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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22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는 것도 딸의 역할이었다.

by 안녕
알고 보면 그곳은
블랙컨슈머를 만들어 내는 곳일지도




이제는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일을 그런 식으로 겪고 나니 다시 움츠러들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실망감도 크게 작용했다.

'난 왜 남들처럼 툭툭 털어내고 일어나지 못하는 걸까?'

가고 싶은 나라가 아직 많이 있음에도 가고자 하는 의지가 모두 사라졌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설렘과 긴장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면 뭐 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버킷리스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후회할 것 같았지만 알면서도 손을 놓아버렸다.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없구나! 앞으로도 그렇겠지?'




직장을 그만두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분명 따로 있었지만 수술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으니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픈 곳과 병명은 분명 괴리가 있었지만 어딘가 아픈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수술로 인한 입원이 반복될 때마다 마음은 한결 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일 같이 전화해서 오늘은 어떻냐고 걱정하셨고 그런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어느 순간부터는 괜찮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나름 잘 지내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해외여행을 문제없이 다녀오곤 하자, 이제는 다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넌지시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에서였지만 당장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문화생활을 하며 지낼 생각도 없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살겠다'는 의지로 참아왔던 순간들이 지나고 보니 너무 부질없었다.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어느 정도 가져야 충분하다고 느끼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돈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많은 돈을 가지게 되어도 더 많은 돈을 갈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그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현실적으로 나은 삶을 선택했었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한 달 생활비 20만 원으로 살고 있는 현재 삶이 더 만족스러웠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돈으로도 아끼고 또 아껴서 2년 정도 모으면 여행 경비가 되기도 했다. 자식 핑계되면서 '내가 너 때문에 어쩌고 하는 부모의 변명'이 싫었던 나는 애초에 홀로서기를 선택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 4년 차에 접어들자 부모님의 압박이 심해졌다. 알아서 할 테니 그만하시라고 조용히 말씀드려 보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점점 수위를 높여가며 압박해 오셨다. 가족의 전화가 힘들어졌다. 나중엔 나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돈 벌어서 뭐 하게요? 남겨줄 자식도 없는데?"

그러자 어머니는 조카에게 주면 되지 않냐고 하셨다.

"이젠 남의 자식을 위해서 내가 돈 벌어야 돼?"

"동생이 남이야?"

부모님의 재산이 고스란히 아들에게 흘러가는 것까지는 나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 바란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재산을 누구에게 주든 그건 부모님 마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재산의 행방에 대해서까지 참견하시니 화가 났다.

"제발 좀 그만하세요!"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버텨보지만 부모님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결국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싸워야 했고 그러다 보면 결국 나는 천하의 나쁜 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들볶이는 와중이었고 정말 어디 취직이라도 해야 하나 싶던 때였다. 지인이 신용카드 회사 콜센터에 취업을 했다며 나에게도 교육을 한번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는 곳에서의 일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장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공과금을 낼 월 20만 원만 있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콜센터에서의 일이 궁금하긴 했다.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어떤 방침들이 있는지 평소에도 궁금했던 나는 교육만 받아도 교육비를 준다고 하니 솔깃해졌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할 일도 없었다. 여행 계획조차 당분간 없을 테니 겁은 났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가서 설명을 들어보니 한 달간의 교육이 끝났다고 해서 무조건 교육비가 지급되는 것은 아니란다. 교육 후, 입사해서 한 달간 정식 근무를 해야 지급되는 거란다. 지인 추천을 하면 십만 원이 지급되었고 그래서 지인은 나를 데리고 온 거였다.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다녀보기로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고 분위기도 좋았으니 교육을 받으러 다니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매일 8시 반까지 출근했고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했으니 모처럼 직장인이 된 것 같았다. 오랜만의 출퇴근이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다양한 연령 층대의 교육생들과도 친해졌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정도 들었다. 그렇게 한 달간의 교육이 끝나고 수십여 명의 교육생 중에 최우수 교육생으로 표창장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겼다.

