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레안드르 2/2
Épisode 15.
몸이 몹시 흔들리는 바람에 마리벨은 눈을 떴다. 텅 빈 마차에 그녀는 혼자 타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떻게 된 거죠?"
"이제 정신이 드셨군요, 아가씨."
마부는 휘두르던 채찍을 멈추고 말했다.
"브르타뉴로 가는 중입니다. 앙제에 말로 극단이 있다면서요?"
마리벨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듯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레안드르는?"
"잔느 양과 약혼한답니다.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겁니다."
마부가 다시 힘껏 채찍을 휘두르자 네 마리의 말이 서로 앞을 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레안드르! 당신도 역시 유혹에는 어쩔 수 없었나요? 잔느, 코메디 프랑세즈, 다지르 후작... 그것들을 이길 수는 없었나요?'
서운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레안드르에게는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마리벨은 생각했다. 드디어 미차가 멈췄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서 아직 발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마리벨을 끌어내려 콜베르 극장 앞에 팽개쳐 놓고 마부는 크게 소리 질렀다.
"확실히 모셔다 드렸습니다. 나중에 딴 소리하면 안 돼요."
마리벨이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콜베르 극장의 분장실에서였다. 앙투안과 장이 마리벨을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벨, 이제 정신이 드나?"
눈은 떴지만 마리벨은 여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레안드르! 그를 구해줘요. 잔느와 결혼하게 됐어요!"
"걱정하지 마. 레안드르는 지금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중이야."
마리벨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잔느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다지르 저택에 남고 자기를 마차에 태워 보냈던 것이 아닌가!
마리벨은 무대로 나가보았다. 마침 샤를르로 분장한 레안드르가 텔레즈와 함께 마지막 연기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레안드르! 어떻게 된 거예요?"
"보다시피 우린 무사해."
"어떻게 그런 일이..."
"할 수 없었어.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자 그대가 기어이 의식을 잃더군. 난 위대한 잔느에게 항복을 했지."
"역시 그랬었군요."
마리벨의 실망이 너무도 커서 샤를르로 분장한 레안드르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잔느와 약혼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가야겠군요?"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잔느는 처음부터 나와 결혼하려던 게 아니었어. 다만 내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던 거야. 자기의 지존심만 회복하면 그만이었던 거지. 난 사실 마리벨을 구할 생각으로 잔느와 결혼할 생각이었어."
레안드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그런데 잔느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그녀는 내게 콧웃음을 쳤어. 멋지게 내가 당한 거지. 그리곤 한다는 말이,
'난 우리 어머니를 내쫓은 여자의 아들인 당신이 이렇게 내 발아래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요. 이것으로 당신 어머니에 대한 복수는 끝난 셈이죠. 이젠 소용없어요. 당신 따윈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가버려요!'
이러지 않겠어! 마치 우리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아느가 읊는 대사 같잖아? 하하하...!"
단원들은 모두들 수다를 떨고 있는 레안드르가 평소의 그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레안드르는 조용히 장을 불렀다.
"장! 만일 내가 떠나면 말로 극단을 맡아주시오. 당신은 아버지의 친구였고 경험도 풍부하니까 단장으로선 적임자요."
"무슨 얘기야, 레안드르?"
레안드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이것이 극단의 흥행 허가서, 통행증, 세금 장부 그리고 단원 명부요. 소중하게 보관하시오."
장은 봉투를 받아 들긴 했지만 도무지 레안드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만 알아 두세요. 난 사실 잔느와 약혼했어요."
"그럼 아까 네가 한 말은...?"
"그럴듯하게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나로선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잖아요!"
아직도 어리벙벙한 상태였지만 레안드르가 말하는 태도로 보아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장은 생각했다.
그날 아침 레안드르는 죽음 직전에 놓여있는 마리벨의 곁에서 최후의 결심을 했다.
"이것 봐! 이 여자에게 물 한 모금만 주게!"
"돌았군, 젊은 친구! 잔느 님의 명령을 내가 어떻게 어길 수가 있겠나!"
감옥지기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이봐! 잔느에게 내가 만나잔다고 급히 전해 주게. 대신 이 여자에게 마실 것과 수프를 좀 주라고."
그렇게 해서 레안드르는 잔느 앞에 서게 되었다.
"마음을 고쳐먹었다죠?"
"그렇소, 잔느."
