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19

듀가 존 선생 2/2

by 안녕
Épisode 17.


그해 가을이 되자 콩테 극장 게시판에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엑스트라 모집 광고가 나붙었다. 그날만을 학수고대하던 마리벨은 그 게시판을 보자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나 된 것처럼 기뻐했다.

마리벨이 일하고 있던 세탁소의 직원들도 모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사람은 같은 세탁소에 근무하며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도리느였다.

"마리벨,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가 된 뒤에도 이 도리느를 잊지 말아 줘. 난 내 친구가 마리벨이라고 자랑하고 다닐 테니까 날 모른다고 잡아떼거나 하지 말란 말이야."

오디션 하는 날 아침에 마리벨은 누구보다도 먼저 콩테 극장으로 나가 기다렸다. 비록 엑스트라이긴 하지만 그것에 뽑히기만 해도 마리벨에겐 큰 수확이었다. 역대의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 중에는 엑스트라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걸 마리벨은 잘 알고 있었다.

한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던 엑스트라 지망생들은 정각이 되었을 때에는 극장 앞 광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소위 오디션이라는 것이 순 엉터리였다. 심사위원은 소개장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을 구분해 놓더니 소개장을 가진 사람 중에서 여섯 명 만을 합격시키고는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 버렸다.

불과 5분 사이에 오디션은 끝나버렸다. 몇 달 동안 그 기회만을 기다리며 힘든 세탁소 노동을 참고 견뎌온 마리벨에게는 정말 맥 빠지는 일이었다.

넓은 파리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세탁소 직원들밖에 없는 마리벨이 유력한 사람의 소개장을 어떻게 얻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마리벨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름 높은 귀족의 소개장을 얻어 다음 기회에는 꼭 합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리벨은 세탁소 일이 일찍 끝나던 날, 어느 귀족의 저택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그 집에서 만찬이 있을 것 같아서 저명한 귀족을 붙잡고 사인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사인 좀 해달라는 마리벨을 동냥을 얻으려는 거지쯤으로 아는지 대꾸도 않고 마차를 타고 달아나기가 일쑤였다.

마침내 젊은 귀족이 혼자 저택에서 나왔다. 마리벨은 용기를 내서 그 귀족에게 다가갔다.

"어머나!"

사인받을 종이를 내밀다가 마리벨은 그 젊은이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 물러섰다. 너무나도 로버트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데 그 젊은이도 마리벨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으니 로버트가 분명하다고 마리벨은 생각했다. 그래서 사인이고 뭐고 그냥 달아나려는데 그 청년은 마리벨의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놔주세요, 로버트!"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손목을 쥔 채 마리벨의 얼굴을 살폈다.

"너는 얼마 전에 센 강에 뛰어들었던 바로 그 여자로구나?"

마리벨이 지세히 쳐다보니 청년은 로버트의 용모를 쏙 빼어닮긴 했지만 로버트는 아니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겠나?"

"누구신지요?"

"하긴... 당연하지! 센 강에서 건져냈을 때 넌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까."

그제야 마리벨은 그가 자기를 센 강에서 건져 살려준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나, 그래요? 그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뭐 별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런데 뭘 하러 이런 덴 왔지?"

상대가 누구든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리벨은 종이를 서슴없이 그에게 내밀었다.

"사인 좀 해주세요. 이왕 절 살려주셨으니 한 번만 더 살려주시는 셈 치고...."

"이건 어디다 쓸려고?"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하려고요. 하지만 소개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청년은 한동안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배우 지망생인가?"

"네."

"실망했는데... 난 배우를 제일 싫어해."

줄리앙은 하인을 시켜 말을 가져오게 했다.

"배우를 경멸하지 말아요. 훌륭한 인간만이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다고요."

줄리앙은 말 잔등에 올라탔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인을 받아 내고 그걸 날조해서 소개장을 만들어 출세를 꾀하는 게 훌륭한 사람들이 하는 짓인가?"

줄리앙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한 번 마리벨을 내려다보고는 말을 달려 저택 앞을 떠났다.

한동안 마리벨은 줄리앙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줄리앙! 줄리앙!"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귀족이 저택의 문을 나섰다.

"아드님은 방금 말을 타고 떠나셨습니다."

"저런! 아비를 놔두고 혼자 가버리다니."

귀족은 마차에 오르려고 했다. 마리벨은 그 귀족의 앞으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사인 좀 해주세요. 전 선생님을 오래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호오, 나를? 나도 전혀 인기가 없진 않은 모양이군."

