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장미 2/2
Épisode 28.
마리벨과 레미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혁명 배우 마리벨 그리고 국민 위병대의 부대장인 레미 그라탱이 반 혁명 분자로 몰러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파리 시민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리벨이 빨간 장미의 일당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게다가 레미 그라탱은 바스티유 공격 때 선두에 서서 공을 세운 용사가 아닌가?"
"하지만 죄상이 너무 명백하고 증인도 많아. 그날 콩테 극장으로 구경 갔던 사람들이 모두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나 아무리 증인이 많고 죄상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파리 시민들은 두 사람의 유죄를 좀처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재판은 오후 두 시에 생 시테 섬에 있는 파리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지금부터 혁명 재판을 시작한다!"
재판장의 개정 선언이 있자 방청석이 갑자기 술렁대기 시작했다.
"재판은 필요 없다! 사형이다! 사형시켜!"
왕당파의 앞잡이들이었다. 마리벨이 체포된 것이 잔느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마리벨과 레미를 이 기회에 없애버리려는 심산이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혁명기의 재판이라서 일제의 절차가 간소화되기도 했지만 죄상이 너무나 명백했고 증인도 많았다.
"마리벨과 레미 그라탱 두 사람은 악당 빨간 장미의 일당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빨간 장미를 알지도 못 합니다!"
마리벨은 힘껏 외쳤다.
"마리벨, 그대가 다르 달랑 가의 막내아들 프랑소와를 숨겼던 사실도 이미 드러났어. 그 당시에도 프랑소와를 잡으러 갔던 경찰은 그대의 방해로 프랑소와를 빨간 장미 일당에게 빼앗기고 만 거야! 이번에 잔느를 도망치게 한 것도 마리벨 그대가 아니란 말인가?"
마리벨은 할 말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두 번 다 빨간 장미를 도운 결과가 되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은 유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레미 그라탱은 군의 고위간부로서 마리벨을 도와 혁명 임무를 방해한 죄가 명백하오!"
레미가 피고석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당치도 않소! 변호사를 불러주시오!"
"변호사? 당신들을 변호할 변호사는 없다!"
마리벨과 레미에겐 사형이 구형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 혁명의 시기에 반혁명 분자로 판명이 된 두 사람을 변호할 변호사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변호사마저도 반혁명 분자로 물려 사형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방청석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변호를 맡겠소!"
사람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쳐다보았다. 이십 대의 한 젊은 청년이었다.
"흥, 어떤 바보인지는 모르지만 쓸데없는 일에 나서는군!"
"그러게 말이야! 가서 낮잠이나 자는 게 편할 텐데!"
재판장과 검사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어떤 바보라고? 그 말은 좀 심하지 않소? 드뉘브 군!"
드뉘브 검사는 그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청년은 다름 아닌 국민공회 의원이며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생 쥐스트였기 때문이었다.
"생 쥐스트 의원, 당신이 변호를 맡겠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난 빈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요!"
"어째서 당신이 마리벨의 변호를?"
"난 당신들의 엉터리 재판을 경멸하기 때문이오."
재판장은 생 쥐스트를 피고 변호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죄라면 잔느를 잡으러 온 경찰을 막아 연극을 끝까지 계속하게 한 것뿐이야. 그 뒤 잔느의 탈출이나 빨간 장미와의 관계는 전혀 입증할 만한 증거 없이 심증만으로 검찰 측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오."
생 쥐스트는 사람들은 둘러보았다.
"확실히 두 사람은 잔느가 끝까지 연극을 할 수 있도록 경찰을 저지했소. 그러나 이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할 일이오. 왜냐하면 극장이란 지각 있는 사람들의 교육장이며 국민교육의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오. 따라서 그 신성한 장소에 진흙 발로 들어선 무지한 자들이야말로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잖소?"
생 쥐스트의 변호는 추호의 빈틈도 없이 논리가 정연했다. 혁명 입법을 기초한 생 쥐스트에게 대항하여 반론을 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빨간 장미 일당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소!"
"그러나..."
드뉘브가 꺼져가는 소리로 말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럼 마리벨에게 묻겠는데 그대가 빨간 장미의 일당인가?"
"아닙니다!"