"좋아요, 그럼 그대가 정식으로 청혼을 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 레안드르 말로는 잔느 드 모로 양에게 청혼하는 바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렇게 말하는 레안드르의 눈에서는 패배의 쓰라린 눈물이 흘러내렸다.
"좋아요, 두 사람을 다 풀어주도록 하세요."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사람은 다지르 후작 부인이었다.
"잘했다, 레안드르. 이제부터 넌 다지르 집안의 상속자야. 내 귀여운 아들아."
그러나 그때까지도 레안드르는 그렇게 콧대 높은 잔느가 자기 같은 삼류배우를 남편으로 맞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청년에게 혼인을 거절당한 분풀이로 결혼을 고집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존심만 충족시키고 나면 자신을 풀어 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인가, 잔느? 자기 어머니를 내쫓은 여자의 아들인 나를 정말로 남편으로 맞을 수 있단 말인가?"
잔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안드르를 쳐다보았다.
"내 어머니를 내쫓은 여자의 아들이기에 난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알 수 없는 말이오, 잔느."
"난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어머니에게 내 어머니가 학대받는 광경을 보아왔어요. 이제부터 난 당신을 남편이라는 쇠사슬로 묶어 한평생을 학대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되면 잔느, 당신도 내 아내로서 한평생을 구속당하는 거요."
"귀족의 세계에선 아내와 남편 사이는 겉치레뿐이라는 걸 몰라요? 난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나의 보람은 연극뿐, 그것만으로 내 인생은 충분히 만족스러워요!"
잔느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고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레안드르는 어쩔 수 없이 잔느의 굴레에 묶이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잔느, 내게 석 달간의 여유를 주시오. 난 지금까지 말로 극단을 이끌어왔소. 그런데 갑자기 내가 없어지게 되면 말로 극단 단원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오. 같은 배우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기 바라오."
레안드르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도망칠 준비를 하겠다는 건가요?"
"잔느, 당신네 귀족들은 한 번 잡은 먹이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고 알고 있소."
"좋아요, 3개월 후. 그러니까 정확히 9월 6일에 당신과 나는 약혼식을 하게 될 거예요. 만약 그날까지 당신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을 다지르 가에 대한 모욕죄로 체포할 거예요. 물론 그동안 당신은 계속 감시를 당할 거고요."
그렇게 해서 레안드르는 3개월의 시한부로 풀려나게 되었다.
"기회를 봐서 도망쳐야 해. 레안드르!"
장이 안타깝게 속삭였다.
"상대는 세력 있는 귀족이에요. 내가 도망가도록 놔두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안드는 창밖을 가리켰다. 장의 눈에도 담 밑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바다를 건너 달아나면 되잖아!"
어느새 왔는지 문 앞에 앙투안이 서 있었다.
"프로렐, 엿들었구나!"
"천만에, 그런 듣기 거북한 소리는 말게. 여길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야."
"달아나는 일에 대해선 나도 생각해 봤네. 그러나 내가 도망치면 그 화가 마리벨에게까지 미친단 말이야."
"그렇다면 마리벨과 함께 도망치면 되잖겠나?"
"마리벨은 날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러니 우린 함께 달아날 이유가 없어."
"자네도 마리벨을 사랑하고 있지 않나?"
"..."
레안드르는 대답 대신 얼굴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답하지 않는 건 사랑한다는 뜻인가?"
"마리벨이... 사랑하는 건 로버트뿐이야."
"나도 그건 알아. 로버트라는 첫사랑은 영원히 마리벨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야. 그러나 사랑이 인생에 단 한 번뿐이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나? 난 아까 깨어나자마자 자네를 찾는 마리벨을 보고 그녀가 자넬 사랑한다고 느꼈네. 그러니까 다지르 후작과 잔느 앞에서 자넬 사랑한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야."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로버트가 떠나간 뒤의 마음의 공백일 뿐이야. 난 그녀에게 있어서 로버트의 대용품에 불과해."
"대용품? 그런 단어는 쓰지 말게. 마리벨이 자네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감춰 버릴지도 몰라."
"자네는 마치 나와 마리벨을 맺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자네라면 마리벨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며 앙투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프로렐, 내가 보기에는 자네도 마리벨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았어, 자네보다 훨씬 깊이 사랑하고 있다네. 그러나 난 그녀와 결혼할 수는 없네."
