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마리벨
Épisode 32.
이튿날 파리의 에베크 집에는 잔느를 비롯하여 일곱 명의 프랑스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영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망명을 결심했습니까?"
최후의 순간에 빨간 장미가 잔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잔느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프랑스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빨간 장미 님, 호의는 고맙지만... 전 영국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 당분간 숨어 있을 만한 집도 있습니다."
"알았소. 그러나 어제처럼 무리는 하지 마시오."
빨간 장미도 더 이상 잔느에게 영국으로 가자고 권유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마차가 도착했다.
장사꾼으로 마부로 늙은이로 각각 변장한 사람들이 허름한 마차에 올라탔다. 누가 보아도 파리에 곡식을 팔러 왔다가 돌아가는 시골 농부들처럼 보였다.
"조심해요, 잔느!"
"잘 가세요, 여러분!"
잔느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향해 한참 동안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칼레 항구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빨간 장미가 전용으로 쓰는 작은 어선 한 척이 항구에 머물고 있었다. 마차는 어선이 매어져 있는 선창가 부근에서 멈추었다.
"빨간 장미 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 수고했소, 선장. 별 일은 없었겠지?"
"네, 그런데... 아까부터 웬 청년 하나가 영국에 밀항하고 싶다는데 프랑스 귀족이라더군요."
"이리로 데려와 봐요."
선장은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당신이 밀항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저는 프랑스의 귀족입니다. 쫓기는 몸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그걸 믿지?"
그 사람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망명하기 위에 온 아르느 남작 부인이 피에르를 알아보았다.
"피에르 씨가 아니에요?"
"오, 아르느 남작 부인! 빨간 장미에게 나를 안다고 얘기 좀 해 줘요."
피에르는 겨우 살아났다는 듯 아르느 남작 부인에게 매달렸다.
빨간 장미님, 이 분은 잔느의 숭배자 피에르 씨예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쫓기는 몸이고요. 그러니 함께 데려가 주세요."
빨간 장미는 더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피에르라는 사람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칼레 항구까지 달아나 올 수 있었다면 다른 밀항선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자기 배를 타려는 것부터가 어쩐지 수상쩍었다.
약혼식장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로버트는 열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하인들은 로버트가 또 옛날처럼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모양이라고 수군댔다.
그러나 마리벨은 참고 기다렸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지난 몇 년 동안에도 마리벨은 언제나 기다리는 신세였다. 마리벨은 이제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기다리는 일은 예전과는 달랐다. 로버트가 화를 내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정말 로버트는 내가 생 쥐스트의 애인이라고 믿고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괴로워하자면 끝이 없었다 그래서 로버트가 없는 동안 마리벨은 하녀처럼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일을 하는 동안은 모든 괴로운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떠난 지 열하루째 되던 날 로버트가 드디어 돌아왔다. 마리벨이 반갑게 맞았지만 로버트는 가벼운 눈인사만 보내고는 곧장 랜버트 공작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프랑스의 망명 귀족들을 위한 모임에 초청을 받았는데 나 대신 너와 마리벨이 참석하거라."
"그런 일엔 관심 없습니다, 아버님!"
로버트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무슨 까닭이냐?"
"프랑스의 망명 귀족이라면 이젠 신물이 납니다. 그들은 나와 마리벨을 중상모략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로버트, 이건 명령이다. 꼭 둘이서 참석해야 돼!"
파티는 얼더스 백장의 저택에서 있었다. 파티가 끝난 후에는 연극 공연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마차 속에서도 로버트는 마리벨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백만장자인 얼더스 백작의 저택은 윈저 궁에 못지않게 으리으리했다. 얼더스 백작 부인은 프랑스 귀족의 딸이어서 망명한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많이 돕고 있었다.
로버트가 얼더스 백작 댁의 현관을 들어섰을 때 그를 보고 달려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형님! 어떻게 이곳에?"
프랑소와였다. 프랑소와는 로버트를 줄리앙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프랑소와 님!"
마리벨이 프랑소와를 껴안았다. 그제야 프랑소와는 그가 줄리앙이 아니고 로버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로버트 님! 제 형님 줄리앙과 너무도 닮으셔서!"
오랜만에 이국 땅에서 프랑소와를 만난 마리벨은 무척 감격스러웠다.
"로버트, 이 분이 제가 프랑스에 있을 때 절 도와준 다르 달랑 공작 댁의 막내아들인 프랑소와 님이세요."
"로버트 씨, 저도 당신의 이야기는 파리에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프랑스의 망명 귀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모두들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긴 뒤 말항선을 타고 건너온 사람이거나 기요틴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빨간 장미에게 구출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만나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화제는 자연히 빨간 장미에 대한 것으로 흘렀다.
"빨간 장미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지금쯤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을 걸세."
