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18

듀가 존 선생 1/2

by 안녕
Épisode 16.


1787년 8월의 어느 날 오후.

생 시테 섬 서쪽의 퐁 뇌프 근처에는 무더위를 식히러 나온 시민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다르 달랑 공작의 둘째 아들인 사관생도 줄리앙도 그때 두 친구와 함께 퐁 뇌프를 향해 천천히 거닐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이 빠졌다!"

"여자가 센 강에 떨어졌어!"

꼬마들이 아우성을 치며 다리 위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관생도들도 그 소리를 듣고 퐁 뇌프로 달려갔다. 가장 먼저 강으로 뛰어든 사람은 줄리앙이었다.

"또 한 사람 빠졌다!"

"바보야, 그건 여자를 구하러 뛰어든 사람이야."

간신히 여자를 건져낸 줄리앙은 재빠르게 사관생도들이 벨트를 이어 만든 밧줄을 붙잡고 다리 위로 기어오를 수가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다리 위의 벤치에 눕히고 인공호흡을 한 뒤 한참 만에야 여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은 회복하지 못했다.

"어떡할 셈인가, 줄리앙?"

"이 정도면 내 의무는 다한 것 아니야?"

"하지만 꽤 미인인데?"

"설사 미인이라 해도 자살을 생각하는 여잔 난 딱 질색이야."

센 강은 생활고에 지친 파리 시민들이 뛰어들어 고통스러운 일생을 청산하는 장소이기도 해서 줄리앙이 자살하는 사람으로 생각된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줄리앙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더 이상은 산책을 즐길 수가 없었다.

"덕분에 수영은 아주 시원하게 했는 걸."

줄리앙은 친구들과 헤어져 지나가는 마차를 잡아 탔다.




마리벨이 눈을 떴을 때는 그 많던 구경군들도 다 흩어져 돌아간 저녁나절이었다.

옷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마리벨은 그대로 벤치에 누운 채 불그스레 해가 기울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볼에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버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마가렛 공주와 결혼하여 깨가 쏟아질 것이다. 마리벨은 고개를 흔들어 그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뒤이어 레안드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줄리엣, 당신을 사랑해!'

마지막 숨을 거두며 그렇게 속삭이던 레안드르의 모습이 아주 뚜렷이 떠올랐다. 파리에 가자고 고집하지만 않았던들! 다지르 후작 댁에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않았던들! 영국으로 밀항하자고 할 때 따라나설 약속만 하지 않았던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앙투안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상한 것은 앙투안을 생각할 때면 항상 프로렐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지곤 하는 일이었다.

프로렐은 랭스의 법과 대학생이었다. 바이올린 연주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라면서 레안드르가 죽은 후 그는 랭스로 떠나버렸다.

레안드르의 장례식이 끝난 후 마리벨은 말로 극단과 헤어져 파리로 왔다. 파리로 오기 전에 그녀는 먼저 앙제에 잔느를 고발했다. 그러나 그 고발이 순순히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한낱 천한 배우 따위가 다지르 후작 가문의 잔느를 고발한다는 것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그다음으로 마리벨이 찾아간 곳은 렌느에 있는 재판소였다. 거기서도 마리벨은 정신 병자 취급을 받아 재판소 문 앞에서 쫓겨났었다. 그러나 레안드르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던 마리벨이었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르 상과 샤르르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귀족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같았다. 그래서 마리벨은 마지막으로 파리로 갔다.

파리에는 고등법원이 있었다. 고등법원이라면 지방 재판소와는 격이 다르니 공평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이라고 마리벨은 기대했었다. 그러나 파리의 고등법원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법원의 서기는 귀족 모욕죄로 마리벨을 고발하겠다는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잔느의 죄를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귀족의 죄를 평민이 고발한다는 것은 잠꼬대에 불과했다.

마리벨은 절망하고 말았다. 이젠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등법원에서 쫓겨나 센 강을 거닐다가 그녀는 마침내 퐁 뇌프 위에서 센 강으로 뛰어들었다.

마리벨은 자기가 어떻게 살아나게 됐는지 통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살아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레안드르! 두고 보세요. 당신의 원수를 꼭 갚고 말겠어요. 이젠 절대로 강물에 뛰어드는 바보 짓은 하지 않겠어요.'

마리벨은 잔느의 거만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가슴을 향해 힘껏 찔렀던 칼, 그것이 연극용 칼이었다는 것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마리벨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잔느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만 들뿐 연극용 칼처럼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칼은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마리벨은 더욱 절망했던 것이다.

'그렇다! 코메디 프랑세즈 (Comédie Française)의 무대에서 잔느를 끌어내려야 한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레안드르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야!"

