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15

동백장의 텔레즈 2/2

by 안녕
Épisode 13.


강가의 숲 속에서 짐을 찾은 후 미레뉴와 마리벨은 잠시 그대로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멀리 후작 별장 근처에서 말을 달려오는 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요?"

"우선 좀 숨읍시다. 내가 여장을 한 사실이 탄로가 난 모양이오. 큰 죄는 아니지만 잡히면 시끄러울 거요."

두 사람은 추격대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숲 속에 숨어있었다.

미레뉴는 자기의 제자가 되겠다는 소녀의 옆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내 동생도 자랐으면 저만큼은 컸을 텐데. 그러고 보면 동생 마리벨을 닮은 것도 같구나.'

청년은 그렇게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미레뉴라는 이름의 청년, 그는 바로 마리벨의 오빠 앙투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넓은 세상에서 단 둘이 강가에 앉아 있는 두 오누이는 서로 상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다만 앙투안만이 소녀의 모습에서 어렴풋하게 마리벨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 동생과 닮은 소녀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앙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의 부질없는 생각을 비웃었다.

"이봐, 모두 사라졌어. 우리도 떠나야지. 그런데 어디로 갈 작정이지?"

"앙제로 가겠어요. 전에 몸 담고 있던 유랑 극단이 아직 거기에 머물고 있을지도 몰라요."

"배우 노릇을 했었나?"

"아주 잠깐 동안, 우연이었지만요."




앙제에 들어서자 마리벨은 금방 얼굴빛이 달라졌다. 말로 극단의 연극 포스터가 담벼락 곳곳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거예요.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극단이에요. 이젠 됐어요."

오갈 데 없는 소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이젠 헤어져도 되겠다고 앙투안은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마리벨!"

"오, 크리메이느!"

"지금 모두들 흩어져서 거리에 홍보 브로셔를 뿌리고 있는 중이야. 너도 이제 우리 극단으로 다시 돌아온 거야?"

두 소녀의 상봉을 지켜보던 앙투안은 놀랐다.

'마리벨?'

앙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소녀가 바로 내 동생 마리벨인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프랑스 천지에 마리벨이란 이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동생 마리벨이 아니라는 단정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앙투안은 가냘픈 희망을 걸고 마리벨이라고 불린 소녀를 일단 더 살펴보기로 했다.

크리메이느가 안내한 곳은 낡은 공회당을 개조해서 만든 극장이었다.

"마리벨!"

"레안드르!"

두 사람이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오누이처럼 반갑게 껴안고 있는 것을 앙투안은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소개하겠어요. 이 분은 음악가 미레뉴, 이분은 말로 극단의 단장인 레안드르."

마리벨은 즐거운 마음으로 두 청년을 서로 소개했다.

"미레뉴? 그건 여자 이름이군요. 본명이 아니죠?"

"그렇소. 본명은 프로렐이오,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드 생 쥐스트!"

"드 생 쥐스트? 그럼 귀족이시군요?"

"그런 셈이죠. 왜요, 제가 귀족이라는 점이 못마땅한가 보죠?"

"물론이죠, 난 귀족을 아주 경멸합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는 '드'를 잊지 않는다?"

앙투안은 할 말을 잃었다.

'난 귀족이라는 자부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난 동생을 찾고 있다. 동생을 찾을 때까지는 아버지가 지어준 나의 온전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앙투안은 애써 참았다.

낡아서 삐그덕거리는 무대에 널빤지를 갈아 대는 일을 거들면서도 앙투안은 잠시도 마리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는 자기 동생을 닮은 것 같았다. 희미한 기억 속에 도버의 별장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지며 입 맞추었던 동생의 커다란 눈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앙투안은 마리벨에게 물었다.

"마리벨, 오빠 이름을 말해 줄 수 있겠어?"

"앙투안이에요. 다섯 살 때 영국 도버에서 헤어졌어요. 하지만 지금은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마리벨은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우리 오빠 이름은 왜 묻죠? 내가 언제 오빠 얘길 했던가요?"

앙투안은 너무도 큰 놀라움과 기쁨 때문에 못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앙투안은 하마터면 마리벨을 껴안을 뻔했다.

