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프랑스!
Épisode 11.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오가는 정기여객선 포트 패트릭 호가 이윽고 도버 항구를 빠져나왔다. 여태껏 갑판에 서서 보이지 않는 선창가를 향해 손을 흔들던 마지막 노부부조차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갑판의 난간에는 마리벨 혼자 남아서 지는 해에 어슴프레 비치는 도버 해안의 절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은 검은 저녁 그림자가 드리워져 비석처럼 음산해 보였다.
그러나 마리벨은 그런 절벽 따위를 보느라고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로버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니 여섯 살 되던 해의 이른 봄, 음산한 도버의 절벽 뒤에 있는 백양나무 별장 2층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껴안아 주던 로버트에서부터, 어젯밤 랜버트 가의 정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미로운 키스를 나누었던 로버트까지, 그런 모든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지금 로버트는 마가렛 공주에게 키스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로버트가 마가렛 공주를 껴안고 있는 광경도 보이는 것 같았다.
마리벨은 살짝 눈을 떠 그런 상념을 흔들어 지워버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 로버트는 마가렛 공주와 약혼을 했다. 그가 약혼식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은 작별했다.
"부디 행복해야 돼, 마리벨. 그대가 행복하지 않다는 소식이 들리면, 난 언제든 그대에게 달려갈 거야."
그 마지막 말을 남기고 로버트는 성이 난 것처럼 홱 돌아서 성큼성큼 약혼식장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로 떠나겠다는 마리벨을 마침내 허락하면서 로버트는 그녀에게 소원이 무어냐고 물었었다.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말했었다.
"당신이 마가렛 공주와 약혼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제 소원이에요."
왜 그런 거짓말을 했던가. 왜 영원히 그대 곁에 있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말하기만 했다면 그대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좋아! 마가렛 공주와 약혼해 주지. 그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말이야!"
온 세상을 다 때려 부숴도 시원치 않겠다는 어조로 그렇게 씹어 뱉으며 분노의 눈으로 마리벨을 쏘아보던 로버트! 그런 로버트의 얼굴까지도 눈만 감으면 다 보였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눈을 뜨자 그 많은 로버트의 얼굴이 온데간데 없었다.
"사랑해요, 로버트!"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자 그것이 정말 소리가 되어 파도 위에서 넘실거렸다.
"사랑해요, 로버트!"
이번에는 자신을 가지고 좀 큰소리로 외쳐보았다. 그러나 뱃전에 부딪쳐 오는 파도 소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랑해요, 로버트!"
그래도 마리벨은 또 소리쳤다. 아무리 피를 토하듯 외쳐도 다 말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속이 좀 후련해지기는 했다.
따뜻한 손길이 오른쪽 어깨 위에 와 닿았다. 여태껏 갑판 위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레안드르였다.
레안드르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마리벨의 프랑스 행도 앞당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벨은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빗기울여 그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꼭 9년 전, 마리벨은 저 절벽을 향해 이 바다를 항해했었다. 그때 느꼈던 앙투안 오빠의 손등의 따뜻함을 그녀는 지금 레안드르에게서 새로이 느끼려 애쓰고 있었다.
포트 패트릭 호는 도버 해협의 한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150톤의 이 거대한 범선은 이미 하나의 나뭇잎이었고 브리튼 섬은 빙산처럼 멀리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만 선실로 들어가지."
레안드르의 상체가 바닷바람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 두터운 후작의 의상은 벗어던지고 없었다.
"이젠 연극이 끝났군요."
"맞았어. 정말 지루한 연극이었어."
그들은 정말 관객이 다 돌아간 후까지 불 꺼진 무대에 서 있던 빙충맞은 배우들처럼 천천히 갑판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녁 여섯 시에 영국 도버 항을 떠난 포트 패트릭 호는 이튿날 새벽 두 시에 프랑스 칼레 항에 닿았다. 8시간의 긴 항해 동안 마리벨은 지난 영국에서의 생활을 열 번도 더 되새겨 보았다.
