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크로스의 결투 3/3
Épisode 10.
커밍스는 아서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더러운 배신자! 친구를 배반하다니! 네 놈까지도 한 패였구나!"
"아닙니다. 배반자는 안토니라고요!"
클라렌스의 시중이 간신히 커밍스를 뜯어말렸다.
"알겠는가, 커밍스 공? 믿기 어렵겠지만 아서의 증언은 사실인 모양이오. 그러니까 안됐지만 안토니는 자신의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네. 난 이 사건을 국왕 폐하께 보고할 생각은 없소. 또한 영국 귀족의 명예에 먹칠을 한 이 가증스러운 음모의 결과가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원치 않소. 죄인에게는 이미 하느님이 적당한 벌을 내려준 셈이니까, 그러나..."
클라렌스는 로버트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로버트! 사건의 진상은 어떻든 안토니가 이토록 부상당한 것은 사교계에 소문으로 퍼질 것이다. 말하자면 작위 상속권 문제로 자네가 안토니를 없애려 했다든가, 아니면 그 반대이든가. 일개 고아인 마리벨이란 여자가 이 사건의 원인이 됐다는 것은 자네가 사교계의 빈축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전하..."
"내 말을 더 들어라. 자네의 어리석은 불장난이 어떤 사태를 유발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 않은가?"
"전하, 그건 마리벨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있는 분수없는 욕심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리벨은 희생자일 뿐입니다."
"로버트, 친구로서 충고한다. 마리벨을 잊어버리고 명문가의 여자와 약혼하라!"
"거절하겠습니다. 전 마리벨 이외의 여자와는 절대로 약혼하지 않겠습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클라렌스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서렸다.
"랜버트 가를 버리고라도 마리벨을 택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상속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더 이상 마리벨을 모욕하지 말아 주십시오!"
클라렌스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더 이상 로버트와 얘기를 하다가는 자신의 마지막 자제력까지 잃게 될 것 같았다.
클라렌스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 뒤이어 랜버트와 커밍스도 따라 나갔다.
방에는 아직도 혼수상태인 안토니와 로버트 그리고 마리벨만이 남았다.
"로버트! 전하의 명령대로 하세요. 그래서 랜버트 가의 작위를 물려받아 국왕의 훌륭한 중신이 되어주세요."
"염려 마, 마리벨. 물론 나는 아버님의 작위를 계승하고 너도 아내로 맞아들일 거니까."
로버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로버트, 난 프랑스로 떠나겠어요. 오빠 앙투안을 찾을 거예요."
"앙투안은 내가 찾아준다. 몸이 다 나으면 같이 프랑스로 떠나자. 그대의 오빠를 찾아 그대가 결코 고아가 아니라는 걸 우리의 약혼식장에서 보여 주겠어."
마리벨로서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배려였다. 그러나 마리벨은 마음속으로 프랑스로 떠나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만이 로버트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감상에 젖어 결심을 무너뜨려서는 안 돼. 로버트는 결코 나와 맺어질 수 있는 신분이 아니야. 지금 헤어지는 것이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하는 최선의 길이야.'
마리벨은 카디프로 떠날 때 집사 맥코비가 들려주던 말이 생각났다.
'결국엔 눈물을 흘리게 된단다! 결국엔 눈물을 흘리게 된단다!'
"로버트, 난 이미 레안드르와 프랑스로 떠나기로 약속했어요."
"레안드르?"
로버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누웠다.
"레안드르가 누구지?"
"그 사람이 당신을 킹스크로스 숲에서 이곳으로 데려다주었어요"
로버트의 뇌리에 어렴풋이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킹스크로스 숲에 마리벨과 함께 나타났던 청년.
혼미한 정신 속에 비쳤던 가물거리는 기억이었지만 그 청년의 외모는 준수했던 것 같았다.
"말해 봐! 마리벨, 그와는 어떤 사이지?"
"어떤 사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마리벨은 입술을 깨물며 거짓말을 했다.
"하하... 사랑?"
"정말이에요, 로버트. 우린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걸 느꼈다고요."
로버트는 처음에는 레안드르라는 청년에 대해 막연한 질투심을 품었다. 그러나 마리벨이 정색을 하며 그들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속임수라는 걸 알아차렸다.
"좋아. 그럼 마리벨은 그를 언제 만났는데 벌써 사랑을 하게 된 거지?"
