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마지막 무대!
Épisode 35.
마리벨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9월 28일 밤 10시 경이었다. 최선을 다해 달려왔지만 그 이상 빨리 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넓은 파리에서 어떻게 로버트를 만난단 말인가! 그저 다시 만날 때까지 로버트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리엔 여전히 혁명의 열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시민들이 몰려다니고 함성이 시내의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마리벨은 우선 옛날에 살았던 아파트에 거처를 정하고 로버트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놀라운 기사가 신문에 났다.
[외국인을 포함한 반혁명 분자 일당 열명 체포]
'어제 오후 네시 콩세르쥬리에 감금된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출하려던 반혁명 분자 일당 열명이 체포되었다. 빨간 장미로 가장했던 영국인 귀족 로버트가 지휘하는 이들은 사전에 경찰에게 발각되어 일망타진되었다. 체포된 열명 중에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배우였던 잔느 드 모로도 있었다. 경찰은 탈출한 두목 빨간 장미 로버트를 전국에 수배 중이다.'
마리벨은 로버트가 아직은 체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가 헬렌과 결혼하기 위해 파리에 온 것이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출하러 왔었다는 사실도 그 기사를 읽은 후에 깨달았다.
마리벨은 그때까지 로버트를 원망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심하게 꾸짖었다. 알고 보니 로버트는 빨간 장미로서 파리에서 활동하기 위해 술주정뱅이와 바람둥이로 가장하여 자기 곁에서 떠나 있었던 거였다. 그런 로버트에게 파혼을 요구했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생각되었고 부끄러웠다.
'가엾은 로버트! 클라렌스 공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기까지 하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정체를 감추다니!'
설사 로버트가 있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마리벨은 그 앞에 나설 면목이 없었다.
마리벨은 전에 다니던 세탁소에 찾아가 다시 일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로버트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간간이 빨간 장미가 나타나 귀족을 구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그가 아직 살아서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만이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10월 16일 아침, 시민들은 혁명광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마리벨은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아가씨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오스트리아 여인을 사형시키는 날이 바로 오늘이잖소."
"오스트리아 여인?"
"허 참! 왕비 말이오, 마리 앙투아네트!"
그날 열두 시 혁명 광장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기요틴에서 사형될 예정이었다.
이날 국경인 와티니에서의 전투는 프랑스 군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각에 사형되었다.
구경꾼들은 많았지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워낙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잔느도 같은 처지가 될게 틀림없었다. 마리벨은 오빠를 만나 잔느를 구해달라고 호소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 건물 앞에서 마리벨은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그 일은 오빠의 입장을 거북하게 만들 뿐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섣불리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체포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무렵 공안위원회 내부에선 당파끼리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죽이고 죽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10월 31일에는 자끄 피에르 브리소 등 지롱드 파 의원 21명이 숙청되었고 11월 8일에는 여류 명사인 롤랑 부인이 그리고 일주일 후에는 오를레앙 공작이 혁명 광장에서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드디어 잔느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날 생 쥐스트는 일선 지구에 나가 있다가 한밤중에 파리로 돌아와 잔느의 재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혁명 재판소에 출정했다.
"피고인 잔느 드 모로, 다지르 후작의 딸, 왕당파 소속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배우!"
잔느가 호명되어 피고인 석에 섰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잔느는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일어나 재판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검사의 논고가 시작되었다.
"피고인 잔느 드 모로는 9월 27일 빨간 장미와 공모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를 탈취, 우리 혁명정부를 전복하고 왕권을 부활시키려는 목적으로..."
두 말할 것도 없이 잔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잔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피고인에게 묻겠다. 빨간 장미와는 어떤 관계인가?"
"모릅니다!"
"사실대로 털어놔. 그대는 체포되기 직전까지 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릅니다!"
"다 털어놔, 잔느! 그렇지 않으면 사형이다!"
"모릅니다!"
잔느는 모든 질문에 대해 한마디로 잘라 대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좋다. 이 법정 안에 피고와 각별히 친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모릅니다."