결국 나도 교육비를 받기 위해 입사를 하게 되었다. 힘들면 언제라도 그만 둘 생각이었다. 아니 스스로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 '절대 참지 말라고, 이제는 그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계속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힘들어도 계속 버티고 있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식 입사한 신입 때는 그래도 팀장이 뒷받침을 해주었다. 응대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팀장에게 넘겨버리면 되었으니 다짜고짜 화풀이 대상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처음 악질 전화를 받고 정신이 나가 있을 때는 팀장이 자리로 불러서 위로해 주기도 했으니 그런 사소한 위로조차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중반이 넘어가면서 팀장 찬스는 허용되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까지 안 된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었으면 좋겠지만 '신입에게는 안 되는 일이 팀장에겐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블랙컨슈머라 불리는 악질 소비자, Bad Consumer는 기업이나 업체를 상대로 트집을 잡아 갑질 횡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블랙컨슈머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로, 화풀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른 사회적 약자인 감정 노동자에게 풀고 있었다. 이들로 인해 제일 피해를 많이 입는 쪽은 고객을 직접 대하는 마케팅 부서로 특히 콜센터의 경우 이런 블랙컨슈머의 사각지대에 놓여 감정 노동에 매우 취약했다. 이에 콜센터 측은 대응책을 마련하여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콜센터 상담사를 놀잇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간단한 문의는 신입으로 연결이 되는데 그걸 아는 일부는 막상 전화 연결이 되면 신입이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이달 요금 문의로 상담을 요청하고는 리볼빙을 하겠단다. 리볼빙 즉 일부 결제금액 이월 약정은 사용한 카드 대금 중 일정 비율만 결제하면 나머지 금액은 대출 형태로 전환되어 다음 결제 대상으로 자동 연장되는 신용카드 결제 방식을 말한다. 아무리 당황하더라도 한번 받은 전화는 끝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신입은 그들이 데리고 놀기에 만만한 먹잇감이었던 셈이다.

그게 신입이 할 수 있는 답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할 수 없을 때는 영문도 모르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하지만 기다릴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그들은 이내 다그치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더 긴장해서 아는 것도 기억나지 않아 결국 확인하고 전화드리겠다고 했다. 처음엔 순순히 끊고 기다리기도 했다. 전화를 끊고 찾고 있으면 모니터 감시조가 발동했다. 그 넓은 콜센터 안이 쩌렁할 정도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콜 안 받고 뭐 하시는 거예요?"

설명을 했지만 그냥 다음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다음 전화를 받는 동안 기다리다 지친 콜백 대기자는 다시 전화를 했고 그 전화를 받은 다른 상담사는 나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해결책 없이 전화를 걸어봤자 감당할 수 없는 상황만 초래할 뿐이었다.

콜백 약속은 더 큰 화만 초래하게 되니 기다려 달라고 하고 무작정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통화 중 상태일 때만 해결할 기회가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는 침묵이 계속되자 대뜸 팀장을 바꾸라고 했다. 규정상 팀장을 바꿀 수는 없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면 해결해 드릴 수 있다고 사과도 하고 애원도 했다. 하지만 이내 욕설과 조롱이 시작되었다. 그까짓 것도 답변 못하면서 무슨 상담을 하냐고 비웃었다. 한참 동안 그 상황을 몰래 듣고 있던 팀장이 그제야 전화를 당겨 받았다. 팀장이 해결을 해주시려나 기대했지만 상담사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사과와 함께 보상부터 제시했다. 후기 점수가 낮으면 센터별로 지급되는 인센티브가 적어지고 그럼 센터장부터 일반 상담사에게 배분되는 수당이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급여를 지키기 위해 그 어떤 불만도 없어야 했으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니 원하기도 전에 미리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보상에 한번 맛 들인 그들은 끊임없이 먹잇감을 노렸다. 어떤 사람은 그 보상을 자신이 당연하게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보상을 받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상담사와의 통화를 다시 요구하기도 했다. 팀장은 나에게 사과 전화를 강요했고 나는 그렇게 한 시간 넘도록 그들의 전화 앞에서 수모를 감수하기도 했다. 그 또한 반복되자 콜 받는 것보다 '네네, 죄송합니다'만 되풀이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팀장의 보상은 오히려 블랙컨슈머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담사가 조금만 답을 망설여도 무조건 팀장을 바꾸라고 소리부터 질렀다.

