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상인
Épisode 24.
베르사유에 갔던 올리비에가 돌아온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줄리앙, 어제 콩테 극장의 소동이 베르사유까지 알려졌다. 귀족을 찬양하는 대사를 거부한 마리벨의 배후에는 다르 달랑 공작 가문이 있다고 말이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가문이 국민의회 편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야!"
"절 책망하는 겁니까? 형님이라면 마리벨을 피에르가 찌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그때 가방을 든 마리벨이 나타났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무슨 얘기야? 마리벨!"
"어제의 소동에 대해 책임을 추궁당하면 마리벨을 쫓아냈다고 해주세요! 그렇게 하면 다르 달랑 가의 입장이 조금은 나아지겠죠."
줄리앙이 다그쳐 물었다.
"나가겠단 말이야? 어디로?"
"모르겠어요. 하지만 벌써 나갔어야 했어요. 지금보다 좀 더 일찍요. 전 비겁했어요. 이 집에서 배불리 먹고 응석을 부리면서 살았던 겁니다."
말을 마치고 마리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형님, 왜 붙잡지 않으시죠? 마리벨은 라벤더의 꽃님의 친딸입니다. 형님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붙잡아야 하잖아요."
"난 장남이야. 사랑보다는 다르 달랑 가문이 더 중요해!"
"형님다운 얘깁니다. 제가 듣고 싶었던 얘기였어요. 이젠 제가 마리벨을 쫓아가도 괜찮겠군요?"
줄리앙은 마리벨의 뒤를 따라나섰다.
"사관학교는 어떻게 하고요?"
"집어치울 생각이야.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군인 따위에겐 환멸을 느낄 뿐이니까."
막상 집을 나왔지만 줄리앙은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줄리앙의 고상한 차림새 때문이었다.
"방을 구한다고요? 베르사유 궁전에나 가서 방을 비워 달라고 하슈!"
이렇게 대꾸하거나,
"쓸데없이 낭비만 하다가 파산했나 보군. 그런 녀석에게 빌려줄 방은 없어!"
라며 문을 닫아걸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그건 좀 나은 편이었다.
"귀족 따윈 죽어 버려!"
하면서 금세 몽둥이를 들고 나올 기세를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다.
줄리앙은 하는 수없이 옛날 도리느가 살던 아파트로 돌아간 마리벨을 찾아가고 있었다.
"귀족의 스파이다!"
"음, 대담한 놈이야. 혼자 여기에 나타나다니!"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나와 삽시간에 줄리앙을 에워쌌다.
이층 창가에 앉아있던 마리벨의 눈에 뚜렷이 들어 오진 않았지만 줄리앙과 비슷한 사람이 묶인 채로 사람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있는 게 보였다.
마리벨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사람은 마리벨의 예상대로 줄리앙이었다.
"여러분, 이 사람은 스파이가 아니에요, 놓아주세요."
"스파이가 아니라면 귀족이 무엇 때문에 이런 데서 서성거리겠나?"
"감싸 주는 걸 보니 너도 한 패로구나!"
"그렇다! 한 패가 틀림없다!"
그래서 마리벨도 줄리앙과 함께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이 여자는 풀어줘!"
"뭣 때문에? 귀족의 스파이를?"
"이 여잔 마리벨이야!"
"마리벨? 마리벨이 뭔데?"
"이 바보야,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도 몰라?"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프랑스 만세를 외쳤던 우리들의 영웅, 마리벨 말이야?"
"그래, 그날 나도 콩테 극장에 갔었어."
"그러고 보니 정말 마리벨이로구나!"
"미안해요, 마리벨!"
"마리벨 만세!"
그때까지 기세 등등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대뜸 마리벨을 영웅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댁까지 바래다 드리죠, 마리벨."
"괜찮아요. 이 밧줄만 풀어주면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이 바보들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풀어드리지 않고!"
줄리앙은 별수 없이 마리벨의 아파트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마리벨이 오기 전에 사람들의 몽둥이에 맞아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날 시민들이 그토록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민들은 귀족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을 결성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마리벨은 콩테 극장으로 나갔다. 다르 달랑 공작 댁을 나온 이상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면 어떻든 간에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받는 급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마리벨이 콩테 극장에 나간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오빠 앙투안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앙투안이 마리벨을 찾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콩테 극장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리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마리벨, 너에게 2년간 출연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어쩜 그럴 수가 있나요, 단장님!"
"코메디 프랑세즈는 프랑스 유일의 왕립 극단이다. 따라서 궁정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나로선 어떻게 할 수가 없단다."
생각해 보면 그런 처분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궁정을 찬양하는 대사를 거부하고 도리어 시민의 편을 들어 만세를 불렀으니 체포 명령이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처지였다.