'마리벨이다! 내 동생 마리벨! 9년 전 도버에 두고 온 내 동생 마리벨이 벌써 저렇게 아름다운 숙녀의 모습으로 이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때 마리벨이 통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앙투안의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틀림없이 무슨 눈치를 챌 수 있었을 것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극장은 어느 정도 연극을 공연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갖춰졌다. 말로 극단으로서는 그나마 공연 장소를 얻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단원들은 마지막 연습에 들어갔다. 물론 레퍼토리는 레안드르 작 《동백장의 텔레즈》였다.

침착한 레안드르였지만 자신의 처녀작을 무대에 올려놓는다는 사실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신용이 땅에 떨어진 말로 극단이 마지막으로 제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동백장의 텔레즈》의 줄거리는 이러했다.

아무런 사랑도 없이 동백장에 시집을 온 텔레즈는 냉정한 남편 밑에서 불행한 결혼 생활을 눈물로 보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텔레즈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동생인 샤를르였다.

어느덧 텔레즈와 샤를르 사이에는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형수와 시동생 사이의 사랑이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샤를르에게도 아리아느라는 약혼녀가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알게 된 아리아느는 격분하여 텔레즈의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불행한 두 연인은 텔레즈의 남편인 성주의 명령으로 각각 다른 방에 갇히게 된다.

샤를르는 갇혀있던 방에서 탈출하여 텔레즈가 갇혀있는 방을 찾아 헤매다가 아리아느를 만난다.

"저하고 결혼해 주세요. 그리고 텔레즈를 잊겠다고 맹세하세요. 그러면 형님도 용서해 주실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형님에게 살해당하고 말 거예요."

아리아느가 간청하는 소리를 갇혀있던 텔레즈가 듣고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

"샤를르! 꺾이지 말아요. 당신이 죽는다면 나도 당신을 뒤따르겠어요."

"텔레즈, 물론이오.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두 사람의 변치 않는 결심을 보고 아리아느는 마침내 자기의 폐배를 선언하고 텔레즈가 갇혀있던 방의 열쇠를 훔쳐 샤를르에게 내준다.

"자, 마음대로 떠나세요, 두 분. 그리고 행복하세요."

그래서 샤를르와 텔레즈는 자유의 나라로 떠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




본래 이 희곡은 레안드르가 말로 극단을 위해 영국에서 써 온 것이었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 적기 때문에 말로 극단 같은 뜨내기 유랑 극단이 공연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원래 레안드르가 구상했던 배역은 성주 역에 아버지, 텔레즈 역에 사브리나, 샤를르 역엔 레안드르 그리고 아리아느 역엔 크리메이느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사브리나는 너무 늙어 버렸다.

그래서 배역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성주는 장이 맡기로 하고 샤를르는 레안드르가, 텔레즈 역엔 크리메이느 그리고 아리아느 역엔 마리벨이었다.

마리벨에게 이 연극의 주연을 맡기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레안드르는 콩피에뉴에서 감히 잔느의 흉내를 제법 해 냈던 마리벨의 천부적인 자질을 믿고 있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연습한 보람이 있어 아침이 밝았을 때는 만족할 만큼 연습이 진척되어 있었다. 레안드르는 성공적인 공연을 확신하며 연습을 끝마쳤다.

막이 오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안드르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공연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픈 시간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극장 입구에서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분장실까지 들렸다.

"저, 부인. 오픈 시간은 아직..."

"알고 있어요. 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극장에 들어선 사람은 다지르 후작 부인이었다. 마리벨은 부랴부랴 앙투안을 숨기는 소동을 벌였지만 부인이 찾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레안드르!"

레안드르는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표정을 바꾸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인.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나가 계시다가 다시...."

"레안드르! 그게 7년 만에 만난 어미에게 하는 말이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단원들은 한결같이 깜짝 놀랐다. 그중에서도 마리벨의 놀라움은 특히 컸다. 레안드르가 다지르 후작 부인의 아들? 그렇다면 잔느와 레안드르는 남매 사이가 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다지르 후작 부인을 처음 보았을 때 어딘지 낯익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레안드르! 네가 단장이 되었다면 그분은... 끌로드가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후작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서 있는 레안드르와 후작 부인은 누가 보아도 모자지간임이 분명했다.

"그냥 돌아가 주세요!"

"레안드르! 내 아들아!"