게다가 그곳에선 내부 시스템이 종종 다운되기도 했다. 그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 말은 회사 내 금기사항 중 하나였다. 발설하면 안 되니 대뜸 사과와 함께 확인하고 나중에 전화를 걸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게 끊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무슨 일인데 그러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당장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화가 난 사람들은 또다시 팀장이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지만 나에게 적용되는 감점 요인이 되었고 급여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 돈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스템이 다운되었으니 상담은 이어갈 수 없지만 콜은 계속 들어오니 전화는 받아야 했다. 그때는 시스템이 아니라 통신이 끊어졌으면 싶었다. 상담을 할 수 없으니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다시 전화드리겠다는 콜백을 예약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내가 콜센터에 전화했는데 다짜고짜 '나중에 전화드릴게요.'라고 하면 영문을 몰라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하면 상황이 나아질 수 있지만 '시스템 문제 발설'은 금지사항이므로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시스템이 정상으로 돌아오더라도 전화를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고 콜이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 A/S콜은 원칙적으로 상담이 모두 종료된 18시 이후에 걸어야 했다. 그런 문제가 있었던 날은 자동으로 야근을 할 수밖에 없지만 실질적인 야근수당은 없었다. 입사 때 들은 총급여는 각종 수당이 포함된 금액이었지만 세부사항에 추가 근무 수당이란 명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도 위배되지 않았다. 야근을 하든 안 하든 이미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이 애초에 제시한 급여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최대 20만 원의 인센티브란 것도 아무런 사건 사고가 없다고 해도 신입에게는 고작 3만 원이 최고였다. 게다가 신입으로선 아무런 사건 사고가 없을 수가 없었으니 그 금액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렇게 남은 업무까지 하면서도 19시에 있는 전체 회의에는 참여해야 하고 상담내역까지 작성하고 보면 21시에 퇴근한 적도 많았다. 셔틀버스를 타지 못하면 20분 거리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하므로 마지막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그마저도 끝내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와서 마무리한 적도 있었다.

회사의 지침대로 따랐을 뿐이지만 상담사는 무조건 약자였고 사과하지 않으면 찾아오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솔직히 한 달이 되기도 전에 같이 교육받았던 교육생들은 대부분 그만둔 상태였다. 전직 콜센터 상담사라고 했던 이들도 하루 이틀 지나면서 말도 없이 사라졌다. 프로라던 그들이 정식으로 사직서를 내지 않고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두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곳은 그만 둘 때도 뜻대로 보내주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들은 직원을 대하는 회사의 분위기만 확인하고는 이내 다른 콜센터로 가버렸다. 그만두겠다고 먼저 얘기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팀장과 언쟁을 거치고 결국 그들도 무단 퇴사를 선택했다. 남은 급여도 포기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 그 또한 회사에서는 이익으로 작용했다.

