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29

빨간 장미 1/2

by 안녕
Épisode 27.


1789년 10월 5일.

파리의 시민 수만 명이 대포를 앞세우고 베르사유로 행진했다. 그들은 베르사유 궁에 있는 왕을 파리로 끌고 왔다.

10월 12일에는 의회도 왕실의 뒤를 따라 파리로 이동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파리는 프랑스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바렌 사건이 터졌다. 1791년 6월 20일 왕실 일가가 파리를 탈출했다가 6월 21일 바렌에서 체포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망명자 처벌법이 제정되어 귀족들의 망명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코메디 프랑세즈에선 아직도 왕당파의 입김이 드셌지만 국민의회는 《에그몰트의 언덕》이라는 혁명 연극을 상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잔느를 비롯한 골수 왕당파 배우들은 출연을 거부했고 다르마와 마리벨을 포함하여 몇 명의 배우들만이 남아 연극의 막을 올렸다. 연극의 내용은 보잘것이 없었지만 바야흐로 혁명의 열기가 널리 퍼져 있던 때였으므로 마리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모두가 왕당파인 극장 간부들은 그것을 보다 못해 마리벨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내쫓았다. 그러자 다르마를 비롯한 일부 배우들이 코메디 프랑세즈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국민의회는 전에 왕이 인정했던 코메디 프랑세즈의 특권을 모두 취소해 버렸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두 조각이 났다.

연극에 있어서 혁명 파는 다르마를 중심으로 '자유와 평등'의 루아르 극단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왕당파 배우들은 그대로 코메디 프랑세즈에 남아 반 혁명 귀족이나 부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에 맞섰다.




1792년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파리에선 다시 새로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반 혁명 귀족들과 내통한 외국군이 파리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

"병사들은 모두 국경에 나가 있는데 지금 파리에 적군이 쳐들어오면 우린 전멸이야!"

"시민들은 모두 모여라!"

"우리의 적인 귀족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잡아 죽여라!"

시민들은 그때까지 파리에 남아 있던 귀족들을 찾아내어 사정없이 죽여 버렸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귀족은 천명이 넘었다. 이것이 바로 1792년 '9월의 학살' 사건이다.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수감된 사람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나마 옥에 갇힌 사람들도 반이상이 흥분한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르 달랑 공작 가의 사람들은 아베이 감옥에 갇혔었다. 그러나 성난 시민들은 아베이 감옥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마리벨은 아베이 감옥으로 달려갔다. 다르 달랑 가 사람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혼란을 틈타 탈출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리벨은 극단 일을 제쳐놓고 다르 달랑 가의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이 마리벨은 견딜 수가 없었다.

거리에서는 시민들에게 잡혀 뭇매를 맞으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귀족들이 가끔 보였다. 골목 구석구석마다 귀족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났던 말인가!'

혁명파 배우로 자처하는 마리벨이었지만 혁명의 무자비함에는 몸서리를 쳤다. 볼로뉴 숲 입구에서 마리벨은 한 거지 청년이 나무 뒤에 숨는 것을 눈치챘다. 다가가 보았더니 거지로 변장을 한 프랑소와였다.

"프랑소와!"

"가까이 오지 마!"

"프랑소와! 도와 드리려고 찾고 있었어요. 가족들은?"

"아버진 감옥에서 돌아가셨어. 올리비에 형님과 어머닌 볼로뉴 숲 속에 있고..."

둘은 함께 볼로뉴 숲으로 들어갔다. 엉겅퀴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올리비에와 공작 부인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어제 아베이 감옥에서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했어. 올리비에 형님은 총에 맞았는데 중상이야!"




숲 속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려 마리벨과 프랑소와는 각각 한 사람씩 업고 마리벨의 집으로 왔다.

올리비에는 이미 숨져있었다. 공작 부인은 간신히 의식은 회복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소와, 어머니를 돌보고 계세요. 의사를 불러와야겠어요."

마리벨은 의사를 부르러 집을 나섰지만 돈은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었다. 마리벨은 우선 레미를 찾아갔다.