후작 부인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모두 지나간 일이야. 잊어버려야 해."

"전 안 돼요. 가난 속에서도 오직 연극만을 위해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레안드르! 네 슬픔은 나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이젠 내게로 돌아와 다오. 이 어미 품으로 돌아와 다오. 실은 다지르 후작에겐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 너를 찾고 있는 중이었단다. 넌 이제 가난한 배우 노릇은 그만 둘 수가 있어. 후작의 작위를 받아 나와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가 있어!"

그때까지 구두코를 내려다보고 있던 레안드르는 고개를 들어 눈을 빛내며 후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신부님 앞에서 '난 배우다! 저승에 가서도 배우 노릇을 하겠다'라고 하셔서 교회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고 뮤즈 강변의 황야에 아무렇게나 묻혔어요. 저도 죽을 때는 당당하게 그렇게 말할 겁니다."

말을 마치자 레안드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둘러 서 있는 단원들을 보고 호령했다.

"뭣들 하고 섰는 거야! 오픈 시간이 임박했다! 모두들 자기 의상으로 갈아 입고 빠뜨린 것은 없나 잘 살펴봐!"

300석의 극장은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말로 극단은 실로 몇 년 만에 꽉 들어찬 관객들 앞에서 마음껏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다지르 후작 부인도 객석의 특별석에 앉아 끝까지 연극을 관람했다.

모두들 열연을 보여주었다. 특히 샤를르 역의 레안드르는 신들린 듯한 연기를 해 내어 연극 도중에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 바람에 연극은 몇 번이나 중단되곤 했다. 아리아느 역의 마리벨도 레안드르의 열연에 못지않은 훌륭한 연기를 해냈다. 레안드르의 안목이 적중한 셈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왔을 때 다지르 후작 부인이 레안드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하다, 레안드르! 작품도 훌륭했지만 네 연기는 정말 감동적이었어. 네 아버지 끌로드를 훨씬 앞지른 연기였어!"

다지르 후작 부인의 찬사에도 레안드르는 차가운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부인은 분장실을 나갔다. 그러나 그때 부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연극 대본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말로 씨, 대단한 성공이오. 정말 훌륭했소."

"고맙습니다, 콜베르 씨."

극장 주인 콜베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소, 앞으로 두 주일 동안 우리와 공연 계약을 맺지 않겠소?"

"정말입니까, 콜베르 씨?"

그렇게 해서 당장 말로 극단은 최고의 조건으로 두 주간의 공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연극의 성공은 마리벨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마리벨, 주급 20 수로 자넬 우리 극단의 정식 배우로 쓰고 싶어!"

"고마워요. 레안드르!"

"고마운 건 오히려 내 쪽이야. 그대가 아리아느 역을 해 주지 않으면 내일부터 우리 극단은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해서 마리벨도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셈인가?"

레안드르는 앙투안에게 물었다.

"축하하오, 단장. 내게도 일거리를 주면 좋겠소."

앙투안은 굳이 남의 극단에 빌붙어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면 바이올린 하나만으로도 생활에 필요한 수입을 얻고도 남았다. 그러나 앙투안은 조금이라도 더 마리벨의 곁에 남아있고 싶었다.

"알겠네, 프로렐. 우선 두 주 동안 공연 계약이 끝날 때까지 우리 극단의 잔일 거리를 맡아 주게. 단, 하루 식사 세끼와 잠자리 외에는 기대하지 말게나."

"아무렴, 난 군식구니까."

그렇게 해서 말로 극단은 본래의 일곱 식구에서 마리벨과 앙투안이 끼어들어 모두 아홉 식구가 되었다.

두 주일 간의 새로운 계약으로 상당한 수입을 얻게 되자 말로 극단은 오랜만에 따뜻한 모텔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단원들의 사기도 높았고 새로운 젊은 단장에 대한 신뢰와 의욕도 높았다.




어느 날 레안드르가 앙투안을 불러냈다. 그러나 르와르 강변을 걸어가면서도 레안드르는 말이 없었다.

"무슨 얘기인가, 레안드르?"

"자네가 마리벨과 특별히 가까운 것 같아서 충고하고 싶은데..."

그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장을 보러 가는 마리벨을 앙투안이 뒤쫓아가는 장면을 레안드르가 목격했던 것이다.