잔느를 몰아세우고 있는 사람은 앙투안과 적대관계에 있는 혁명가 조르쥬 당통이었다. 그는 잔느의 입을 통해 앙투안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겠다. 피고 잔느는 공안위원회 의원 생 쥐스트와..."
그러자 배심원 석의 르 바가 당통의 말을 막으며 일어섰다.
"재판장! 이건 재판이 아니고 인신공격이오! 모함입니다! 엉터리 스캔들을 조작해서 생 쥐스트를 제거하려는 음모입니다!"
그러나 당통도 지지 않았다.
"르 바 씨, 이건 조작된 일이 아니오. 잔느와 생 쥐스트는..."
"입 닥쳐라, 당통!"
"이미 오래전부터 잔느는 생 쥐스트의 아파트를 은밀하게 출입하고 있었소. 이건 경찰의 조사 기록에도..."
"생 쥐스트의 인기를 시기하고 있구먼, 당통!"
"치사하다, 당통!"
"계속해라, 당통!"
재판장은 순식간에 두 파로 갈라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재판장은 도저히 재판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폐정! 폐정이다! 잔느의 재판은 며칠 뒤에 다시 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폐정한다!"
르 바를 비롯한 생 쥐스트 옹호파들은 격분하고 있었다.
"당통 녀석!"
"우리 자코뱅 파를 타도하기 위해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인 생 쥐스트를 모함하는 거야!"
간수에게 끌려나가는 잔느를 향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릴리아나였다.
"잔느! 오, 잔느!"
잔느가 돌아보자 릴리아나는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릴리아나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더니 잔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간수들을 따라나갔다.
"오! 잔느! 내..."
멀어져 가는 잔느를 보며 릴리아나는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친구들과 헤어져 앙투안은 법정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미 재판이 시작될 무렵부터 방청석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마리벨을 알아보았다. 마리벨은 비록 검은 가발을 쓰고 변장을 했지만 오빠인 앙투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앙투안은 마리벨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리벨!"
"쉿!
자기의 이름이 불리자 마리벨은 기겁을 하며 앙투안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앙투안은 여유 있는 자세로 물었다.
"왜 그렇게 떨지? 가발까지 뒤집어쓰고. 꼴이 그게 뭐야?"
"조용하세요! 전 지금 지명수배자란 말이에요."
"지명수배자?"
앙투안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마리벨은 오금이 저려 왔다.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리벨과 빨간 장미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공안위원회에서 이미 알고 있어. 너의 지명수배는 취소된 지 오래야!"
"그게 정말이에요?"
"따라서 넌 가발 없이도 '내가 마리벨이오' 하고 떳떳하게 대낮에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거야."
마리벨은 너무도 기뻐서 쓰고 있던 가발을 벗어 센 강에 집어던졌다.
"오빠!"
"마리벨! 그동안 많이 여위었구나."
오누이는 오랜만에 만난 터라 할 말이 너무도 많았다.
마리벨과 앙투안이 앉아 있는 강변의 벤치로 웬 여자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생 쥐스트!"
앙투안이 돌아다보니 아까 법정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는 여자였다.
"릴리아나!"
그러나 앙투안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생 쥐스트! 날 기억 못 해요? 그럴지도 모르죠. 어렸을 때 헤어지고 못 만났으니!"
앙투안은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잊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어!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난 늘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삶의 의미를 찾곤 했어. 당신을 찾아내어 우리 오누이의 원수를... 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어. 꺼져 버려!"
그제야 마리벨은 어렴풋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릴리아나는 옛날 생 쥐스트 집안의 하녀로 있던 여자였다.
"가자, 마리벨! 저 여자가 우리 오누이를 죽이려 했던 그 여자다!"
"네?"
마리벨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릴리아나가 생 쥐스트 집안의 하녀였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후처로서 어린 두 남매를 죽이도록 뱃사람들에게 부탁한 악독한 여자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생 쥐스트! 나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잔느만은... 잔느만은 제발 살려 줘요!"