"그것 보시오! 당사자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소?"
드뉘브가 드디어 일어섰다.
"생 쥐스트 의원, 적어도 국민공회 의원인 당신이 어째서 보잘것없는 배우 나부랭이를 그토록 열렬히 변호하는 거요?"
생 쥐스트는 드뉘브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보잘것없는 배우라고? 저 콩테 극장 무대 위에서 귀족이 칼로 목을 겨눌 때 프랑스 만세와 국민의회 만세를 부른 사람이 바로 마리벨이오. 당신네들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분명히 국왕 만세를 불렀을 것이오. 그런 마리벨이 보잘것없는 배우라고? 마리벨이야말로 혁명의 횃불이었다는 걸 당신들은 잊었소?"
재판정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그리고 마리벨은 나의 누이동생이기도 하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마리벨이었다. 마리벨은 생 쥐스트가 자기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앙투안은 애써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었다. 지금 이 재판정에서 자기가 오빠임을 자처하고 나선 까닭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를 살려 보려는 앙투안의 안간힘이었다.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입법의원 생 쥐스트와 혁명 배우 마리벨이 친오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이야깃거리였다.
재판장이 일어섰다.
"마리벨이 생 쥐스트 의원의 누이동생이라는 것은 그녀의 무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다만 이 사건은 빨간 장미가 체포되어야 흑백이 명백히 가려질 것이오. 그러므로 본 법정은 사흘간 휴회를 선언하고 빨간 장미의 체포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소. 만일 그때까지 빨간 장미가 체포되지 않으면 마리벨과 레미 그라탱은 어쩔 수 없이 유죄가 인정될 것이오."
그것은 생 쥐스트에게 사흘 안으로 빨간 장미를 체포해 오라는 말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마리벨과 레미 그라탱은 석방입니까?"
"마리벨만 일단 석방한다. 레미 그라탱은 군인의 신분임으로 석방을 보류한다."
재판은 폐정되었다.
생 쥐스트와 마리벨이 오누이 사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혁명파의 실권자가 연극배우 하나를 애인으로 삼으려고 꾸며낸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마리벨과 앙투안은 오래오래 껴안았다. 영국 도버의 백양나무 별장에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오누이가 이제 비로소 다시 혈육임을 확인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도버에서 마리벨과 헤어진 뒤 앙투안이 항상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은 '마리벨을 반드시 데리러 갈 테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프랑스에 돌아와 보니 혼자 먹고 살기에도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 배워둔 바이올린 솜씨를 밑천으로 이곳저곳의 귀족 집을 방문하여 돈을 얻어서 랭스의 법과 대학에 다닐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동안 조급한 마음에 얼마나 절망과 자포자기의 감정으로 떠돌이 생활을 했던가! 다지르 후작의 별장에서 처음 마리벨을 만났을 때가 바로 앙투안의 방랑 시절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마리벨이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처지를 반성하고 랭스의 법과대학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했던 것이다.
"오래전에 이미 난 네가 내 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단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처음엔 절 모른 척하시는 오빠를 원망했어요. 그러나 나중엔 오빠에게도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언젠가 오빠가 절 동생이라고 불러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던 거예요."
마리벨의 집으로 돌아온 오누이는 밤새도록 마주 앉아 있었다. 만나면 할 말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만나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오누이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한이 없었다.
이튿날 국민공회에 나타난 생 쥐스트는 동료 의원들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어이! 미남자가 드디어 나타났군!"
"이 사람! 여자에겐 관심 없는 체하더니만!"
"마리벨이란 배우가 자네 애인이라면서?"
"하지만 좀 서둘렀어! 이왕 변호를 해 줄 바에야 누이동생이란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해서야..."
"맞았어. 정치에서는 얼음장같이 냉정한 자네도 애정 문제에는 유치원생이나 마찬가질세."
그런 사람들에게 마리벨이 친동생이라고 떠들어봤댔자 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생 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사흘 동안의 휴가를 얻었다. 그동안 빨간 장미를 잡기 위해서였다.
휴가를 얻은 다음 생 쥐스트는 랭스 법과대학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 르 바는 혁명정부의 치안 위원회 고위 간부였다.
"다 들었네. 자네가 마리벨..."
