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27

무기를 들라 1/2

by 안녕
Épisode 25.


시민군을 훈련시키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줄리앙은 그런대로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2년 동안 사관학교에서 배운 검술, 사격술을 그토록 빨리 써먹게 될 줄이야!'

그러나 구령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는 600여 명의 시민군을 온종일 상대하고 나니 줄리앙은 몹시 지쳐 버렸다. 레미의 침대에 축 늘어져 줄리앙은 비로소 마리벨을 생각해 보았다.

사실 줄리앙은 온종일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벨의 집에서 나오던 날 그는 다시는 마리벨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버트라는 청년을 꿈속에서도 그리는 마리벨에게 더 이상 미련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자기는 한낱 로버트라는 인물의 대역밖에 안 된단 말인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자신의 판단이 너무 경솔했던 것 같기도 했다.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쫓겨나 하루 세 끼를 해결할 빵조차 마련해 놓지 못한 마리벨을 그대로 버려두고 꽁무니를 뺐다는 자책감에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보고 싶은 마리벨이었다. 로버트의 대역이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를 찾으러 거리에 나섰다가 무슨 변이나 당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줄리앙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드디어 줄리앙은 마리벨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레미, 내 애인을 소개해 줄까?"

"놀라운 얘긴데, 줄리앙? 여자를 사귀다니... 도대체 어떤 여잔가?"

"자네도 잘 아는 여자야. 아무튼 같이 가 주게나."

그렇게 해서 줄리앙과 레미는 인적이 끊어진 밤거리로 나섰다. 센 강 왼쪽 편에 자리 잡고 있는 레미의 집으로부터 마리벨의 아파트까지는 30분가량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마리벨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짤막한 편지 한 장뿐이었다.

줄리앙,
혹시 당신이 와 보고 실망할까 봐 몇 자 적어놓아요.
상 탕 트와느 가의 캉탕 씨 댁에 다녀올 거예요.




마리벨은 없었지만 자기를 염두에 두고 쓰인 그녀의 편지를 보자 줄리앙은 무척 기뻤다. 마리벨 그날의 일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마리벨의 침대에 걸터앉아 줄리앙은 처음 퐁 뇌프 아래 센 강에서 마리벨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며칠 전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까지의 이야기를 레미에게 해 주었다.

"놀랍군. 마리벨이 다르 달랑 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었네. 그러나 자네가 그녀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자넨 어렸을 적부터 배우라면 딱 질색을 하지 않았었나?"

줄리앙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와 두 번째로 퐁 뇌프에서 만났을 때도 사랑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마리벨의 데뷔 공연이 끝난 뒤 자기 집으로 삼 형제가 합심해서 데려가 일 년 동안 함께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마리벨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줄리앙은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마리벨이 갔다는 상 탕 트와느 가는 유명한 빈민가로서 범죄의 소굴이었다. 그런 곳을 밤중에 젊은 여자가 혼자서 다녀온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마리벨이 갔다는 곳이 어디지?"

"상 탕 트와느 가의 캉탕 댁이라고만 적혀있어."

"캉탕?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긴 한데..."

그러나 상 탕 트와느 가라면 파리에서도 가장 범위가 넓은 지역이었다. 공장과 빈민굴이 있고 아베이 감옥도 있으며 한가운데는 센 강이 흐르는, 웬만한 소도시만큼 넓은 지역이었다. 그 거리에서 캉탕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동전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려도 마리벨은 돌아오지 않았다.

줄리앙은 마침내 일어섰다.

"이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마리벨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생긴 건지도 몰라. 내가 상 탕 트와느 가에 가 볼 테니까 자넨 여기서 좀 기다려 주게."

그러나 줄리앙 같은 귀족에게 상 탕 트와느 거리는 낯설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컴컴한 거리, 좁은 골목은 금방이라도 무엇이 튀어나올 것 같이 음산했다. 줄리앙은 가장 으슥해 보이는 곳만을 골라 아무 데나 마구 찾아다니는 도리밖에 없었다. 믿는 것은 옆구리에 찬 칼 한 자루뿐이었다.