"자네도 로버트처럼 귀족이기 때문에?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드 생 쥐스트 각하?"
그렇게 빈정대는 레안드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마리벨이 찾고 있는 오빠의 이름이 앙투안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앙투안? 자네가 혹시..."
"맞았어, 레안드르. 내가 바로 마리벨의 오빠 앙투안일세."
레안드르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의혹의 구름이 비로소 걷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자가 마리벨에게 그토록 친절했었나?
"그렇다면 자네는 왜 자신이 오빠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나? 마리벨이 불쌍하지도 않나? 자넨 동생의 아픔을 즐기는 사디스트인가?"
"사정이야 어떻든 난 동생을 한 번 버렸던 사림이야. 게다가 떠돌이 신세인 내가 어떻게 오빠라고 자처하고 나타날 수 있겠는가. 염치없는 짓이야. 마리벨은 혼자서도 저렇게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잖은가."
레안드르는 앙투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자기의 가슴속에 싹트고 있던 마리벨에 대한 사랑을 이제는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레안드르는 앙투안을 연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레안드르, 부탁이네. 제발 내 얘기를 마리벨에게는 하지 말아 주게."
레안드르가 다지르 후작의 저택에서 잔느와 약혼식을 치르기로 약속한 사실을 마리벨에게 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레안드르는 어느 날 아침 르와르 강변에서 그 얘기를 하고 말았다. 레안드르로서는 그것이 마리벨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고 청혼이었다.
"따라가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성취가 아니라 시작이었다.
'로버트! 레안드르라면 당신도 용서하실 거예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로버트와의 첫사랑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리벨은 오히려 홀가분해지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영국으로 떠나기로 약속했고 탈출 준비는 일체 앙투안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콜베르 극장에서의 공연은 계약대로 계속되었다. 콜베르와의 공연 계약은 한 달간이었는데 계약 만료 일주일을 남기고 레퍼토리를 변경하기로 했다. 《동백장의 텔레즈》는 레안드르와 마리벨이 끝까지 무대에 남아 있어야 하므로 잔느의 심복들을 피해서 탈출하기엔 적당치 않은 연극이었기 때문이었다.
새 레퍼토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정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저 무대 위에서 칼이나 휘두르고 피를 흘리는 야만스러운 연극이라고 무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안드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프랑스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진가를 알아줄 때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레안드르가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작품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택한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레안드르는 이 마지막 무대를 평생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공연의 막을 여는 날 칼레에 갔던 앙투안이 돌아왔다.
"결정됐다! 배는 내일 아침에 칼레 항구를 떠난다. 여기서 칼레까지는 마차로 열다섯 시간, 그러니까 늦어도 오늘 오후 여섯 시에는 출발해야 돼!"
"너무 시간이 촉박하잖아!"
"더 지체할 수는 없어. 이번이 기장 좋은 기회다. 내일은 영국 왕가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어서 밀항하기에는 안성맞춤이야."
왕가의 결혼식이라면 마가렛 공주와 로버트의 결혼식일 것이라고 마리벨은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런 날을 잡아 밀항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싫었지만 마리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여섯 시면 연극이 한창 진행될 무렵이다. 르와르 강 언덕에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다가 로미오로 분장했던 레안드르가 먼저 나가 마차를 몰고 시청 뒷담으로 오면, 줄리엣을 연기하던 마리벨이 분장을 지우고 그곳으로 가서 합세해 칼레로 향하기로 되어 있었다.
레안드르와 마리벨이 극장을 빠져나간 다음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은 장과 사브리나가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연극이 끝나는 일곱 시까지는 두 사람의 탈출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칼레까지 다녀온 앙투안의 뒤를 잔느의 심복인 피에르가 줄곧 뒤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마리벨은 앙투안을 만났다. 그녀가 앙투안 앞에 내놓은 것은 로버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장식용 접시였다.
"이것이 로버트예요. 레안드르를 따라가기로 한 이상 이걸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날더러 없애 달라는 건가?"
"제 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앙투안은 묘한 감정을 느끼며 그 장식용 접시를 받아 들었다.
마리벨은 앙투안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면서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오빠의 모습을 느꼈다. 윤기 나는 금발, 푸른 눈의 프로렐은 보면 볼수록 앙투안의 어렴풋한 모습과 일치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정말 오빠라면 그때까지도 자기를 모른 체하고 있을 리가 없다고 마리벨은 생각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첫 무대 준비와 탈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분장실에 느닷없이 잔느와 피에르가 나타났다. 말로 단원들은 귀신을 만난 것처럼 파랗게 질려버렸다.
