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14

동백장의 텔레즈 1/2

by 안녕
Épisode 12.


가짜 잔느 드 모로 사건은 레안드르에게는 타격이 무척 컸다. 성난 관객들에게 무대 위에서 얻어맞은 것만 해도 억울한데 거기에다 극장 주인에게 멱살을 잡히는 곤욕을 치르고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쯤은 레안드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안드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난 배우요! 저 세상에 가서라도 배우 노릇을 하겠소!'라고 외치다가 묻힐 자리마저 잃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말로 극단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안 되어 이토록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그 일은 자기가 없는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단원들은 아버지의 매장비를 벌기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둘러 댔다. 그러나 그런 가짜 연극을 결심하게 된 내면에는 모두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게다가 레안드르를 더욱 화나게 했던 것은 마리벨이 그 사기극에 주연으로 참가했다는 사실이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마리벨을 보호하겠다고 로버트 앞에서 그토록 굳은 맹세를 했던 레안드르였다. 그랬건만 프랑스에 오자마자 마리벨을 가짜 잔느로 만들어 무대에 세우고 말았으니 사정이야 어떠했든 레안드르로서는 좀처럼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더럽혀진 말로 극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참고 견디어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안드르는 영국에 있을 때부터 구상해 왔던 연극 《동백장의 텔레즈》를 말로 극단의 새 레퍼토리로 결정했다. 각본은 영국에 있을 때부터 틈틈이 써 왔기 때문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연출 프로그램도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 이제 단원들에게 알맞은 배역을 맡겨 연습을 시키고 극장을 얻어 무대에 올려놓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수입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극장을 빌린 값을 갚고 나니 말로 극단의 재정은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설사 레안드르가 파리에 가서 아버지의 매장 허가를 얻어왔다 하더라도 장례식을 치를 돈도, 무덤을 만들 돈도 없으니 모든 건 허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파리에 간 레안드르는 변호사로 개업한 친구를 찾아갔다.

"곤란한 일이야. 자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신부가 문제야. 그 신부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네. 이건 법이니까 말이야."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의 매장 허가를 얻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알 만한 유력자들은 모두 찾아가 보았지만 대답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공연히 파리에서 이틀씩이나 시간을 허비하고 돌아와 보니 레안드르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엉뚱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묻힌 언덕에 꿇어앉아 레안드르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머지 많아 돌아와서 반드시 훌륭한 무덤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




이튿날 말로 극단 일행 여덟 명은 다시 마차를 몰았다. 새로운 레퍼토리와 레안드르라는 젊은 단장을 맞아 활기에 차 있어야 할 말로 극단의 사기는 말할 수 없이 침체되어 있었다. 마차가 파리를 거치지 않고 노르망디 지방에 도착했을 때 단원들에게는 하루 한 끼의 식사를 마련할 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찾아가는 극장마다 말로 극단에게는 극장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콩피에뉴에서의 사기극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말로 극단과 레안드르에게 안겨 준 피해는 심각했다. 사기극의 소문을 피해 레안드르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마차를 몰았다. 도중에 지방 영주의 성에 들러 연극을 보여준 대가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기도 했다.

마차가 브르타뉴 지방에 이르렀을 때 마리벨은 자기의 짐을 꾸렸다. 더 이상 레안드르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도무지 염치가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유랑극단 살림에는 군식구 하나도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마리벨은 잘 알고 있었다.

"갈 곳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잖아?"

레안드르는 로버트와의 약속도 있긴 했지만 마리벨을 빈 손으로 시골 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하다못해 종업원이나 하녀 노릇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이 이상 신세 진다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레안드르는 입장이 무척 난처했다. 아무리 마리벨의 보호를 자처하고 나섰던 레안드르였지만 당사자가 혼자 살아가겠다는데 말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실적으로도 레안드르는 그녀를 신통하게 보호해 주고 있지도 못했다.

"좋아, 내가 아는 귀족에게 소개장을 써 주지."

유랑극단과 함께 마리벨은 마차를 타고 이틀을 더 달려 르와르 강변의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 아래에는 시골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호화로운 저택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다지르 후작 별장이야. 당분간 지내보다가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면 즉시 나를 찾아와. 당분간은 여기서 강변 길을 따라 10km쯤 떨어져 있는 앙제에 머물 예정이야. 거기선 극장을 빌려 연극을 할 수가 있을 거야."

마리벨이 내린 다음에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장, 크리메이느, 사브리나 등과는 짧은 동안이나마 무척 정이 들었기 때문에 서로 헤어진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원하기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이 너를 보내 주지만 다시 내게 도움을 청해 오면 그때부턴 목숨 걸고 너를 보호해 줄게.'

브르타뉴 강 가에 마리벨을 내려놓고 떠나면서 레안드르는 그렇게 결심했다.




마리벨은 레안드르의 소개장을 들고 언덕 아래에 위치한 다지르 후작의 저택으로 갔다. 저택 앞마당에는 십여 명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죠?"