마리벨은 힘차게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행복스러워 보이는 한 쌍의 연인을 위해 서슴없이 벤치를 비워주었다.




며칠 째 콩테 극장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마리벨은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극장 지배인은 물론 문지기들조차도 마리벨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때마침 한 떼의 여배우들이 콩테 극장 정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리벨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 앞을 막아섰다.

"전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세요."

한 여배우가 마리벨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주었다.

"코메디 프랑세즈에 들어오려면 말이죠, 우선 센 강에 뛰어들어 머리 좀 식히고 나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아요."

다른 여배우들이 허리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센 강엔 며칠 전에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그다음엔 어떻게 하는 거죠?"

너무나도 진지한 마리벨의 태도를 보자 여배우들은 웃음을 뚝 그쳤다.

"얘! 이상한 여자야."

"그래, 기분 나쁜 여자야."

"어서 가자."

여배우들은 미친 사람을 다 봤다는 듯이 잰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마리벨은 멍하니 서서 여배우들의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다.

"마리벨이로군요."

마리벨이 뒤를 돌아보니 잔느가 어느 틈에 뒤에 있었다.

"잔느!"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하고 싶은가 보죠?"

"..."

"그럴 생각이라면 코메디 프랑세즈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소개장을 얻든가 혹은 엑스트라 모집에 응모를 하세요. 아니면 가끔 실시되는 오디션에 참가하여 시험을 치르든지요."

그렇게도 알고 싶었던 코메디 프랑세즈의 관문을 이토록 명쾌하게 잔느로부터 듣게 되리라곤 마리벨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난 언제나 정당한 대결을 원해요. 당신이 꼭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하기를 바라요."

밉살스럽기 짝이 없는 잔느였지만 언제나 당당하기만 한 그녀의 태도는 정말 부러웠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입단은 나의 꿈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그것은 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어요. 코메디 프랑세즈에 들어가서 기필코 당신을 꺾고 말겠어요. 잔느! 당신을 무대 위에서 끌어내리고 말겠어요."

"당신이 들어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어요. 하지만 내가 너무 늙기 전에 들어왔으면 좋겠군요."

잔느는 콩테 극장 안으로 사라지면서 그렇게 내뱉었다. 마리벨의 가슴에는 새로운 복수심이 용솟음쳤다.




출연이 없는 날엔 잔느는 극장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웬일이십니까, 잔느 양?"

"지배인, 다음 주에 공연할 작품은 어떤 것이죠?"

"《피가로의 결혼》입니다."

"변경할 수는 없나요?"

"변경이라뇨?"

"《동백장의 텔레즈》로 말이에요."

"그건 안됩니다. 잔느 양. 왕비께서 관람하실 예정이라서요. 그건 왕비께서 직접 청하신 작품이랍니다."

"안 되겠다는 얘기로군요. 그럼 전 당분간 무대에 서지 않겠어요. 《피가로의 결혼》은 연습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동백장의 텔레즈》라면 혹 몰라도..."

"그건 곤란해요. 왕비께선 잔느 양을 보러 오신다는 걸 잔느 양도 잘 아시잖습니까!"

잔느는 그대로 돌아서서 나오려고 했다.

"잠깐만! 할 수 없군요. 잔느 양의 뜻이 정 그렇다면 왕비님께 사정을 말씀드려서 레퍼토리를 바꿔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지배인 님."

잔느는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무표정하게 극장 로비에 가서 앉았다.

"레안드르의 추모 공연이 되는 셈인가?"

피에르가 빈정거렸다.

"피에르, 내 연극에 대해선 당신이 관계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레안드르의 추모 공연을 해 줄만큼 사랑했었다... 이 말씀이로군, 잔느!"

"난 다만 내 인생에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당신은 쓸데없이 내게 충성을 한답시고 내 약혼자의 목숨을 빼앗은 거라고요!"

왕비의 앞에서 상연되는 작품은 연극사에 길이 남겨지게 된다. 그러므로 작자인 레안드르와 더불어 《동백장의 텔레즈》도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잔느는 레안드르의 이름을 연극사에 길이 남겨 놓음으로써 그를 죽게 만든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퍼토리가 바뀌었다는 소식은 다른 배우들을 매우 슬프게 만들었다. 《동백장의 텔레즈》는 원래 말로 극단을 위해 쓰인 것이므로 등장인물의 수가 적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들은 다음 주의 연극에 참가할 수가 없게 된 셈이었다.

"너무했어! 사사로운 일로 콩테 극장의 공연 레퍼토리를 변경시키다니!"