"그 얘긴 집어치워! 다만 빨간 장미를 잡고 싶을 뿐이야. 힘 좀 빌려줘!"
"무슨 수로? 빨간 장미는 나도 잡고 싶긴 하지만..."
"르 바, 모험을 해야 돼. 미끼를 던져놓고 거미줄을 치는 거야!"
그날 파리 시내에는 전에 없이 많은 경찰이 깔려 있었다.
"지금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그류 거리에서부터 프티파 감옥까지는 일반 시민의 통행을 금지한다!"
경찰의 발표와 함께 즉시 거리는 통제되기 시작했다.
"귀족 죄수를 프티파 감옥으로 이송하려는 모양이야!"
"이송되는 귀족은 그레꼬 후작과 프레뱅 백작 그리고 미요 백작이래!"
"히야! 모두 거물급이로군!"
"괜찮을까? 빨간 장미한테 또 빼앗기는 건 아닐까?"
"바보야! 그러니까 통행금지에다 이렇게 경찰이 죽 깔려 있는 거 아니야."
치안 위원회 앞에 죄수 호송용 검은 마차가 도착했다.
르 바는 자기가 직접 지휘하여 세 명의 거물급 귀족 죄수를 마차에 태웠다.
"자, 생 쥐스트! 죄수를 마차에 다 태웠어. 건투를 비네!"
"좋아! 출발!"
생 쥐스트는 마부의 바로 옆에 앉아서 프티파 감옥을 향하여 출발 명령을 내렸다.
"의원님! 헛수고가 아닐까요?"
마부가 생 쥐스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의원님이 사흘 안으로 빨간 장미를 잡아들이겠다고 공언한 것이 거리에 쫙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수 호송 마차가 빨간 장미를 유인하는 함정이라는 걸 녀석들도 눈치를 챘을 것 아니겠어요?"
"물론이다! 그러나 죄수는 진짜야. 자네가 빨간 장미라면 어떻게 할 셈인가?"
"글쎄요..."
"빨간 장미는 반드시 나타난다. 난 확신해!"
통행이 금지된 거리는 대낮인데도 무척 한산했다. 창문으로 마차의 행렬을 구경하는 시민들이 간간히 보일 뿐이었다.
마차가 노트르담 성당을 지나 첫 번째 모퉁이를 막 돌아가려 할 때 길 한가운데로 어린 소년 하나가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었다.
"멈춰!"
마차가 멈췄다. 그런데 그 어린 소년은 빨간 장미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다가 마차를 향해 던졌다.
"빨간 장미다!"
생 쥐스트는 곧 경계 신호를 보내고 마차에서 내렸다. 빨간 장미를 던진 꼬마는 곧 잡혔다.
"넌 누구야?"
"어떤 아저씨가 이걸 전해 주랬어요."
꼬마는 심부름을 한 대가로 받았음직한 커다란 초콜릿을 먹으며 접은 편지 한 장을 꺼내놓았다.
그레꼬 후작
프레뱅 백작
미요 백작
이상 세 분을 반드시 모셔가겠소.
빨간 장미.
그것이 편지의 내용이었다.
"예고까지 하다니! 대담무쌍한 녀석이군"
앙투안은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명의 죄수는 묵묵히 그 속에 앉아 있었다. 이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죄수의 마차 뒤로는 무장 경찰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빨간 장미! 네가 아무리 대담하다지만 이번엔 마음대로 안 될걸! 자, 출발!"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빨리 달렸다. 어느덧 프티파 감옥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빨간 장미란 녀석! 예고까지 해놓고 나타나지도 않다니!"
앙투안은 김이 빠졌다. 모처럼의 함정에 빨간 장미가 빠져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빨간 장미가 아마 겁을 집어 먹은 모양이로군요."
마부가 다시 한번 앙투안을 향해 의미 있는 웃음을 던졌다.
드디어 마차가 프티파 감옥 앞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마부가 방심하고 있던 앙투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마부, 어떻게 된 거야?"
마부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소? 내가 바로 빨간 장미요. 예고한 대로 안에 있는 분들을 모셔 갑니다!"
그러더니 마부는 세차게 채찍을 휘둘러 쏜살같이 마차를 몰고 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