"갑자기 웬일이오?"

"줄리앙의 가족을 발견했어요. 올리비에 님은 이미 숨을 거두었지만 공작 부인은 아직 살아 계세요. 프랑소와 님도 심한 영양부족이고!"

마리벨과 레미가 의사를 데리고 갔을 땐 이미 공작부인도 숨을 거둔 뒤였다.

"부인의 유해는 나의 친척이라고 속이고 정중히 장사 지내겠소!"

국민 위병대의 장교 제복을 입은 레미가 그렇게 말하자 프랑소와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마리벨! 이 사람은 살인마야!"

"아니에요, 프랑소와. 이 분은 줄리앙의 가장 친한 친구 분이세요!"

레미는 프랑소와의 손목을 꼭 잡았다.

"프랑소와! 혁명이 너무 급격히 일어나는 바람에 이런 불상사가 생긴 걸세. 자네만이라도 국외로 망명할 수 있도록 내가 힘써 보겠네!"

"달갑지 않은 호의로군!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

형님과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프랑소와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프랑소와! 올리비에 님의 시체가 시민들 손에 넘어가 모욕을 당해도 좋단 말이에요? 레미 씨의 호의를 받아들여야 해요. 레미 씨는 국민 위병대의 부대장으로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돕겠다는 거예요!"

레미는 뿌리치는 프랑스와의 손목을 다시 한번 잡았다.

"프랑소와! 이건 마리벨의 부탁 때문이 아니야. 네 형이며 내 친구인 줄리앙 때문이야!"

레미는 돌아갔다. 프랑소와는 형님과 어머니 시체 앞에 말없이 꿇어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줄리앙은 어디 있어?"

프랑소와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을 때 마리벨은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줄리앙은... 외국에..."

"망명했나?"

"그런 셈이죠."

"그럼 왜 함께 가지 않았어? 결혼하지 않았나?"

"우린... 결혼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형님을 버린 셈이군. 당신과 결혼하기 위해 집과 가족을 버린 우리 형님 줄리앙을!"

"프랑소와! 난 줄리앙을 버린 게 아니에요. 내가 물러난 거예요."

"결국은 마찬가지야! 당신네들 혁명가들은 피도 눈물도 없고 인정도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마리벨은 할 말이 없었다. 이제 다르 달랑 가문을 위해 보답하는 유일한 길은 프랑소와를 국외로 무사히 탈출시키는 일뿐이었다.




이튿날 올리비에와 공작 부인의 장례가 치러지고 유해는 묘지에 정중히 묻혔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레미와 마리벨 단 두 사람뿐이었다.

"레미 씨, 고맙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형님과 어머니의 시체는 거리에 던져질 뻔했군요."

프랑소와는 비로소 레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날 밤 마리벨의 집 대문을 요란스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장총을 든 헌병들이 안으로 다짜고짜 밀고 들어왔다.

"도망 중인 귀족을 숨겼다지?"

마리벨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섰다. 프랑소와가 달아날 시간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짓이에요? 난 마리벨이에요! 혁명파 배우 마리벨! 그런데 내 집에 귀족을 숨기다니요?"

"다 알고 왔어! 의사가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안 돼요! 당신네들이 정 그러면 고발하고 말겠어요. 이 집은 국민 위병대의 부대장 레미 그라탱의 집이에요!"

"비키지 못해!"

헌병들은 마리벨을 밀쳐 넘어뜨리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소와는 이미 창문으로 달아난 뒤였다.

"그 자가 달아났다. 어서 뒤쫓아라!"

헌병들이 밖으로 나가자 길모퉁이를 돌아서는 프랑스와의 그림자가 보였다. 온몸에 부상을 입은 프랑소와는 금세 잡히게 될 것 같았다.

헌병들이 골목을 돌아섰을 때 귀신이 곡할 노릇이 벌어졌다. 프랑소와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때 골목 끝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 그놈을 말에 태워 달아난 거야!"

