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31

오, 로버트!

by 안녕
Épisode 29.


앙투안이 세 사람의 중죄수를 내어주고 얻은 대가라곤 빨간 장미가 영국인일 거라는 추측밖에는 없었다. 빨간 장미와 몇 마디 주고받는 동안 그의 말투에서 강한 영국식 억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간 장미를 체포해 오겠다고 약속한 날짜는 이제 이틀밖에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날 아침 앙투안은 마리벨을 불렀다.

"마리벨, 부탁이 있어. 네가 피신 중인 귀족의 딸로 변장해서 빨간 장미를 유인해라."

"빨간 장미를 붙잡는다고요? 빨간 장미는 프랑소와와 잔느를 구해주었어요."

"그렇다고 빨간 장미가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 그 귀족들을 이용해서 다른 흉계를 꾸밀지도 몰라. 혁명정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재건하려는 음모 인지도 모르는 거야! 지금 빨간 장미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귀족과 평민들은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돼!"

그러나 마리벨은 빨간 장미 체포에 앞장설 수는 없었다.

"마리벨, 생각해 봐. 빨간 장미를 붙잡지 못하면 레미가 사형을 당하게 돼!"

레미! 그가 사형을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프랑소와를 탈출시켰고 잔느를 구했었다.

"... 미끼가 되겠어요. 하지만 결코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은 아니에요."

생각할수록 혁명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옛날에는 귀족들이 으스대며 호강을 하고 평민들은 그 등쌀에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서 공화제가 된 뒤에는 국민들이 모두 평등해졌다고는 하나 살기는 여전히 고달팠다.

혁명광장에서는 반혁명파와 귀족들이 하루에도 몇십 명씩 처형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다르 달랑 가의 사람들처럼 착한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혁명이란 말인가!

"빨간 장미 일당은 귀족들이다. 그러니 네가 혁명 배우 마리벨이라는 걸 알게 되면 죽일 거야. 탄로 나지 않도록 단단히 변장해야 돼."

앙투안은 마리벨을 돌아보며 말했다.

"빨간 장미가 나타날 때까지는 계속 경찰에 쫓기는 시늉을 하면서 시내 골목골목을 누벼야 해. 빨간 장미에게 구출되면 그 즉시부터 이 가루를 뿌리고 다녀라. 우리가 그 가루가 뿌려진 길을 따라가서 널 구출하고 그들을 체포할 거야."




그렇게 해서 마리벨은 금발을 물들여 검은 머리카락으로 아침부터 귀족 여인으로 변장하고 경찰에 쫓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루가 지나도록 빨간 장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리벨이 상 탕 트와느 가의 골목을 누비고 있을 때 골목에서 갑자기 억센 손이 튀어나와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빨간 장미였다.

"빨간 장미다!"

뒤따르던 경찰이 호각을 불자 사방에서 숨어 있던 경찰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그러나 빨간 장미는 말 잔등에 마리벨을 태우고는 비호처럼 달려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마리벨을 태운 말은 어느 저택에서 멈춰 섰다.

"보스가 돌아왔다!"

저택 안에서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빨간 장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이 본거지인 모양이었다.

"오늘도 또 한 명 구했어!"

마리벨을 소파에 앉혀놓고 빨간 장미는 마리벨을 위로해 줄 셈으로 다른 귀족 여인들을 데려왔다. 그런데 마리벨을 무심코 쳐다보던 빨간 장미가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마리벨!"

마리벨은 너무 놀랐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버틸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마음 약하게 자기가 마리벨임을 인정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 것이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대는 마리벨이 아닌가?"

빨간 장미는 마리벨의 턱을 치켜들고는 찬찬히 뜯어보았다.

"전 마리벨이 아니에요. 마리벨이란 혁명 배우의 이름을 들은 적은 있지만 전 샤브리에 백작의 딸 로리타예요."

"하하! 실례했소. 그녀와 너무나 닮았군요. 그러나 그녀는 금발이었지!"