그날 앙투안과 장바구니를 함께 들고 오면서 마리벨은 그에게서 로버트의 모습을 읽고 있었다.

"프로렐, 마리벨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연을 당해 울고 있었다네."

"가엾군. 그래, 상대는 어떤 자였나?"

"영국인이었어. 귀족이었지..."

레안드르는 마리벨을 처음 만났던 날의 광경부터 자세히 얘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마리벨과 함께 벌였던 연극에 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둘이 그렇게 사랑했다면 왜 헤어져야 했지?"

"상대가 귀족이었기 때문이야. 알겠는가? 신분이 달랐단 말이야. 그리고 자네도 귀족이고."

앙투안은 레안드르의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리벨을 또다시 울려서는 안 되네. 그녀의 슬픔은 그 일 한 번만으로도 충분해. 만약 마리벨이 똑같은 슬픔을 겪게 된다면 난 그걸 가만두고 볼 수가 없네!"

앙투안은 마리벨을 걱정해 주는 레안드르의 마음에 감격하고 있었다.

"자네, 마리벨을 사랑하나?"

"뭐?"

느닷없는 반격에 레안드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 오로지 보호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마리벨을 대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질문을 받고 보니 마리벨에 대한 자기감정을 돌이켜 본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말이야, 단지 로버트와 약속했을 뿐이야."

"로버트?"

"그 영국 귀족 말이야. 훌륭한 청년이었는데. 귀족이라는 것만 빼놓는다면 말이야."

앙투안은 로버트라는 청년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레안드르의 말대로 훌륭한 청년이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유랑 극단을 따라 방황하는 동생 마리벨이 앙투안은 새삼스럽게 가여워졌다.

지금이라도 마리벨을 붙잡고 과거의 쓰라림을 서로 얘기하며 한바탕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앙투안의 현재 입장은 너무나 보잘것이 없었다. 마리벨 앞에 자기가 오빠라고 떳떳이 나설 수가 없었다. 기껏 해야 여장을 하고 귀족의 살롱에서 바이올린을 켜 주는 어릿광대 신세가 아닌가?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오라비라고 나설 수가 있겠는가.

"어쨌든 누구든 마리벨을 울리면 아무리 자네가 귀족이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겠네!"

그렇게 말하고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극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레안드르의 뒷모습을 보며 앙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로 극단의 《동백장의 텔레즈》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텔레즈의 슬픈 운명을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과 행복을 쟁취하는 샤를르와 텔레즈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또 사랑하는 자신의 약혼자를 기꺼이 떠나보내는 아리아느의 용기에 대해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느 날 레안드르에게 한아름의 꽃다발과 함께 편지 한 장이 전해졌다.

"누구야? 이런 천한 짓을 한 사람이!"

레안드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꽃다발 속에 끼워져 있는 편지를 뽑아보았다.

그것은 잔느 드 모로가 서명을 한 편지였다

"잔느 드 모로?"

"잔느? 코메디 프랑세즈의?"

그것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공연 초대장이었다. 연극은 파리의 유명한 국립 극장에서 상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 끼어있는 공연 프로그램을 보고 레안드르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아니 이건 《동백장의 텔레즈》 아냐? 이럴 수가?"

"그건 순전히 레안드르 당신의 창작물이잖아요!"

마리벨도 의아하다는 듯이 레안드르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코메디 프랑세즈가 허락도 없이 남의 작품을 공연한다는 거죠?"

"고약한 짓이군. 남의 작품을 함부로 공연하다니! 이건 코메디 프랑세즈가 무명 극작가를 깔보고 하는 짓이라고. 진상을 밝혀서 단단히 혼내줘야겠어!"

장과 다른 단원들도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번에 대본 하나가 없어진 걸 발견했지. 다지르 후작 부인의 짓이야."

"하지만 이건 도둑질이나 다름없어요. 《동백장의 텔레즈》가 인기가 높으니까 코메디 프랑세즈가 탐낸 거예요. 고발해요, 레안드르!"

레안드르는 단원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을 그저 쳐다보기만 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모두들 그만둬요. 이건 함정이야, 날 다지르 후작 댁에 데려가려는! 난 그런 수법에는 걸려들지 않아!"