"하는 수 없지 뭐. 잔느는 귀족 출신이니까 지배인도 그녀의 말에는 꼼짝 못 하잖아!"

"그녀의 눈밖에 나는 날에는 모가지가 달아나고 말걸."

"하지만 피에르도 한심해. 잔느에게 그렇게까지 냉대를 받으면서도..."

"앙제에서는 잔느에게 부채로 따귀까지 얻어맞았다던데."

"잔느가 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여자가 잔느밖에 없나 뭐!"

배우들이 그렇게 쑥덕거리는 소리는 피에르의 귀에도 들려왔다. 피에르는 가슴을 저며 오는 분노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잔느! 언제든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 그날이 바로 내가 너를 차 버리는 통쾌한 날이다!'




잔느가 '약혼자의 상' 중이라는 표시를 한 것은 머리에 맨 검은 띠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더욱 화려한 의상을 입고 오페라좌의 파티에 참석했으며 친구의 생일 파티에도 빠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러한 잔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잔느 양, 당신 약혼자가 죽은 것은 정말 안됐습니다. 그러나 우릴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이제 우리는 당신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으니까요."

그러나 여자들은 달랐다.

"상 중인 여자가 저게 무슨 꼴이람."

"분해 죽겠어. 내 약혼자 하고 마구 수작을 부리잖아."

"내 애인도 잔느에게 넋을 다 빼앗긴 것 같아."

"우리 그이도 그래."

그러나 잔느의 변명은 항상 그럴듯했다.

"이런 화려한 장소에라도 나오지 않는다면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달래겠어요."




오페라좌의 파티에서 돌아온 날 밤에 다지르 후작 부인은 드디어 잔느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잔느! 자중 좀 해라. 레안드르의 상 중인데 사교계에 출입하는 것이 뭐 대단한 자랑이나 되는 줄 아느냐?"

"어머니도 사교계에 출입을 좀 해보시죠. 아들을 잃으신 슬픔이 덜어질 텐데요."

"레안드르를 죽게 해 놓고 넌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있구나!"

"죄의식이라뇨? 레안드르를 죽인 건 바로 어머니예요.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들을 나와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했던 건 바로 어머니였으니까요. 평민의 자식을 귀족과 혼인시키려고 한 것부터가 무리였거든요."

잔느는 서슴없이 다지르 후작 부인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잔느! 너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하긴 너 자신을 귀족의 자식인 줄로 오해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너도 다지르 집안의 친딸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해!"

다지르 후작 부인의 말은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잔느에게는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말은 다지르 후작의 외동딸로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지내왔던 잔느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고도 남았다.

잔느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다지르 후작 부인은 더욱 신이 나서 마구 떠들어댔다.

"넌 나와 내 아들을 업신여기지만 네 어미는 나보다 더 천한 시골 여자였어. 그 시골 여자가 사생아인 널 데리고 이 다지르 가에 들어와서 후작 부인을 내쫓았지. 난 다만 네 어미가 했던 방법 그대로 네 어미를 내쫓았을 뿐이야."

잔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하더니 잔느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




잔느는 다지르 후작이 있는 서재의 문을 열었다.

"잔느! 웬일이냐?"

"아버님, 사실을 말씀해 주세요. 저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요."

다지르 후작은 갑작스러운 잔느의 질문에 당황했다.

"글쎄... 그 일에 대해선 나도 전혀 듣지 못했다."

듣지 못했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자기가 다지르 후작의 딸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원래 말이 없던 잔느였지만 자신의 뿌리를 알고 난 뒤부턴 더욱 말이 없어졌다. 사교계 출입도 완전히 끊다시피 했다. 다만 전보다 더욱 연극에만 온 정열을 쏟았다

레안드르를 위해 억지로 마련한 추모 공연에서 잔느는 다시 한번 파리의 연극광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녀의 연기는 지금까지의 것과는 또 달랐다. 너무도 심각하고 정열적인 연기를 보자, 관객들은 오히려 오싹하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내가 다지르 후작의 친딸이 아니라 하자. 도대체 그게 어떻단 말이야! 귀족이나 다지르 가문 같은 건 내가 내 손으로 만든 것도 내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대만은 내가 몇 년 동안이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 손에 넣은 영광의 자리다. 이 영광의 자리만은 아무에게도 내주지 않을 것이다!'

관객들은 잔느의 연기에 환성을 질렀다.

"잘한다, 잔느!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왕!"

'그래, 난 여왕이다. 덤비려면 누구든 덤벼라. 이 여왕의 자리는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잔느는 항상 울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눈물을 본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항상 축축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로소 잔느에게 인생의 슬픔이 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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