결론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열네 살의 마리벨에게 로버트라는 첫사랑의 그림자가 도버 해협 저편으로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 조국 프랑스에서의 새 생활이 전개된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마리벨은 성스럽기까지 한 감정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다. 선착장 근처는 불빛으로 밝아있었지만 프랑스 땅은 아직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다.
"갈 데가 없으면 날 따라와도 좋아."
레안드르가 무뚝뚝하게 손을 내밀었다. 따로 갈 데가 있을 리 없었다.
조국이라지만 프랑스는 이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 하나, 살아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오빠 앙투안 밖에는 그녀가 알고 있는 프랑스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레안드르가 아주 익숙하게 마차를 잡았다.
"콩피에뉴!"
"아주 멀리 가시는구먼. 이왕이면 파리까지 가시지?"
"콩피에뉴!"
"60 수요."
마부는 레안드르가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매우 실망한 표정이었다.
"신혼여행이신가?"
"아니오."
마부는 따분한 여행이 될 것이 뻔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더니 말 엉덩이에 힘껏 채찍질을 했다.
선실에서처럼 레안드르는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얼굴에 노트를 펼쳐 놓고는 잠을 잘 모양이었다.
봄이라지만 밤바람은 차가웠다. 마리벨도 숄 위로 두 눈과 코만 내민 채 레안드르와 같은 자세로 잠을 청했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와 삐그덕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는 더없이 훌륭한 자장가였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레안드르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노트는 아직도 레안드르의 콧등 위에 그대로 있었다.
마리벨은 마차의 커튼을 열었다. 그러자 손수건 만한 창으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가고 들이 지나가고 숲과 나뭇가지와 냇물이 지나갔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었다.
런던의 아침은 그렇지 않았다. 날마다 희끄무레한 안갯속에 해가 가려져 있기가 일쑤였다.
"아침이에요, 레안드르!"
하마터면 마리벨은 그의 얼굴을 덮은 노트를 걷어낼 뻔했다.
레안드르는 자고 있지 않았다. 그의 뺨 위에는 밤새도록 흘러내렸음이 분명한 눈물 줄기가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고 그 위에 방금 솟은 눈물 방울이 망울져 있었다.
레안드르는 콧등의 노트를 조금 아래로 내려 눈물 자국을 가렸다.
마리벨은 처음으로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 그동안 자신의 슬픔에 너무 열중했던 나머지 레안드르를 잊었던 자신이 뉘우쳐졌다.
단 하나뿐인 아버지가 생사를 넘나 든다는 레안드르의 경우에 비하면,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따위로 한숨짓는 자신의 처지가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 짓 같았다. 그런데도 레안드르는 끝까지 마리벨의 연극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레안드르가 눈을 뜬 것은 정오 가까이나 되어서였다.
마차는 뮤즈 강변의 콩피에뉴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언덕 아래 작은 마을에서 레안드르는 마차를 세웠다.
마차를 향해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레안드르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그중 가장 빨리 달려온 한 소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레안드르에게 와락 안겼다.
"레안드르!"
"크리메이느!"
크리메이느? 그렇다. 술집 이층에서 마리벨이 처음으로 레안드르로부터 불리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번갈아 레안드르를 얼싸안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네."
"역시 그랬었군요, 장!"
장이라 불리는 중년의 사내가 레안드르의 어깨를 붙잡아 주었고 사람들은 모두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누구죠?"
"친구야, 마리벨이라는..."
마리벨의 존재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크리메이느였다.
장이 앞장서자 사람들이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양지바른 언덕 아래서 사람들은 멈췄다.
새로 덮은 도톰한 잔디 위에 얇은 널빤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꽂아놓은 것이 보였다. 레안드르 아버지의 무덤이었다.
"자, 레안드르. 아버지께 귀국 인사를 해야지."
크리메이느가 건네 준 꽃다발을 십자가 앞에 세워놓고 레안드르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어째서 이런 곳에... 왜 성당에 묻지 않았죠?"
"미안하네, 레안드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네. 단장님은 임종 직전에 신부님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네. '난 배우요, 저 세상에 가서도 배우 노릇을 하겠소!'라고. 결국 신부님은 매장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 뭔가."
