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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8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by 안녕
MEMENTO MORI




가끔 새벽 3시의 풍경과 마주할 때가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불이 켜진 집이 보이면 문득 궁금했다.

'이 시간에 들어온 것일까?'
'이 시간에 나가는 것일까?'

퇴근이 늦어진 거였어도 슬펐으니 차라리 늦게까지 안 자고 있는 것이었으면 싶었다. 더구나 출근을 위해 일찍 일어난 것이라면 그 삶도 참 고단하겠다 싶어 마음이 쓰였고 그래서 더 우울했다.

밤은 모두가 잠든, 그냥 깜깜한 밤이었으면 싶었다.




어렸을 때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댁 고양이가 새끼를 낳자 부모님이 그중 예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 그렇게 우리 집의 애완묘가 된 나비는 집 안팎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집안 곳곳에 털을 날리며 다녔다. 그래서 아버지가 엄청 싫어하셨는데 어느 날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비벼대며 아버지의 바지에 털을 잔뜩 묻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분노하셨고 나비를 집어던지셨다. 그 후 나비는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

나비와 단둘이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방 한가운데 나비가 앉아있었다. 난 방 귀퉁이에 자리 잡고 누웠는데 나비가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이 거슬려서 그날따라 나도 나비를 같이 쳐다봤다. 둘 사이의 신경전이 시작되었고 나도 오기가 생겨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후, 나비는 나비처럼 날아와 내 손을 물어버렸다. 너무 놀란 나는 그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비는 스스로가 나보다 서열이 높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후 나는 나비를 피해 다녔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나비는 집에 없었다. 그동안 집 안팎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니던 나비는 우리 집의 골칫덩이가 되어있었다. 결국 나비는 어디론가 팔려갔다는데 지금까지도 내 꿈에 종종 나타나곤 했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나비에게 생긴 상처는 흉터마저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동물을 키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홀로 지내니 누군가 있었으면 했지만 반려 동물을 키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 하나 먹고살기 힘든데 살아있는 동물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동물을 사주기도 했고 스스로 키우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은 아이러니하게도 햄스터 두 마리였다.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근처 항운회사 직원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햄스터 한쌍을 선물했다.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왠지 정이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키워야 했다. 휴가 때 부모님 댁에 데리고 갔는데 햄스터가 교대로 쳇바퀴를 도는 모습을 아버지가 밤새워 지켜보더라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통통하고 예쁜 한 마리는 '뽀', 왠지 날카로운 다른 한 마리는 '쭈'라고 이름 지었다. 쭈는 점점 야위어가고 있었다. 통통한 뽀가 먹이를 다 뺏어먹는 것은 아닐까 신경이 쓰였고 야윈 쭈가 왠지 안쓰러워 손으로 집어 들었는데 순간 내 손을 물어버렸다. 내 마음도 모르고 예민하게 반응한 녀석이 미웠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 후, 자고 일어나 보니 통통한 햄스터가 죽어있었다. 전날까지도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기에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내 손을 물었던 전적이 있었으니 쭈가 의심스러웠지만 물증은 없었다. 한 공간에 둘만 있으려니 왠지 두려웠지만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버렸는지 쭈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불광동 시장에 토끼 장사꾼이 있었다. 하얗고 예쁜 토끼들 사이에 아주 새까만 토끼 한 마리가 있었는데 다들 무섭다고 싫어했다. 왠지 혼자 외면받고 있는 것 같아 그 토끼를 집으로 데려왔다. '까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고 배춧잎을 가져다주며 나름 정성을 쏟았다. 그러다 매번 먹는 배추가 질리지 않을까 싶어 비스킷을 하나 주었는데 모처럼의 특별식을 너무나도 잘 먹었다. 하지만 며칠 후 까망이는 죽어버렸다.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어릴 때 가져보지 못했던 커다란 곰인형을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 와있던 고향 친구들, 동창들과 자연스레 뭉치게 되었는데 친구 중 하나가 갑자기 선물이라며 강아지 한 마리를 모임에 데리고 왔다. 학교 다닐 때는 서로 알지도 못했던 친구였고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된 친구라 그 깜짝 선물이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들었기에 그 선물을 받기가 부담스러웠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사온 생명체를 거절하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품에 쏙 안겨온 그 강아지에게 난 그대로 빠져버렸다. 요크셔테리어 종 강아지는 어릴 때는 짙은 어두운 빛깔의 털을 가졌지만 점차 자라면서 빛나는 베이지 색으로 바뀐다고 했다. 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던, 너무나 예쁜 강아지였다. 그렇게 준비도 없이 반려견과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털이 빠지지 않아 알레르기로 고생하던 나에게도 문제없었다. 나의 꿈이었던 그 강아지에게 '夢'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날 바로 목욕을 시키고 내 침대에서 데리고 자고 싶었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여 목욕을 시키지 않았다. 방바닥에 몽이 이부자리를 만들어 주었지만 몽이는 내 침대 위에 올라오려고 떼를 썼다. 한참을 안 자고 보채어 바닥으로 손을 뻗어주자 내 손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일주일 후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예방주사 접종 관련 스케줄을 확인하고 예약했다. 목욕과 미용을 시키고 돌아왔고 이날부터 침대 위, 내 베개 옆이 몽이의 잠자리가 되었다.

