝이며 걸어가고 있는데 차도 위를 달려가던 자전거 순례객이 멈추어 서서 괜찮냐고 묻는다. 평소라면 안 괜찮은데도 괜찮다고 습관처럼 말했었겠지만 지금은 정말 안 괜찮았다. 자전거라도 얻어 타고 싶은 마음이었다. No! 중세부터 다리를 부러뜨리는 길이라고 불렸다더니 자갈로 뒤덮인 좁은 오솔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되었다. 협곡과 언덕 사이를 반복해서 걷다 보면 멀리 보이는 비아나와 에브로 계곡은 신기루 같게만 느껴졌다.

험난한 길은 이어지고 곧 후회를 했다. 왠지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는 빙빙 돌고 갈증이 심해졌다. 이제 안 되겠구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고 그 길에서 벗어났다. 만일을 위해서는 도로 위가 나을 것 같았다. 무모한 일을 벌여놓고 이제는 뒷일까지 걱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나가는 차가 부러워졌다. 타자! 어떤 사람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히치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오늘따라 쓸데없는 용기마저 생겼다. 하지만 마음을 먹고 나니 이제는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절망감에 그렇게 걷고 또 걷는데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차 한 대가 보였다. 간절함을 담아 손을 번쩍 들었지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이해가 되면서도 야속했다.

비아나 7km 지점 이정표를 지난 지도 한참이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직선으로 이어진 길은 짧았지만 흙길이라 발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었는데 3km도 채남지 않은 지점이 되니 어쩌면 비아나까지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불안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마침 차가 한 대 다가온다. 손을 들려다가 나라도 안 태워줄 거란 생각에 짐짓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를 지나쳐 가던 그 차가 저만치에 멈추어 섰다. 설마? 설마 절 태워주시게요? 혹시나 싶어 다가가니 비아나에 가냐고 묻기도 전에 차에 타라는 손짓을 먼저 한다. 그라시아스를 외치긴 했지만 좀 무섭긴 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평범한 아저씨였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배낭을 끌어안고 차에 올랐다. 오늘 여러모로 무모한 짓을 많이 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저씨가 갑자기 유리창을 손으로 가리키는데 이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비가 쏟아졌다. 우비를 꺼내고 말고 할 틈도 없었을 그런 폭우성 소나기였다.

난 비를 맞지 않고 비아나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래된 성채 깊숙이 알베르게가 있었고 그 옆의 바르에서 약속이 있으셨다는 마음씨 착한 아저씨의 이름은 Patxi,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 까미노 천사를 만나게 된다. 나에게도 이런 기회는 오는구나 싶었다. 사람에게 상처받았던 마음이 사람에게 위로받은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보자. 하느님, 감사합니다!




Viana (474M)에는 오래된 성벽이 보존되어 있으며 도시의 평면도는 사각형 모양이다. 까스띠야와 가깝다는 점 때문에 산초 7세가 기존의 성벽을 합쳐서 비아나의 성벽을 만들었다. 로그로뇨 법령에도 등장한 비아나는 까미노 순례자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발전했다. 비아나에서는 양송이, 소시지, 비스킷과 함께 리오하 원산지의 향기로운 포도주를 쇼핑하기 좋다.

비아나의 외곽에는 까냐스 연못(Laguna de las Cañas)이 있는데 자연보호 구역이자 조류 보호 구역인 이곳에는 잉어, 누치 등이 살며 수많은 황새와 백로, 오리, 가우마지, 거위 같은 조류들이 있다.

비아나는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데 알레손, 스페인의 소설가였던 프란시스코 나바로 비요슬라다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비아나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는데 까미노 데 산띠아고의 까미노와 같은 의미인 Via라는 이름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과 로마의 여신이자 주술사였던 이름인 Diana와 관련돼 있다는 주장이 있다.

Monasterio de San Pedro
산 뻬드로 수도원은 13세기의 원래 건물에 18세기 후반까지 증축이 여러 번 되었으며 그중 바로크 양식의 거대한 현관이 돋보인다. 현재까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이 건물의 제단은 시토 교단의 영향을 받았다.