잔느와 피에르를 뒤따라 대여섯 명의 젊고 화려한 의상의 여자들이 따라 들어왔다.
"왜들 그런 표정을 짓죠? 우리 극단의 친구들이에요. 내 약혼자의 연극을 보고 싶다기에 데리고 왔어요. 괜찮겠죠?"
"우리로선 더 없는 영광이오, 잔느."
그렇게 대답하는 레안드르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잔느가 무언가 낌새를 채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한다지?"
"이런 야만적인 연극을 프랑스에서 하다니!"
"하지만 유랑 극단에 어울리는 멜로드라마지 뭘 그래."
여자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던지고는 분장실을 나갔다.
"레안드르, 어떻게 하지?"
장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연극도 탈출도 다 예정대로 진행해요."
"레안드르, 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연극을 보여줘야겠어요."
"암, 그렇고 말고!"
갑자기 마리벨에게는 새로운 투지가 샘솟았다. 지난번 콩테 극장에서 잔느의 연기를 보고 한없이 감탄했던 마리벨이었지만 그녀도 이제 풋내기 배우는 아니었다.
'오늘 잔느에게 내 연기를 보여 주겠어. 말로 극단의 마리벨의 연기를!'
마리벨에게는 탈출에 대한 생각보다도 오히려 잔느에게 지지 않는 연기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베로나 거리의 캐플릿 가의 무도회에 몬타규 가의 로미오가 잠입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무대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숙명적인 사랑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객석의 잔느와 피에르는 다른 생각을 품고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때요, 피에르?"
"아직은 탈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3막에서 줄리엣과 헤어진 로미오는 곧바로 분장실로 가서 장에게 의상을 넘겨주었다.
"조심하게, 레안드르!"
레안드르는 분장실의 뒷문으로 나가 뒷담을 타 넘었다. 그 아래 메어져 있던 말 등에 올라타면서 처음으로 레안드르의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줄리엣을 연기하는 마리벨의 신들린 듯한 연기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마리벨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배우로서의 소질을 그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마리벨. 그대 같으면 분명히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에도 설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레안드르는 말 잔등에 탄 채 더 이상 박차를 가하지 못했다. 마리벨과 영국으로 떠나는 것은 그녀의 재능을 헛되게 썩히는 일이라는 자책감이 앞섰다.
레안드르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되돌아가서 마리벨의 재능을 키워줘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마리벨이다. 로버트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 나를 따르게 하기보다는, 로버트와의 사랑을 억누를 필요 없이 그녀의 재능을 살리는 길을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레안드르! 넌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마리벨의 사랑을 욕심낼 것인가, 아니면 마리벨의 소질을 키워줄 것인가!'
그러나 레안드르의 갈팡질팡하던 괴로운 생각도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담 모퉁이를 돌아 쫓아오는 두 마리의 말발굽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레안드르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피에르가 권총을 꺼냈다.
"레안드르가 분명하다. 우릴 보자마자 달아나고 있어."
"그러나 피에르 님, 절대로 죽이지 말라는 잔느 님의 분부였어요."
"죽이진 않는다. 말을 맞춰 떨어뜨릴 거니까."
레안드르의 말이 르와르 강 언덕을 거의 다 올랐을 때 피에르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레안드르가 갑자기 말 잔등 위에 푹 엎어졌다.
"맞았군요!"
그런데 달아나던 레안드르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 이상했다. 뒤를 쫓는 피에르 일당은 너무도 놀라 그대로 멍하니 멈춰 서 있었다.
레안드르는 추격자들의 앞을 지나 다시 콜베르 극장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극장 안에선 줄리엣의 독백이 한창이었고 신들린 마리벨의 연기를 잔느도 넋을 잃고 지켜보고 있었다. 줄리엣이 독약을 마시고 쓰러지자 빈정대기만 하던 잔느의 친구들조차도 겁먹은 얼굴을 했다.
"저런!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가슴이 두근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제발 라스트 신을 가르쳐 줘. 그렇지 않고는 무서워서 볼 수가 없어!"
그러나 잔느만은 담담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조용히 해, 이 촌뜨기들아! 틀림없이 해피엔딩이 될 테니까."