아마도 마리벨의 연극을 몇 번 구경한 적은 있지만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마리벨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그렇지만 아가씨! 마리벨이란 이름의 후작 부인은 혹시 알고 있으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마리벨이란 이름은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흔하거든요."

마리벨은 계속 시치미를 뗐다. 사실 마리벨이란 이름의 후작 부인에 관해선 그녀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런데 빨간 장미 님은 왜 우리들에게까지 변장을 하시죠?"

"미안하오, 아가씨. 난 내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는 입장이라오. 양해해 주시오."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는 뭐죠? 이렇게 우리 귀족들을 구해 주고 돈을 받나요?"

빨간 장미는 그 말을 듣고는 한동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죄 없는 목숨을 구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난 내 소신껏 이 일을 할 뿐이오. 프랑스혁명이 옳으냐 그르냐의 판단은 훗날의 역사가에게 맡겨져야 하오. 그러나 다만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무차별하게 빼앗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고 생각하오."

빨간 장미는 한숨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 국민들은 피에 굶주려 있소. 귀족이라면 여자든 늙은이든 어린아이든 사정없이 사형대로 보내고 있소. 아무리 남의 나라 일이라고는 하지만 같은 귀족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소?"

빨간 장미의 말은 한 군데도 틀린 데가 없었다. 그의 말을 미루어 보아 그는 적어도 프랑스 사람은 아니며 귀족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우리를 어쩔 셈이죠?"

"안심해요, 아가씨. 당신은 지금까지 우리가 구해낸 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보내질 것이오."

그의 말에서 마리벨은 영국식 억양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허둥지둥 뛰어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경찰이 여길 포위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골목골목에 경찰이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어떻게 여기를 알아냈지?"

"길에 이런 가루가 뿌려져 있었습니다!"

청년은 마리벨이 뿌려놓은 가루를 손바닥을 펼쳐 보여 주었다. 그 순간 빨간 장미의 복면 속에서 두 눈이 번뜩이며 마리벨을 노려보았다.

"이 아가씨의 몸을 뒤져라!"

마리벨의 가슴에서 가루 주머니가 금세 발견되었다.

"길가에 뿌려져 있는 것과 똑같은 가루다! 경찰의 앞잡이로군!"

"순진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속이다니!"

"처치해 버립시다!"

"안 돼. 우리의 목적은 목숨을 하나라도 구하는 것이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야. 그럼 모두들 탈출해!"

경찰이 이미 대문을 부수고 담을 넘기 시작했다. 빨간 장미 일당은 마리벨만 남겨 둔 채 카펫을 걷어내더니 지하실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사라졌다.

"우린 하수도 구멍으로 달아나는 거요. 마리벨을 닮은 아가씨, 그대가 우리들의 탈출을 일러바치지 않길 바라오."

빨간 장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유만만하게 사라져 갔다.




뒤이어 생 쥐스트가 경찰과 함께 방안에 들어섰다.

"오! 마리벨, 무사했구나!"

"어디로 달아났지?"

그러나 마리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이 카펫 밑의 비밀통로를 발견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바람에 또다시 빨간 장미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말해라, 마리벨! 빨간 장미의 정체를. 내일까지 그를 잡지 못하면 레미는 사형이야!"

마리벨은 괴로웠다. 레미와 빨간 장미! 빨간 장미는 자신이 경찰의 스파이인 줄 알면서도 살려 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빨간 장미를 체포하는데 협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만약 협조하지 않으면 레미는?

"빨간 장미는... 영국인 귀족이래요."

그것이 마리벨이 빨간 장미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였다.

잠시 앙투안은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르 바를 불렀다.

"지금 파리에 살고 있는 영국 귀족을 모두 조사해 줘. 공안위원회 이름으로 파티를 열겠다. 영국 귀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대하도록!"




그날 밤 공안위원회 주최로 팔레 루아얄에서 영국 귀족을 위한 파티가 열렸다. 갑작스러운 파티였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내의 영국 귀족들은 모두 참석했다.