마리벨과 앙투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릴리아나가 잔느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가!
"당신은 공안위원회 의원이니까 잔느를 살릴 수 있어요. 잔느는 나의 딸이랍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잔느는 나의 딸, 즉 당신네들의 형제예요!"
"거짓말!"
그렇게 말하는 생 쥐스트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생 쥐스트 대위인 당신의 아버지와 하녀였던 나 사이에 태어난 잔느는 태어나자마자 남의 집에 맡겨져서 컸던 거예요."
릴리아나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앙투안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와 박혔다. 잔느가 릴리아나의 딸이라면 자기와는 배다른 형제였다!
"오빠! 그게 정말이에요?"
마리벨도 앙투안의 품에 안겨 떨고 있었다.
"그렇다, 마리벨. 잔느는 너에게 언니가 된단다!"
어느덧 릴리아나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담겨 있었다. 앙투안이 잔느를 누이동생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잔느를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거니 하고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꺼져버려요! 설사 잔느가 내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당신 같은 마녀 하고는 상관이 없어! 얼른 꺼지지 않으면 강물에 처넣을 테야!"
"생 쥐스트! 잊지 말아요, 잔느를!"
릴리아나는 마귀할멈처럼 스산한 웃음을 머금으며 어두워져 가는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센 강 위에 떨어지는 커다란 눈송이들은 금세 강물로 변해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 위에 내리는 눈은 허망했다. 그러나 전혀 더럽혀지거나 짓밟히지 않은 채 사라지는 그 눈들이 도리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리벨의 어깨를 꼭 껴안고 앙투안은 그 옛날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얘기해 주었다.
"옛날엔 말이야, 우린 즐거웠단다. 남들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도 계셨고 특히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프랑스 군의 대위셨단다."
앙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요양을 가신 사이에 하녀가 여자아이를 낳았단다. 어린 나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 좁은 시골 바닥이라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아버지는 그 아기를 남의 집에 맡기도록 하셨단다. 어머니도 그 소문을 듣고는 병이 다 낫지 않은 채 돌아오셨지. 생 쥐스트 집안의 하녀가 주인의 딸을 낳았다는 소문 때문이었어. 아름답지만 허약했던 어머니는 널 낳으시자마자 돌아가셨단다. 아름다운 어머니! 라벤더의 꽃님!"
생 쥐스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뒤 릴리아나가 아버지의 후처로 들어왔지. 그녀도 한동안은 얌전히 지내더니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시자 날마다 귀족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단다. 아버지가 전사하신 뒤부터는 우리를 아예 대놓고 학대하기 시작했어."
"어느 날 한 귀족이 그녀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나는 들었어. '저 두 아이를 내쫓아요. 그럼 생 쥐스트의 재산은 모두 당신 것이오. 그리고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삽시다!' 그게 바로 몰락한 귀족인 다지르 후작이었어. 우린 칼레 항구에서 화물선에 실려 도버에 버려진 거야. 그러나 릴리아나도 결국 다지르 후작에게 우리의 재산만 빼앗긴 채 몇 년 가지 못해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어."
"그럼 그때 릴리아나가 낳은 아기가 잔느란 말이에요?"
앙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아나의 말로는 그렇다는 거지."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다. 레안드르의 원수인 잔느가 자신의 언니라니!"
"거짓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외쳐봤자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리벨은 앙투안의 품에 파묻혀 한참 동안 슬피 흐느꼈다.
"자, 이제 일어서자. 로베스피에르의 집에서 모이기로 한 시간이다. 마리벨, 혼자 갈 수 있겠지?"
아직도 센 강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리벨, 네 아파트에 가서 먼저 자고 있어."
앙투안은 마리벨을 남겨둔 채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레안드르를 죽게 한 잔느! 그리하여 마리벨에게 연극에의 열정을 심어준 잔느!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를 보여주었고 복수의 씨앗을 자라게 해 주었던 잔느!
마리벨은 모든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응접실에는 르 바를 비롯한 자코뱅 파의 거물급들이 모여 있었다. 막강한 힘으로 도전해 오는 당통 파에게 대처하기 위한 전략을 의논하려는 모임이었다.