잔느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당시의 연극은 관객들의 주문에 따라 해피엔드로 장식된 극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극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물론 《햄릿》, 《리어왕》도 해피엔드로 고쳐서 상연되고 있었다.
막이 내리고 마리벨이 무대를 나서자 무대 뒤의 단원들은 모두 그녀의 연기에 찬사를 보내며 조용한 박수로 마리벨을 맞았다.
"정말 잘했어, 마리벨. 최고의 연기였다고."
"우리들도 가슴을 졸이며 넋을 잃고 있었다니까."
드디어 마리벨이 레안드르가 기다리고 있을 마차를 타러 떠날 시간이 되었다.
"자, 마리벨. 곧 여섯 시가 된다. 의상을 벗어서 사브리나에게 주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그런데 앙투안이 그렇게 외지며 등을 떠다밀어도 마리벨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아... 아니에요, 난... 끝까지 하고 싶어요."
"마리벨! 정신 나갔어? 지금이 바로 달아나야 하는 시간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 끝까지 연극을 해야겠어요."
그런데 그때 유령처럼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레안드르였다. 사람들은 더욱 놀랄 뿐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레안드르!"
"하자! 마리벨, 끝까지 하자!"
"당신도 역시?"
"하자꾸나, 마리벨. 배우란 일단 막이 오르면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연극을 계속해야 하는 법이야. 나만이 할 수 있는 로미오, 마리벨만이 할 수 있는 줄리엣! 그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할 수는 없지."
화가 난 것은 앙투안이었다.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탈출해야 할 시간이라니까!"
"그건 연극을 마치고 나서 생각할 일이야."
"이런 바보! 잔느 일당에게 잡히고 말아!"
"이건 나의 마지막 무대! 자, 나간다!"
제5막이 올랐다. 묘지에서의 장면이었다. 여기서 로미오는 줄리엣의 오빠를 만나 그의 칼에 찔려 죽게 되어있었다.
"자 피에르, 여기는 로미오가 등장하는 장면이어요. 누가 레안드르를 대신할지 궁금하잖아요?"
그런데 다음 순간 등장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레안드르였다. 누구보다도 잔느의 놀라움은 컸다. 레안드르는 이미 달아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줄리엣의 오빠가 등장하고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인다. 그런데 상대의 칼끝이 닿을까 말까 했는데 로미오의 배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잔느, 이건 해피엔드가 아니잖아?"
잔느로서도 까닭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로미오가 줄리엣의 시체 위에 푹 쓰러졌다. 그러고 나서 레안드르는 대사를 잊은 것처럼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막이 내려졌다.
객석에서 극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리벨이 먼저 일어났다.
"레안드르, 어서 일어나서 저 소릴 들어보세요."
그러나 레안드르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레안드르!"
마리벨이 비명을 지르자 단원들이 무대로 달려 나왔다. 장이 레안드르의 배를 만져 보았다. 뜨거운 피가 배에서 마냥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연극용 피가 아니야."
"레안드르가 죽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때 레안드르는 죽어있었다. 아니 이미 르와르 강 언덕에서 피에르의 권총에 맞았을 때 그는 죽었던 것이다. 그가 극장으로 다시 돌아와 연극을 마치고 쓰러졌다는 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의 힘이었다.
무대 뒤에 어느새 잔느가 와 있었다.
"인정해 드리겠어요, 마리벨! 언젠가 당신이 나의 라이벌이 되리란 것을!"
그러나 그런 말이 마리벨의 귀에 들려올 리가 없었다.
"잔느!"
그렇게 말하는 마리벨의 목소리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그제야 잔느도 사태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죽었군요, 레안드르가! 어쩐지 마지막 장면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배우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죽음이죠, 무대 위에서 죽었으니...."
"당신이로군요, 레안드르를 죽인 것이!"
마리벨의 한마디 한 마디는 자갈을 씹는 것처럼 이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도망치려 했었다면 당연한 처벌을 받은 거겠죠."
"잔느!"
잔느가 돌아섰을 때 마리벨의 손에 쥐어진 칼이 곧바로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잔느는 태연하게 손바닥으로 그 칼을 막아냈다.
순간적으로 배우들은 또 하나의 살인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잔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연극용 칼로는 날 죽이지 못해요."
잔느는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부채로 힘껏 피에르의 따귀를 갈겼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느의 두 뺨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