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33

잔느! 내 사랑 2/2

by 안녕
Épisode 31.


그 무렵 파리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국민 공회 도서실에서는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가 늦게까지 남아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생 쥐스트, 안색이 좋지 않군!"

로베스피에르가 문득 생 쥐스트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베스피에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 생 쥐스트는 마리벨을 생각하고 있었다. 런던으로 떠나보낸 후 소식이 없는 마리벨이 어쩐지 염려스러웠다.

"피곤해 보이는군. 미안하오, 생 쥐스트. 요즘 계속 밤을 새우도록 부탁해서... 오늘은 그만 들어가 푹 쉬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말해서 나도 이제 지쳤소. 이젠 쉬고 싶다오."

바스티유가 함락된 지 4년. 그동안 이 두 혁명가는 미친 듯이 치닫는 혁명의 물결을 바로잡기 위해 몸과 마음이 다 지치도록 일했다.




무척 쌀쌀한 날이었다.

생 쥐스트가 퇴근하던 무렵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숙소까지 지친 몸으로 힘없이 걸어가는 생 쥐스트 뒤에 몇 개의 그림자가 따르고 있었다.

"알겠지? 생 쥐스트를 잘 감시해야 돼. 마리벨이나 빨간 장미가 연락을 취할 거다!"

드뉘브는 생 쥐스트와 빨간 장미 사이엔 분명히 어떤 관련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꼭 꼬리를 잡아내고 말 테다!'

생 쥐스트는 뮤제트 거리의 자기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마리벨인가?"

여자의 목소리가 났기 때문에 생 쥐스트는 마리벨이 와 있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제 목소리가 마리벨을 닮았단 말인가요?"

"잔느 드 모로였다.

"잔느! 웬일이오?"

"루이 앙투안 프로렐 드 생 쥐스트! 단순한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역시 당신이었군요."

쫓기는 처지면서도 잔느는 무척 당당했다.

"용건이 뭐요?"

"마리벨을 만나고 싶어요."

"마리벨? 나도 만나고 싶소. 그러나 어디 있는지 모르오."

"소문으론 당신과 마리벨이 사랑하는 사이라던데?"

"사랑? 그건 헛소문이오."

"그럼 좋아요. 그러나 제 말을 전해 줄 수는 있겠죠?"

"행방을 모르는데 어떻게 말을 전할 수가 있겠소?"

"그렇다면 언젠가 만나게 되면 이렇게 전해 줘요. 다시 한번 승부를 겨루고 싶다고!"

"승부라고? 지난번처럼 같은 날 같은 연극으로?"

"그래요."

"그거라면 이미 승부가 끝나지 않았소? 마리벨은 무대를 포기했고 잔느는 끝까지 해냈으니 당신의 승리가 아니던가?"

"아니에요! 그건 마리벨 덕분에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무대였어요. 그건 내게 있어서 굴욕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한번 승부를 겨루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이나 마리벨이나 다 같이 경찰에 쫓기고 있는 몸이잖소! 어떻게 무대에 서겠다고..."

"이런 공포정치가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생 쥐스트는 잔느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생 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의 정권이 곧 무너지고 말리라는 너무나도 대담한 예언이었다.

"루이 16세는 억울하게 최후를 맞았지만 곧 루이 17세의 시대가 올 거예요. 귀족사회는 다시 부활합니다! 그래서 전과 같은 평화로운 시대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때 다시 한번 승부를 겨루자는 거지요!"

말을 마치자 잔느는 바로 일어서서 나가려고 했다.

"잔느! 잠깐만 기다려요."

"왜요?"

"지금 밖에 나가면 붙잡혀요. 마리벨의 행방을 찾는 경찰이 나를 뒤쫓고 있기 때문이오."

"혁명정부의 간부인 당신이 경찰에게 쫓기고 있다고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잔느는 생 쥐스트의 말을 거짓말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혁명정부 안에서도 생 쥐스트 일파를 미워하여 어떤 꼬투리든지 잡아서 그들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잔느! 당신이 나를 찾아온 진정한 목적을 말해 주시오."

"말했잖아요. 마리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그건 핑계요. 진짜 목적이 뭐요?"

"내가 바스티유로 보내려 했던 생 쥐스트와 혁명가 생 쥐스트가 같은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 동일 인물이라면?"

"이번에는 실수 없이 바스티유로 보내야죠."

"잔느, 바스티유는 이제 없어졌소."

생 쥐스트는 불타는 눈으로 잔느를 바라보았다. 처음 콩테 극장에서 쫓기다가 잔느의 도움을 받았을 때부터 생 쥐스트는 어쩐지 잔느에게 끌리고 있었다.

두 번째로 잔느에게 잡혀 다지르 후작 댁에 감금당했을 때도 생 쥐스트는 잔느의 심문을 받았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잔느였지만 생 쥐스트는 그런 그녀에게 적개심보다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매력은 도저히 보통 여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생 쥐스트는 와락 달려들어 잔느에게 키스했다. 잔느도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당히 긴 시간을 두 사람은 입술을 맞대고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키스가 끝나자마자 잔느는 다짜고짜 생 쥐스트의 따귀를 후려쳤다.

"잔느, 당신은 키스할 때마다 상대를 때리오?"

잔느는 분한 듯 눈물을 흘렸다.

"마리벨의 애인인 당신에게 이런 일을 당하다니!"