귀족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리벨이 받쳐준 책 위에 종이를 놓고 선 채로 사인을 했다.

"어때, 아가씨! 우리 집에 가서 간단히..."

마리벨은 사인을 한 종이를 나꿔채 가지고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마리벨은 귀족이 사인한 종이로 소개장을 만들어 가지고 콩테 극장으로 달려갔다. 소개장을 보자 지배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소개장... 가짜는 아니겠지?"

"그럼요, 직접 사인받은 소개장인 걸요."

지배인은 마리벨의 소개장을 가지고 단장에게로 갔다.

"뭐야! 이건 다르 달랑 공작의 소개장 아냐?"

"그렇습니다."

"가져온 사람이 누군가?"

"그게 말이죠, 기가 막혀서! 몇 번이나 소개장 없이 오길래 돌려보냈더니 며칠 전에는 그 세탁소 주인의 소개장을 가져왔던 여자예요."

"공작 각하가 아무리 여자를 밝힌다지만 이런 풋내기한테까지..."

"가짜가 아닐까요?"

"아냐, 이건 분명히 다르 달랑 공작의 사인이야."

"그럼 어떡할까요? 입단시켜야 할까요?"

"다르 달랑 공작이 추천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나 그전에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단장은 마리벨을 데리고 다르 달랑 공작의 저택으로 갔다.

"여기가 어디죠?"

"널 추천한 다르 달랑 공작 댁이다."

마리벨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공작이 사인을 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 쓴 '추천한다'는 글은 자신이 써넣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청년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소개장을 가져온 사람이 그대인가?"

청년이 매섭게 노려보는 통에 마리벨은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에잇, 더러운 것!"

청년은 마리벨의 두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어서 물러가! 여긴 너 같은 더러운 여자가 올 곳이 못 돼!"

청년이 마리벨을 마구 두들겨 팰 것처럼 노여워하며 소리 질렀다.

"프랑소와!"

그때 응접실 문을 열고 뚱뚱한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이 나타났다.

"무슨 짓이냐, 프랑소와!"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이 나타나는 덕분에 마리벨은 위기를 넘길 수가 있었다.

"미안해요. 지금 공작께선 외출 중이라서요. 대신 내가 용건을 들어 드리죠. 내 아들들은 배우에 대해선 신경이 무척 예민하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단장은 의미 있는 웃음을 던졌다. 다르 달랑 공작은 젊을 때부터 여배우들과 스캔들을 일으켜 공작 부인의 속을 무던히도 썩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들도 배우를 보기만 해도 모두 때려죽일 듯이 눈을 부릅떴다.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마리벨의 추천서를 펼쳐보았다.

"분명히 공작님의 사인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희들로선 이런 소녀가..."

"이걸 어떻게 구했지?"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이 조용하게 물었다.

"저... 그분이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공작님 하고는 어떤 관계지?"

이렇게 묻는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코메디 프랑세즈에 들어가고 싶어서 공작님께 사인을 부탁했더니 들어주신 것뿐입니다. 추천하는 내용은 제가 직접 적었습니다."

그제야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랬었군요.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프랑소와, 이 분에게 사과드려요. 프랑소와가 아가씨를 공작님의 애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에요. 공작님의 몹쓸 버릇이 또 시작된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공작님은 유명한 바람둥이였거든요."

"미안합니다, 아가씨."

프랑소와는 마지못해 사과했다.

"아닙니다. 잘못은 제 쪽에 있었으니까요."

마리벨도 진심으로 사과했다.

"남이 호의로 해 준 사인을 악용하다니... 악질적인 짓입니다."

단장은 마리벨을 혼내 줄 작정이었다.

"아니에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얼마나 코메디 프랑세즈에 들어가고 싶었으면 그랬겠어요. 그것보다는 실력은 보지도 않고 남의 소개장만 가지고 단원을 뽑는 당신네들한테 문제가 있다고 봐요. 아는 귀족이 없는 사람은 이 아가씨처럼 할 수밖에 없잖아요."

단장은 불만스러웠지만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는 멋쩍게 일어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아가씨 이름은?"

"마리벨입니다."

"나이는?"

"열다섯 살입니다."

"그래 연극 공부는 얼마나 했죠?"

"전혀..."

마리벨은 말로 극단에서의 경력을 얘기할까 생각했으나 인정해 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만두었다.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친구 중에 연극학교를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먼저 기초부터 쌓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전..."

"내가 그분에게 소개해 주겠어요. 내 친구 듀가 존 씨의 학교는 뮈느 프레지트 거리에 있어요."