레안드르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2년간 출연정지라니! 그동안에 잔느는 마리벨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까지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코메디 프랑세즈에서도 쫓겨났으니 이젠 하루 세끼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 형편이었다.
아파트로 돌아가니 줄리앙은 퍼렇게 멍이 든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정교사 자리를 네 군데나 구했어. 나도 이제 내 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된 거야."
그러나 마리벨이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를 듣자 줄리앙의 얼굴은 다시 일그러져 버렸다.
"할 수 없군. 당분간 내가 가정교사를 해서 먹을 걸 마련해 주지."
"하지만 나도 일자리를 구해 보겠어요. 내 힘으로..."
"그러지 말고 앙투안이나 찾으러 다녀 봐. 그 뒤에 일자리를 찾아도 늦지는 않으니까."
이튿날 아침 줄리앙은 일을 하러 떠났다. 마리벨은 앙투안을 찾아 나섰지만 넓고 넓은 파리에서 어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마리벨은 팔레 루아얄에 가보기로 했다. 시민들이 거기에 모여 연설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를레앙 공의 집 앞인 팔레 루아얄 광장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알겠나! 이미 프랑스 영광은 사라지고 없다. 국가의 창고는 텅 비어 있고 특권 계급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그런 프랑스를 구할 수 있는 자는 귀족도 성직자도 아닌 바로 우리 시민들이다!"
구석구석마다 연사들이 목청을 돋워 연설을 하고 있었다.
마리벨은 아무나 붙잡고 앙투안을 아느냐, 생 쥐스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나서지를 않았다. 설사 아는 사람이 있어도 지명수배 중인 그를 무턱대고 알려줄 리도 만무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잔느의 그림자로 일하는 피에르였다.
"생 쥐스트라는 사내를 모르나? 그럼 단서라도 잡히면 내게 알려 주게. 사례는 톡톡히 하겠네."
피에르도 앙투안을 찾고 있었다.
마리벨이 아파트에 돌아와 보니 줄리앙이 맥없이 앉아 있었다.
"가정교사는 틀렸어. 네 군데에서 다 거절당했지 뭐야? 우리 집에서 못 하게 하도록 지시를 내린 모양이야."
창밖이 매우 소란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다.
"이 봐! 큰일 났다!"
"왕실 친위대원 중에 우리들 편을 들던 사람들이 잡혀서 아베이 감옥으로 보내졌대!"
"뭐라고? 우리 편이 감옥에?"
"그들을 구하러 가자!"
"감옥을 때려 부셔라!"
삽시간에 거리는 사람의 홍수로 출렁였다.
줄리앙도 그 군중 속에 끼겠다고 했다. 혹시 앙투안이 그 속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도 가겠어요."
"안 돼. 당신은 집에 있어야 돼. 보통 위험한 게 아니라고."
아베이 감옥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 가고 난 뒤 거리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마리벨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어느덧 마리벨은 콩테 극장의 커다란 광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극장에서는 《시골 처녀 잔느》가 공연되고 있었다.
마리벨의 눈물이 빗물에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갈망했던 코메디 프랑세즈였던가! 얼마나 애를 써서 얻은 무대였던가!
극장 안에서는 간간히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저 무대 위에 서 있을 것이다! 잔느도 다르마도 롤랑도 베아트리스도.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마리벨, 나는 무엇이냐?'
무대를 잃은 배우! 그것은 날개 없는 새와 마찬가지였다.
마리벨은 로버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로버트! 당신이 있는 런던에도 다 내리고 있나요? 마가렛 공주와 함께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나요? 혹시 이 마리벨을 생각하고 있나요? 아, 레안드르! 마리벨은 쫓겨나고 말았어요. 당신의 원수를 갚기 직전에 무대를 빼앗기고 말았다고요! 가엾은 레안드르! 다시 무대에 서고 싶어요. 말로 극단의 삐그덕거리는 무대라도 좋아요.'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벨은 동상처럼 빗줄기 한가운데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마리벨!"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로버트였다.
"로버트"
마리벨은 줄리앙의 품속에 쓰러졌다.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침대에 누운 마리벨은 계속해서 로버트를 부르고 있었다. 온몸에서 열이 났다. 줄리앙은 의사를 찾아 나섰다.
"돈은 갖고 있나?"
"지금은 없지만... 꼭 갚을 수 있습니다."
병원 문이 쾅하고 닫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원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줄리앙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평민으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가 않는구나!'
줄리앙은 혼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리벨의 열은 더욱 심해져갔다. 줄리앙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본 일이 있다. 추울 때는 사람의 체온이 꽤 도움이 된다지!'
줄리앙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가슴을 되도록 크게 벌려 마리벨의 작은 몸을 힘껏 껴안았다.
마리벨의 가슴에서 고동이 전해져 왔다. 줄리앙의 가슴도 뛰었다. 그러나 갑자기 줄리앙은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로버트!'