두 달째는 자리 이동이 있었고 남은 신입들은 각 팀으로 배정되었다. 새 팀장은 날카로운 인상이라 쉽게 다가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팀원에게 점수를 따고 싶었는지 열심히 하면 각자 원하는 것을 선물하겠다고 했고 난 당장 필요한 방석을 요청했다. 하지만 말 뿐이었는지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책상과 컴퓨터가 배정되면 업무에 필요한 메모를 각자 스타일대로 다시 작성해야 했다. 책상에는 낡은 컴퓨터와 전화, 헤드셋 그리고 빈 노트와 볼펜만 허용되었다. 개인 휴대전화는 사무실에서 절대 사용할 수 없었다. 고객의 정보는 물론 상담사 자신의 정보도 조회할 수 없었다. 오로지 걸려오는 상대의 정보만 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나중에 보복하기 위해 블랙컨슈머의 연락처를 따로 메모할까 봐 쉬는 시간에 끄적이는 낙서조차 외부로 반출할 수 없었다. 몸만 들어왔다가 일이 끝나면 몸만 나가야 했다. 퇴근할 때는 누가 와서 사용해도 좋을 정도의 책상 컨디션을 만들어 놓고 가야 했는데 무단 퇴사가 잦은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입에게 배정되는 컴퓨터는 보기에도 낡아 보였지만 그만큼 고장도 잦았다. 시스템 문제가 있는 날은 그 컴퓨터의 고장일 때도 있었다.

8시 반까지는 출근을 해야 했고 1분이라도 늦으면 지각비 만원을 내야 했다. 늦어도 8시 10분 셔틀버스는 타야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서 8시 전에는 도착해서 기다려야 했는데 버스 배차시간을 감안하자니 아침 6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동역 주변은 출퇴근 시 상습 정체구간이라 벗어나기까지 최소 3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렇다고 정체되는 시간을 피하자고 더 일찍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일찍 출근도 해봤지만 사무실은 잠겨있었고 복도에 서서 누군가 오길 마냥 기다려야 했다. 사무실에 먼저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들어간다고 해도 인터넷이 되는 것도 아니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었다.

8시 반에 공지를 받고 9시 정각부터 18시 정각까지 하루 8시간을 전화만 받았다. 계속 감시 중이라 1분 이상 콜을 받지 않으면 이름이 크게 호명되곤 했다.

흡연자는 수시로 자리를 비웠지만 비흡연자는 그런 휴식조차 가질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화장실을 간 다른 직원이 없어야 보내주었다. 그마저도 10분을 넘기면 문책이 따랐다. 대부분 흡연자인 덕에 흡연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담배 피운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흡연구역에 가서 쉬다 오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점심시간은 팀별로 돌아가면서 시간이 정해졌다. 어떤 주는 11시에, 어떤 주는 15시에 밥을 먹기도 했다. 교육받을 때는 점심시간이란 것도 지정되어 있으니 밥을 챙겨 먹었지만 입사를 하고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외부로 나가서 먹을 때는 이동시간에 30분은 족히 소요되었으니 처음에는 도시락을 싸다녔다. 하지만 새벽 출근에, 한밤중 퇴근이 반복되자 도시락을 쌀 여력이 없었다. 밥을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했으니 점심시간에는 먹는 것을 포기하고 쉬는 걸 택하게 되었다. 새벽에 나가서 하루 종일 굶다가 집에 와서 간신히 한 끼 챙겨 먹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18시가 되면 전화만 멈출 뿐이고 상담 기록을 남겨야 했다. 30분 이상 걸려 마감을 하고 셔틀버스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평균 19시에 회사를 나섰다. 그렇게 집에 오면 21시가 훌쩍 넘어버린다. 그때서야 씻고 저녁을 먹고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늦어서 청소도 못하니 내 생활이라곤 없었다. 거기다 모두가 마감하는 19시에 맞추어서 매주 1~2회 정도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일찍 끝나더라도 기다려야 했고 늦게 끝나는 사람은 일을 잠시 멈추고 19시 회의에 참여했다. 회의는 짧을 때도 있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22시거나 그보다 더 늦을 때도 있었다.

매주 1회 테스트를 하는데 시험이 있는 날은 8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다. 그 또한 교육 수당이란 명목으로 급여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실질적인 수당은 없었다.