아버지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분노에 차 있던 레안드르의 얼굴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마리벨은 보았다.
"그야말로 아버지다운 최후였군요!"
"맞았어! 단장님은 타고 난 배우셨어. 전생에도 아마 배우였을 거야."
"장, 난 파리에 다녀와야겠어요.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는데 어떻게든 매장 허가를 얻어봐야겠어요."
"그렇지만 레안드르,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거야."
"그럼 내 아버지를 이런 무덤에 버려두란 말이오? 들개나 늑대가 파헤쳐 비바람에 쓸려가게 내버려 둬도 좋단 말이오?"
레안드르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걸 마리벨은 처음 보았다.
"모두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아가씨를 돌봐 줘요."
그렇게 말하고 레안드르는 파리로 떠났다.
마리벨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어째서 '나는 배우요.' 하면 매장 허가를 내주지 않는 거죠?"
"그건 말이야, 배우는 누구든지 연극 속에서 하느님이나 신부님을 비웃게 되는 법이거든. 교회는 그걸 용서할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배우는 자동적으로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거야. 하지만 죽기 전에 신부님 앞에서 '나는 배우가 아니오.' 하고 선언을 하게 되면 파문은 취소되고 교회는 매장 허가를 내주지."
마리벨에게 장은 자상히 설명해 주었다.
한 대의 마차에 단원 일곱 명의 재산이 모두 실려 있었다. 그 속에서 취사도구도 나오고 취침 도구도 나왔다.
들판에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자 밤이 찾아왔다.
"여기가 우리들의 숙소야. 진짜 모텔에서 자 본 것이 몇 달 전인지도 몰라."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마리벨은 크리메이느와 장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 마리벨은 레안드르와 무슨 사이죠?"
"그냥 친구리잖니?"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공연히 남을 질투하지 마라. 레안드르는 연극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제 아버지처럼. 마리벨은 우리 극단에 새로 들어온 신인 배우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렴."
"그래도 안심이 안돼요...."
고국에서의 첫날밤을 마리벨은 뮤즈 강변 언덕의 별빛 아래에서 보냈다.
이튿날 레안드르의 말로 극단은 이 마을의 작은 극장에서 《명량한 아가씨》라는 연극을 공연했다.
일곱 명의 단원 전부가 아침부터 홍보 브로셔를 들고 마을 거리를 다니며 홍보를 했지만 손님은 고작 스무 명, 수입은 백 수도 안 되었다.
단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우울했다.
"이러다간 극장 대관료도 지불할 수가 없겠군!"
레안드르 대신 임시 단장직을 맡고 있는 장의 얼굴이 가장 죽을 상이었다.
"작년에 단장하고 싸워서 쫓겨난 피에르 말이에요. 낭트 쪽에서 극단을 만들어 크게 돈을 벌었다는군요."
가장 나이 많은 사브리나가 신세를 한탄하며 말했다.
"그 친군 아주 재주가 좋은 놈이지. 그래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대?"
"출연료를 많이 주고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를 데려다 쓴 것이 맞아떨어졌다나 봐요."
"코메디 프랑세즈?"
장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가 왔다고 하면 이런 시골 사람들은 극장이 터져라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출연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좋은 수가 하나 있어요. 어차피 이런 시골 구석에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의 얼굴을 누가 알기나 하겠어요? 그냥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라고 이름만 붙이면 되잖겠어요?"
"말하자면 가짜로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를 출연시킨다, 이 말이로군?"
장은 사브리나의 제안에 솔깃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크리메이느는 달랐다.
"하지만 레안드르가 돌아오면 화를 낼 거예요."
"한 이틀만 공연해서 레안드르 아버지를 매장할 돈만 버는 거야."
그렇게 해서 일단 사기 연극을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런데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이왕 거짓말을 할 바에야 코메디 프랑세즈에서도 최고의 인기 스타를 내세워야죠"
"그래, 맞았어. 잔느 드 모로가 출연하는 것으로 해."