득세 일로에 있던 공안위원회가 주최하는 파티였기 때문에 섣불리 불참했다가는 의심을 받아 감옥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안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기 나라의 귀족들은 잡아다가 죽이면서 영국 귀족들에게는 파티를 열어주다니!"

"명색은 파티지만 무슨 속셈이 있는 거겠지!"

"말조심해. 공안위원회 귀에 잘못 전해졌다가는 우리들도 기요틴 행이야."

팔레 루아얄에 모인 영국 귀족들은 겉으로는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모두들 떨고 있었다.




마리벨도 앙투안과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

"알겠나, 마리벨? 한 사람 한 사람씩 남자들의 왼쪽 뺨을 자세히 살펴봐. 어제 죄수 호송 마차를 탈취해 간 마부는 왼쪽 뺨에 칼자국이 나 있었어. 그 자가 빨간 장미가 분명해!"

마리벨은 앙투안이 마음 내키지 않은 일만 시키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레미를 구하려는 노력임을 알고 있는 터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리벨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주위에 몰려들었다.

"마리벨! 당신의 소문은 영국에서도 굉장하다오!"

"용감한 혁명 배우 마리벨! 난 좀 우악스럽게 생긴 여성일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어."

그렇게 수작을 부리는 귀족들을 일일이 웃음으로 대하며 마리벨은 그들의 왼쪽 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왼쪽 뺨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앙투안은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모처럼 큰 비용을 들인 계획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다.

"빨간 장미는 여권이 없는 밀입국자일지도 모르지."

"아직 참석하지 않은 손님도 있잖아요. 더 두고 봐요."




그때 입구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누군가 인기 있는 귀족이 파티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공작님!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특히 젊은 여성들이 그 새로운 손님을 반기며 에워쌌다.

"공안위원회 파티는 너무 딱딱해서 재미가 없어요. 우리 술래잡기해요!"

"또 술래잡기야?"

"투덜거린 죄로 공작님이 첫 번째 술래야!"

모두들 손뼉을 치며 그 공작의 눈을 가리는 것이 멀찌감치 보였다.

"마리벨! 저 공작이라는 자가 빨간 장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마리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그날 빨간 장미의 아지트에서 보았던 빨간 장미의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내가 한번 확인해 보겠다!"

앙투안이 공작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공작은 자기가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술래잡기에만 열심이었다.

그가 한 소녀를 붙잡았다.

"오! 이 부드러운 손! 분명히 쥐느비에브 양이로군."

"미안하지만 틀렸어요, 공작님!"

그러면서 그 소녀는 공작을 힘껏 꼬집었다.

"절 쥐느비에브로 잘 못 알아맞힌 벌이예요."

"아! 이제 알았어. 틀림없이 엘마야, 맞았지?"

그러나 그녀는 이미 멀리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눈을 가린 채 허우적거리는 공작의 손에 앙투안이 일부러 잡혔다.

"이건 남자의 손이야! 미안하지만 내겐 동성애의 취미는 없으니까 좀 사양해 주시지!"

앙투안은 유심히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수건으로 눈을 가린 데다가 머리카락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앙투안은 하는 수 없이 마리벨에게로 돌아왔다.

"마리벨! 이번엔 네가 한번 알아보도록 해라!"

앙투안에게 떠밀리어 마리벨이 공작의 앞으로 갔다. 공작이 마리벨을 잡으려 하자 소녀들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공작님! 그 아가씨는!"

"안 되다니! 난 어느 아가씨든 다 알아맞힐 수가 있다고!"

공작은 그때까지 다른 여자들을 상대하는 때와는 달리 마리벨의 머리 냄새를 맡고 어깨와 허리를 마음대로 더듬어 내려갔다.

"너무하잖아요! 당신이 공작이면 공작이지!"

마리벨이 화를 내면서 공작의 눈을 가린 수건을 낚아채었다.

"아!"

공작과 마리벨은 동시에 놀라서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공작은 다름 아닌 로버트였다.