혼란스러운 시기라서 밤에는 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려 캉탕의 집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동이 틀 때까지 줄리앙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채 센 강변에 힘 없이 앉아 있었다.




작은 배 한 척이 센 강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배는 줄리앙이 서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멈췄다. 배 속에서 몇 사람이 튀어나와 부산하게 오락가락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강가에 면한 낡은 건물 속에서 여자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이 무섭게 윽박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무언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려니까 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여자 아이들 여러 명이 건물 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나온 소녀들은 제법 커 보였다.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잔말 말고 어서 배에 타!"

"안 돼요, 난 그럴 수 없어요."

그것은 분명 마리벨의 목소리였다. 줄리앙은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줄리앙은 힘껏 달려 나가 마리벨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줄리앙!"

머리가 헝클어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마리벨이 줄리앙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줄리앙은 그녀를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달려드는 사내들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웬 놈이냐!"

턱수염을 검게 기른 늙은이가 줄리앙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캉탕 씨인가요?"

"그렇다."

"우선 이 소녀들을 돌려보내시오."

"참견하지 마라. 이 아이들은 모두 부모의 허락을 받고 외국에 일자리를 구해주러 데려가는 길이다."

"거짓말이에요. 난 연극을 하게 해 준다기에 찾아왔던 것뿐이에요."

마리벨이 그렇게 소리지르자 캉탕은 한 뭉텅이의 서류를 줄리앙의 코 앞에 내밀었다.

"자, 보게! 이게 바로 이 아이들의 부모와 내가 작성한 계약서일세. 이 아이들은 모두 반년 어치 페이를 미리 지불한 뒤 데려온 거란 말일세!"

계약서와 영수증은 완벽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모도 없는 마리벨이 잡혀 가게 되어 있는 것만 봐서도 그것이 모두 사기라는 것이 확실했다.

"자! 젊은이, 이젠 어서 물러나시지!"

줄리앙은 칼을 뽑았다.

"안 돼요. 당신네들의 일은 정당한 일이 못 되는 것 같소!"

"뭐라고?"

캉탕이라는 자도 칼을 뽑아 줄리앙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는 줄리앙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줄리앙의 칼과 한두 번 부딪히고는 캉탕은 이내 잡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줄리앙의 발 앞에 고꾸라졌다. 줄리앙은 그의 목덜미에 칼을 겨누고 소리쳤다.

"자! 모두들 물러 서! 그리고 아이들을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두목의 목을 찌를 테다!"

건달들이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줄리앙은 겁을 먹은 소녀들과 마리벨을 안심시켜 조심조심 그들로부터 물러나와 골목의 입구에 다다다.

"칼을 놓고 손을 높이 쳐들어!"

돌아보니 한 놈이 권총을 등 뒤에서 겨누고 히죽 웃고 서 있었다. 줄리앙은 꼼짝없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배에 올라타라!"

캉탕이 일어나 소리지르자 뱃사람들은 다시금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며불며 발버둥 치는 아이들을 그들은 하나씩 안아 배에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사방의 골목에서 함성을 지르며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레미가 시민군들을 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레미!"

"줄리앙, 무사했군!"

악당들은 두세 명의 아이들만을 실은 채 배를 몰고 달아나 버렸다.

"고마워, 레미!"

"자네가 떠난 후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으니 나도 가만히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내가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상 탕 트와느의 캉탕이라는 사람을 물어보니 밀수꾼에다 유명한 노예상인이라는 거야. 그때야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지. 그렇지만 도저히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동지들을 모아서 오느라고 좀 늦었어."

마리벨은 줄리앙의 품에 안겨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무서웠어요, 줄리앙! 꼭 외국에 팔려가는 줄만 알았어요."

