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25

프랑스 만세 2/2

by 안녕
Épisode 23.


며칠 후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다르 달랑 공작 댁을 찾아왔다.

"저는 마리벨 님의 팬입니다. 마리벨 님이 부상을 당했다지요?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시중을 들까 해서요..."

"시중이라고요?"

마리벨은 자기의 부상이 가짜였으므로 시중을 들 여자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릴리아나라는 그 여자는 마리벨이 말을 듣지 않자 공작 부인에게 매달렸다.

"공작 부인 마님, 저는 드씨즈에 있을 때 공작 부인의 사촌이신 마리 안느 로비노 님의 하녀로 있었습니다."

"호오... 그래요?"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너무도 반가웠다. 사촌 동생인 마리 안느 로비노 즉 라벤더의 꽃님은 공작 부인이 가장 좋아하는 동생으로서 항상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마리 안느 로비노 님은 정말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분이셨어요. 늘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의 얘기를 하곤 하셨죠. 그런데 두 번째 아기를 낳은 뒤 건강이 나빠져서 세상을 떠나시고 몇 년 후에는 루이 장 대위님마저... 그리고 두 자제분도 유행병으로... 그래서 생 쥐스트 가문은 가계가 끊기게 된 겁니다."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오랜만에 사촌 동생의 얘기를 들으며 감회에 젖었다. 어린 올리비에는 생 쥐스트 부인을 매우 따랐었다. 그래서 생 쥐스트 부인이 여자 아기를 낳으면 자기가 커서 장가를 가겠노라 얘기하곤 했었다.

"좋아요, 당신을 하녀로 쓰겠어요."

그러나 릴리아나는 잔느와 군인들이 보낸 스파이였다. 마리벨의 꾀병의 증거를 잡아 체포하라는 밀명을 받고 온 여자였다.

릴리아나가 스파이라는 것은 그녀가 이 집에 들어온 뒤에 세 번씩이나 군인들의 가택 수색을 받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럴 때마다 삼 형제의 기지로 마리벨은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형제들은 그녀를 내쫓지는 못 했다. 어머니가 릴리아나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지식욕이 왕성한 줄리앙은 사관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서재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는 군인이 될 작정이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저서에 흠뻑 빠져있었다.

어느 날 줄리앙은 몰래 읽던 책을 공작 부인에게 들켰다. 그건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책 보다 더 위험한, 출판되자마자 정부에 의해서 판매가 금지된 《바티칸의 오르강》이라는 책이었다.

"줄리앙! 어쩌자고 네가 이런 책을 읽느냐?"

아들을 훈계하다가 부인은 문득 그 책의 표지를 보았다. 그 책의 저자는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드 생 쥐스트로 되어있었다. 공작 부인은 너무도 놀라웠다. 그것은 사촌 동생인 마리 안느 로비노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자기가 프로렐이란 이름을 지어 덧붙여주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줄리앙! 이건 로비노의 아들 이름이 아니냐!"

줄리앙도 깜짝 놀랐다.

"어머니! 그러니까 이 책을 쓴 사람이 마리 안느 로비노의 아들이란 말씀인가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루이나 앙투안이라는 이름 하나만 따서 부른다면 그건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드 생 쥐스트란 긴 이름이 그렇게 조카의 이름과 꼭 들어맞는 건 우연한 일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그럴 리가 없어요. 생 쥐스트 부인의 아이들은 확실히 죽었습니다. 제가 봤다니까요!"

릴리아나는 두 오누이의 죽음을 보았다고 고집했다.

"어쨌든 한번 조사해 봤으면 좋겠다. 혹 다른 사람이 로비노의 아들 이름을 써먹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 마리 안느 로비노의 아이들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어디엔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던 건 올리비에였다. 그는 아름다운 마리 안느 로비노의 추억을 너무나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 마리벨이란 소녀를 로비노의 딸로 확신하고 있었다.

"줄리앙! 네가 니에브르 주의 드씨즈로 가서 확인해 보아라."

올리비에는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군의 지휘관이라는 책임 때문에 파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올리비에는 줄리앙에게 그 일을 맡겼다.

"하지만 지명 수배자 생 쥐스트와 우리 가문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곤란해. 드씨즈에 갈 만한 적당한 핑계가 있어야겠는데..."

"제가 갔다 오겠어요. 저는 몸이 약하니까 휴양차 간다고 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잖아요?"

프랑소와가 나섰지만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허락할 수가 없었다. 시국도 그러려니와 병약한 프랑소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마리벨의 부상 때문에 휴양을 간다고 하면 어떨까요? 제가 호위하겠어요. 스파이를 피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죠."