레안드르는 비싼 코메디 프랑세즈의 초대장을 단원들 앞에서 쭉쭉 찢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마리벨은 코메디 프랑세즈가 《동백장의 텔레즈》를 어떻게 소화해 냈을지가 무척 궁금했다. 당연히 잔느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잔느라면 주역인 텔레즈로 나올 거야. 그녀는 대관절 어떤 텔레즈의 모습을 보여 줄까?'

실은 레안드르의 마음도 마리벨과 비슷했다.

'내 작품을 코메디 프랑세즈는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올려놓을까?'

그것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극장 측과 계약한 두 주간의 공연이 모두 끝났다. 극장 객석은 매일 만원이었다. 연극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감동을 감추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홍보를 해댔다.

"말로 씨. 우리 극장이 비로소 제대로 극장 구실을 했나 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만 더 공연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앙제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연극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공연을 하겠습니다."

공연은 나흘을 쉰 후에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날 말로 극단의 단원들은 넉 달만에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위에 두둑한 보너스까지 얹어 받은 단원들은 모두들 돈 쓸 곳을 생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한 달치 급여라서 가장 액수가 적은 마리벨이 누구보다 제일 감격해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기가 일을 해서 번 정당한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정말 제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리본도 사고 구두도 새로 맞춰 신어."

"아니에요. 난 꼭 쓸 데가 있거든요. 파리에 가야 해요. 코메디 프랑세즈의 《동백장의 텔레즈》를 볼 거예요."

마리벨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바보야, 파리에 가서 잘 차려입고 국립 극장에 가려면 그 돈으론 어림도 없어."

사브리나가 이렇게 말하자 마리벨은 금세 풀이 죽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도 어림이 없다면 도대체 얼마가 더 필요하다는 거죠?"

"네가 가진 돈의 곱절은 더 있어야 마음 놓고 국립 극장의 객석에 앉아 있을 수가 있을 거야."

"그렇담... 난 다음 달에나 가겠어요."

마리벨은 낙담하여 얼굴빛이 흐려졌다.

"내가 구경시켜 주지."

그런 마리벨의 모습을 보고는 레안드르가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정말이에요, 레안드르?"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다녀와서는 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적어도 코메디 프랑세즈의 연기자들은 자기의 대사를 무대 위에서 잊어버리는 따위의 실수는 하지 않거든."

요즘엔 그렇지 않았지만 연극을 시작할 무렵에 마리벨이 대사를 잊어먹는 바람에 난처한 경우가 몇 번 생겼었다. 그때마다 레안드르가 임기응변으로 넘어갔는데 이제 그걸 꼬집어 얘기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레안드르. 코메디 프랑세즈의 연극을 한번 보기만 하면 난 똑같이 해 낼 자신이 있어요."

"저런, 그걸 보고 똑같이 한다면 난 절대로 그대를 데려갈 수가 없어. 연극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연극을 해야 하는 거야. 남의 흉내나 낸다면 그건 연극이 아니야, 꼭두각시놀음이지."

사실 레안드르는 마리벨을 구경시켜 준다는 구실로 자기도 파리에 가 볼 생각이었다.

마리벨은 뛸 듯이 좋아했지만 크리메이느는 잔뜩 풀이 죽었다. 레안드르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 사이였지만 언제부턴가 레안드르에게 남 모르는 연정을 품게 되었던 크리메이느였다.

한동안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지만 마리벨도 크리메이느의 마음을 환히 알고 있었다. 마리벨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 정도는 레안드르 쪽이 더 강하면 강했지 절대로 덜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 런던의 싸구려 모텔에서 레안드르가 자기를 놓고 연기 연습할 때 부르던 이름이 바로 크리메이느였기 때문이었다.

"크리메이느, 실망하지 마. 난 레안드르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고마워, 마리벨. 내 드레스를 빌려 줄게.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레안드르를 유혹하지 말아야 해."

"오케이."




그날 오후 레안드르와 마리벨은 마차를 타고 파리로 떠났다. 처음 해 보는 파리 여행이라서 창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마차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벨은 심심하기만 했다.

"돌아올 땐 아침에 출발하기로 해요, 레안드르."

"알았어,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단 말이로구나."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마차는 센 강의 퐁 뇌프를 건너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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