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마리벨 1/2
Épisode 36.
그날 밤 로버트 일행은 파리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선술집에 모여 있었다. 노인으로 변장한 에베크가 들어서자 일행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로 몰렸다.
"잔느 양이 오늘 낮에 혁명광장에서 사형당했어!"
"알 수 없는 일이야. 그 여자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우리와 함께 탈출했으면 영국으로 망명해서 연극도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외국에 망명해서 사는 것 자체를 그 여자의 자존심이 거부한 거야!"
"난 자존심이 없길 잘했네. 자존심이 있었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뻔했어."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로버트도 잔느를 생각하고 있었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왕으로서 죽는 편이 그녀에게는 크나큰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마리벨과 비슷한 여자를 사형장에서 봤어!"
"마리벨을 봤다고? 그녀는 프랑스에 있어!"
"아냐! 머리카락 색깔만 달랐을 뿐 영락없는 마리벨이었다니까!"
"그렇다면 그게 진짜 마리벨일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로버트가 갑자기 돌아서서 사람들을 노려봤다.
"로버트, 마리벨이 파리에 있다잖아. 마리벨이 생 쥐스트의 애인이란 소문이 사실인가 봐! 그래서 우리들의 정체가 탄로 난 거야!"
"입 닥쳐! 에베크!"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버트의 가슴은 메어질 듯했다. 마리벨을 검은 장미의 스파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자기의 정체가 드러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자기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검은 장미인 피에르와 마리벨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피에르는 죽었으니 그 사실을 퍼뜨릴 사람은 마리벨밖엔 없었다.
'마리벨이 파리에 와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얼까? 내가 빨간 장미라는 것을 안 이상 런던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던 걸까? 그래서 파리로 와서 나의 정체를 공안위원회에 보고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런던에서 클라렌스 공이 윈저 궁에서 보호해 주겠다는데도 마리벨이 굳이 달아나 검은 장미에게 붙잡혔던 일도 수상했다.
'그것도 나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는 마리벨을 믿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렇게 마음을 약하게 갖는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마리벨의 아파트에선 앙투안과 마리벨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리벨은 마리벨대로 앙투안은 앙투안대로 잔느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벨, 이리 가까이 오렴!"
비로소 앙투안이 다정한 목소리로 마리벨을 불렀다.
"이런 미치광이 혁명이 언제 끝난다는 거죠?"
그건 앙투안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미쳐있어요. 제정신이 아니에요. 국왕도 왕비도 귀족도 마구 잡아 죽이고! 이번에는 혁명가들끼리 서로 죽이고..."
그건 사실이었다. 공안위원회와 국민의회의 대립,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대립으로 희생된 동지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무엇 때문에 잔느를 죽였나요?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손을 잡고 언니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을!"
"마리벨! 잔느가 우리의 형제라는 건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
"그러나 사실일지도 몰라요. 아니, 틀림없는 사실일 거예요!"
"마리벨! 잔느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앙투안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나 보죠? 기요틴에서 죽어간 잔느가 누이동생이라면 혁명가로서 입장이 거북해지기 때문이었겠죠! 그래서 잔느를 구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거로군요?"
말없이 마리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앙투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리벨의 따귀를 올려 부쳤다.
"잔느는... 평생을 걸고 내가 사랑했던 오직 한 사람의 여인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벨의 입은 얼어붙었다. 앙투안의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바스티유에 보내려 했던 여인을 오빠가 사랑했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였나? 다지르 후작 댁에서 떠돌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처음 만났을 때? 앙제의 말로 극단에 잔느가 찾아왔을 때?'
"너를 찾기 위해 콩테 극장에 갔다가 난 경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었지. 그때 난 잔느의 분장실로 숨어 들어갔었어! 그때 잔느가 날 구해 줬어! 그날 그녀와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첫 키스를 나눴었다!"
"그랬었군요. 그렇다면 잔느가 그토록 오빠를 잡으려고 했던 건 바스티유로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려는 욕심에서였군요."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렸다.
'로버트가 나를 사랑하듯 오빠는 잔느를 사랑했군요. 아! 가엾은 앙투앙!'
마리벨은 눈물 없이는 오빠의 모습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그를 오해하고 미워했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어떤 식으로 사죄를 해야 할지 마리벨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애인을 기요틴으로 보낸 남자! 그러면서도 자기의 동생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남자! 그런 남자가 자기의 오빠 앙투안이었다.
마리벨은 미안한 마음에 앙투안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오빠를 힘껏 안아 주고 싶었다.
앙투안의 눈망울이 흐려졌다.
"마리벨! 얼굴을 저쪽으로 돌려줘!"
마리벨은 시키는 대로 했다. 앙투안은 울고 있었다. 앙투안은 눈물을 동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벨! 그 흰 꽃이 지금도 피고 있을까?"
"네?"
어느새 앙투안의 얼굴은 평소의 온화함을 되찾고 있었다.
"왜 있잖아, 도버의 백양나무 언덕에 피어 있던 흰 꽃! 아! 넌 그때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아니에요! 기억하고 말고요.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는 꽃이죠. 지금은 다 지고 없을 거예요."
"요즘은 왠지 그 언덕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럼 당장 가요, 내일 당장! 어서 여길 떠나요, 오빠. 이대로 혁명가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다간 언젠가는 오빠도..."
"걱정 마라, 마리벨.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넌 빨리 런던으로 돌아가거라. 반드시 로버트한테 돌아가야 한다."
"싫어요, 오빠!"
이번에는 마리벨이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파리 시내 곳곳에 로버트의 몽타주가 나붙었다. 현상금이 천 프랑이나 걸려 있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마리벨!"
그 수배 전단지를 바라보며 에베크가 중얼거렸다.
"로버트! 한시바삐 파리를 떠나는 게 좋겠어!"