너무나 기뻐서 마리벨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피리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세탁소의 아가씨들밖에 없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후원자가 생긴 셈이었다. 너무나도 큰 행운이었다.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즉석에서 추천장을 써주었다.

"결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제가 무대에 서게 되는 날 반드시 초청을 하겠어요."

"고마워요. 기대를 갖고 그날을 기다리겠어요."




보물단지를 안듯 마리벨은 소중하게 추천장을 들고 다르 달랑 공작 댁을 나오고 있었다.

"이봐! 마리벨이라고 했지?"

프랑소와가 마리벨의 뒤를 따라 나왔다.

"배우가 되더라도 초청장 같은 건 보낼 필요 없어. 우리 집안은 배우를 제일 싫어해.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란 말이야."

마리벨은 너무도 서글펐다. 뜻하지 않은 행운을 잡아 희망에 부풀어 있는 마리벨에게 프랑소와의 그 말은 저주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배우를 싫어해!'

마리벨은 프랑소와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마리벨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배우 따윈 쓰레기다, 이 말이지!'

마리벨은 소중한 추천장을 쭉 찢어 센 강에 던져버렸다.

'좋아요, 누구의 추천도 받지 않겠어요. 나 혼자 힘으로 해 보겠다고요!'




어느새 마리벨은 뮈느 프레지트 거리를 걷고 있었다. 듀가 존 연극학교는 거리의 남쪽 끝 푸른 숲 속에 있었다.

"이 학교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저도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물론이오, 아가씨."

흰 머리카락에 흰 콧수염을 기른 신사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렇지만 전 추천해 줄 사람도 없어요. 그래도 되나요?"

"되고 말고. 추천장 같은 건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내놓는 것이지."

"그렇담 어떤 식으로 학생을 뽑죠?"

"해마다 봄, 가을에 실시하는 두 번의 시험이 있는데 그 시험에 합격하면 돼요. 이번 시험은 10월 5일에 있으니 지금 신청해 두는 게 좋겠군요."

신사는 친절하게도 접수처가 있는 건물을 알려주고는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참 친절한 분이셔. 모습도 멋지고!'

마리벨은 신청서에 자기의 이름, 나이 등을 자세히 적고는 사인을 했다.




10월 5일 마리벨은 듀가 존 연극학교로 갔다. 37명의 지원자 중에서 1차로 8명을 뽑고 다시 그중에서 3명을 뽑아 입학시킨다는 것이었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입단에 못지않게 힘든 일이었다.

시험장의 제일 상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지난번에 마리벨이 학교 입구에서 만났던 흰 콧수염의 신사였다.

'저분은 누구지?'

옆에 있던 소녀가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경멸의 눈초리로 마리벨을 바라보았다.

"듀가 존 선생님이야.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고."

마리벨은 새삼스럽게 흰 콧수염의 신사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에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후 이 학교를 세웠고 현재 인기 상승 중인 조셉 다르마를 길러낸 분이었다.

37명의 응시자들은 차례로 무대에 나가 시험관이 건네 준 대본에 따라 멋지게 연기하고는 들어갔다. 모두들 놀라울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 특히 마리벨의 바로 앞 번호인 모라라는 소녀가 그중 돋보였다.

모라는 지금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활약 중인 여배우 베아트리스의 딸이었고 듀가 존 선생의 조카이기도 했다. 어머니를 닮아 빼어난 미인이었고 연기력도 남달리 뛰어났다. 누가 보아도 모라는 최종 합격이 분명했다.

드디어 마리벨의 차례가 되었다. 그렇게 연기력이 뛰어난 모라의 바로 다음 순서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시험관으로부터 대본을 받아 들자마자 마리벨은 숨이 꽉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기가 할 역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귀족인지 하인인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 어서 시작해야지."

그러나 마리벨은 겨우 그것이 여자의 대사라는 걸 알았을 뿐 아무리 훑어보아도 어떻게 감정을 잡아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마리벨은 용감하게 시험관 앞으로 다가갔다.

"저... 이건 몇 살쯤 된 어떤 계층의 여자인가요?"

시험관들은 기가 막히다는 듯 크게 눈을 떴다.

"이런 것을 여쭤 보면 안 되나요?"

"이봐요, 아가씨! 이 학교를 지망했다면 당연히 코메디 프랑세즈가 목표 아닌가? 그런데 그 대사를 보고도 코메디 프랑세즈의 단골 레퍼토리인 몰리에르의 《외로운 손님》 중 한 구절이라는 걸 모른단 말이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시험을 치르겠다고. 나 원 참!"