이튿날 아침, 일곱 명의 단원이 모두 마을로 나가 브로셔를 뿌리며 나팔을 불고 돌아다녔다.
"자! 놀라운 뉴스요. 코메디 프랑세즈의 인기 여배우 잔느 드 모로 양이 말로 극단에 특별 출연! 파리가 아닌 곳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효과는 대단했다. 아침부터 손님들은 줄을 서서 모여들었고 극장은 발들여 놓을 틈도 없이 입석까지 꽉 차 버렸다.
"야! 굉장해. 우리 극장이 생긴 이래 이렇게 많은 손님은 처음이야!"
극장장은 환호를 질렀다.
가짜 잔느 노릇은 크리메이느가 하기로 결정했다. 화장을 더 짙게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으면 아무도 몰라볼 것 아닌가.
"괜찮을까? 떨리는데."
"어차피 다들 잔느를 처음 보는 사람들일 텐데 뭐."
그러나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마리벨만은 조바심이 났다. 레안드르가 알면 큰일 날 짓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느 드 모로라면 바다 건너 런던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배우다. 아무리 시골 구석이라지만 한두 사람은 잔느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막이 오르자 관객들은 연극의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잔느! 잔느! 를 외치며 잔느의 등장을 재촉했다.
잔느 아닌 크리메이느가 등장했다. 관객들은 잘 속고 있었다.
"과연 코메디 프랑세즈의 잔느답구만!"
"야! 소문 이상으로 예쁜데?"
그러나 거짓은 오래갈 수가 없었다, 누군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저건 잔느가 아니야!"
무대 위의 크리메이느가 그 소리를 듣고 뻣뻣이 굳어버렸다.
"저건 어제도 나왔던 바로 그 배우야!"
"화장을 좀 짙게 했을 뿐이야!"
"촌놈이라고 우릴 얕잡아보는 거냐?"
"입장료 물어내라!"
"때려 부셔라!"
소동은 점점 크게 번져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책임자인 장의 낯빛이 흙색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내 다짜고짜 마리벨의 팔을 잡고 무대로 달려 나갔다.
"여러분! 조용히! 잔느 드 모로 양이 파리에서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장은 마리벨만 무대에 남겨놓고 쏙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마리벨이 잔느가 되어 성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십 년 동안이나 무대에서 살아온 장의 순간적 재치였다. 그러나 마리벨은 아찔했다. 마리벨은 졸지에 잔느가 되어 인사를 하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상을 입고 연극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마리벨, 도와줘! 이번까지 거짓인 게 탄로 나면 우린 모두 끝장이야!"
"하지만 난 한 번도 연극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괜찮아. 뭐든지 좋으니 좀 해 줘! 우릴 제발 살려줘."
순간 마리벨은 레안드르를 생각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하면서까지 자기를 위해 런던에서 연극을 해 준 고마운 레안드르! 그를 위해 무언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그냥 커튼 앞에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어요. 대사는 내가 전부 할 테니까. 대신 커튼 근처를 떠나지 말아요."
마리벨은 죽을 각오로 무대로 나갔다. 그리고 처음 해보는 연극을 그런대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물론 커튼 뒤의 크리메이느의 공이 컸다.
그런데 연극은 주인공이 남자 배우와 열렬히 포옹하는 장면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벨은 많은 관객 앞에서 도저히 남자를 껴안을 수는 없었다. 남자 배우의 포옹을 몇 번 도망을 다니며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 뒤의 장과 다른 배우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고 마침내 크리메이느도 지쳐버렸을 때였다.
"저리 가요! 난 이 세상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단 말이에요!"
그렇게 외치며 마리벨이 그 자리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이젠 도저히 연극을 계속할 수 없다고 장은 판단했다.
"막을 내려!"
막이 내려가자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장은 입장료를 돌려주고 얻어맞지나 말았으면 좋겠다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객석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멋진 연기야! 오랜만에 연기다운 연기를 봤군!"
"과연 코메디 프랑세즈는 달라!"