"미안해, 마리벨! 이젠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처음부터 연약한 여자를 혼자 남겨놓고 떠난 것이 잘못이었다.

부모가 있어도 먹고 살아갈 수가 없어 부모가 자식을 팔아넘기는 세상이었다.

줄리앙은 마리벨을 레미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대로 아파트에 놔두었다가는 언제 다시 캉탕 일파의 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 가고 있었다. 줄리앙이 훈련시킨 시민군들이 귀족의 마차를 습격하여 보석과 무기를 탈취해 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광경을 보며 줄리앙은 차츰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을 빌어 강도짓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군들 쪽에서도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귀족들이 지닌 재물들은 모두 시민들의 재산을 빼앗았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자기네들의 재산을 도로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레미! 어떻든 난 더 이상 도적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수는 없네."

레미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앙, 정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네. 지금 왕과 귀족들은 스위스나 독일로부터 군대를 불러들여 파리 시내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야. 시민들이 조금만 더 움직이면 그 군대를 시켜 총을 내두를 심산이야."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나? 왕은 절대로 시민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레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국왕은 파리 시민을 위압하고 국민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각지의 군대를 파리로 집결시켰다. 파리의 식량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모자라는 식량이 그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대가 총을 쏘면 시민은 누가 지켜 줄 건가? 우리들은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밖에 없어. 그러기 위해선 돈과 무기가 필요한 거야! 우리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믿네. 그러니 혁명이 끝날 때까지는 눈 감아 달라는 말일세."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줄리앙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혁명의 피해를 입은 것은 귀족들 뿐만이 아니었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불쌍한 시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오해를 받고 모함에 걸려들어 시민이 시민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줄리앙이 콩세르지리의 시계탑 광장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커다란 벽보가 붙어 있었다. 줄리앙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가가 보았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벽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
반 정부 대 연설회
루이 15세 광장에서
오후 1시부터




줄리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레미의 집에 얌전히 있던 마리벨이 어느새 이런 짓에 가담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마리벨을 헤치려는 모함이 틀림없었다.

줄리앙은 레미의 집을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일 리는 없지만 혹시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리벨을 말려야 했다. 거리의 길목 길목마다 같은 내용의 벽보가 붙어있었다.

마리벨은 레미의 집에 아침처럼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줄리앙의 이야기를 듣고 도리어 마리벨이 깜짝 놀랐다.

"장난치고는 좀 심하군요."

"장난이 아니야.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묘히 파놓은 함정이야."

생각할수록 마리벨이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빠져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벽보를 간단히 무시하고 루이 15세 광장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랬다가는 진상을 모르는 시민들은 마리벨이 겁을 먹어 연설회를 중지하고 도망쳤다고 분개할 것이다. 만일 마리벨이 연단에 올랐다가는 대기하고 있던 헌병들 손에 잡혀 바스티유 감옥에 처넣어질 것이 뻔한 일이었다.

"누군가 마리벨을 매장시키기 위해 파 놓은 함정이야!"

둘이서 얻은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레미가 흥분한 모습으로 들이닥쳤다.

"자네도 벽보를 보았겠지?"

"물론이야. 그래서 시민군을 동원하여 누구의 짓인지를 알아보고 오는 길이야. 벽보를 붙이고 다니는 놈을 하나 잡아 족쳤지. 그랬더니 그렇게 시킨 놈이 다름 아닌 피에르라는 귀족이었다는 거야."

"피에르?"

순식간에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 피에르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교활한 놈이었다. 그동안 생 쥐스트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마침내 생각해 낸 함정이었다.




사람들은 벌써 루이 15세 광장 쪽으로 떼를 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코메디 프랑세즈를 떠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리벨의 인기는 대단했다. 마리벨은 단순히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가 아니라 프랑스 만세를 외친 시민의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몰려가는 사람들 속에 앙투안도 끼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줄리앙은 벌떡 일어섰다.

"루이 15세 광장으로 가야겠어. 앙투안이 위험해! 레미, 마리벨을 부탁한다!"