헌병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 그 자리에 주지 않고 말았다. 그런데 가로등 밑에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장미의 줄기 끝에 쪽지가 한 장 매어져 있었다.

"읽어 봐!"

"빨간 장미라고만 쓰여 있습니다, 대장님!"

헌병들은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빨간 장미?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이튿날 파리 시내는 빨간 장미의 소문으로 들끓었다.

"소문 들었어? 빨간 장미!"

"쫓기고 있던 귀족을 눈 깜짝할 사이에 채갔다면서?"

"이름은 빨간 장미지만 생김새는 선적 같았대. 머리카락은 덥수룩하고 뻐드렁니에 배불뚝이였다는 거야."

소문은 터무니없이 불어나서 바퀴가 달린 것처럼 저절로 굴렀다.




마리벨이 소속되어 있는 '자유와 평등'의 루아르 극단에선 12월 20일에 레안드르의 작품인 《동백장의 텔레즈》를 창립기념으로 상연하기로 결정했다. 누구보다도 기뻐한 것은 마리벨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코메디 프랑세즈도 같은 날 같은 작품을 국립 극장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르마 씨! 이건 잔느의 노골적인 도전이에요. 우리 극단의 손님을 자기의 인기로 빼앗아 가겠다는!"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그러나 저러나 상태가 심상치 않구려. 잔느의 국립 극장은 우리 극장의 수용인원보다 다섯 배는 돼요. 국립 극장과 우리 극장이 다 만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잔느의 승리가 돼 버린다고."

"하지만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잖아요? 잔느 따윈 의식할 필요도 없어요."

'자유와 평등'의 루아르 극단은 더욱 열을 올려 《동백장의 텔레즈》를 연습했다.




국왕 루이 16세는 혁명 재판에 넘겨졌다. 국외로 탈출하려다 잡힌 바렌 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샀던 루이 16세는 8월 10일 사건으로 또다시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마리벨은 오빠 앙투안이 입법의회의 최연소 의원으로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미남 청년 생 쥐스트의 당선을 얘기하면서도 마리벨이 그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마리벨의 집에 다르 달랑 가의 하녀로 있었던 릴리아나가 찾아왔다. 전에 그녀는 마리벨의 거짓 부상을 감시하러 온 스파이였지만 그래도 지금은 다르 달랑 공작 가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마리벨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다르 달랑 공작 댁의 소식은 저도 들었어요. 모두들 죽고 줄리앙 님과 프랑소와 님만 외국으로 탈출했다면서요?"

"나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걸 늘 미안하게 생각해요, 릴리아나!"

릴리아나는 이러쿵저러쿵 아부를 해가며 계속 지껄여댔다.

"그런데 요즘 소문을 듣자니까 마리벨 님의 극단과 잔느 님의 극단이 같은 작품으로 대결하게 됐다면서요?"

"그렇게 된 셈이죠. 우리로선 최선을 다 해 보는 도리밖에..."

"그래서 제가 찾아왔어요. 조그만 힘이라도 되어 드릴까 해서요. 아무 일이나 시켜 주세요. 그래요, 하녀로 써주세요. 전 마리벨 님이 꼭 이기리라고 믿어요."

마리벨은 수상한 이 여자를 집 안에 들여놓는다는 것이 좀 꺼림칙했다. 그러나 이제 마리벨에게는 남에게 숨길 만한 비밀도 없었고 릴리아나가 꽤 부지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도움을 받기로 했다.




《동백장의 텔레즈》 공연을 하루 앞두고 마리벨은 오랜만에 깊은 감회에 젖었다. 비록 자기가 벌인 싸움은 아니었지만 잔느에게는 꼭 이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잔느에게 이긴다는 것은 죽은 레안드르의 원수를 갚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잔느는 오빠 앙투안을 체포해서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기도 했던 여자였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인생이란 사소한 일을 계기로 방향이 크게 뒤바뀌는 것 같았다. 만일 레안드르가 살아 있다면 마리벨은 결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마리벨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레안드르! 내일 당신의 작품 《동백장의 텔레즈》를 공연해요! 잔느를 꼭 이겨서 당신의 원수를 갚아 드리겠어요!'