두 달 만에 체중은 줄었고 앞 자릿수가 달라졌다. 앙상한 뼈만 남은 내 몸을 또다시 보게 되었다. 다이어트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도 안 빠지던 살이 너무도 쉽게 빠졌고 치골이 드러났다.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기에 바빴고 그나마 남은 시간은 잠을 자기에도 부족했다. 출근과 퇴근에 소요되는 시간도 문제였으니 회사 근처로 이사해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그전에는 직장과 관련된 일을 가족에게 말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부모님의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취업이었으니 일을 한다 말씀드리자 자꾸 물어보셔서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일상의 직장인들이 다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도 어렵게 들어간 직장이니까 참고 열심히 일해.'

그곳은 어렵게 들어간 직장도 아니었고 내가 직장으로 선택한 곳도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에, 당장 무언가 할 일이 필요했을 뿐이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잔소리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들어간 곳이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콜센터에서 일한다고 주변에 소문까지 내셨다. 콜센터는 힘들지 않냐고, 왜 굳이 그런 데서 일하냐는 전화를 종종 받기도 했다. 물론 그곳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직장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주변의 시선처럼 나 역시 그랬다.

근무시간에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젊어서도 피했던 대중교통 출퇴근을 그것도 왕복 4시간을 허비하느라 피로가 쌓였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행이나 더 열심히 다닐 걸 하고 후회하게 되었다.

근무시간에는 개인적인 전화는 받을 수 없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면, 놀고 있을 때는 바쁘다던 이들의 부재중 전화가 쌓여있었다. 만나자는 연락이 와도 이번에는 내가 그들을 만날 시간이 전혀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석 달째 접어들면서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참고 계속 일을 하다 보면 한 달이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십 년이 되어 또다시 여기에 뼈를 묻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추천했던 지인조차 지난달에 그만둔 터였다. 막상 일을 하고 있으니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이 계속 생각났고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정식으로 한 달간의 여유를 두고 사직서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팀장은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건강상의 이유라고 하니 점심을 안 먹으니 아플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고 빈정거렸다. 점심때 먹은 밥을 소화시키지 못해 하루 종일 고생한 날은 저녁도 거르고 잠을 청하지만 결국 자정쯤 깨서 그대로 토했던 적도 있었다. 팀장의 빈정거림이 어이가 없었고 그 상황도 이해되지 않았다. 남은 한 달 동안 성실히 마무리하겠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조곤조곤 말하는 나에게 팀장은 성질도 내지 못하고 서로 같은 말만 30분째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위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기에 팀장님이 얘기하기 곤란하시면 내가 기꺼이 그분에게 직접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팀장은 무슨 트집이라도 잡은 것처럼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건방지게 그분을 직접 만나겠다고 해?"

아마도 내가 조금은 만만했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막 나가자는 거구나 싶었다.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거 알면서 어디서 반말이세요?"

그러자 자기가 언제 반말을 했냐며 꼬리를 내렸고 이미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그 높으신 분이 보다 못해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그렇게 높으신 분의 개입으로 상황은 종료되었고 월말까지 다니고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교육을 했던 강사도, 신입생 팀장도, 현재 팀장도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무서운 얼굴로 대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기본적으로 100 콜이 넘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콜이 많을 때는 200 콜 가까이 받기도 했지만 정해진 콜 수에 도달하면 오천 원권 스타벅스 상품권을 주기도 했다. 그런 미션이 걸린 날엔 어김없이 전화가 폭주했다. 단 1분이라도 전화를 안 받으면 팀장의 모니터에 표시가 되어 어김없이 고성이 들려왔다. 하루에 한 명 꼴의 블랙컨슈머만 피하면 그런 미션 콜은 수시로 채울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상품권은 익월에 지급되므로 퇴사를 앞둔 나는 받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딱 한 콜씩 덜 받아서 미션을 수행하지 않았다.