줄리앙을 떠나보낸 후 안절부절못하던 마리벨도 드디어 일어섰다.

"나도 가겠어요."

"안 돼요, 마리벨! 그들의 함정에 걸려들 뿐이오."

레미가 가로막고 나섰다.

"가 봐야 해요. 설사 그들의 함정이라 해도 이건 피할 수가 없어요. 난 비겁한 마리벨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그들이 마련해 놓은 연단 위에 올라가서 내가 하고 싶은 소리를 마음대로 외쳐 보겠어요. 그리고 오빠를 만나겠어요. 오빤 틀림없이 날 찾으러 광장에 나타날 거예요."

레미로서도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마리벨이 나타나면 군중들은 연설을 요구할 것이다. 군중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들은 노할게 틀림없다. 그러나 연설을 하면 헌병들이 그녀를 체포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군중 틈에 끼어 있던 앙투안이 그녀를 구하러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레미도 마리벨의 뒤를 따랐다. 마차는 루이 15세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밀물처럼 모여든 군중들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연설을 하기로 한 13시가 훨씬 지나 14시가 되었는데도 군중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마리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것 봐! 벌써 헌병들이 나타났어. 마리벨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 연설을 할까?"

"마리벨은 용기 있는 여자라고! 콩테 극장 무대에서는 귀족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만세를 불렀었잖아!"

그러나 수많은 군중 앞에 마리벨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군중들은 차츰 실망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마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마리벨을 보았다.

"마리벨이다! 드디어 왔어!"

"맞았다, 마리벨이야. 호위하는 사람도 하나 없이 용감하게 나타난 거야."

"모두들 길을 비켜! 우리의 마리벨이 지나간다!"

"마리벨을 단상에 모셔라!"

넓은 광장의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마리벨이 있는 곳에서부터 단상까지 좁다란 길이 마련되어 마리벨은 단숨에 단상에 올 수가 있었다.

군중 속에 끼어있던 줄리앙과 레미는 물론 앙투안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단상에 올라 선 마리벨의 모습은 너무나도 엄숙해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순간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살아있는 잔다르크의 모습을 대하는 것 같았다.

마리벨은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여러분! 무기를 듭시다. 썩어빠진 왕정을 타도하고 우리들 시민의 손으로 권리를 되찾읍시다! 시민 여러분, 무기를 듭시다!"

정말 대단한 연설이었다. 광장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헌병들 앞에서 시민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선동하는 것이다.

"체포하라! 마리벨을 체포하라!"

헌병들이 연단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헌병을 막아라!"

"마리벨에게 연설을 계속하게 해라!"

마리벨을 호위하는 군중들과 체포하려는 헌병들 사이에 밀고 밀리는 싸움이 벌어졌다.

"방해하는 자는 사살한다!"

드디어 헌병 장교의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 그래도 군중들은 연단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연단 위에 올라가 마리벨을 끌어내린 사람이 있었다. 앙투안이었다.

"오빠!"

"시간이 없어! 빨리 군중들 틈에 섞여 숨어라!"

마리벨을 군중 틈새로 들여보내고 앙투안은 달려오는 헌병들을 막아섰다.

"비켜! 비키지 않으면 발포한다!"

헌병들이 앙투안을 총대로 밀어 제쳤다. 그때 앙투안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잔느였다.

"오랜만이군요, 생 쥐스트!"

"잔느!"

"마리벨은 놓쳐도 좋아요. 이 자를 체포하세요!"

잔느가 명령을 내리자 헌병들은 총부리를 앙투안에게 들이댔다.

"루이 앙투안 레옹 프로렐 생 쥐스트, 이 자가 바로 지명수배 중인 반정부 범죄자예요!"

앙투안은 두 손이 뒤로 묶였다.

"잔느! 이것이 나를 체포하기 위한 연극이었나?"

"바로 맞췄어. 당신을 꾀어내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거든."