콩테 극장 앞에서 그녀가 줄리앙을 향해 부르던 이름 때문이었다. 그 이름이 자꾸만 줄리앙의 머릿속에 메아리쳐 왔다.
'로버트!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로버트! 나와 닮았다는 로버트!'
줄리앙은 로버트라는 영국 청년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어째서 마리벨은 그토록 로버트를 잊지 못하는가? 첫사랑이기 때문인가? 첫사랑의 상처가 그토록 그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인가!'
아침이 되자 비가 그쳤다. 마리벨의 열도 내리기 시작해서 뺨에는 발그스레한 빛이 되살아났다.
마리벨은 두 눈을 떴다. 눈 앞의 줄리앙을 향해 마리벨이 소리쳤다.
"아, 로버트!"
그녀는 밤새도록 로버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 결코 줄리앙의 품에 안겨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줄리앙은 달아나듯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게 개어 아침 햇살이 비에 젖은 지붕을 내려 쬐고 있었다.
줄리앙의 손바닥과 가슴에는 아직도 마리벨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원한 건 헤어진 첫사랑 로버트뿐이었다. 줄리앙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로버트의 대역인 것만으로도 줄리앙은 만족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 로버트!'
마리벨의 그 한 마디가 그토록 줄리앙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 수가 없었다. 줄리앙은 로버트의 대역을 그 이상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줄리앙이 나가버린 문을 쳐다보며 마리벨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로버트가 아니라 줄리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내가 줄리앙에게 로버트라고 불렀잖아!'
마리벨은 쫓아가서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마 줄리앙은 실망한 나머지 다르 달랑 저택으로 되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싶었다. 줄리앙이 곁에 있으면 자꾸 그에게 의지하고픈 생각이 드는 것이 싫었다.
마리벨은 일어나 주방에 가 보았다.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게 급한 것은 우선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몽마르트르 거리의 카페 라팡에는 갑자기 손님이 들끓기 시작했다. 처음에 카페 주인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제부터 하루에 10 수를 주기로 하고 고용한 마리벨 때문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손님들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배우 마리벨이 날라다 주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배급 행렬처럼 카페 라팡의 입구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봐, 마리벨! 오늘부턴 하루에 12 수씩 주기로 하겠어. 그러니 다른 가게에 갈 생각은 말라고."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선심을 썼다. 그러나 파리의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 하루 12 수로는 방세를 내고 나면 검은 빵 한 조각을 사 먹기도 빠듯한 액수였다.
그러나 마리벨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나마 잠자리와 끼니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점잖은 신사 하나가 마리벨을 손짓으로 불렀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이죠?"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소문도 들었습니다. 왕립 극단이 혹독한 처사를 내렸더군요. 전 당신의 편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이런 데서 일을 하다니!"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마리벨은 진심으로 그 신사에게 감사했다.
"어떻습니까? 내가 아는 지방의 극단이 있는데 출장 지도를 해 주시면? 보수는 여기보다 훨씬 좋을 텐데요."
"마리벨은 귀가 솔깃했다. 극단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무대를 떠나 사는 하루하루가 그녀에게는 고통으로 느껴지던 터였다.
"생각이 있으면 상 탕 트와느 21번지에 있는 캉탕 댁으로 오시오."
신사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온 마리벨은 캉탕 댁이 있다는 상 탕 트와느 21번지로 향했다.
혹시 줄리앙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리벨은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마리벨의 아파트에서 나온 줄리앙은 갈 곳이 없었다.
이제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편히 쉴 곳도 배를 채울 돈도 없었다.
'평민 노릇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군.'
줄리앙은 마리벨을 처음 만났던 퐁 뇌프 위를 걷고 있었다.
"줄리앙! 줄리앙 아닌가?"
레미 그라탱이라는 사관학교 시절의 친구였다.
"웬일인가, 줄리앙? 아침부터 센 강을 배회하다니!"
레미는 사관학교를 1년 동안 다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군의 용사로서 귀족에 대항해 싸우는 중이라는 소문을 줄리앙은 듣고 있었다.
레미의 권유로 줄리앙은 그의 집으로 갔다. 시민군의 용사답게 쓰러져가는 2층 건물의 구석방에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줄리앙, 자넨 물론 귀족이니까 날 미워하겠지?"
줄리앙에게는 괴로운 질문이었다.
"레미, 난 귀족이긴 하지만 시민들의 입장도 이해하고 있어."
"이젠 그런 애매한 태도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줄리앙! 지금 프랑스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 센 강과 혁명의 강."
"자네들이 말하는 혁명이란 도대체 뭔가?"
"몰라서 묻나? 귀족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지."
"그게 정말 평민을 위하는 유일한 길일까?"