그렇게 해서 줄리앙과 마리벨이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다.




릴리아나는 그 오누이가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른들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오누이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제발 죽이지는 말아요. 절대로 집에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우릴 죽이지 말아 줘요.'

어린 앙투안과 마리벨이 외치던 말이었다.

'마리벨?'

그제야 릴리아나는 마리벨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지금 한 지붕 밑에 살고 있는 배우 이름도 마리벨이 아닌가?

'마리벨?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그러나 십여 년 전에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린 마리벨의 모습이 지금의 마리벨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튿날 줄리앙과 마리벨은 마차를 타고 드씨즈로 향했다. 오랜만에 달리는 시골길은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했다. 뒤숭숭한 파리와는 달리 시골엔 여전히 냇물이 흐르고 풀벌레가 울었다.

다음날 아침 마차는 드씨즈에 도착했다. 줄리앙은 마을 입구에서 한 농부를 만나 안내를 부탁했다.

"저 쪽이 생 쥐스트 저택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꽤 오래됐죠."

언덕 아래로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회색빛 성이 보였다.

"생 쥐스트 님은 성실했고 부인도 얼굴처럼 마음씨가 고와서 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었죠. 그런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하나씩 낳고는 부인은 세상을 떠났답니다. 얼마 후 하녀가 생 쥐스트 님의 부인이 되었지요. 그녀는 들어올 때부터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딸도 실은 생 쥐스트 님의 딸이었다는 거예요. 생 쥐스트 님은 전쟁에 나가서 돌아가시고 오누이도 웬일인지 곧 죽었다며 없어져 버렸지요. 후처가 되었던 하녀는 딸과 함께 생 쥐스트 님의 재산을 처분하여 이 곳을 떠났답니다."

'그렇다면 생 쥐스트 집안의 자식은 그 하녀의 딸 하나뿐이란 말인가?'

그 사람의 말로는 한 달 전쯤에 저택 주위를 서성이는 젊은 남자 하나가 있었다고 했다. 금발에다가 여자처럼 예쁜 얼굴이었는데 지명수배 중인 생 쥐스트의 인상과 비슷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단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 쥐스트 본인을 잡아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자백을 듣지 않는 한은 알 수 없었다.




농부가 돌아간 후 마리벨과 줄리앙은 저택이 있다는 방향을 항해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으니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언덕이 나왔다.

"앙투안 오빠 생각이 나요, 이런 아름다운 동산에서였어요."

마리벨은 눈을 감고 꿈을 꾸듯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마리벨이 눈을 뜨며 건너편 숲을 가리켰다.

"저 앞 떡갈나무 숲 속에 나와 오빠의 비밀 장소가 있었어요."

줄리앙은 마리벨의 손에 이끌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있어요! 정말 있어요!"

거기에는 커다란 고목나무의 썩은 등걸이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 둘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썩은 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이 숲이 끝나는 곳에 무너진 성터가 있고..."

신들린 듯한 마리벨을 따라 숲을 자나니 정말 무너진 성터가 나왔다.

"그리고 이 성터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우리 집이 보였어요."

모든 것이 마리벨이 말한 그대로였다. 무너진 성터의 벽을 조심조심 발로 딛고 올라서자 숲 너머로 멀리 생 쥐스트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벨! 그러니까 네가..."

줄리앙의 말은 듣지도 않고 마리벨은 오래된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줄리앙도 마리벨을 뒤따랐다.

문은 열고 먼지가 잔뜩 쌓인 홀을 가로질러 마리벨은 익숙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기가 지하실 입구고요."

그때 낡은 벽이 뻐걱거리더니 쾅하는 소리를 냈다. 엉겁결에 두 사람은 부둥켜안았다,

"누구야!"

먼지가 쌓인 액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일곱 살쯤 된 소년과 두 살쯤 된 소녀가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이었다.

"이거예요. 이것이 앙투안 오빠고 이건 바로 저라고요!"

마리벨은 넓은 홀을 가로질러 갔다.

"여기가 살롱이고 오른쪽은 주방이었어요. 이쪽은 아버지의 서재... 저 위에 내 방이 있고 그 옆이 오빠의 방..."

마리벨의 이야기는 한 군데도 틀리는 곳이 없었다.

"이쪽에서도 지하실로 통할 수 있어요. 지하실엔 오빠와 나만의 비밀의 방이 있었죠."