Balcon del Ayuntamiento
Juan de Raon이 1685년에 짓기 시작한 이 건물은 바로크 양식을 나타내는 파사드가 있고 발코니, 토스카나식 기둥, 처마의 띠 장식 위의 문장, 벽돌로 된 탑 등이 있다.

군주론의 주인공, 보르지아의 무덤
비아나의 산따 마리아 성당의 반석 아래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인물이 묻혀 있다. 바로 교황 알레한드로 6세의 아들인 께사르 보르지아(Cesar Borgia) 다. 그는 16세에 빰쁘로나의 주교, 19세에는 추기경, 22세에 가톨릭 군대의 장군이었고 24세엔 나바라 왕의 처남이 되었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때 영감을 준 사람으로 군주론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바라의 총수라고 불렸던 보르지아는 1507년 레린 백작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비아나에 묻혔다. 스페인 빨렌시아의 보르하 가문 출신인 보르지아의 무덤에는 비아나와 빨렌시아의 흙이 함께 뿌려졌고 아직까지도 그의 무덤 위에는 남녀 어린이가 두 지역의 꽃을 걸어놓는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다.

목숨을 건진 왕자
까를로스 3세는 손자 까를로스를 나바라의 왕위 계승자들이 받는 비아나 왕자로 임명했다. 비아나 왕자로 임명된 그가 말을 타고 비아나 외곽을 지나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다고 한다. 다행히 번개는 왕자의 머리 바로 위에 있던 나뭇가지(라모; Ramo)에 맞았고, 왕자는 목숨을 건졌다. 왕자는 감사하며 보답으로 그 자리에 Monasterio de San Juan del Ramo, 산 후 안 델 라모 수도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서둘러 알베르게에 등록하고 먼저 씻었다. 다시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다. 여기 공용 주방은 제법 컸다. 누군가 두고 간 건자두를 먹으며 기운을 차리고 밥을 하고 있는데 한국인이 보였다. 어떤 식으로든 오늘은 상처를 받기 싫어서 말을 걸지 않고 있었는데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뉴욕에서 오셨다는 K, 대접할 두 분이 계셔서 스파게티를 만들려고 하는데 같이 만들어서 먹자고 한다. 누군가 두고 간 면에다 소스 재료만 사 오면 될 것 같아 같이 장을 봐왔는데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저녁식사가 완성되자 K가 모시고 온 K, P는 두 분 다 신부님이었다. 신자라고 인사를 드리니 왠지 불편해하시는 게 느껴졌다. 뭐 하는 사람인지 묻길래 백수라고 하니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으셨다. 왜 그러시지?

저녁을 먹고 디저트로 수박을 얻어먹었다. 그러다 대뜸 수녀가 아니냐고 물으신다. 당황스러운 질문이라 아니라고 정색을 하니 보기에 딱 수녀인데 숨기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신다. 극구 부인을 하니 그제야 신분을 숨긴 채 순례길을 걷는 성직자가 많아서 수녀인 줄 알았다며 아깐 불편해서 그러신 거란다.

하긴 직장 다니는 젊은 여자가 이 까미노에 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학생, 은퇴자 아니면 백수였다.

설거지를 하고 침대로 돌아왔다. 저녁의 일상을 거치면서 오늘의 일은 그새 잊어버렸다.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줄 놓지 않고 무사히 온 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였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 스페인 아저씨의 친절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화살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슴프레 창밖 풍경이 다채로워 보인다.




Villamayor de Monjardín→Viana 30.1km

○Villamayor de Monjardín (673M)
●Los Arcos (447M) 11.8km
-Iglesia de Santa María
-Puerta de Castilla
●Sansol (479M) 7.0km
-Iglesia de San Zoilo
●Torres del Río (471M) 0.8km
-Iglesia del Santo Sepulcro
●Viana (474M) 10.5km
-Iglesia de Santa María
-Monasterio de San Pedro
-Balcon del Ayuntamiento

622.2km/775.0km




Albergue de Peregrinos Andres Munoz -8.00€




비스킷
스파게티, 밥, 음료, 수박, 홍삼차
(건자두)


Cocina
Refrigerador
Microondas
WIFI
Tie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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