"댁도 하녀 지망생인가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래요. 한꺼번에 면접을 한다는군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다지르 후작의 저택에선 마침 임시 하녀를 뽑고 있었다. 다지르 후작은 파리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후작 부인이 이곳의 별장으로 와서 파티를 열며 지내는 며칠 동안 필요한 하녀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마리벨은 굳이 레안드르의 소개장을 내보일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하녀를 골라서 뽑는다면 자기 실력으로 뽑혀야지 이런 일에까지 레안드르의 힘을 빌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레안드르와 헤어질 때 혼자서 앞날을 헤쳐 나가겠다고 마리벨이 결심했던 것과도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하녀로 뽑힌 젊고 예쁜 네 명의 여자 중에는 마리벨도 끼어 있었다. 그래서 자자, 비비, 휘휘라고 부르는 세 여자들과 마리벨은 그날부터 같은 방을 쓰면서 다지르 후작 별장의 하녀 생활을 시작했다.

하녀의 신분이었지만 그날만은 오랜만에 마리벨도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레안드르는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그리고 로버트는... 어쩌면 윈저 성의 파티에서 마가렛 공주와 밤을 새워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노라면 마리벨의 마음은 다시금 서글퍼지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마리벨? 고향에 두고 온 애인 생각이라도 하는가 봐?"

비비가 그렇게 물어 왔으므로 마리벨의 서글픈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비비를 비롯해서 다른 두 명의 하녀도 모두 젊고 예뻤다. 그들은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남의 집 하녀를 자청하고 나섰을 뿐이었다. 그들은 귀족은 아니지만 몸치장을 하고 나서면 런던의 어느 무도회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어여쁜 소녀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 같은 처지의 여자도 꽤 많은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리벨은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으리으리한 마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브르타뉴 지방의 귀족들이었지만 노르망디나 파리에서 온 마차들도 있었다.

30명이 넘는 하인과 하녀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파티 준비를 서둘렀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내내 바쁘게 뛰어야 했다. 손님들이 묵을 방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가구들을 정리하고 화분을 나르고 하는 동안 어느덧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점심 식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기다랗게 한 줄로 놓인 식탁엔 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었다. 식탁에 커트러리를 놓고 와인을 나르고 음식 접시를 나르는 일은 주로 남자 직원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자와 비비, 휘휘는 일하는 틈틈이 몸치장을 하더니 은접시에 포도주 병을 담아 파티장의 식탁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이봐요, 우리 여자들은 식탁 근처에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마리벨은 아침에 늙은 하녀장이 일려 주던 말이 생각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다간 늙어 죽을 때까지 하녀 신세를 면하지 못해. 나중에 그 여자처럼 늙은 하녀장이 되는 게 고작이지. 우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티장에 자주 들락거려야 한다고. 그래서 젊은 귀족들 눈에 띄어야 팔자를 고치는 거야. 누가 알아, 우리들 중에서 귀족 부인이 나올지? 그러니까 너도 단장 좀 하고 날 따라와."

자자가 잡아 이끄는 통에 마리벨은 어리둥절해서 접시를 하나 들고 식탁으로 나갔다.

굉장한 파티였다. 영국에 있을 때는 로버트의 파트너로서 여러 번 파티에 참석했었던 마리벨이었지만 프랑스 시골 구석에서 이렇게 성대한 파티가 열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저 식탁 끝에 앉아있는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이 집 주인인 다지르 후작 부인이야."

자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아름다운 부인이 앉아 손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작 부인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상이었다. 마리벨이 멍하니 후작 부인은 쳐다보고 있는데 자자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뭘 꾸물거려! 우린 어서 남자 손님들 쪽으로 술을 가져가야 한다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무슨 소리야! 꾸물대다간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거야."

어정쩡하게 서 있는 마리벨을 자자가 확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마리벨은 들고 있던 접시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접시가 떨어지면서 와인 병이 깨어졌다. 하얀 대리석 위에는 피같이 붉은 와인이 쏟아져 사방으로 방울이 튀었다.

"이런 멍청이 같은 여자는 당장 쫓아내요!"

바닥에 엎드려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마리벨의 뒤통수로 젊은 여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 싶으면서도 마리벨은 호령을 하고 있는 여자가 누구일까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발성 공부를 한, 그러니까 성악가나 연극배우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니,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잔느!"

"아니...?"

얼굴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장소에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마리벨 쪽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누군지 알겠어요, 잔느 양?"

"물론이죠."

잔느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피에르가 불쑥 나타났다.

"어제는 남의 이름으로 연극에 출연한 사기꾼으로, 오늘은 하녀의 탈을 쓰고 나타났군 그래. 뭘 노리는 거지? 돈만 생긴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 내일은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날 테지? 어서 꺼져 버려! 더러운 것!"

피에르가 내뱉은 말 한마디는 마리벨에겐 뼈에 사무치는 굴욕이었다.

"참아요, 피에르. 어떤 인연이었든 아는 사이고 보니 내쫓을 수는 없잖아요. 마리벨, 오늘은 그냥 눈 감아 주기로 하겠어요."

마리벨은 어떻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잘못을 눈 감아 주겠다는 잔느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곤 허둥지둥 자자에게 이끌려 왔을 뿐이었다.

"마리벨, 너 참 굉장하구나! 잔느 양하고 아는 사이야?"