두 사람은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이상하게도 지하실 계단에만은 거미줄이 쳐져 있지 않았다.

"어른들한테 야단 맞거나 하면 오빠와 내가 단 둘이 숨던 방! 아!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아아! 모두가 옛날 그대로예요!"

이제 마리벨이 마리 안느 로비노의 딸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지하실 방 한가운데에는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다른 곳과는 달리 깨끗이 닦여져 있었다. 최근에 불을 켠 듯한 촛대도 놓여있었다.

"이것 봐, 마리벨! 이건 모두 너에 관한 기사야!"

책상 서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어 줄리앙이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신문지를 오려 붙인 스크랩 북이었는데 마리벨이 코메디 프랑세즈에 데뷔한 기사와 그녀의 연기에 대한 비평 기사들이었다.

다른 서랍을 열어보니 몇 권의 노트가 나왔다. 그것은 줄리앙이 자기 집 서재에서 몰래 꺼내 읽던 생 쥐스트의 서적 초고였다.

"그러니까 마리벨, 네 오빤 영국에서 헤어진 뒤 이곳으로 돌아왔던 거야. 생 쥐스트는 이 지하실에 들어박혀 책을 썼던 거고!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드 생 쥐스트가 바로 네 오빠야!"

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노트의 마지막에 이런 글이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활약 중인 사랑하는 내 동생 마리벨에게 바친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믿어야만 했다. 그렇게 다정했던 오빠가 불온서적을 썼기 때문에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말로 극단에서 헤어진 그 프로렐이란 청년이 바로 오빠 생 쥐스트였던 것이다.

"우선 파리로 돌아가자! 이렇게 되면 생 쥐스트를 찾는 일이 더 급해."




드씨즈에 다녀온 며칠 사이에 파리의 정세는 완전히 변해있었다. 6월 20일 국왕은 삼부 회의장을 폐쇄하고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했다. 151명의 신부와 47명의 귀족이 제3 신분에 합류해서 국민의회 측은 기세 등등하게 국왕에게 대항하는 중이었다.

"어머니! 마리벨은 마리 안느 로비노의 딸이었어요."

다르 달랑 공작부인은 처음에 줄리앙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녀였던 릴리아나가 직접 두 아이가 죽은 것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줄리앙이 내놓은 오누이의 그림을 보자 그제야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마리벨을 껴안았다.

'마리벨이 생 쥐스트 가문의 딸이라면 어째서 릴리아나는 아이들이 죽었다고 말하는가? 생 쥐스트의 후처였던 하녀가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아이들을 버렸던 것인가? 그렇다면 릴리아나는 그 후처의 스파이란 말인가?'

"마리벨! 네가 내 사촌 로비노의 딸이라니... 그런 걸 나는 여태껏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구나."

다르 달랑 공작부인은 자기의 감정이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없이 마리벨을 껴안고 울고만 있었다.

"이제 생 쥐스트 군을 찾아야 합니다. 그가 위험해요!"




마리벨은 이튿날부터 콩테 극장에 나갔다. 그때까지 마리벨을 잡으려고 벼르던 군인들은 크게 실망했다. 마리벨은 《귀족 만세》 출연을 계속 거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리벨을 체포해서 왕비 앞에 충성심을 보일 셈이었는데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벨에게는 따로 속셈이 있었다. 앙투안이 마리벨을 찾기 위해 극장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인들이 콩테 극장 주위를 전보다 몇 배나 더 엄하게 경계를 하는 것이 이상했다.

"수배자는 스물두 살의 금발의 미남이다. 입장객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라."

지휘자가 말하는 뜻으로 보아 군인들도 앙투안이 이 극장에 나타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리벨과 앙투안 생 쥐스트가 오누이 사이라는 걸 알고 있단 말인가? 릴리아나가 그 사실을 당국에 밀고한 것을 줄리앙이 알 리가 없었다.

"마리벨! 누군가가 널 찾고 있어! 푸른 눈에 금발의 청년이야!"

롤랑의 말에 마리벨은 그가 앙투안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분장실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대신 이리저리 날뛰는 군인들의 구두 소리만 요란했다.

"생 쥐스트가 방금 나타났었다! 지명수배자 생 쥐스트를 잡아라!"

앙투안이 정말 나타난 모양이었다. 마리벨이 나오기를 분장실 앞에서 기다리다가 군인들에게 먼저 발각되어 그냥 달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국립 극장이 아무리 넓다 해도 달아나 데는 없었다.

마리벨은 줄리앙의 부스로 곧장 달려갔다.

