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35

검은 장미 1/2

by 안녕
Épisode 33.


마리벨은 이스트엔드의 염색 공장에 취직을 했다. 매기가 자기의 친척을 통해 주선해 준 일자리였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프린시팔 극단에 나가 연극 연습을 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리벨은 오히려 좋았다. 바쁘다 보면 로버트의 생각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리벨이 로버트와의 약혼을 취소했다는 소문은 런던의 사교계에 쫙 퍼졌다.

"마리벨이 랜버트 댁에서 쫓겨났대요, 글쎄!"

"당연하죠, 로버트 님이 싫증을 냈을 테니까요."

"난 어제 이스트엔드 거리를 마차로 지나다가 마리벨을 봤어요. 거지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빨래통을 들고 가더군요."

프랑소와는 프랑스의 망명 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프링소와도 마리벨이 로버트와 파혼한 뒤에 말없이 랜버트 가를 떠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프랑소와 님, 어떻게 생각하시죠? 같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부끄럽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프랑소와가 부끄러워하는 건 망명 귀족들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마리벨이 거지 차림으로 나다니기 때문에 같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부끄럽다는 뜻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해서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마리벨에 비해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뜻이었다.

그즈음 프랑소와는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파티에 참석해 주는 대신 돈을 받는 그런 생활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그가 참석하는 파티에는 여인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해서 성대한 파티를 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를 고용하곤 했다.

"프랑소와, 돈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좋아요. 최고로 멋을 내고 참석해 줘요.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

그러면 프랑소와는 때로는 빨간 장미의 복장으로, 때로는 루이 16세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여 손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돼 버렸는가! 한낱 귀부인들의 접대용 밖에 안 된단 말인가!'

프랑소와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프랑소와는 드디어 결심했다. 마리벨처럼 땀 흘려 일하며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결심만 가지고는 우선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별수 없이 마리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스트엔드에 있다는 소문만 듣고 프랑소와는 마리벨을 찾아 나섰다. 마리벨을 찾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워낙 그녀가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이스트엔드의 일꾼들 중에 마리벨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 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만 하는 프랑스 여자 말인가요? 엘마네 염색 공장에 있어요. 저 가게 모퉁이를 돌아 첫 번째 집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프랑소와를 보고 마리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랑소와, 웬일이에요?"

"마리벨! 당신, 정말 여기에 있었군요."

온몸과 얼굴에 빨간 물감 칠을 한 마리벨을 보고 프랑소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내 꼴이 우습죠? 지금 런던에는 빨간 장미의 붐이 일고 있어요. 그래서 빨간색이 유행이랍니다. 스커트 감에서부터 속옷과 양말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빨간 색깔만 찾는답니다. 그래서 우리 염색 공장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프랑소와는 부탁을 하려고 찾아오긴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이세요? 무슨 일이라도?"

"마리벨... 사실은... 나도 여기서 일 좀 하면 안 될까?"

"일손이 부족하니까 일할 사람을 구하고는 있어요. 하지만 프랑소와가 일을 감당해내지 못할 거예요."

"마음먹기에 달린 거죠. 여자인 당신이 하는 일을 내가 못 할 거야 없지 않겠소?"

마리벨은 프랑소와에게 허름한 옷을 입혀 공장장에게 데려갔다.

"좋아. 마리벨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지. 내일 아침부터 공장에 나오게."

그렇게 해서 프랑소와는 단번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프랑소와가 잠잘 곳이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마리벨, 급료가 나오면 방을 하나 빌릴 테니 당분간은 당신 집에서 재워줘."

"그렇게 하세요."

마리벨은 파리에서 줄리앙과 함께 지냈을 때처럼 방에 커튼을 치고 침대를 하나 들여놓으면 되리라 생각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매기는 그 소리를 듣고는 펄쩍 뛰며 말렸다.

"뭐라고? 안 돼요!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빌려 줄 테니까 차라리 방을 구해요."

"왜 그래요, 매기?"

"왜 그러긴! 내가 뭐 때문에 마리벨 님을 따라 나왔는데? 로버트 님 외에는 다른 사람이 마리벨 님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거예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한은 안 돼요!"

프랑소와는 기가 막히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마리벨이 살고 있는 건물에 빈 방이 있어서 쉽게 방을 빌릴 수가 있었다.