"마리벨!"

"로버트!"

로버트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너무도 뜻밖의 만남이었다.

"머리카락이 많... 이 자랐군! 키도 커지고... 어깨도... 가슴도... 그러나 그 다정한 푸른 눈은 그대로구나. 옛날의 마리벨 그대로야!"

두 사람은 와락 달려들어 껴안고는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뜻밖의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당신은 진짜 마리벨이겠지? 아!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로버트! 당신이 로버트인 것처럼 나도 진짜 마리벨이에요!"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원으로 나갔다.

"레안드르 후작은?"

"그는 죽었어요."

"그럼 지금은?"

"혼자예요."

"됐어! 결혼합시다!"

로버트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말했다.

"로버트! 당신에게는 마가렛 공주가 있잖아요?"

"아니오, 나도 혼자였소! 당신과 헤어진 후 내내 혼자였단다!"

마리벨은 멍하니 로버트의 팔에 안겨있었다. 로버트가 혼자였다니! 도대체 마가렛 공주는 어떻게 된 것일까?

마리벨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레안드르 그다음엔 줄리앙. 더군다나 줄리앙과는 헤어지던 날 밤 같이 밤을 지내지 않았던가!

'로버트! 난 순결한 여자가 못돼요.'

그러나 마리벨은 그 말만은 차마 고백할 수가 없었다.




로버트는 주저하는 마리벨을 끌고 막무가내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살롱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여러분이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나와 마리벨은 지금 여기서 정식으로 약혼을 발표합니다!"

'안 돼요, 그건! 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답니다.'

빨간 장미를 잡을 목적으로 열린 파티가 동생의 약혼식 파티로 변하는 것을 앙투안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앙투안도 로버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그림 접시 속의 얼굴과 꼭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작님! 약혼을 축하합니다!"

"약혼 파티도 아주 극적으로 하시는군요!"

사람들은 이 갑작스러운 파티의 의도가 두 사람의 약혼을 위해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로버트는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를 마리벨의 손에 끼워주었다. 마리벨은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

"자, 마리벨! 이제 남은 일은 하루빨리 런던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일뿐이오."

"영국이라고요?"

"물론이지. 내일이라도 건너가서 아버님 앞에서 결혼식을 올려야지!"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런던에서 헤어진 뒤로 로버트의 모습만 그리며 살아왔던 나날들!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꿈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다니! 모든 슬픔,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행복에 찬 미래뿐!

혁명이나 죽음, 재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사랑이 있었기에 마리벨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건 사랑, 로버트의 사랑 때문이었다.

비로소 마리벨은 앙투안을 쳐다볼 여유를 가졌다. 앙투안은 이 모든 소동을 눈을 아래로 깐 채로 귀로만 듣고 있는 듯했다.

"미안해요, 오빠!"

"..."

앙투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로버트! 앙투안 씨를 소개하겠어요!"

"반갑습니다, 앙투앙 씨!"

로버트가 앙투안을 껴안자 그제야 앙투안도 그를 와락 껴안았다.

"괜찮겠습니까? 저희 내일 영국으로 떠납니다!"

"공작! 그것만은 안 될 거요."

"무슨 이유로?"

앙투안은 말없이 창밖을 가리켰다. 몇 명의 경찰들이 마리벨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로버트, 전 감시를 받고 있답니다. 내일은 빨간 장미를 잡아야 하는 마지막 날이에요. 만약 내일까지 빨간 장미를 잡지 못하면 은인인 레미 그라탱과 전 혁명재판소로 끌려가야 한답니다."

로버트는 뜻하지 않은 마리벨의 말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무슨 까닭으로 당신 같은 혁명 배우가?"

"전, 레미와 함께 빨간 장미 일당으로 오해를 받고 있어요. 오해를 풀기 위해선 빨간 장미를 잡아야 해요."

로버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겠어, 마리벨! 내가 당신을 구해 주겠어!"

그러더니 로버트는 자기의 친구를 불렀다.