"소름 끼치는 일이었어. 그런데 빨간 장미를 만나게 해 줄 수는 없나요? 그분에게 감사드리고 싶어도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죠."
"저도 몰라요. 배가 영국에 닿자마자 그분은 사라지셨거든요."
아무도 빨간 장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빨간 장미는 더욱더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었다.
"정말 정의의 기사야!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도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들 틈에 숨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다니!"
그때까지 구석에서 조용히 혼자 앉아 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파리 경찰이 빨간 장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스파이를 파견했다고 하더군."
"피에르!"
누구보다도 마리벨이 깜짝 놀랐다. 피에르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마리벨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잡히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해."
"그게 누군데?"
"생 쥐스트의 애인이지!"
망명 귀족들은 모두들 마리벨 쪽을 쳐다보고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애매한 사람을 스파이로 몰지 말아요."
"프랑소와! 자네는 언제부터 마리벨 편이었나?"
"난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마리벨을 스파이로 모는 것을 보니 당신이야말로 의심스럽소!"
그때 얼더스 백작 부인이 나타나 말리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결투라도 벌일 기세였다.
곧 연극이 시작될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많이 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왜들 이러죠? 막이 오를 시간이 벌써 지났는데?"
"그러게 말이야."
"거지 역을 맡은 배우가 병이 났다는군요."
"어머나! 그럼 연극은 못하겠군요. 모처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리벨 양, 당신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명배우잖아요. 간단한 거지 역쯤은 문제없겠군요."
얼더스 백작 부인이 나서며 말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마리벨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다.
"좋아요. 저라도 상관없다면..."
마리벨이 서슴지 않고 나섰다.
"마리벨, 이건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함정이야."
"괜찮아요. 어떤 식으로든 연극을 다시 할 수 있다니 기쁘군요."
프랑소와가 말려봤지만 마리벨은 막무가내였다.
연극은 시작되었다. 마리벨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만큼 더러운 꼴로 분장하고 무대에 섰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저게 무슨 꼴이람."
"역시 천한 태생은 달라요. 거지 역이 아주 잘 어울리지 않아요?"
"실제로 저 여잔 저런 생활을 했을지도 모르죠!"
연극을 보면서 로버트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따위 거지 역할을 그토록 진지하게 연기하는 마리벨을 로버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버트는 더 이상 연극을 관람할 수 없었다. 로버트는 마리벨을 남겨두고 집으로 먼저 돌아버렸다.
랜버트 저택에는 방금 프랑스에서 날아든 편지 한 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취인이 마리벨로 되어 있는 그 편지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로버트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마리벨, 잘 있느냐. 지난번에 잔느로부터 네게 얘기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얼마 전 실패한 무대 위에서의 승부를 다시 한번 겨루고 싶다는구나...'
용건만 간단히 적은 편지였다. 이 편지로써 마리벨이 생 쥐스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딱 잡아뗀 건 거짓말이었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던가! 마리벨이 생 쥐스트의 애인? 그렇다면 마리벨이 빨간 장미의 정체를 밝히러 온 스파이란 것도 사실인가? 나를 우연히 만난 것으로 가장하여 나와 약혼하고 그렇게 해서 런던 사교계의 신임을 얻어 마음대로 스파이 활동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파리에서 공안위원회가 열었던 영국 귀족을 위한 파티부터가 빨간 장미를 찾아내기 위한 음모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리벨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로버트는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마리벨과 생 쥐스트가 관련이 없다는 것이 거짓이란 사실뿐이었다.
그날 로버트는 다시 런던을 떠났다. 항간에는 도버에 사는 애인과 함께 지내다 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마리벨은 그런 따위의 소문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로버트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마리벨은 베이커 거리의 프린시팔 극단을 찾아갔다. 얼더스 백작 부인의 파티에서 공연을 했던 극단이었다. 날마다 돌아오지 않는 로버트를 기다리느라고 속을 썩이느니 무슨 일거리든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프린시팔 극단의 단장 헨리 씨는 마리벨의 말을 듣고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뭐라고요? 연극을 하시겠다고요?"
내로라하는 랜버트 가의 며느리가 청하는 일이어서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할 일 없는 여자가 장난 삼아 그러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단장의 추측과는 달리 보통 열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헨리 단장은 마리벨에게 조그만 단역 하나를 맡기기로 했다.
마리벨이 연극에 출연하는 날 그녀는 랜버트 공작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안 된다! 귀족은 연극을 구경만 하는 거야. 내 며느리가 될 사람이 배우 흉내를 내다니!"
"공작님! 연극은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연극은 제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마리벨, 네게는 로버트가 있다. 로버트를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거라!"