"여러분, 당통은 생 쥐스트와 잔느의 스캔들을 조작해서 우리 자코뱅 파를 제거하려 하고 있소."
"그렇소. 사태는 매우 심각하오."
"이 난간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생 쥐스트 본인에게 달려있소."
모두들 앙투안 쪽을 쳐다보았다. 앙투안은 말없이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죽은 자는 말을 못 한다. 잔느를 변호할 게 아니라 그녀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처치해 버리는 게 상책이야!"
앙투안은 고개를 홱 돌려 그렇게 말하는 르 바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생 쥐스트! 그게 싫으면 다른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하네. 그건 자네가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잔느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보여 줘야 해."
그때까지 말없이 창문에 기대어 서 있던 앙투안이 천천히 사람들 앞으로 걸어왔다.
"동지들! 난 잔느를 살려야 하오. 내가 그녀를 살리려는 건 당통이 의심하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오. 그 까닭을 이 자리에서 밝힐 순 없지만 그대들이 내 입장이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잔느를 살려야 할 거요."
묵묵히 듣고 있던 로베스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생 쥐스트, 잔느는 명백한 반혁명 범죄행위를 저질렀소. 마리 앙투아네트를 탈취하려 했소."
"알고 있소, 로베스피에르. 그렇더라도 난 잔느를 살려야 하오!"
로베스피에르는 입장이 난처했다. 잔느가 사형을 당하고 생 쥐스트가 제거되면 로베스피에르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얘기해 보시오! 잔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르 바가 일어섰다.
"생 쥐스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시오. 그러면 우린 당통을 반역 의사가 있는 자라고 추궁할 수가 있소. 그 혼란을 틈타서 잔느는 국외로 내 보내면 되오!"
모두들 앙투안을 쳐다봤다.
"어떤가, 생 쥐스트? 잔느를 살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은 그것뿐이오."
앙투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잔느를 생각했다. 일생에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자 잔느.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기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정은... 내가 잔느를 만난 다음에 하겠소!"
앙투안은 회의실을 걸어 나갔다.
"당통 님! 공안위원회에서 잔느를 조사하겠다고 왔습니다."
"조사관은 누군가?"
"생 쥐스트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보나 마나 잔느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계속 부인하라고 말하려고 온 거야. 잔느가 생 쥐스트의 아파트를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정을 통해 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거든."
당통은 앙투안을 들어오게 했다.
"생 쥐스트 군, 자네가 잔느를 조사하겠다고?"
"그렇소, 공안위원회가 나를 조사관으로 임명했소."
"좋아. 그러나 조사하는 자리에 나의 부하 데물랭이 입회할 걸세. 이의는 없겠지?"
"물론이오!"
생 쥐스트는 데물랭과 함께 잔느가 갇혀 있는 방으로 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앙투안은 데물랭의 머리를 내리쳐서 기절시켜 버렸다.
"잔느!"
감옥 속에서도 잔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앙투안은 힘껏 잔느를 껴안았다.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그리고 여동생으로서. 너무나 큰 감동과 슬픔 때문에 그토록 냉정한 앙투안은 콧날이 시큰거려 왔다.
"잔느! 내 말 똑똑히 들어! 로베스피에르가 말하길,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조건으로 네 목숨을 보장하겠다고."
잔느가 앙투안의 품 속을 빠져나와 벽에 붙어 섰다. 그리고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재빨리 말했다.
"생 쥐스트! 당신이 나 이외의 여성을 아내로 삼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요!"
앙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잠시 생 쥐스트는 그녀와 자기가 오누이 사이라는 걸 알려 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결혼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잔느로서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잔느가 그걸 믿어 줄 리가 없었다. 설사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자존심이 강한 잔느는 도리어 고집을 부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 잔느를 그대로 죽게 하자! 그것이 이 여자를 위한 길이다! 잔느? 넌 더 이상 생 쥐스트가 오라비라는 사실을 모르고 죽게 될 것이다. 생 쥐스트를 네 애인으로 생각하고 죽을 것이다. 네가 끝까지 행복한 여자로서 일생을 마치게 해 주마!'