마리벨은 얼굴이 발갛게 되어가지고 쩔쩔맸다. 시험관이 몰리에르의 《외로운 손님》이라고 일러 주었지만 마리벨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몰리에르의 작품은 단 한 번도 읽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듀가 존이 부드러운 얼굴로 마리벨을 불렀다.

"젊은 미인으로서 훌륭한 가문의 여성이지. 자, 최선을 다해서 연기해 봐요."

그 한마디가 마리벨에게 꼭 필요했던 말이었다. 마리벨은 말로 극단의 무대에서처럼 자기가 이해한 대로의 연기를 거침없이 해냈다.

발표 결과 여덟 명의 1차 합격자 중에 마리벨의 이름은 다섯 번째로 불려졌다.

떨어진 사람들 중에는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많았다.

"납득할 수가 없어요."

"그래요, 연습을 쌓은 우리들은 떨어지고, 몰리에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풋내기가 합격하다니...! 그래도 유명한 듀가 존 연극학교라고 할 수 있나요?"

듀가 존은 천천히 일어나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분들도 물론 잘했소. 난 여러분들이 결코 마리벨 양보다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소. 다만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맡은 역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했고, 목소리와 연기력에서 장래성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뽑은 것뿐이오."




1차 합격자들은 이튿날 최종 시험에 필요한 대본을 한 권씩 나누어 받았다. 대본을 소중히 받아 들고 돌아오다가 마리벨은 비로소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매일 빵 한 조각과 물만으로 벌써 일주일째 견뎌 왔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급여일까지는 나흘이 남았다. 그때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일 시험을 치를 때까지는 절대로 쓰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리벨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내일 시험을 치를 작품은 역시 몰리에르의 《병은 기분에 따라》였다. 심하게 배가 고팠지만 마리벨은 물을 들이켜 배를 채우고는 밤을 새워 혼자 연습했다.




아침이 되자 뱃속이 꾸르륵거리면서 심한 설사가 계속되었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주인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걸 먹어, 마리벨! 오늘이 시험이라면서?"

마리벨은 너무도 고마워서 감사의 말도 잇지 못했다. 뒤이어 도리느도 찾아왔다. 마리벨과 마찬가지로 지독히도 가난한 그녀가 어디서 구했는지 달걀 세 개를 마리벨 앞에 내밀었다.

"마리벨, 이걸 먹고 힘을 내! 오늘 꼭 합격해야 해."

마리벨은 목이 메어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것 때문이로군요, 레안드르! 당신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귀족이 되지 않으려고 했던 까닭이...!'

그것은 귀족들로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인간미였다. 자기는 굶주려 가면서까지 친구의 시험을 위해 달걀을 들고 나타난 도리느. 그런 참다운 우정과 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끝끝내 레안드르는 귀족이 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레안드르, 꼭 합격하고 말겠어요.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에 서고 말겠어요. 잔느를 무대 아래로 끌어내려 당신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요.'




최종 시험에는 모라의 어머니 베아트리스도 시험관으로 나왔다. 시험은 1막 4장으로서 안제릭이라는 소녀가 하녀 트와넷과 자기의 애인에 관해서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1번 롤랑부터 차례로 시험관 앞으로 나갔다. 별로 흠잡을 곳이 없는 무난한 연기였다.

다음은 모라, 그녀는 차분히 연기하다가 점차로 감정을 고조시켜 단숨에 폭발시키는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감탄할 만한 연기였다. 타고난 미모와 몸에 밴 고상한 기품은 잔느의 어린 시절을 보여 주는 듯했다.

마리벨도 한때 필사적으로 잔느의 흉내를 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마리벨은 문득 그때 레안드르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 멍청이! 남의 흉내를 내다니! 남의 흉내를 내는 건 배우가 아니야, 마리벨! 너의 무기는 그 얼굴 표정이야. 네 얼굴만큼 잘 변하는 얼굴도 없어. 하나의 얼굴로 여러 사람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 때 관객들은 싫증을 내지 않는 거야.'

'아, 레안드르! 당신의 얼굴도 나 못지않게 잘 변했었죠.'

"마리벨!"

최종 시험에서도 마리벨은 모라의 다음 차례였다.

마리벨은 무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시험관 한 사람이 신경질을 부렸다.

"이봐! 한숨만 쉬지 말고 어서 시작해."

"전 이미 시작한 거예요."

마리벨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봐요, 트와넷!"

"네, 무슨 말씀이세요?"