휴가 때 몽이를 부모님 댁에 데리고 갔는데 사람을 잘 따르는 몽이를 부모님 두 분 다 좋아하셨다. 외출했다 돌아올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과할 정도로 반기는 몽이를 너무 예뻐하셨고 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올 땐 몽이는 두고 가라고 요구하시기도 하셨다. 마당과 집안을 힘차게 뛰어다니는 모습에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난 몽이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외로움을 타는 몽이는 출근할 때마다 내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큰길에 나올 때까지도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보통 개들은 분리불안증이 생기면 짖는다고 했지만 몽이는 구슬프게 울었다. 그래서 골목에 주저앉아 울음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끝내 멈추지 않아 결국 집으로 되돌아갔던 적도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 혼자 두고 다녀야 했지만 집에서 직장까지 도보 5분 거리였던 탓에 수시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직을 하면서 이마저도 할 수 없게 되자 부모님 댁으로 보내기로 했다. 좁은 원룸보다 마당이 있고 하루 종일 사람이 있는 부모님 댁이 몽이에게도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전시회가 계속 있어서 휴일이 없었던 탓에 군무원으로 있던 친구가 고향으로 갈 때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용산역에서 만나 기차에 태워 보냈는데 군용 기차다 보니 군대 가는 들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속에 함께 서있으니 마치 나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이가 탄 기차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내가 울 때마다 눈물을 핥아주며 곁을 지키던 몽이는 그렇게 서울을 떠났다.

몽이는 넘치는 애교만큼 부모님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머니는 누군가 자신을 때리면 몽이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대견해하셨다. 아버지에게 한번 때리는 시늉을 해보라고 했고 그러자 몽이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덤빌 듯이 짖어댔다. 평소에 얼마나 그런 상황이 자주 있었으면 그 조그만 동물도 알아차렸을까 싶어 참 씁쓸했지만 몽이라도 어머니를 잘 지켜주길 바랐다.

몽이는 열 살이 넘어가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스스로도 그 상황을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보면 좋아서 펄쩍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 데려가니 기관지 협착증이라며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단다. 하지만 그 약을 먹게 되면 심장에 무리가 올 거라고 해서 무척 고민이 되었지만 당장 숨 쉬기 힘들어하니 약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한 달에 십만 원 가까이하는 약값 따위는 아깝지 않았다.

이직한 직장에 적응하고 직장 가까이 이사하게 되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지만 12년을 다닌 그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도 결국 몽이를 데리고 오지는 못했다.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는 여행을 갈 때 맡길 곳이 없었고 그 후에는 몽이가 아프면서 죽음 이후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어느 날, 이 아이도 곧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처음 했던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그렇게 절반의 슬픔을 미리 당겨 아파했고 마음속으로 몽이와의 이별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까미노에서 돌아왔을 때 몽이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부담감에 가지 않았다. 발톱도 빠지고 몸도 지치고 마음도 쉬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음에 가면 되지 뭐.'

까만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이 보였다. 그들은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몽이가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부르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이리 오라고 불렀지만 몽이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몽이의 표정이 오묘했다. 아쉬움과 슬픔이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 다시 걸어갔다. 환한 빛이 비치는 그 길을 몽이는 걸어갔고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뒤늦게 몽이를 애타게 불렀지만 몽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몽이를 부르다 잠에서 깼다.

여느 때처럼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을 때 내색하지 못했고 일상적인 대화만 오갔다. 꿈이 계속 생각났지만 애써 태연한 척 몽이는 별일 없냐고 물었다. 옆에서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에 집중하며 쳐다보고 있다고 하셔서 안도했다. 그때 어머니가 갑자기 집에는 안 올 거냐고 물으셨다. 그 질문에는 매번 '다음에 갈게'라고 답했지만 그날따라 웬일인지 나도 모르게 "안 가!"라고 말해버렸다. 어머니도 더 이상 강요는 하지 않으셨고 몽이와의 저녁 산책을 위해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 3시간 후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전화가 그날따라 두려웠다. 전화를 받자 부모님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동생이 몽이의 마지막을 전해주었다.

어머니는 전화를 끊고 몽이와 산책 준비를 하셨다. 보통 그 시간에 집에 없었던 동생도 휴가를 앞두고 짐을 챙기러 잠시 들른 상황이었고 아버지도 그날따라 집에 계셨다. 여느 때처럼 신이 나서 먼저 달려 나가던 몽이가 집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하니 집으로 돌아가자는 듯 뒤돌아서 걷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계신 아버지가 왜 다시 돌아오냐고 하니 그런 아버지를 한번 쳐다보더니 조용히 동생 방으로 가서 동생까지 한번 쳐다보고는 쓰러졌고 그대로 숨이 멎어버렸다. 몽이는 우리 곁에서 14년을 살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족은 패닉 상태가 되었고 그렇게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던 거였다. 7월 30일 그날은 몹시도 더운 날이었고 이미 몽이의 쉼터를 봐 둔 터라 그날 밤 바로 몽이의 장례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던 몽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멀리 있는 나에게는 꿈에서 인사하러 왔었나 보다. 어쩜 내가 오길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안 간다고 하니 몽이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모양이다.

이후 몇 달 동안 부모님 댁은 수시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밥을 먹다가도 몽이 생각에 울음바다가 되었고 몽이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울음이 터졌다. 이를 지켜본 동생이 걱정이 되어 또 다른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키우려고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몽이를 대신할 수 없다며 어머니는 끝내 거부하셨다. 그리고 동물은 다시는 키우지 않겠다고 하셨다. 가끔 전화로 몽이와의 추억을 얘기하셨고 그렇게 어머니는 몽이를 가슴에 묻으셨다.

나 또한 오래도록 몽이를 놓아주지 못했다. 못해 준 것만 생각나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내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몽이는 결국 지병이 아닌 치료를 위해 먹었던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심장마비가 왔고 눈도 감지 못하고 그렇게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평소의 나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었다. 다시 태어나는 끔찍한 일도 없었으면 싶었다. 그곳에서도, 아니 어디에서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로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하지만 만약 몽이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몽이가 떠난 지 어느덧 7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보고 싶다.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 그리고 가끔은 나도 데려가 달라고 목놓아 울기도 했다.

보고 싶어, 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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