"그대로 평범한 해피엔딩인 줄 알았지 뭔가?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어요.'지 뭔가?"
"정말이지 최고의 클라이맥스였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공연은 대성공으로 끝난 것이다.
누구보다도 장이 기뻐했다.
"모두가 마리벨 덕분이야. 우릴 구해줬어!"
"아니에요. 크리메이느가 잘했어요. 난 그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을 뿐인 걸요."
일단 고비는 무사히 넘겼고 그날 하루 수입도 상당했다. 그런데 장은 욕심을 더 냈다.
"이런 식으로 2~3일만 더 하면 자금을 마련할 수가 있겠어. 우리가 날마다 땅바닥에서 잘 필요가 없단 말이야. 안 그래?"
한번 해본 거짓말이 두 번째도 어려울 게 없었다. 마리벨도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마리벨은 연극과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윈저 궁에서 유랑극단을 따라 숨어 들어갔던 일이나, 뒷날 레안드르에게 구출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크리메이느 역을 하게 된 일이나, 로버트와 헤어지기 위해 레안드르와 함께 해 본 연극 등.
지금은 삼류 유랑극단이긴 하지만 진짜 극단의 무대에 서서 코메디 프랑세즈의 주연 배우 잔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튿날은 첫날보다 입장료가 두배로 늘었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말로 극단 단원들은 극단이 생긴 이래 처음 맛보는 성공에 들떠 있었다.
그날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잔느 양을 만나고 싶습니다."
청년은 한아름 꽃다발을 마리벨에게 건네주었다.
"항상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파리에선 이런 싼 입장료를 내고 당신의 연극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제 친구들에게 자랑거리가 생겼습니다. 내일 또 보러 오겠습니다."
열렬한 팬의 말에 마리벨은 자기가 마치 코메디 프랑세즈의 진짜 잔느 드 모로가 된 것 같았다.
"크리메이느, 이 꽃다발의 반은 당신이 받아야 해요."
마리벨은 자기가 받은 꽃다발에서 반을 나누어 크리메이느에게 주었다.
그때 웬 낯선 이가 무대의 커튼 뒤에서 나타났다. 척 보아도 시골 구석에선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세련된 여자였다.
"잠깐, 그 꽃은 내가 모두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마리벨은 가슴이 뜨끔했다.
"당신이 잔느 드 모로인가요?"
마리벨은 차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시죠, 당신은?"
그 여자의 입술에 경멸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구냐고요? 무슨 까닭인지 나의 이름도 잔느 드 모로예요. 코메디 프랑세즈의!"
진짜 잔느! 코메디 프랑세즈의 잔느 드 모로가 나타났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마리벨은 머리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고요? 염치없는 여자 같으니!"
장이 달려와 잔느 앞에 매달렸다.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며칠 전에 우리 단장님이 세상을 떠났답니다. 장례 비용을 벌려고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입장료는 모두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보러 온 사람들이 낸 돈이니까요. 너그러이 보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잔느는 마리벨 불러 세웠다.
"내일 손님들 앞에서 당신이 잔느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밝히고 입장료를 모두 돌려주세요, 알겠죠?"
"네..."
마리벨은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만은...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다간 우리 극단은 사기 극단이란 오명을 쓰게 되어...."
장은 잔느의 발 밑에 끓어 엎드렸다.
"그럼 난 이런 시골 삼류 극단에 출연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연극사에 남겨도 좋단 말인가요? 난 코메디 프랑세즈의 잔느 드 모로! 이따위 시골 광대놀음에 출연할 정도라면 차라리 목을 매달아 관객들에게 보여주겠어요!"
얼마나 자신에 찬 태도인가! 얼마나 자존심 있는 말인가! 얼마나 기품이 넘치는 행동인가!
마리벨은 그녀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하룻밤 더 묵겠어요. 내일 나의 요구가 지켜졌는지 어쨌는지를 확인해 보고 돌아갈 예정이에요! 갑시다, 피에르!"
잔느는 피에르라고 불린 날카롭게 생긴 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왕비같이 당당한 모습으로 극장을 떠났다.