"아서의 파티에서 달아났던 날 밤이었어요. 레안드르가 빗속에서 날 구해줬어요. 그는 프랑스 망명 귀족의 아들이에요. 곧 프랑스로 떠날 거라고 했어요."
거짓말이 계속 술술 잘도 나온다고 마리벨은 스스로 감탄했다.
'나를 위한 거짓말이겠지만 마리벨이 저렇게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로버트는 마리벨이 그럴수록 더욱 애처롭고 사랑스러워졌다.
"마리벨, 그 청년을 내일 데리고 와."
"로버트, 그건..."
"내가 확인해야겠어. 레안드르가 그대를 생각하는 정도는 어느 만큼인지? 혼자 들떠 있는 건 아니겠지?"
"좋아요, 로버트."
레안드르가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마리벨은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기왕에 시작한 연극이었다.
"잠깐!"
방을 나서는 그녀를 로버트가 불러 세웠다.
"그대가 누구를 어느 만큼 사랑하느냐에 대해선 난 알 수가 없어.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마리벨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어. 그것만은 마리벨도 부정하지 말아주었으면 해!"
로버트가 뒤통수에다 던진 마지막 한 마디는 마리벨의 가슴을 마구 헝클어 놓았다. 그건 마리벨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영원히 가슴속에 담아두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랜버트 저택의 테니스 코트 만한 응접실의 소파에 안내된 레안드르는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휘둘러 보았다.
"히야, 굉장하구먼. 내 평생에 이런 호화스러운 응접실은 처음 구경해 본다!"
"레안드르! 촌스럽게 굴면 안 돼요. 당신은 프랑스 망명 귀족 후작의 아들이란 걸 잊었어요?"
그날 아침 마리벨은 레안드르에게 랜버트 저택에 함께 가 줘야 할 이유를 말하고 통사정을 했었다. 그러나 레안드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남의 사랑싸움에 끼어들어 어릿광대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
그것이 레안드르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다른 배우 지망생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 거짓 약혼자를 내세워서까지 자신을 잊게 하려는 마리벨의 결심에 감동했다.
"정말 그 사람을 잊을 수 있겠어? 연극에나 나올 법한 얘긴 걸!"
배우 지망생들까지 합세를 해서 레안드르를 설득했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마리벨은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올리버라는 친구가 레안드르를 빈정대기 시작했다.
"레안드르가 마리벨의 애인 역할을 싫다고 하는 이유를 난 잘 알고 있어. 한마디로 연기에 자신이 없는 거야."
"뭐라고?"
여태껏 묵묵히 혼자 떨어져 앉아 있던 레안드르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올리버는 계속 빈정댔다.
"내 말이 틀리나? 레안드르는 기껏해야 삼류 유랑극단 배우의 아들이야. 그런 주제에 후작의 아들 역을 정말처럼 연기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야."
레안드르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난 당장 루이 16세도 연기하 낼 수가 있어. 단지 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자네가 마리벨과 함께 후작 아들 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하고 돌아오면 우리가 자네의 프랑스 행 여비의 반을 부담하기로."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외쳤고 레안드르도 그런 조건이라면 귀가 솔깃했다.
사실 어제 분수에 넘치게 고급 마차를 타고 런던 거리를 오가는 통에 그동안 모아 두었던 여비의 태반을 날려 보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실패한다면?"
"그땐 자네가 마리벨의 여비의 반을 벌어대는 거지."
누가 생각해도 훌륭하고 명분 있는 내기의 조건이었다.
"좋아. 모두들 주머니가 상당히 가벼워지겠는 걸."
그렇게 해서 레안드르는 마리벨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삼각 붕대로 팔을 잡아매고 로버트가 응접실에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은 팔의 부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리벨!"
"로버트!"
"그리고 레안드르 씨, 은인에 대한 인사가 늦었소."
"별말씀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오."
로버트의 심경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차피 거짓 애인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레안드르에게서는 런던 귀족 청년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기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쳐드는 질투심을 막을 길이 없었다.
총명하게 빛나던 로버트의 눈자위가 보기 싫게 붉어진 것을 보며 마리벨은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품에 안겨 로버트의 고뇌에 찬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안돼, 마리벨. 이왕 시작한 연극이야. 막을 내릴 때까지는 멈출 수가 없어!'
그러나 시시각각 가슴을 찌르는 듯한 괴로운 연극이었다.
레안드르는 처음 로버트가 나타나는 순간, 자기들의 연극이 로버트의 눈에 거짓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완벽한 연기를 해 보여야겠다는 배우다운 욕심이 본능적으로 생겼다.