피에르가 싱글거리며 대꾸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국립 극장에선 날 숨겨주고 지금은 또 날 잡아가게 하는가?"

"이유를 알고 싶다면 내가 말해 주죠. 그날 당신은 내게서 키스를 훔쳐갔거든요."

앙투안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헌병이 이끄는 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어떻게 할까요, 잔느 님?"

헌병장교가 물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심문할 일이 있어요. 오늘 내 집에 감금했다가 내일 바스티유로 보내겠어요."

"잔느 님 그건..."

"안 된다... 이 말이죠? 하지만 그 자를 체포한 건 바로 나예요. 그러니 내게 그만한 편리는 제공해야 하지 않아요?"

헌병 장교도 그 이상은 반대하지 않았다.

헌병들의 호위 속에 앙투안을 실은 마차는 다지르 후작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광장에 있던 시민들은 흩어질 줄을 몰랐다. 그들 사이에선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아 모두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시민의 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던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가 비밀리에 교수형에 처해졌다느니, 외국 군대 십만 명이 파리를 포위했다느니 헛소문들이 시민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리벨이 단상에서 외쳤던 것처럼 이제는 시민이 무기를 들 차례라고 판단했다.

"여러분, 무기를 듭시다!"

"국왕의 군대가 우리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자!"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누군가 상 탕 트와느 가의 무기상을 알고 있다고 외치자 시민들의 물결은 상 탕 트와느 거리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상 탕 트와느의 무기상들은 불과 몇 분 사이에 메뚜기 떼가 지나간 밀밭 꼴이 되었다.

성난 시민들을 따라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마리벨은 팔레 루아얄 광장에서 줄리앙을 만났다.

"줄리앙! 오빠가 잡혀갔어요!"

"어디로?"

"잔느가 데려갔어요. 지금 다지르 후작 댁에 감금되어 있을 거예요."

"레미의 집에 가서 기다려. 내가 앙투안을 구해 가지고 올 테니..."

말을 마치자 줄리앙은 다지르 후작 있는 생 시테 섬의 동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마리벨은 군중들 틈을 빠져나와 레미의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초조한 것이지만 그 날처럼 누구를 애타게 기다려 본 것은 마리벨로서는 처음이었다.

밤이 새도록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서성거리며 문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앙투안은커녕 줄리앙도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밝았다.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앙투안을 구하러 간 줄리앙마저 다지르 후작 댁을 지키고 있는 헌병들에게 잡힌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마리벨은 우선 다지르 후작 댁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 두 사람이 아직 잡혀 있다면 잔느의 발밑에 꿇어 사정이라도 한 번 해 볼 작정이었다.

마리벨이 일어서려는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나더니 창밖에서 갑자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말에서 내리는 사람은 줄리앙이 아니고 앙투안이었다. 줄리앙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말 잔등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오빠!"

"마리벨!"

두 사람은 줄리앙을 데려다 침대에 눕혔다.

"긴 말 할 시간이 없다. 이 사람이 날 구해줬어. 상 탕 트와느 거리의 망통 술집으로 연락해!"

앙투안은 그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오랜만에 만난 오누이는 회포를 풀 시간도 없었다.

줄리앙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줄리앙은 전날 저녁부터 다지르 후작 정문이 보이는 숲 속에 숨어 앙투안을 실은 마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들어가 앙투안을 구해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새벽녘이 되자 정문이 열리고 마차가 나왔다. 마차에는 마부 외에 죄인을 호송하는 헌병이 셋이나 타고 있었다. 정문을 빠져나와 바스티유 쪽으로 달리는 마차를 줄리앙은 뒤쫓아가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마차는 더 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줄리앙은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부를 마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마부가 말고삐를 잡고 떨어지는 바람에 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마차는 길 옆의 담을 들이받고 산산이 부서졌고 마차에 탔던 사람들은 앙투안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앙투안이 쓰러진 줄리앙을 말에 태워 데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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