근무 마지막 날, 높으신 그분도 퇴사를 한다고 퇴임식을 성대하게 했다. 그날도 모두가 마감하는 19시까지 전 직원을 대기시켰다. 자기도 그만두면서 직원 퇴사를 거부한 거라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팀장은 사직서를 낸 직원이 지각 한번 없이 하루에 200 콜 가까이, 최대 콜을 갱신하며 성실하게 근무를 끝낸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팀을 배정받았을 때 약속했던 방석을 뒤늦게 선물로 주면서 열심히 마무리해 주어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난 그 상황에서 바보같이 또 눈물이 터졌다. 팀장이랑 얼싸안고 서로 사과하며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그곳과 헤어져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체력을 되돌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내 겨울이 찾아왔다. 깜깜할 때 집을 나서서 깜깜할 때 집으로 돌아왔으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햇살의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무엇보다 청소를 매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달이 지나고 미션 상품권이 지급되는 시점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미션 수행을 일부러 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콜 수에 어쩔 수 없이 미션을 수행해 버린 날이 몇 번 있었는데 누적된 상품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퇴사 직원의 급여조차 무단 퇴사라는 이유로 챙겨주지 않았던 곳인데 성실히 마무리하고 나온 탓인지 상품권까지 그렇게 챙겨 보내주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재입사를 권유하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솔직히 생계가 목적일 때라면 다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군가에게 욕설을 들으면 온몸이 굳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처음엔 이유 없이 듣는 욕설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팀장이 어르고 달래며 격려해 주니 그나마도 버틸 수 있었는데 2주 정도가 지나자 그마저도 사라졌고 오히려 팀장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아졌다.

콜센터가 블랙컨슈머의 사각지대에 놓여 감정 노동에 매우 취약하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욕설을 들으면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와 기사를 보고 출근을 했지만 정작 회사에서는 그걸 반기지 않았고 끝내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방침만 믿고 먼저 끊는 상담사도 있었지만 그들은 전화를 끊자마자 도청하고 있던 팀장으로부터 문책을 받았고 금전적으로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그곳에는 20만 원 정도의 성과급이란 것이 있고 애초에 그걸 포함한 금액으로 구인 광고를 내긴 하지만 그건 팀장에게 권한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팀장에게 찍히게 되면 구경도 할 수 없는 돈이었다.

내가 그만둔 것은 블랙컨슈머 때문이 아니었다. 직원을 대하는 회사의 시선이 조금만 달라져도 나같이 정에 약한 사람은 사람을 보고 다닐 수도 있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어르고 달랬다면 나는 참으면서 계속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은 팀장에 의한 압박이나 언어폭력이 더 많은 곳이었다. 그런 팀장들 또한 센터장의 압박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센터장은 다른 센터와 비교당하며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니 이곳에서의 가장 좋은 위치는 아이러니하게도 교육 강사 자리였다. 이직률이 높은 만큼 보충되는 교육생은 항상 있었고 매달 교육생들만 상대하는 교육 강사 자리는 모든 팀장이 탐내는 자리였다. 오래 다녔다고 해서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던 그곳은 보통의 직장인들이 꿈꾸는, 승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공석이 될지 모르는 그 한 자리를 노리며 다니기엔 세월이 아쉬웠다.

지금도 신용카드사에서 새로운 혜택에 대한 광고가 보이면 저녁마다 그 공지를 받고 외우느라 고생하고 있을 상담사들이 생각났다.

나도 언젠가는 다시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몸이 힘든 쪽이 나은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한다고 몸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난 뜻하지 않은 근로로 돈이 생겼다. 석 달 동안 받은 돈은 고작 350만 원이 전부였지만 수입이 없던 나에겐 엄청난 거금이었다. 1년 반치 생활비에 맞먹는 이 돈이면 석 달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다닐 수 있었으니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버틴 인내로는 그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가 있는데도 왜 주저앉아만 있었는지, 콜센터를 다니는 동안 내내 후회하고 있었다. 덕분에 용기를 내어 두 번째 까미노를 준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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