"에베크! 내가 다녀올 때까지 마리벨을 부탁한다!"

"어딜 가나, 로버트?"

"물론 그 레미라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지. 그렇지 않으면 앙투안 씨도 마리벨과 나의 영국행을 허락해 주지 않을 거야."

그러나 무슨 수로 로버트가 레미를 감옥에서 탈출시킨 단 말인가!

"그만두세요, 로버트! 그건 위험해요, 불가능해요!"

그러나 로버트는 주저하지 않고 떠났다.




프랑스혁명의 소식이 영국에 전해졌을 때 로버트는 곁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마리벨을 걱정했었다고 한다.

마리벨이 레안드르 후작과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던 로버트는 귀족들이 잡혀 죽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프랑스로 왔다. 마리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마리벨을 찾아 헤매다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에베크는 우선 마리벨과 생 쥐스트를 경찰의 미행자들을 따돌려서 자기가 알고 있는 영국 귀족의 집에 몰래 숨겼다.




이튿날은 앙투안이 빨간 장미를 잡아 주기로 약속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날이 밝자 드뉘브 검사는 마리벨과 생 쥐스트를 소환했다. 그러나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경찰이 두 사람을 놓쳤다는 보고를 듣자 노발대발했다.

"우선 레미를 사형시켜라!"

레미의 사형 집행은 정오에 혁명 광장으로 불리는 루이 15세 광장에서 기요틴으로 집행될 예정이었다.

귀족이 아니라 혁명군의 간부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기요틴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혁명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12시 5분 전, 레미를 태운 마차가 혁명 광장에 도착했다.

레미는 태연한 표정으로 단두대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그때였다.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단두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레미는 무죄예요! 레미를 살려주세요!"

마리벨이었다.

"마리벨! 난 상관할 것 없어. 빨리 도망쳐!"

단두대 위에서 레미가 애타게 부르짖었다.

"붙잡아라! 마리벨이다!"

마리벨 꼼짝없이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빨리 사형 집행해! 뭘 하고 있는 거야?"

단두대에 묶여 있는 레미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생긴 사형 집행인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걸어 올라갔다.

드디어 레미의 목이 기요틴 위에 놓이고 사형 집행인이 밧줄만 잡아당기면 칼날이 레미의 몸을 두 동강이로 내리칠 찰나, 사형 집행인이 갑자기 가슴을 만지며 뒤로 발랑 나가떨어졌다. 그의 가슴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빨간 장미가 꽂혀 있었다.

"빨간 장미다! 체포하라!"

빨간 장미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와 비호처럼 단두대 위에 오르더니 레미의 결박을 풀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꼼짝 마라, 빨간 장미! 움직이면 마리벨의 목숨은 없다!"

드뉘브가 마리벨을 옆구리에 끼고는 마리벨의 목에 단도를 겨누었다.

"전 상관없어요! 레미 씨를 데리고 어서 피하세요!"

그러나 빨간 장미는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칼을 빼들고 기요틴 위로 오르려는 경찰들만 제지할 뿐이었다.

"자, 보십시오! 마리벨과 레미 그라탱은 빨간 장미와 한 통속이었습니다!"

드뉘브가 모여 선 시민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난 마리벨이나 이 사람을 알지 못하오! 다만 나 때문에 애매한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구해주러 나왔을 뿐이오!"

빨간 장미도 목청을 다해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거짓말이오!"

드뉘브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기요틴을 에워싸고 빨간 장미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지만 승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시민들이었다. 혁명 굉장에 꽉 들어찬 수만 명의 시민의 협조 없이는 빨간 장미 일당도 경찰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민들은 드뉘브의 칼날 아래에서 떨고 있는 마리벨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민들은 마리벨을 왕당파와 내통한 반혁명 분자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마리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마리벨을 처음 본 것은 《아크로폴리스의 시민》에서였어!"

"난 《동백장의 텔레즈》야!"