앙투안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알겠어, 잔느! 얘기는 끝났다!"
"생 쥐스트!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앙투안이 돌아섰다.
"이별의 얘기가 남았어요."
그러면서 잔느는 앙투안의 목에 매달렸다.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앙투안이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어루만졌고 잔느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앙투안이 돌아가고 나자 경찰은 잔느를 아베이 감옥으로 호송할 준비를 했다. 빨간 장미가 잔느를 탈취하러 온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튼튼한 감옥이 필요했다.
"드뉘브 검사님, 감옥은 여기도 허술하지 않습니다. 자꾸 옮겨 다니다가는 오히려 빨간 장미에게 기회를 줄 뿐입니다!"
"바보 같은 놈! 명령대로 해!"
두대의 죄수 호송 마차가 도착하자 잔느 일행이 불려 나왔다. 서너 명의 경찰이 죄수들을 끌어내어 마차에 태웠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탈취하려던 중죄인을 호송하는 마차 치고는 경비가 너무 허술했다.
그때 건너편 2층 건물의 지붕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서너 명의 날쌘 사내들이 죄수 호송 마차로 뛰어내려왔다. 경찰들이 칼을 빼들었지만 그들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빨간 장미!"
"잔느 양!"
빨간 장미 일당이 경찰을 밀어내고 마차를 통째로 탈취해 달아나려는 참이었다. 사방에서 갑자기 수백 명의 경찰들이 튀어나와 마차를 에워쌌다.
"하하... 빨간 장미! 이럴 줄 알고 널 기다리고 있었다!"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수백 명의 무장 경찰 앞에서 빨간 장미도 무력한 존재였다. 빨간 장미는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뭐야! 빨간 장미가 아주 애송일세!"
복면을 벗기니 로버트의 앳된 얼굴이 나타났다. 경찰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로버트 랜버트, 너의 활동은 우리의 비밀조직이 뒤쫓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 밤의 계획은 우리에게 환히 드러나 있었던 거야."
드뉘브는 득의양양해서 뇌까렸다.
"그동안 꽤도 우리의 속을 썩였지. 이제부터 단단히 복수를 해 줄 테다. 잘 묶어서 감옥에 처넣어라!"
잔느 일행과 그들을 구하러 왔던 로버트 일행은 다 같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잔느는 그동안 몇 차례 빨간 장미와 연락을 가졌었지만 이렇게 복면을 벗은 얼굴을 대하긴 처음이었다.
잔느는 로버트의 젊고 씩씩한 모습에 속으로 감탄하면서 아까운 나이에 이국 땅에서 자기들과 함께 죽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빨간 장미 님, 저 때문에 이렇게 되셨으니 면목이 없군요."
"천만에! 도리어 9월 27일에 제가 시간을 지키지 못해 왕비님을 구하지 못한 것을 사과합니다.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당신은 꼭 구해 드리겠습니다."
잡혀있는 몸이면서도 로버트는 빨간 장미답게 여유만만했다.
아베이 감옥 입구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갑자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저희들끼리 서로 총을 들이대고 체포하는 것이 아닌가!
"잔느 양, 이 감옥 경비병의 반은 이미 우리 부하들로 바꿔져 있습니다. 일단 붙잡힌 체했다가 틈을 봐서 탈출하려던 계획이었죠."
경비병으로 변장한 로버트의 부하들이 느닷없이 총을 들이대는 통에 감옥은 로버트의 부하들에게 금세 점령되었다.
"자, 잔느 양, 우리와 함께 어서 탈출합시다."
그런데 잔느가 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잔느 양, 어서 달아납시다! 군대가 몰려오고 있어요!"
그래도 잔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봐요, 잔느! 우리 모두가 당신을 위해 생명을 걸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요!"
"미안해요, 빨간 장미 님!"