마리벨은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한심한 행동이었는지 그제야 똑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손님들에게 몰매를 맞아도 좋아. 그들 앞에 나가서 내가 직접 사과해야겠어!"
이튿날 극장에는 어제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입장료도 무료라는 공지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막이 올랐다. 그러나 무대는 텅 비어있었다.
"이건 뭐야? 무대가 비어 있잖아?"
"공짜 연극이라서 이런 건가?"
관객들은 영문을 몰라 수군거렸다.
그때 마리벨이 무대에 나타났다.
"저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잔느 드 모로가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객석에서는 대번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뭐라는 거야?"
"잔느가 아니리잖아!"
"가짜였다는 거야!"
"이 놈들이 우릴 촌놈이라고 마구 속이려 드네!"
"우릴 속으로 비웃으면서 돈을 끌어모았겠지!"
"참을 수 없어. 다 때려 부숴라!"
노한 관객들이 무대로 마구 뛰어올라왔다.
"잠깐!"
그때 마리벨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레안드르였다.
"넌 뭐야?"
"레안드르, 이 극단의 책임자요. 때리건 짓밟건 그건 나에게 모두 해 주시오."
"좋아. 여자를 때리기보다는 남자 쪽이 더 맘 편하지."
관객들은 레안드르를 쓰러뜨리고 미친 것처럼 마구 짓밟았다.
그때 관객 중에서 한 청년이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만들 해요! 저항도 하지 않는 사람을 때리다니!"
"그럼 돈을 내라고! 이틀분을 몽땅!"
관객들은 이틀분 입장료를 도로 받아가지고서야 하나 둘 돌아갔다.
레안드르의 부상은 컸다.
"미안해, 레안드르. 우린..."
장이 눈물을 흘리며 레안드르에게 사과했다.
"아무 말도 말아요. 대강 짐작은 하고 있으니까."
관객 중에는 아직 돌아가지 않은 관객이 두 사람 있었다. 아까 싸움을 말리던 청년과 잔느 드 모로였다.
"자, 당신이 마지막이오. 얼른 이틀분 입장료를 받아가시오."
그러나 그 청년은 도리어 돈을 꺼내놓았다.
"이건 오늘 입장료. 난 잔느 드 모로의 연극이 아니라 당신의 연극이 보고 싶었소!"
어제 마리벨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던 청년이었다.
"오늘은 무대를 열지 않나요?"
"아닙니다. 관객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우린 연극을 해야 합니다."
"하겠어요. 제 연극을 보러 오신 관객인 걸요."
부랴부랴 무대 장치가 서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관객은 낯선 청년과 잔느 단 두 사람뿐이었다.
오늘 마리벨은 크리메이느가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대사를 다 외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단 두 명의 관객을 앞에 놓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이상하게도 마리벨은 그렇게 연기가 신이 날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 자기의 연극을 보러 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극이 끝났다. 객석에서 외로운 박수 소리가 터졌다. 청년의 박수 소리였다.
"이상해요, 레안드르! 단 한 사람의 박수 소리가 어제의 많은 사람들의 박수보다 더 크게 들려요!"
잔느도 객석에서 일어섰다. 그녀도 돈을 내놨다.
"난 남의 연극을 공짜로 볼 생각은 없어요. 다만, 적어도 잔느 드 모로의 이름을 도용하려면 올챙이가 아니고 병아리쯤 되는 배우를 내보내야죠!"
잔느는 어제와 같이 거만한 태도로 피에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극장을 나갔다.
"당신의 진짜 이름이 뭐죠?"
어제의 청년이 물었다.
"마리벨이라고 해요."
"마리벨, 좋은 이름이군요. 마리벨 양, 언젠가 당신이 코메디 프랑세즈의 잔느 드 모로가 아니고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로서 무대에 서는 날이 온다면 난 반드시 구경 가겠소!"
"고마워요.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카미유 데물랭!"
그렇게 말하고 청년도 사라졌다.
빈 무대에 마리벨 혼자 섰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
마리벨의 귓가에 청년의 말소리가 언제까지나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