레미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레미 자신도 혁명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수많은 시민의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레미, 자네들이 말하는 혁명이 성공했다고 치자.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귀족의 정치가 부자의 정치로 바뀌는 것뿐 아닌가? 고리대금업자나 악질적인 부자들 밑에서의 서민들 생활이 성직자나 귀족 밑에 있을 때보다 나아질 것으로 믿나?"
"줄리앙, 우리들더러 고리대금업자나 노예상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느 세상이건 돈 있는 자들이 권력을 쥔다는 뜻이야."
"그러나 이젠 그런 걸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자네가 말하는 국민이란 서민 대중을 뜻하는가?"
"그렇지. 바로 어제만 해도 우린 혁명파 근위병과 친위대를 감옥에서 구출하고 식료품과 와인을 세금 없이 시민들에게 나눠 줬어. 그렇게 해서 서서히 국민들이 정권을 잡는 거야."
"나도 그 장면을 봤지. 그건 폭력이었어. 폭력이란 점에서 그건 귀족이나 부자의 폭력과 다를 바가 없었어. 폭력은 일시적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는 있어. 그러나 그건 권력은 아니야. 폭력과 권력은 다른 거야."
"줄리앙, 솔직히 말하지 그래. '난 귀족 편이다'라고!"
"그러나 내 몸속에는 귀족의 피와 평민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다."
두 사람의 토론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튼 그 얘긴 천천히 하세. 날 며칠 동안만 자네 집에서 묵게 해 주겠나?"
"그건 어렵지 않네. 그 대신 날 좀 도와주게. 자네더러 시민군에 가담하라고 하진 않겠네. 하지만 그들에게 검술을 좀 가르쳐 주게. 자네의 솜씨가 절실히 필요하다네."
"잠시 생각해 본 뒤 줄리앙은 시민군의 검술 교사가 될 것을 승낙했다.
밤이었지만 마리벨은 상 탕 트와느 21번지 캉탕 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카페에서 만났던 신사가 마리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잘 와주었소, 마리벨 양."
"극단이 있는 곳은 어디죠?"
"가까운 곳이오, 샤르트르."
샤르트르라면 파리에서 마차로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마리벨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급료는?"
"800 수. 하지만 단장을 만나 절충하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소."
보수도 그만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럼 마리벨 양, 이 문서에 서명하시오."
마리벨은 그 신사가 내미는 계약서에 무심코 서명을 했다.
마리벨을 기다리라고 해 놓고 신사는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나 30분 이상을 기다렸는데도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리벨은 조바심이 났다. 이미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아파트로 돌아가기엔 겁이 나는 시간이었다. 연극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뒤에야 문이 열리며 얼굴이 넓적하고 건장한 풍채를 지닌 노인이 들어섰다. 첫눈에 겁을 주는 인상이었다.
"네가 마리벨이냐? 내가 캉탕이다."
노인의 말투에도 정이라곤 털끝만큼도 담겨있지 않았다. 노인은 다짜고짜 마리벨에게 다가오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마리벨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음, 제법 예쁘군. 꽤 값이 나가겠는 걸!"
그제야 마리벨은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려보내 주세요, 할아버지!"
"앙탈 부리지 마라. 그런 짓은 내겐 안 통해! 배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란 말이야!"
캉탕은 마리벨의 어깨를 눌러 소파에 다시 앉혔다.
"전, 돈도 필요 없어요. 집에만 가게 해줘요."
"집에 간다고? 난 네 아버지에게 십 년 치 급료 전액을 다 지불했다. 집 따윈 이제 다 잊어버려!"
"아버지라고요?"
"아까 그 사내가 네 아버지 아닌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소용없어. 그런 식으로 날 속이진 못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캉탕은 무지막지한 손으로 마리벨을 잡아끌어 다른 방으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마리벨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방안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열명 정도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너희들도 속아서 왔니?"
"아빠가 날 팔았어. 아빠도 울고 나도 울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가 팔려가는 대신 내 동생들이 밥을 먹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나도 빵을 먹게 될 거야."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겁을 먹고 우는 아이도 있었고 울다가 지쳤는지 쓰러져 자는 아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나친 욕심 때문에 엄청난 변을 당한 게 된 셈이었다. 카페에서 일을 하여 끼니와 방세를 해결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공연히 배우라는 허영심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속임수에 걸려든 것이었다.
이젠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겠는데 문은 잠겼고 높은 창문은 감옥처럼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얘들아, 도망쳐야 해!"
"안 돼요! 내가 도망치면 우리 동생들은 빵을 먹을 수가 없게 돼요."
조금 전의 그 소녀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마리벨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러나 설사 도망치려고 해도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는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게 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코 좋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마리벨은 다른 아이들처럼 쪼그리고 앉았다. 잠이 오질 않았다. 어렴풋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