"뭘 꾸물거리나! 여기서 잡히게 되면 개죽음을 당하게 돼. 혁명가들끼리의 싸움은 이미 시작됐어. 우리들이 더 이상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야!"
"아직도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나? 널 속이고 배반까지 한 마리벨이게?"
"그런 여자는 생 쥐스트에게나 알맞은 여자야!"
로버트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 미련 없이 파리를 훌쩍 떠나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신은 영원히 마리벨을 원망하며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배반한 마리벨! 그러나 아무리 객관적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믿기는 싫었다. 아니 믿어지지 않았다.
로버트는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번 마리벨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도 편안해질 것 같았다.
혁명가들의 싸움은 날로 치열해져 갔다.
3월 24일 이미 자끄 르네 에베르 등 에베르 파가 처형되었고 4월 5일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조르쥬 당통과 까미유 데물랭 등의 자코 파가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너희들도 곧 나처럼 되고 말 것이다!"
당통은 기요틴에서 그렇게 외쳤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너무도 빨리 실현되었다.
운명의 7월 27일, 아침이 밝았다.
앙투안은 밤을 새우며 연설 원고의 초안을 작성했다. 아침이 되자 앙투안은 운동 삼아 승마를 즐기고 돌아왔다. 날씨는 매우 흐렸지만 기온이 높아 아침부터 후덥지근했다.
"마리벨, 지금쯤 도버의 언덕엔 흰 꽃이 만발하겠지?"
마리벨은 오빠의 여유 있는 태도가 미웠다. 그즈음 마리벨은 오빠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국민공회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오늘은 안 나가면 안 되나요?"
"왜?"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날씨도 그렇고..."
"쓸데없는 소리! 오늘 회의는 아주 중요해. 이제 그 회의만 끝나면 한동안은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 그럼 도버에도 다녀올 수가 있을 거야."
"그럼 오늘 밤 안으로 파리를 떠나 내일 아침엔 칼레 항구에서 배를 탈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난 이제부터 준비하고 오빠를 기다릴게요."
그러나 앙투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마리벨! 이것 좀 맡아 줘. 잔느의 머리카락이다."
그때까지 기대에 차 있던 마리벨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
"언젠가 잔느를 도버의 언덕에 묻어주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잔느 혼자라면 쓸쓸하겠지?"
그러면서 앙투안은 자기의 머리카락도 한 움큼 잘라냈다.
"오빠!"
자기의 머리카락을 내밀면서도 앙투안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건 내 마음이야."
"오빠!"
"내 손으로 묻기가 쑥스러웠단다. 그 하얀 꽃이 피는 언덕에 나와 잔느를 함께 묻어다오. 그 날이야 말로 나와 잔느가 떳떳하게 맺어지는 날, 나와 잔느의 결혼식 날인 셈이야."
앙투안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받아 쥐며 마리벨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몸을 떨었다.
"부탁해, 마리벨. 아! 이제야 겨우 안심할 수 있게 되었구나! 흰 꽃에 파묻혀 손발을 마음껏 뻗고 잔느와 단 둘이서 잠잘 수 있을 거야!"
어느덧 마리벨은 울고 있었다. 그런 마리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앙투안은 쾅하는 문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줄리앙도 저렇게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 이상하다! 왜 갑자기 줄리앙이 생각나는 걸까?'
생각할수록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리벨은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도버로 떠날 채비를 하기로 했다.
앙투안이 집을 나와서 막 첫 번째 골목을 돌아서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왔다. 로버트였다.
"조용히 하시오, 생 쥐스트!"
로버트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죽일 생각은 아니오. 대답만 해 주시오. 마리벨을 사랑하는가?"
"물론!"
"마리벨과 결혼할 예정인가?"
"그건 틀렸어. 난 마리벨과 결혼할 생각은 없소."
"왜?"
"아마 그녀의 대답도 나와 마찬가지일 거요."
"그렇다면 어째서 마리벨과 함께 사는 것이오?"
"우스운 질문이군. 가서 직접 물어보시오, 로버트 군. 난 대단히 바쁜 사람이니까!"
멍하니 서 있는 로버트를 남겨두고 앙투안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게 무슨 뜻이지? 옆에서 보기에 시샘이 날만큼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가슴은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의 말이 농담이란 말인가?"
"로버트! 그것보다 국민공회의 움직임이 좀 이상한 것 같아.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가 방청석을 자기네 심복들로 채웠어..."
"그것 참 수상한데? 그러면 생 쥐스트가 위험하지 않을까?"
"로버트! 무엇 때문에 자기를 배반한 여자의 애인까지 걱정하나? 바보 같은 짓이야!"
"바보짓? 좋아! 이왕 바보가 된 바에야 철저히 바보가 되어 주지."
로버트는 국민공회 회의장으로 달려갔다. 방청석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로버트는 간신히 한쪽 구석에 앉을 수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앙투안은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로 몰고 있는 반 로베스피에르 파와 로베스피에르 파를 화해시킬 생각이었다.
앙투안이 발언권을 얻어 일어섰다.
"여러분! 공화국은 이제야말로..."
"이제야말로 어떻단 말인가! 공화국이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소유가 되었단 말인가? 공화국은 로베스피에르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야!"
자끄 니꼴라 비요 바렌 의원은 앙투안의 발언을 방해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의장! 본인이 발언하고 있는 중이오!"
앙투안이 항의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생 쥐스트! 자네도 로베스피에르의 후계자로서 독재자 노릇을 하겠다는 뜻인가!"
비요 바렌 의원은 제멋대로 발언했고 의장도 그걸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앙투안의 연설이 자기네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회의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앙투안은 발언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폭군을 타도하자!"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하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들과 한 편이었다.
※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기요틴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