"로버트 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전 이제 기다리는데 지쳤어요. 물론 로버트 님은 꼭 제게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가 없잖아요. 그때까지 만이라도..."
랜버트 공작은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그도 아들 로버트가 마리벨을 버려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을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프린시팔 극단에서 《사기꾼》을 공연하는 날이었다. 극장 앞에 으리으리한 쌍마차가 와서 멎었다. 랜버트 공작이 며느리의 첫 무대를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무대 뒤로 마리벨을 찾아갔던 랜버트 공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리벨이 무거운 소도구를 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벨, 연극에 출연한다더니 이건 심부름꾼이 아니냐?"
"연극에는 출연합니다. 그러나 무대 준비도 거들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의무랍니다."
랜버트 공작은 땀 흘려 일하는 마리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리벨에겐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더 어울리는구나!'
프린시팔 극장 앞에는 귀족들의 마차가 계속해서 당도했다. 휼 후작, 얼더스 백작 부부 등 런던 사교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단장 헨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 밖에 나가 귀족들을 맞이하느라고 허리를 펼 시간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리벨에게 좀 더 큰 역할을 맡기는 건데..."
프랑소와도 장미꽃을 한 아름 안고 분장실에 나타났다.
"마리벨! 런던에서의 첫 무대를 축하해요?"
"프랑소와 님! 와주셨군요!"
그 누구보다도 프랑소와가 와주었다는 사실이 마리벨을 기쁘게 했다. 마리벨은 항상 다르 달랑 가의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클라렌스 공과 그의 부인 마가렛 공주가 나타난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보잘것없던 프린시팔 극장에 런던 사교계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축하해요, 마리벨 님! 왕자님께 졸라서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마가렛 공주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마리벨을 껴안았다.
"그런데 로버트는?"
클라렌스가 로버트가 보이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마리벨은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러나 이제 곧 나타날 거요. 내가 오늘 여기에 꼭 참석하라고 명령을 했으니까."
마리벨은 그렇게까지 자기를 걱정해주는 클라렌스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전하, 이런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대에 잠깐 밖에 출연하지 않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리벨은 하녀 역을 맡아 차를 한 잔 나르고 들어가더니 연극이 끝날 때까지 다시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극이 다 끝날 때쯤 로버트가 나타났다. 로버트는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클라렌스 전하, 명령대로 로버트가 왔습니다!"
"로버트! 몹시 취했군!"
"물론이죠. 제 약혼녀의 첫 무대가 아닙니까? 그래서 미리 축하주를 좀 했습니다."
그러더니 로버트는 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술병을 꺼내어 마개를 땄다.
클라렌스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더니 로버트의 따귀를 힘껏 후려쳤다. 그러는 서슬에 술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어째서 마가렛 공주가 그대를 단념했는지를 모르나? 그대가 마리벨과 약혼하여 행복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이 꼴이 뭐야! 사랑하는 약혼자를 내팽개치고 거리를 쏘다니고... 그래도 그대가 사나이란 말인가!"
클라렌스가 호통을 쳐도 로버트는 도리어 빈정거리며 웃었다.
"클라렌스 전하, 전하야 말로 전하가 사랑하는 부인에게 손 한번 내밀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사나이인가요!"
이번에는 마리벨이 로버트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너무하잖아요, 로버트! 당신을 그토록 아끼시는 왕자님께 그런 심한 말을 하다니! 로버트! 당신은 옛날의 로버트가 아니에요!"
마리벨의 마지막 말은 차라리 흐느낌에 가까웠다.
"로버트! 자네에게 앞으로 한 달 동안 자택 근신을 명한다!"
클라렌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가렛 공주 함께 떠났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마리벨은 로버트에게 말했다.
"로버트, 깊이 생각해 봤어요. 저와의 약혼을 취소해 주세요."
로버트는 대답이 없었다. 멍하니 소파에 드러누워 있더니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마리벨은 짐을 싸가지고 랜버트 가를 나섰다. 매기가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마리벨 님, 어디로 가세요?"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랑스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런던에는 신세 질 만한 곳도 없었다.
"런던 시내에서 방을 구하고 연극이나 계속해 보겠어요."
"마리벨 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매기가 따라오며 소리쳤다.
"안돼요, 매기! 당신이 없으면 랜버트 가는 살림 맡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지만 마리벨 님을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마리벨 님이 절 쫓아내신다고 해도 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마리벨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그러지 말고 돌아가세요. 로버트 님도 마리벨 님을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로버트가 사랑하는 건 예전의 마리벨이에요. 지금의 마리벨이 아니라고요."
매기는 흐느껴 우는 마리벨을 품에 안았다. 16년 전 도버의 백양나무 별장에서 추위에 떨던 마리벨을 껴안듯이.
이제 마리벨은 어른이 되어 사랑 때문에 슬퍼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