"당신은 이미... 죽을 각오가...?"
잔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가 다가오며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여자야, 잔느는...'
로버트는 맨 끝으로 말 위에 올라타고 힘껏 말 허리를 찼다.
잔느는 다시 혁명 재판소의 법정에 섰다. 그녀는 빨간 장미의 일도 생 쥐스트의 일도 일체 모른다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결국 잔느에겐 사형이 구형되었다.
"잔느를 구해 줘요, 오빠!"
앙투안은 마리벨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구해 줘요! 잔느가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잔느는 꼭 한 번은 나와 대결을 해야 해요. 난 레안드르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요."
"마리벨! 잔느가 죽으면 레안드르의 원수는 저절로 갚아지는 것이야!"
"아니에요. 난 무대 위에서만 레안드르의 원수를 갚을 수가 있어요! 내 손으로 그걸 꼭 이루어야 해요!"
그날은 바람도 없고 눈도 내리지 않은 슬프도록 따뜻한 겨울 날씨였다.
잔느를 태운 마차가 혁명 광장을 향해 떠날 때 거리의 창문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잔느를 구경했다.
"잔느다!"
"잔느가 기요틴으로 끌려간다!"
마차를 따라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중에는 마리벨도 끼어있었다.
드디어 죄수 호송 마차가 혁명 광장의 기요틴 앞에 당도했다.
그날 처형될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잔느! 죽으면 안 돼요!"
마리벨이 그녀를 향해 소리지르자 잔느가 웃음을 머금고 마리벨을 돌아다보았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날씨가 추워지려는 모양이에요. 어서 돌아가요, 마리벨!"
"왜 죽으려는 거예요? 당신 입으로 다시 한번 승부를 하자고 해 놓고!"
"돌아가요, 마리벨! 당신은 영원히 나를 이길 수가 없어요!"
경비병이 마구 떠다밀어도 마리벨은 필사적으로 잔느를 향해 다가갔다.
세명의 죄수가 차례로 기요틴에 목이 잘렸다. 이제 잔느의 차례였다.
잔느가 계단을 딛고 기요틴을 향해 올라갔다. 한 사람이 그녀를 향해 꽃을 던졌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른 사람들도 잔느를 향해 꽃을 던지기 시작했다.
"잔느!"
"잔느!"
잔느는 그녀의 이름을 외쳐대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리벨이 경비병의 제지를 뚫고 잔느에게 다가갔다.
"잔느! 죽으면 안 돼, 잔느!"
그러나 잔느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똑똑히 봐요. 이것이... 나의 마지막 무대예요!"
마지막 무대? 마리벨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마지막 무대라고? 그래서 잔느는 그토록 죽기를 바랐던 말인가?
마리벨은 두 다리의 힘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잔느!"
"잔느!"
잔느의 이름을 외쳐대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군중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
잔느! 스무여섯 살의 그녀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왕답게 파리 시민들을 자기의 마지막 무대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세상의 어느 배우도 해낼 수 없었던 연기를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위대한 배우는 무대 위에서 죽는다. 레안드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잔느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마리벨은 완전히 패배한 것이다.
한동안 군중들은 기요틴 옆을 떠나지 않고 잔느의 이름을 불러 댔다. 그들은 잔느를 반혁명 분자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배우로서 더 오래 기억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군중들 속에는 앙투안의 비통한 모습도 보였다.
"생 쥐스트! 웬일이오? 애인의 처형을 보러 오다니!"
"..."
앙투안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과연 '죽음의 대천사'라는 그대의 별명에 손색이 없군. 자기 애인의 사형을 태연히 구경할 수 있다니!"
당통과 드뉘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광장을 떠나갔다.
저녁노을이 드리워진 광장에는 어느새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나와 뛰놀고 있었다.
그러나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앙투안과 마리벨은 한없이 눈물짓고 서있었다.
오누이는 말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눈물이 메말라 붙어 뻣뻣해진 마리벨의 얼굴에 앙투안은 자기의 볼을 비볐다.
앙투안, 그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