"잔느, 마리벨은 나의 누이동생이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잔느의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 쥐스트가 마리벨의 애인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질투의 감정까지 품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쫓기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생 쥐스트를 찾아왔던 것이다.

"자, 잔느! 이제 다시 나를 때리는 일은 없겠지!"

생 쥐스트는 소나기 같은 키스를 잔느의 얼굴에 퍼부었다. 폭풍 같은 키스가 끝났을 때 잔느의 얼굴에서는 그토록 교만하고 당당하던 표정이 싹 사라져 버렸다. 대신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어 생 쥐스트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 쥐스트의 아파트 밖에선 두 명의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에 잔느가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토록 추운 눈 내리는 밤에 소득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으라고 명령한 드뉘브 검사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이 추워!"

"이런 날에 밖에서 파수를 보라고 하다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올까?"

"그러다가 들키는 날이면 우리 모가지야."

경찰들은 불만을 가슴에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생 쥐스트의 아파트 정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생 쥐스트의 아파트 입구를 아까부터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웬일이야! 잔느가 너무 늦는 군!'

피에르는 그렇잖아도 생 쥐스트를 대하는 잔느의 태도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 쥐스트가 들어간 지도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 잔느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오로지 잔느만을 따라다니며 충성을 바쳐온 피에르의 가슴속엔 질투의 감정이 솟아 부글부글 끓었다. 저 어두운 방에서 두 사람이 하고 있을 짓을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피에르는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피에르는 살금살금 생 쥐스트의 아파트로 다가갔다.

'잔느! 만일 나를 버리고 생 쥐스트와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

아파트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야 잔느가 도둑고양이처럼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잔느인가?"

"..."

"너무 늦었잖아! 내가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끓어오르는 질투의 감정을 억누르고 피에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느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 흐릿한 눈물 자국이 있었다. 피에르는 자기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잔느! 생 쥐스트 그놈과 무슨 일이 있었어?"

피에르는 잔느의 얼굴을 쳐들고 똑바로 쏘아보았다.

"왜 이래요, 피에르!"

"내 눈은 속이지 못해! 어서 사실대로 말해!"

"사실대로 말하고 할 것도 없어요. 난 당신에게 말할 의무가 없으니까요!"

"뭐라고?"

그때 두 사람은 숨어있던 경찰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야!"

경찰들은 어둠 속에서도 잔느의 얼굴을 금세 알아보았다.

"잔느잖아!"

"달아나, 잔느!"

피에르가 경찰을 막고 있는 사이에 잔느는 눈길을 미끄러지며 달아났다. 호각 소리가 울리고 사방에서 숨어 있던 경찰들이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눈길 위에 쓰러져 있던 잔느를 말에 태우고 달리는 사람이 있었다.

"빨간 장미다!"

"잡아라!"

그러나 경찰이 빨간 장미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놈들아! 너희들에게 잡힐 빨간 장미라면 애초에 너희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빨간 장미는 잔느와 함께 종적을 감춰 버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국민 공회에 드뉘브가 나타났다.

"생 쥐스트 의원, 어젯밤 당신 집에서 잔느가 나왔소. 더욱 체포하려던 경찰의 손에서 잔느를 빼앗아 달아난 자는 빨간 장미였소. 이래도 그대가 빨간 장미와 관계가 없다고 시치미를 떼겠소?"

"허! 드뉘브 검사! 자신의 무능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애매한 내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군!"

드뉘브는 분통이 터졌다.

"로베스피에르 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생 쥐스트를 체포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생 쥐스트 의원을 체포한다고? 어째서!"

"생 쥐스트가 빨간 장미와 내통하여 귀족들을 도망시키고 있습니다."

"드뉘브 군! 생 쥐스트는 내 친구이며 동지이고 또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하는 소린가? 생 쥐스트를 내게서 떼어놓으려는 건 내게서 오른팔을 떼어놓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야! 어째서 이 로베스피에르는 빨간 장미의 일당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로베스피에르는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님, 최근 리옹에서 두 명의 귀족을 빨간 장미에게 빼앗겼습니다. 칼레에서도 노르도에서도 닷새 동안에 모두 일곱 명의 죄수를 빨간 장미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콩세르쥬리 감옥의 마리 앙투아네트까지도 빼앗길지 모릅니다!"

"드뉘브 군! 그대는 자신의 무능함을 지금 자랑하고 있는 건가? 빨간 장미를 잡으려다가 안 되니까 그 대신 내 친구 생 쥐스트를 잡아서 공을 세우겠다는 건가?"

로베스피에르를 움직여 생 쥐스트를 체포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드뉘브도 잘 알고 있었다. 드뉘브는 새로운 작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드뉘브가 알고 있는 빨간 장미의 정체는 그가 영국의 귀족이라는 한 가지 사실뿐이었다. 빨간 장미를 잡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드뉘브에게 한 가지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그것은 생 쥐스트 집 앞에서 잔느의 추종자인 피에르를 체포한 일이었다.

"그 피에르라는 자는 잔느가 달아났다는 걸 알고 있는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 좋아, 그 자를 풀어 줘라. 우리가 잔느를 체포한 것처럼 얘기해서 그가 빨간 장미의 정체를 알아 오지 않으면 잔느를 살려 주지 않겠다고 해!"

그날 피에르는 갑자기 풀려났다. 대신 피에르는 영국에 건너가서 빨간 장미의 정체를 알아오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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