그러나 사랑의 아픔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을 억지로 꿰매고 있는 두 연인을 보는 것도 역시 괴로워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서투른 연극은 집어치워!"
로버트의 외침은 가짜 연인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다.
"연극이 아니에요. 레안드르와 나는 프랑스에 도착하는 즉시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벨의 목소리는 간신히 들릴 듯 말 듯했다.
"로버트 씨, 당신을 이해하오. 당신으로부터 마리벨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니 나도 무척 언짢소. 다만 이 여자에 대한 내 사랑도 당신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소."
레안드르의 연기는 조금씩 그럴 듯 해졌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마리벨에게 키스해 보시오. 그렇게 해서 나를 믿게 하시오!"
그러나 마리벨로서는 그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극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키스를 해 보일만큼 마리벨은 능숙한 배우는 아니었다.
"왜 못 하는가, 마리벨? 내 앞에서 그대들의 애정을 자랑해 보란 말이야!"
마리벨은 그만 거짓 가면을 벗어던지고 항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레안드르는 역시 배우였다.
"우리들 사이를 믿고 안 믿는 것은 로버트 당신의 자유요. 그러나 키스는 아무 데서나 하는 것이 아니오. 키스는 서로가 상대를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을 때 하는 것이오. 남의 명령이나 구경거리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레안드르의 연기는 조금 더 완벽해지고 있었다.
"로버트 씨, 당신은 마리벨의 은인이오. 그러니까 나의 은인도 되는 셈이오. 마리벨은 은인인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과 당신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심정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소. 마리벨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마음에 돌을 던지진 마시오!"
레안드르의 말은 로버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저도 로버트를 좋아해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좋아해요. 하지만 그건 사랑은 아니에요. 소꿉친구, 오빠 같은 그런 거예요. 레안드르는 달라요. 사랑하고 있어요."
마리벨의 연기도 레안드르의 연기 못지않게 능숙해지고 있었다. 거짓 연인들의 능숙한 연기는 차츰 로버트를 무너뜨렸다.
"하하... 말하자면 난 네 오빠 앙투안의 대용품이었단 말이지? 알겠어. 나도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로버트는 혼자서만 애태우고 있었던 거였구나. 가장 못난 남자의 표본이었구나. 마리벨, 그렇다고 날 비웃진 마!"
그러나 그게 연극의 전부는 아니었다. 또 한 가지 고비가 남아있었다.
"레안드르 씨, 한 가지 묻겠소. 프랑스에선 귀족과 평민의 결혼은 국왕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레안드르는 재빨리 답했다.
"그 점은 염려 없소. 프랑스로 돌아가는 즉시 먼 친척이 되는 자작 집안에 마리벨을 양녀로 보낼 예정이오. 그렇게 되면 국왕의 허가 없이도 정식 결혼을 할 수 있다오."
드디어 희대의 명배우 앞에서 로버트는 한낱 관객으로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다.
"하하... 어쩔 수 없구나. 그대들의 결혼을 축하할 수밖에. 그러나 허전한 내 가슴에 찬바람이 이는 것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 자, 이제 난 연인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한 몸, 남자답게 물러서겠소."
그러나 아직도 배우들은 무대를 내려올 수가 없었다.
"그럼 언제 프랑스로 귀국할 계획이오?"
"아... 아직... 그건."
"정해지지 않았단 말이로군요. 그럼 날짜가 잡히면 마리벨을 데리러 오시오. 그때까지 마리벨은 내가 데리고 결혼 준비를 시킬 것이오. 그게 바로 애인 아닌 오라비의 역할이 아니겠소?"
레안드르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되면 마리벨의 여비도 자기가 벌어야 된다는 얘기였다. 역시 쓸 데 없이 남의 일에 말려든 벌이었다.
그러나 내친걸음이었다.
"그건 아주 고마운 일이오. 그럼 마리벨을 그때까지 부탁하기로 하고 이제 그만."
하고 얼버무리고 일어났다.
진땀 나는 무대에서 레안드르는 되도록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마리벨이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이럴 수가! 자기 몫의 여비는 각자 벌기로 약속했잖아!"
"미안해요, 레안드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어떡하죠?"
"어쩔 수 없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밖에."
"미안해요, 레안드르."
"내 연기가 완벽했던 덕분이니까."
"그 대신 프랑스에 도착하면 일해서 갚겠어요."
레안드르는 서둘러 마차를 탔다. 그러나 그것이 그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