그 날부터 프랑소와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식사는 마리벨, 매기와 함께 했지만 빨래만은 제 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자 온종일 일에 시달려 녹초가 된 프랑소와가 저녁을 먹으러 마리벨의 방으로 왔다.

"마리벨, 정말 힘들군. 이제야 평민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가엾어라, 프랑소와 님!"

"하지만 문제없어요. 난 이런 기회에 평민들의 생활을 알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으니까."

프랑소와는 생각보다는 잘 견디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공장 안에서도 가장 열심히 일하는 편에 들었다. 다음 달부터는 일할씩 급료를 올려 주겠노라고 공장장이 얘기할 정도였다.




마리벨에게는 즐거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런던에서도 일류 극단인 코벤트가든 극단에서 스카우트를 제의해 왔던 것이다.

코벤트가든 극장의 단장인 고든이 프린시팔 극단에 구경하러 갔다가 마리벨의 재능을 발견하고 즉석에서 코벤트가든에 오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보수도 프린시팔 극단의 두 배나 주겠다는 것이었으므로 마리벨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코벤트가든 극단의 여배우들은 마리벨을 시기했다.

"단장님!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풋내기에게 그런 중요한 역을 맡기는 건 모험이 아니겠어요?"

"모험이지! 그러나 내 눈이 틀림없다면 그녀는 큰 재목이야."

"하지만 단장님, 잘못 생각하신 것 같아요."

"괜히 질투하지 말고 자기가 맡은 역이나 잘하라고!"




마리벨이 코벤트가든에서 처음으로 맡은 역은 《시골 아가씨》라는 작품의 조연이었다.

무대에 마리벨을 내보내면서 단장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리벨, 실수 없이 잘하라고!"

그러나 단장의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금세 증명이 되었다. 그렇게 큰 코벤트가든 극장 무대에 처음 서면서도 마리벨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연기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연극이 끝났을 때 주연 여배우를 제치고 관객들은 마리벨의 이름을 외쳐댔다.

"마리벨? 혹시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이 아닐까?"

"농담의 말씀! 그 유명한 마리벨이 뭣하러 영국에 와서 무대에 서겠습니까?"

"아니야! 그녀도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어!"

"아무튼 한번 물어나 보시죠. 손해 될 건 없으니까."

단장과 지배인은 무대에서 내려오는 마리벨을 불러 세웠다.

"이봐요.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활동하던 마리벨이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마리벨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역시 그랬었군!"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숨겼죠?"

"그런 걸 꼭 말해야 하나요?"

"물론이지. 미리 알았더라면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을 텐데...."

그때까지 마리벨을 시기하던 여배우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마리벨을 얼싸안았다.

"멋져요, 마리벨! 코메디 프랑세즈의 마리벨과 우리가 함께 공연할 수 있었다니!"

단장도 입이 크게 벌어졌다.

"마리벨 양, 당신의 보수를 열 배로 올려 주겠소. 그 대신 다른 극단에 갈 생각은 말아요."




그 무렵 프랑스에서 한 손님이 피에르를 찾아왔다. 드뉘브가 보낸 사람이었다.

"빨간 장미는 여전히 프랑스에서 날뛰고 있다. 더욱 소문으로는 프랑스에 있는 왕당파 세력과 공모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를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피에르! 이달 12일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이 시작된다. 그때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빨간 장미의 정체를 밝혀 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잔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통보다. 그걸 분명히 전했네."

드뉘브의 심부름꾼이 돌아가고 나서 피에르는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그때까지 빨간 장미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를 써 봤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그가 영국의 귀족이라는 사실뿐. 그러나 영국 귀족이 어디 하나 둘인가.

더군다나 빨간 장미는 프랑스에만 나타나고 있다. 런던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 온 것부터가 잘못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런던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타나도록 유인하면 된다!'

피에르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빨간 장미는 프랑스 귀족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 영국에 있는 프랑스 망명 귀족들의 생명이 위태롭다면 빨간 장미는 영국에 나타날 것이 틀림없었다.

피에르는 영국 내 프랑스 망명 귀족을 하나씩 살해해 버리기로 했다.




그날 저녁 프랑소와는 짐수레 가득히 빨갛게 염색한 옷감을 실어다가 빨랫줄에 너는 일을 간신히 마쳤다. 프랑소와가 지친 몸으로 빈 수레를 창고에 두고 나오려는데 함박웃음을 머금은 마리벨이 막아섰다.

