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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19

원래 진실이 거짓보다 더 불편하고 황당한 경우가 많다.

by 안녕
자유의 숨은 의미




나는 언젠가부터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심장부터 두근대기 시작했다. 숨이라도 멎을 것 같은 공포에서 간신히 벗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폰을 집어 들면 모르는 번호가 대부분이다.

'다행이다.'

직장에 있을 때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초기 때라 어눌한 연변 사투리가, 누가 들어도 '나, 보이스피싱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네네, 검찰청이시라고요? 그냥 저 잡아가세요."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집요한 전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받으면 끊고, 받으면 끊었다.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러다 말겠거니 하고 받아주었지만 그 상황이 두 시간째 이어지자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회사 전화라 안 받을 수도 없고 받으면 또 그 전화였다. 덕분에 왜 계속 통화 중이냐는 항의가 개인 전화로 오고 있었다.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 업무를 마비시키고 있지만 방법은 없다고 했다. 그냥 전화를 받지 말란다. 울리는 전화 벨소리를 외면할 수 없으니 결국 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면 지쳐서라도 포기하고 스스로 멈추길 바랐는데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전화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도 이어졌다. 업무상 필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통화까지 모두 미리 당겨서 전화를 걸어 '통화 중'을 유지했다. 그 전화는 며칠이 계속되었고 스토커의 전화만큼이나 끔찍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누군가와 통화할 일은 없었지만 가끔 걸려오는 전화는 급한 일이거나 안 좋은 일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가슴부터 두근대기 시작했다. 카톡으로 연락을 많이 하니 전화를 해지할까도 고민했지만 본인 인증을 위해 없앨 수도 없었다.

벨소리에 예민해지니 수시로 걸려오는 스팸 전화조차 힘들었다. 모든 인터넷 정보에서 내 개인정보를 지웠고 인터넷 주문도 하지 않았다. 2년쯤 지나니 어느 순간 스팸 전화도 사라졌다. 그렇게 몇 년간은 조용한 세상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허경영이란 사람에게 전화 오기 시작했다. 차단을 해도 번호를 바꾸어 걸려오니 선거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해가 되면 의례적인 안부를 묻는 인사치레가 싫었다. 영혼 없는 인사에 나도 영혼 없이 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니 그런 안부 인사도 대부분 사라졌다.




예전에 탈북 청소년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연결된 아이들은 대부분 자매였고 연결된 자매 중에 10대가 있었다. 적극적인 첫째가 연락을 했었고 둘째는 그런 언니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당당하게 요구하던 언니는 충분히 잘 적응하고 있었다. 아니 가끔은 지나칠 때도 있어서 왠지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모처럼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고 시간이 되어 연락을 하면 어느 교회에서 선물을 주기로 했는데 그 선물을 받으러 가야 한다며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나중에 받을 수 있는 내 선물은 그렇게 후순위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특별 전형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고 여러 종교 단체를 통해 지원받아 해마다 해외로 여행 또는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가끔은 부러울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 자매 중 둘째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대부분 첫째가 주로 연락을 했으니 둘째의 연락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반가워서 집으로 불렀더니 빈손으로 오기 그렇다며 뭐라도 사 오고 싶다고 했다. 그냥 와도 상관없었으나 이것도 예의이니 집 앞 커피숍에서 카페라테를 사 오라고 했다. 위치도 상세히 알려주었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떡하니 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찾지 못하겠다며 빈손으로 나타났다. 차라리 물어보지나 말던가, 뭐 예의상 물어본 말이구나 싶었다. 사실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예전에는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자연스레 언니로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주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으니 이 상황이 좀 웃기긴 했다. 그래서 일보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서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농담 삼아 건넸다. 돌아갈 때는 옷 몇 벌이랑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물품을 챙겨주었다. 추운 날이었는데 얇은 외투를 입고 와서 내 코트를 입혀서 보냈다.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 자주 오겠다더니 그뿐이었고 이후로는 외국에 있다는 소식만 자주 들렸다. 만나지는 못하고 그렇게 연말이나 연초에 가끔 톡으로만 안부 인사를 했다.

한 번은 7월에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북한 연구소를 운영하시는 분이 행정 업무 할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한 달에 2~3번 나와서 문서 업무를 도와주면 월 60만 원을 준다고 했다. 북한에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서류화 작업하는 줄 알았으니 정리할 문서가 많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연구소라고 하니 북한에 대해서 좀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무엇보다 그런 지루한 작업을 좋아하기에 솔깃했다. 하지만 막상 세부내역을 받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주 3일 근무에 시급이었고 문서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회계 경리 직원을 구하는 것 같았다. 규칙적인 시간에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만 수시로 불러서 하루에 한두 시간씩 일 시키고 퇴근시키면 교통비가 더 들 수도 있었다. 보수는 최대 금액이 그렇다는 거였다. 이런 일을 봉사활동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르바이트라고 하기도 그랬다. 실제 얼마 받을지 모르는 애매한 상황이니 직장이라 하기에도 그랬다. 그래도 그곳 운영자와 친분이라도 있으면 운동하는 셈 치고 가보려고 했는데 얘기를 들어보고는 마음을 돌렸다. 원래는 탈북자 직원을 썼는데 엑셀, 한글, 워드 등 문서 작업을 힘들어해서 익숙한 직원을 구하려는 거란다. 시간이 정해져 있든 날짜가 정해져 있든 규칙적인 조건이라면 고민해 보았을 텐데 아무래도 적은 돈으로 막 부릴 직원을 뽑는 것 같아 거절했다. 봉사 활동하고 싶다고 했더니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닐 직장을 소개해 주었고 돈은 필요 없다고 했더니 돈이 적어서 자기도 안 하는 일을 소개해 준 셈이었다. 그래도 연락은 고마웠다.