마리벨은 하늘에서 빛을 뿌리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12월 20일이 되었다.

파리 시민들의 관심은 두 극단이 동시에 공연하는 《동백장의 텔레즈》에 집중되었다.

잔느의 콩테 극장과 마리벨의 루아르 극장 앞엔 개막하기 몇 시간 전부터 관객들이 줄을 이었다.

"《동백장의 텔레즈》는 역시 잔느가 최고야."

"아무렴! 잔느의 조용한 연기에 비하면 마리벨 따위는 정말 천한 어릿광대지!"

콩테 극장 관객들의 대개는 부자와 귀족들이었다. 적어도 콩테 극장의 입장권을 사려면 제일 나쁜 좌석도 50 수는 내야 했다. 그건 웬만한 노동자의 이틀 분 일당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혁명 배우 마리벨을 오랜만에 보게 됐구먼!"

"칼을 목에 들이대도 프랑스 국민 만세를 부른 마리벨을 이제야 다시 무대 위에서 보게 되다니! 그동안 코메디 프랑세즈 놈들이 방해를 했었다더군!"

"코메디 프랑세즈는 극단이 아니야! 그들은 그저 왕궁의 파티를 흉내 낸 화려한 의상을 무대에서 자랑할 뿐이잖아!"

루아르 극장의 입장료는 10 수였다. 그래서 웬만한 노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한번 구경을 갈 만했다. 게다가 마리벨과 공연하는 다르마는 코메디 프랑세즈에 있었던 시절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였다.




마리벨이 극장에 나타나자 루아르 극장 앞에 줄을 섰던 사람들이 목청을 돋워 환호성을 질렀다.

"마리벨 만세!"

"잔느 따윈 코를 납작하게 눌러 버려요!"

마리벨은 열성적인 팬들에게 둘러싸여 간신히 극장에 들어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극장 안에 들어선 마리벨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세워 놓은 무대장치가 갈갈이 찢어지고 넘어지고 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허나 다름없는 무대 한쪽 구석에 다르마가 맥없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모르겠소! 방금 도착해 보니 이 꼴이 되어 있었어!"

엉망이 된 것은 무대 장치뿐만이 아니었다. 분장실의 무대 의상도 걸레처럼 찢겼거나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소도구들도 모두 망가져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누가 여길 들어왔었죠?"

극장 지배인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점심때 내가 돌아봤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 멀쩡했습니다. 그런데 마리벨 님의 하녀라는 여자가 의상을 한 벌 빨아서 가져왔다기에 분장실에 걸어 놓고 가라고 했었죠. 아무래도 그 여자가 수상합니다!"

릴리아나의 짓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하녀로 쓴 것이 잘못이었다. 다르 달랑 가에서는 경찰의 스파이로 마리벨을 괴롭히더니 이젠 이 중요한 상황에서 마리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말았다.

"마리벨! 이건 분명히 잔느 일당의 짓이오!"

"잔느는 이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아요. 릴리아나가 제멋대로 한 짓이 틀림없어요!"

뒤이어 들어온 단원들은 모두들 잔느를 향해서 분노를 터뜨렸다.

"콩테 극장으로 갑시다! 잔느를 때려 부숴야 해요!"

"안돼! 다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무대장치를 고치고 옷을 마련해서 준비를 해야 돼! 우리 극단의 창립 공연이야!"

다르마가 소리를 지르고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단원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그런 북새통에 레미가 찾아왔다.

"레미! 와 주었군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오늘 공연은 엉망이에요."

"마리벨! 그것보다 당신에게 기쁜 소식이 있소. 드디어 잔느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졌소."

놀라운 일이었다. 귀족들이 모두 잡혀가는 마당에 잔느라고 무사하라는 법은 없었겠지만 아무튼 예삿일은 아니었다.

"체포된다면 잔느는 어떻게 되죠?"