"프랑소와, 오늘 저녁은 런던 최고의 식당에서 외식해요."

"미쳤어, 마리벨? 우리의 수입을 한 달치 몽땅 바친다고 해도 한 끼밖에 먹지 못할 거야!"

"괜찮아요. 내가 한턱낼게요. 이달부터 나의 급료를 열 배나 올려주겠다고 코벤트가든 극단장 고든 씨가 말했거든요. 방금 계약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서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최고로 멋을 내고 웨스트엔드의 루아얄 레스토랑에 갔다.

그러나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로버트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헬렌이라는 미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가요, 프랑소와!"

프랑소와도 로버트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다른 데로 가서 식사해요, 프랑소와."

"안 돼요, 마리벨! 로버트를 혼내줄 테요. 당신을 차 버리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다니!"

두 사람은 문간에서 서로 끌고 다니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로버트와 헬렌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저것 보셔요, 로버트 님. 마리벨이 나타났어요. 프랑소와와 함께!"

"나도 보고 있소."

"약혼을 취소당하고도 런던에 나다니다니! 마리벨은 정말 얼굴이 두꺼운 여자로군요!"

"헬렌, 약혼을 취소당한 건 오히려 내 쪽이야."

마리벨은 간신히 프랑소와를 끌고 밖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마리벨, 이유 없이 약혼을 취소당하고도 분하지 않단 말이야?"

"프랑소와, 약혼을 취소한 건 로버트가 아니고 바로 나예요."

"마리벨, 내가 로버트를 끌고 나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요."

"안 돼요!"

"로버트가 당신을 끝내 못 본 체하면 내가 당신을 맡겠다고 말해 주겠어요."

마리벨이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리벨을 길가에 세워놓고 프랑소와는 루아얄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비명이 들렸다. 프랑소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마리벨이 달려갔을 때 프랑소와는 길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다. 프랑소와를 일으켜 세우려는 그녀의 손에 뜨거운 피가 끈적거리며 만져졌다.

"오, 하느님!"

로버트가 비명을 듣고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마리벨!"

그러나 대답이 필요 없었다. 프랑소와의 시체 옆에 검은 장미 한 송이가 편지 한 장과 함께 놓여 있었다.

'다음 표적은 아나톨 공작이다. 검은 장미.'

"검은 장미?"

매우 음산한 기분이 드는 이름이었다.

프랑소와의 시체를 마리벨의 아파트에 옮겨 놓고 로버트는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 빨간 장미의 흉내를 내고 있어. 그의 활동을 견제하려는 자의 소행이 분명해."

로버트는 검은 장미의 편지를 마리벨에게 쥐어주었다.

"이것을 아나톨 공작에게 보여주고 조심하라고 일러주시오. 난 급히 프랑스로 떠나야 해."

"로버트, 프랑스에 가거든 생 쥐스트에게..."

"미안하지만 난 파리에는 가지 않아."




이튿날 프랑소와의 장례식은 염색공장 직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히 치러졌다. 레안드르부터 시작해서 몇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렀던가! 마리벨은 눈물조차도 말라버린 거 같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마리벨은 아나톨 공작이 신세를 지고 있는 틸러 남작 댁을 찾아갔다.

"검은 장미? 애들 장난이야! 실없는 놈의 짓이지."

아나톨 공작은 검은 장미의 편지를 보더니 한마디로 코웃음을 쳐 버렸다.

"하지만 공작님, 프랑소와도 검은 장미에게 살해됐어요!"

아나톨 공작은 마리벨을 노려보았다.

"프랑소와를 죽인 건 당신이 아닌가요? 빨간 장미의 정체를 알아 내려는 스파이가 바로 당신이라던데!"

"그건 오해예요, 공작님."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어서 돌아가시오!"

아나톨 공작은 마리벨을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마리벨이 그곳을 떠나기도 전에 아나톨 공작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벨이 되돌아가 문을 열자 칼에 심장을 맞은 아나톨 공작이 현관에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나톨 공작을 죽인 건 당신이죠?"

"아니에요. 제가 돌아가려다가 비명을 듣고 돌아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거짓말! 지금까지 아나톨 공작과 단 둘이 있었던 건 당신이야. 마리벨을 체포해라!"