탈북 청소년을 대상으로 남한 정착을 돕는 지원 활동은 한 사람과 연결되기보다는 형제나 자매, 또는 한 가족과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처음 만난 동생은 20대의 자매였다. 처음 그들을 만나는 날, 왠지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무리를 해서 아웃백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동생들은 다이어트를 한다며 음식을 대부분 남겼다. 그럼에도 다음 약속을 정하려고 하면 또 아웃백에서 보자고 했다. 나에게도 패밀리 레스토랑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받는 것에 익숙한 그들에겐 그런 호사도 일상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와서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잘하지 않았다. 나이로는 성인이지만 고등학생이었던 그들은 외모에 한창 신경을 썼는데 그래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내 옷차림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하곤 했다. 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몇 년 동안 인연을 이어 갔지만 규칙을 어기고 다른 동료에게 연락하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그들에게서 손을 떼기로 했다. 대기 중인 동생들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내 도움을 원치 않는 이들을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 후 다른 동료조차 그들의 연락을 받지 않자 다시 나에게 연락해서 이것저것 요구할 때는 얄밉기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가정 방문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님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자유를 찾아오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알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착금은 브로커에게 모두 줘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은 다시 벌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집에 있었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처음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인 줄로만 알았고 개인적인 문제라 생각했다. 우리도 취직하기 힘드니 그들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번째 연결된 동생은, 그냥 한 가족이었다. 아이들이 그야말로 꼬마 자매였기 때문에 나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가 없어서 집으로 찾아갔다. 자매의 부모님은 젊었고 탈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탈북자들 여느 가족처럼 아이들 아버지는 집에 있었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막 퇴근을 했다고 했다. 내가 방문하자 부모님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한국에 와서 하나원을 퇴소하고 아파트와 정착금을 받으면 돈은 대부분 브로커들이 가져간다. 그래서 아파트 하나만 남는 경우가 많았고 나쁜 브로커를 만난 이들은 아파트마저 빼앗겼다. 그래도 이 아버지는 가톨릭 재단을 통해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았고 운이 좋아 일자리까지 소개받았단다. 종교 단체에서 물류 창고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는데 10시부터 17시까지 하루 6시간, 주 5일 근무에 초봉이 월 150만 원이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그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놀고 있다고 해서 일이 힘들어서 그만둔 것이냐고 하니 '그까짓 일' 별로 힘들지도 않았단다. 그런데 왜 그만두었냐고 물어보니, '그까짓 150만 원 받겠다고 목숨 바쳐 온 줄 아냐!'며 순간 격분을 하셨다. 난 할 말을 잃었다. 남한 사람들은 비싼 월급을 받는데 자기는 북한 사람이라 차별을 하는 거라고 했다. 작업 반장의 연봉을 전해 들었던 모양인데 그것이 경력 차이가 아닌 출신으로 인한 차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엔 누구나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고 남한 사람들도 초봉은 적으나 일하다 보면 월급도 오르고 기회가 있으면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하면서 그렇게 산다고 설명해 드렸다. 하지만 자기가 브로커에게 들은 얘기는 그렇지 않다며 '거짓말로 선동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의 생각은 이미 확고했고 그 누구의 얘기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조금 무섭기도 했었다.

세 번째 연결된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 자매였다. 그래도 친척이 이미 정착해 살고 있어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고 있었다. 나보다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한여름에 수박을 들고 단지 내에서 30분을 헤매느라 녹초가 되어 방문했다. 내 몰골을 보고 미안해하셔서 오히려 내가 선풍기를 사다 드렸더니 어머니가 고마워했다. 받는 것에 익숙해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진심이든 아니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더 고마웠다.

형제나 남학생을 맡은 동료 봉사자들은 아이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상대하기도 했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기도 하고 상습적인 경우엔 봉사자에게 연락이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아이를 집으로 보낼 수가 없어 임시 보호하기도 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 모습과 너무나 다른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고 여느 부모처럼 자식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집이 무서워진 아이는 가출을 일삼기도 하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대안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힘들었던 시절, 나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그 일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니 물질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만나서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물질적인 것만을 요구했다. 없는 형편에 만나서 밥을 사주고 정기적으로 놀이공원 등 가고 싶다는 곳에 데리고 다니려니 너무 버거웠고 큰 부담이었다. 나보다 못한 이들을 보며 위안을 삼았지만 막상은 내가 가장 못하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번 시작한 일이니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몇 년을 이어갔지만 단체가 와해되면서 결국 멈추게 되었다.

지금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아버지는 생각을 바꾸고 일을 하고 있을지 아님 아직도 상사와 자신의 월급 차이에 기분 나빠서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이 땅에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쩜 내가 만난 사람들만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내가 직접 보았던 그들은 자유가 아닌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듯했다. 어렵게 탈북을 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우리에게 북한은,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생각해 왔으나 사실 알고 보면 누군가에게는 그냥 가까운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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