"난 《귀족 만세》를 봤었어! 그날 마리벨은 오늘처럼 귀족들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귀족 만세 대신 프랑스 만세를 외쳤었지!"

"나도 그건 봤어!"

시민들의 마음은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군중 속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마리벨을 붙잡고 있는 드뉘브의 눈을 맞췄다.

"돌을 던진 자가 누구냐!"

화가 난 드뉘브가 길길이 날뛰자 그 사이를 틈타 마리벨이 재빨리 빠져나와 군중 속으로 숨었다.

"마리벨을 구해라!"

"그래 그래! 마리벨을 구하자!

"마리벨이 빨간 장미 일당이건 아니건 우리하고는 상관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배우 마리벨 구해라!"

"누가 마리벨을 마음대로 사형시킨대?"

"마리벨을 에워싸라!"

수천 명의 군중이 마리벨을 에워싸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 누구도 그들을 헤치고 마리벨에게 접근할 수는 없었다.

"안 되겠습니다, 검사님! 마리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빨간 장미를 잡아라!"

그러나 빨간 장미와 레미도 어느새 기요틴 위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마리벨을 호위하는 시민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했다.

"경찰은 우리가 막을 테니 어서 도망가요!"

"붙잡히면 안 돼요!"

"혁명의 열기가 식으면 꼭 돌아와서 다시 무대에 서 줘야 해요!"

"기다리겠어요, 마리벨!"

마리벨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요, 여러분! 프랑스 국민 만세!"

"프랑스 국민 만세!"

시민들은 경찰을 완전히 막은 뒤 안전한 곳에 이르자 마리벨을 놓아주었다.




에베크의 집에 마리벨이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레미와 앙투안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이제 마리벨은 로버트 함께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앙투안도 그것을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도 괜찮아요, 오빠?"

"물론이다, 가서 너의 행복을 찾아라!"

이제부터는 자신의 손으로 마리벨을 행복하게 해 줄 셈이었는데 로버트가 나타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마워요, 오빠! 그럼 정식으로 제 오빠로서 로버트와 인사하세요."

"안 된다, 마리벨! 그것만은 아직 비밀로 해야 해. 나와 네가 오누이란 것을 그 자가 알면 안 돼. 지금 영국 귀족들은 프랑스혁명을 두려워하고 있다. 난 이 혁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루이 16세를 사형으로 몰아넣었던 생 쥐스트는 '죽음의 대 천사'라는 별명이 붙어있듯이 유럽 귀족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프랑스는 가까운 장래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랜버트 공작 부인으로서 영국 귀족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마리벨이, 적국 간부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지면 입장이 거북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로버트의 입장도 거북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벨, 로버트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네 오빠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야 해."

"그러나 오빠, 로버트에게만은 사실을 말하고 싶어요. 로버트 얼마나 오빠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몰라요!"

" 안 돼, 그러면 로버트는 혼자 고민하게 돼."

앙투안과 레미는 에베크의 집을 떠났다.




잠시 후 로버트가 돌아왔다.

"마리벨! 당신이 오늘 혁명 광장에 갔었다는데..."

"레미가 죽는 걸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순 없었어요."

로버트는 마리벨의 뺨을 힘껏 때렸다.

"알겠어? 당신은 이제 당신 혼자의 몸이 아니야!"

에베크가 달려왔다.

"왜 이러나, 로버트! 다 내 잘못일세. 내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마리벨이 그만...."

로버트는 아직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그대로 잡혔으면 지금쯤 시체가 돼 버렸을 거야. 그런 위험한 짓을 하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라! 알겠어, 마리벨?"

마리벨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에게 따귀를 맞았지만 결코 슬퍼지는 않았다. 로버트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도 위험해! 어서 떠나자, 칼레 항으로!"

로버트와 마리벨 그리고 에베크를 태운 마차는 바람을 가르며 칼레 항을 향해 달렸다. 단지 3년 동안 프랑스를 떠나 있게 되는 것인데도 마리벨은 정말 프랑스를 떠나기가 싫었다. 프랑스는 마리벨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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