"뻔한 일이오. 귀족은 모두 사형이오."

사형!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잔느가 사형을 당하다니! 비록 레안드르를 죽게 한 장본인이었지만 잔느만큼 우수한 배우도 없었다. 그런 잔느가 사형을 당하다니!

"사형은 안 돼!"

갑자기 마리벨이 무대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잔느가 사형을 받으면 레안드르의 복수를 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자기의 손으로 복수를 맹세한 마리벨이었기에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리벨은 단숨에 콩테 극장에 다다랐다. 잔느는 이미 무대에 나가 서 있었다. 이제 막이 오르면 연기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잔느!"

그러나 마리벨이 외치는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막은 스르륵 걷혀 올라가고 있었다.

"도망쳐요, 잔느! 경찰이 와요!"

그러나 이미 무대 위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린 잔느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마리벨 혼자만이 안타깝게 잔느의 연기를 지켜볼 뿐이었다.

마리벨과의 경쟁을 의식해서 그런지 잔느의 연기는 더욱 완숙했다. 마리벨은 잔느의 연기를 감탄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 잔느는 배우야! 일단 무대에 선 이상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연극을 끝내고 무대를 내려와야 해."

마리벨은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레안드르도 총에 맞아 죽어 가면서까지 마지막 연기를 했었다!

연극은 클라이맥스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복도 끝에서 요란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경찰이 들이닥쳤다.

"잔느를 체포한다!"

경찰은 무대 뒤로 들어와 사람들을 제치고 무대로 뛰어들려고 했다.

"안 돼요!"

두 팔을 벌리며 마리벨이 경찰을 막아섰다.

"영장이다! 잔느를 체포하라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해요!"

마리벨은 죽을힘을 다해 버틸 작정이었다.

"네가 뭔데 참견이야?"

"난 혁명 배우 마리벨이에요. 연극이 끝나고 체포해도 늦진 않아요!"

"마리벨? 아무리 마리벨이라고 해도 소용없어! 어서 비켜!"

"안 돼요! 연극이 끝날 때까지는 내 목숨을 걸고라도 당신네들을 들여보낼 수가 없어요!"

"좋아, 마리벨! 당신도 공무집행을 방해한 죄로 함께 체포해 주지."

대장이 우악스럽게 덤벼들어 연약한 마리벨의 팔을 뒤로 꺾었다.

"잠깐! 이보게들, 막이 내릴 때까지만 기다려 주게!"

레미 그라탱이었다.

"오! 의원님! 하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경사!"

무대 뒤의 그런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느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콩테 극장을 꽉 메운 관객들을 숨소리조차 낼 수 없게 사로잡고 있었다.

마리벨도 넋을 잃고 잔느를 지켜보았다.

품위 있는 잔느! 자존심 강한 잔느! 레안드르를 죽게 만든 잔느! 그런데도 아리아느 역을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해내는 잔느!

그런 잔느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벨은 어떻게 해서든 경찰의 손에서 잔느를 구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막이 내리면 경찰의 손에 잡혀 사형장으로 끌려가야 하는 잔느였다.

"당신을 떠나보내는 건 약혼자를 배반한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싫기 때문이에요! 자, 어디든 마음대로 떠나 버려요!"

그 유명한 잔느의 마지막 대사였다. 이제 잠시 후면 막이 내려질 예정이었다.

경찰도 연극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고는 잔느를 체포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리벨은 속수무책으로 일이 되어가는 광경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객석 2층의 귀족석으로부터 한송이의 빨간 장미가 무대 위로 던져졌다.

"빨간 장미다!"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복면을 한 빨간 장미가 비호처럼 무대로 뛰어올라가 잔느를 낚아채어 넋을 잃고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극장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빨간 장미를 잡아라!"

잔느를 잡으러 왔던 경찰이 뒤늦게 뒤쫓았지만 이미 빨간 장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레미 그라탱 씨! 당신과 마리벨을 체포하겠소.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빨간 장미와 내통한 혐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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