마리벨은 우울한 표정으로 맥없이 물었다

"내가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하는지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

"알고 있다 뿐인가요! 저... 도련님들 얘기 아니에요?"

마리벨은 금세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다면 어째서 그 얘길 꺼내지 않는 거죠?"

"미안해요... 전..."

마리벨은 다시 수줍은 소녀의 표정을 지었다.

"아! 그분의 열렬한 사랑의 말씀, 부드러운 몸가짐, 트와넷! 그분에게 내가 만약 속는다면..."

이번엔 마리벨은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한평생 남자를 믿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 나서 마리벨은 다시 본래의 수줍은 소녀가 되었다.

시험관들은 넋이 빠져 멍하니 마리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이제 다 끝났는데요."

그렇게 해서 여덟 명의 응시자가 차례로 무대에 섰다가 내려갔다.

심사는 별실에서 따로 진행되었다.

"우선 롤랑 양을 택하고 싶소."

"찬성입니다."

듀가 존 선생의 말에 베아트리스와 다른 시험관들이 모두 찬성의 뜻을 표했다

"다음은 내 조카라는 이유를 떠나서 모라 양을 택했소."

"찬성입니다, 물론."

모라의 합격도 만장일치였다.

이번에는 베아트리스가 말했다.

"듀가 존 선생님, 나머지 한 사람은 남자로 뽑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이오. 그래서 나도 6번의 아르망 군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성합니다!"

아르망 군도 무난히 합격했다. 세 명의 합격자를 뽑는 데에선 한 사람의 반대도 없었으므로 심사는 간단히 끝난 셈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일어서려고 할 때,

"잠깐!"

듀가 존이 손짓을 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오."

심사위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듀가 존을 쳐다봤다.

"이상 세 명의 합격자 외에 난 5번의 마리벨 양을 합격시키고 싶소"

"반대합니다."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심사위원 모두가 마리벨의 합격에는 반대를 부르짖고 나섰다.

"마리벨 양은 연기의 기초도 대사법도 모르고 표정도 카멜레온처럼 안정감 없이 수시로 변합니다."

베아트리스가 마리벨의 결점을 지적하자 다른 심사위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바로 그 점을 택하고 싶은 거요. 바꾸어 말하면 마리벨 양은 아직 어떤 색깔에도 물들지 않은 백지상태라는 거지요. 그리고 나는 마리벨 양에게서 천부적인 재능을 엿보았소. 모라 양은 잔느의 영향을 무척 많이 받은 모양이니 아마 모라는 잔느를 잇는 배우가 될 것이오. 롤랑 양도 마찬가지지."

듀가 존은 물을 한잔 따라 마시고는 이미 결심했다는 듯 일어섰다.

"난 이제 지금까지의 연극의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새롭고 자유로운 배우를 키우고 싶소."

"무슨 뜻이죠?"

"오늘날의 연극은 고전의 아름다움을 너무 추구한 나머지 자연을 잊고 있습니다. 마리벨 양에게는 자연의 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는 뜻이오."

듀가 존은 잠시 말을 끊더니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코메디 프랑세즈에서는 격정적인 표현을 억제하고 세련미와 우아한 몸짓만을 요구하고 있소. 잔느 드 모로가 바로 그런 연극의 대표적인 존재지요. 물론 난 그것이 나쁘다고만 생각지는 않소. 그러나 한 가지만 최선으로 인정하고 계속해서 추구한다면 연극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모두들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무대는 그 자체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무대 위에서 자연 그대로 울고 웃고 외치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듀가 존 선생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외침을 따르시겠다는 건가요?"

베아트리스가 격앙된 어조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렇소! 자연스러운 연기! 자유스러운 표현!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새로운 연극이오!"

그 이상은 그 누구도 듀가 존의 결정에 대해 반대할 수가 없었다. 모라, 롤랑, 아르망에 이어 마리벨은 특별 연기생으로 합격이 되었다.

'합격했어요, 레안드르! 코메디 프랑세즈에 오르는 첫 번째 층계에 올라선 셈이에요. 이제 한 계단씩 실수 없이 내딛겠어요. 그래서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가 잔느를 끌어내리고야 말겠어요.'

듀가 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마리벨은 세탁소를 향해 내달렸다.

'어쩌면 이 영광은 그들의 것일지도 몰라. 그 수프와 달걀이 아니었다면 난 무대 위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을 거야.'

세탁소에서 일하는 가난한 직원들은 마리벨의 합격소식을 듣고 입을 모아 만세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 준 사람은 도리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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