"한 번... 만난 일이 있어. 그런데 잔느라는 여자는 이 집안과 어떤 관계가 있지?"

"그것도 몰라? 잔느 드 모로는 다지르 후작의 딸이야"

참으로 세상은 넓고도 좁았다.

잔느에게 용서를 받았다지만 더 이상 다지르 후작의 별장에 머문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한 일이었다. 자자와 비비가 말렸지만 마리벨은 다시 짐을 꾸렸다. 하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구태여 이 집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살롱에 모여 제각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지르 후작 부인은 딸 잔느를 불렀다.

"잔느, 내가 부탁한 일은 알아봤느냐?"

"조금 전에 파리에서 막 도착하는 길이에요. 말로 극단이 콩피에뉴에서 연극을 한다기에 찾아가긴 했었죠. 하지만 그건 같은 이름의 유랑 극단일 뿐 어머니가 찾는 말로 극단은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신 50세 전후의 금발의 단장과는 거리가 먼 젊은 청년이 단장이었거든요."

잔느의 말을 듣자 후작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은 깊은 수심에 잠겼다.

그때 여류 바이올리니스트가 나타나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당신의 어머니는 찾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무척 낙심하고 있구나. 그 말로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머니하고 어떤 관계지?"

피에르가 잔느에게 물었다.

잔느는 피에르의 얼굴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머니의 전 남편이에요. 그의 아들은 내 약혼자고요."

"약혼자라고?"

피에르의 얼굴이 잠시 흙빛으로 변했다. 넓은 파티장에는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 퍼졌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여자는 다지르 후작 부인이나 잔느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잔느에게 그토록 열중해 있던 피에르조차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는 넋을 잃을 정도였다.

"저 여자는 누구지?"

"미레뉴라나요! 떠돌이 악사겠죠."

"멋진데! 어딘지 분위기가 당신과 비슷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그렇담 한번 사귀자고 해 봐요.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가까이할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에요."

"무슨 뜻이지?"

"어쨌든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저 사람은 여자가 아니니까."

"그럼 남자란 말이야?"

"아무리 변장을 해도 내 눈은 못 속여요. 이래 봬도 난 코메디 프랑세즈의 최고 배우거든요. 남의 변장 같은 건 첫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하하... 저 여자가 남자라고? 잔느, 당신의 상상력은 너무도 비약이 심하구먼."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가 끝나자 귀족들은 제각기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지갑 속에서 번쩍번쩍하는 루이 금화를 아낌없이 그녀 앞에 내놓았다.

"다음 주에 우리 살롱에 외서 연주해 주었으면 해요."

"감사합니다만 그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게 될지는 잘 모르겠군요..."

미레뉴라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는 여러 귀족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바이올린을 챙겨 들고는 다지르 후작 별장을 나와버렸다.




르와르 강변 언덕 위에선 짐을 꾸려 든 마리벨이 미레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벨은 미레뉴가 귀족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다지르 후작 별장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단 한 번의 바이올린 연주로 많은 금화를 벌어들이는 광경도 보았다.

마리벨은 강변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는 미레뉴의 뒤를 한동안 쫓아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다지르 후작의 별장에서 바이올린을 켰었죠?"

"그래요. 아, 당신은 식탁에서 실수를 저질렀던 하녀로군."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잠시 함께 걸었다.

"왜 귀족들의 청을 거절하셨죠? 돈을 더 많이 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난 오늘 꽤 많이 벌었어요. 더 이상은 욕심내지 않기로 했거든요."

미레뉴는 담담하게 말하며 천천히 걸었다.

"저... 저를 제자로 써 주시지 않겠어요?"

마리벨이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자?"

"그래요, 전 이제부터 혼자서 살아가야 돼요. 당신에게 바이올린을 배워서 당신처럼 떳떳하게 살고 싶어요."

"내가 사는 것이 떳떳한 삶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어요.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난 제자를 둘 만한 실력도 못 된답니다."

처음부터 거절을 당하리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던 마리벨은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을 작정이었다.

"언제까지든 당신을 따라다니겠어요, 제자로 써 줄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하...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요. 당신이 내 정체를 알기만 해도 금방 달아나 버릴 테니까."

"정체?"

미레뉴는 멈춰 서더니 몸에 걸치고 있던 드레스와 가발을 벗었다. 그러자 금방 아름다운 청년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놀랐어요, 당신이 남자라니. 왜 그런 짓을 하시죠?"

"별다른 이유는 없어. 단지 이 일을 하기에 여자로 행세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지."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 청년은 마리벨을 강가의 숲으로 안내했다. 후작 댁에 오기 전에 여장을 하려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곳에 짐을 숨겨놓았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떠난 후 다지르 후작 별장에서는 잠시 소동이 일었다. 마리벨이 떨어뜨리고 간 레안드르의 소개장을 하녀 하나가 후작 부인에게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소개장을 본 후작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개장에 레안드르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벨은 한 시간 전에 짐을 싸서 떠났습니다"

"모두들 그녀를 찾아보도록 해. 놓쳐서는 안 돼, 절대로!"

후작 댁의 하인들은 부랴부랴 말을 달려 마리벨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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