"맞았어! 프랑소와가 살해되었을 때도 이 여자가 옆에 있었어."

그때 피에르가 사람들을 제지했다.

"난 이 여자가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여자가 죽였다면 의심받을 줄 뻔히 알면서 시체 옆에 그냥 있었겠소?"

"그렇다면 범인은?"

아나톨 공작의 시체 밑에는 역시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다음 표적은 돈반 남작이다. 검은 장미.'

"역시 검은 장미로구나!"

"어떤 놈일까? 검은 장미란 자는?"

"모르지. 하지만 파리에서 온 스파이인 것만은 분명해."

"놈은 망명 귀족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모두들 조심해야 돼!"

"모두들 돈반 남작에게 가자. 그를 경호해야지!"

피에르는 마리벨을 현관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러나 마리벨은 하나도 고맙지가 않았다.

"왜 그러지, 마리벨? 레안드르의 죽음 때문에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피에르의 소매 끝에 묻은 핏자국을 마리벨은 보았다.




돈반 남작은 작달막한 키에 대머리가 훌렁 까진 사람이었다. 자기를 노린다는 검은 장미의 편지를 보자 그의 대머리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돈반 남작! 좀 침작하시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우리들이 이렇게 지키고 있지 않소."

"그러나..."

"우리들을 믿지 못한단 말이오?"

돈반 남작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도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덜덜 떨고 있었다.




하루 해가 다 지도록 돈반 남작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 아무리 검은 장미라 해도 지키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쩌지는 못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갑자기 돈반 남작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오, 돈반 남작?"

"... 실은 어제저녁부터 무서워서... 화장실에도 못 갔다오."

"하하... 어서 다녀오시오. 그렇게 검은 장미를 무서워해서야 원..."

피에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돈반 남작은 오리걸음으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하... 꼬박 하루 동안 참았다면 지금쯤 무척 시원하시겠구먼!"

경호하러 온 사람들도 함께 껄껄 웃고 있었다.

"으아악!"

갑자기 화장실 쪽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남작이 당했다!"

사람들이 모두 화장실로 몰려갔다. 거기에는 심장에 칼이 꽂힌 돈반 남작이 뻗어있었다.

"역시 검은 장미야!"

돈반 남작의 가슴 위에도 검은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틸러 남작 댁의 별실 창문을 넘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장미였다.

검은 장미는 재빨리 복면을 벗어 감추고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망토를 벗으려다 말고 피에르는 창문 쪽의 커튼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누구야!"

커튼 속에서 나온 사람은 마리벨이었다.

"역시 검은 장미는 당신이었군요!"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지?"

"어제저녁 아나톨 공작 댁에서... 당신의 소매 끝에 묻은 피를 봤어요."

"하하... 마리벨, 그대는 역시 영리한 여자야!"

"왜 당신과 같은 귀족들을 죽이나요?"

"잔느 때문이다. 잔느가 체포되어 있어. 잔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잔느?"

"공안위원회에 체포되어 있어. 빨간 장미의 정체를 알려 주면 잔느를 살려주겠다고 드뉘브 검사가 약속했어."

"그렇다고 귀족들을 죽여요?"

"빨간 장미는 파리에만 나타나고 런던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러나 망명 귀족들을 살해하면 언젠가 빨간 장미는 런던에 나타날 것이다!"

마리벨의 얼굴엔 독기가 서렸다.

"레안드르의 원수! 프랑소와의 원수! 내 칼을 받아라"

마리벨은 비수를 곧추 세우고 정면에서 피에르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마리벨은 피에르에게 팔목을 잡히고 말았다.

"어리석은 것! 네가 감히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

팔을 꺾인 마리벨은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마리벨은 눈을 감고 피에르의 칼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에르는 마리벨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자, 어서 꺼져!"

"왜 날 놓아주는 거죠? 검은 장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를?"

"너를 살려 두는 게 내겐 유리해. 다른 귀족들이 널 스파이로 의심하면 난 행동하기가 더 편하니까."

"그러나 당신이 스파이라고, 검은 장미라고 얘기해 버릴 텐데도요?"

"그렇게 해 보시지. 그럼 난 검은 장미는 마리벨이라고 말하지. 망명 귀족들이 그대와 나 중에 누구의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마리벨은 복수를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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