"줄리앙! 앙투안 오빠가 나타났어요. 지금 이 극장 안에서 군인들에게 쫓기고 있을 거예요. 도와줘요!"

마리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투안이 헐레벌떡 줄리앙의 부스로 숨어들었다. 줄리앙은 얼른 문을 잠갔다.

"마리벨!"

"앙투안 오빠!"

오누이가 껴안고 눈물을 흘릴 사이도 없이 뒤따라 온 군인들이 잠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난 다르 달랑 공작의 아들 줄리앙이오. 생 쥐스트 집안과는 인척관계로 마리벨을 맡고 있는 중이오. 나중에 연락 주시오."

앙투안이 아슬아슬하게 난간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줄리앙은 문을 열어주었다.

"줄리앙 님! 왜 범인을 못 잡게 방해합니까?"

"난 범인이 누군지 모르오. 연극을 구경하러 왔을 뿐이오."

생 쥐스트는 다시 무대 뒤 분장실 쪽으로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독 안에 든 쥐다. 막다른 곳이야. 자! 어서 덮쳐라!"

군인들이 범인이 들어갔으리라 생각하고 열었던 방은 잔느의 분장실이었다.

"아! 잔느 님, 죄송합니다!"

잔느는 마침 평상복을 벗고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이 방은 잔느 님의 방이다! 다른 방을 뒤져라!"

군인들이 돌아가자 앙투안이 거울 뒤에서 나왔다.

"잔느! 그대의 도움을 받게 되다니..."

잔느는 말없이 자기의 옷을 건네주었다. 그 옷으로 갈아입은 앙투안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당신은?"

"이름을 밝힐 사람이 못 되오."

"좋아요, 생명의 은인에게조차 정체를 밝힐 수 없을 만큼 중죄인인 모양이로군요."

나가려던 앙투안이 우뚝 멈춰 섰다.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드 생 쥐스트요!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아드리겠소."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내 앞에서 두 번째로 여장을 했군요, 바이올리니스트 양!"

앙투안은 잠시 놀라 멈칫했으나 곧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무대에서 귀족 만세를 외치면 객석의 귀족들도 그 구호를 따라 외치도록 왕비로부터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창 기세가 등등한 평민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자, 리블! 지금이라도 경찰들을 돌려보낼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하느님도 국왕도 그리고 우리 귀족도 당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어요."

그다음이 마리벨의 차례였다.

"자비로우신 국왕님 만세!"

마리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러자 객석에 앉아있던 귀족들도 모두 만세의 함성을 울렸다.

"집어치워라!"

평민석에서 들고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집어치워! 이 귀족의 앞잡이들아!"

평민들의 태도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계속해요, 마리벨!"

귀족들은 마리벨을 재촉했다.

"마리벨! 귀족 만세를 부르지 마라!"

"귀족 따윈 모두 죽여야 해!"

"프랑스 만세!"

"국민의회 만세!"

"귀족은 망하고 우리의 세계가 온다. 그땐 귀족들이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야 해!"

더 이상 연극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관객들이 만세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며 설쳐댔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 무대 한복판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피에르였다.

피에르는 마리벨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다들 조용히 해라!"

그때까지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이 이 오싹한 광경을 보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극장 안은 연극이 시작될 때처럼 조용해졌다.

"자, 마리벨! 큰소리로 외쳐라! 국왕님 만세! 왕비님 만세! 귀족님 만세!"

그러나 마리벨은 그렇게 외칠 수가 없었다. 수많은 평민들이 그들의 배우라고 믿고 있는 마리벨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마리벨! 어서 만세를 불러!"

레안드르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도리느와 필립의 얼굴도 보였다.

마리벨은 일어섰다. 그리고 목청을 다하여 외쳤다.

"프랑스 만세! 프랑스 국민 만세! 프랑스 국민의회 만세!"

그제야 평민들도 마리벨을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프랑스 만세!"

"프랑스 국민 만세!"

"프랑스 국민의회 만세!"

피에르의 칼이 높이 치켜 올랐다가 마리벨을 향하여 내리 꽂히려는 찰나였다. 피에르의 오른팔이 힘없이 꺾어지면서 손에서 칼이 툭 떨어졌다. 줄리앙이 던진 단검에 맞았던 것이다.

귀족들과 평민들이 한꺼번에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콩테 극장의 무대는 귀족과 평민의 싸움터로 변했다. 싸움은 군대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소동으로 평민 측은 4명의 사망자 외에 150명의 부상자를 냈고 귀족 측은 78명의 부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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