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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23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미련이었다.

by 안녕
배려가 지속되면 호구로 보인다.




지난가을, 예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거의 10년 만의 연락이라 반가웠다. 그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 텔레비전에 나온 누군가를 보니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좋은 일로 방송에 나온 사람도 있었고 가슴 아픈 일로 방송에 소개된 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모처럼 옛날이야기를 하니 좋았다. 날씨도 좋았고 컨디션도 좋았으니 찾아온다면 기쁜 마음으로 커피 한 잔 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전 중에 전화했다며 가는 동안 통화했고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해서 대화는 끝이 났다. 백수로 지내는 삶을 응원해 주었고 제주도에 이사 가게 되면 가족과 함께 놀러 오겠다고도 했다.

새해가 밝자 다시 전화가 왔다. 새해 인사차 전화를 했나 싶었지만 대뜸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순간 서글퍼졌다. '돈을 빌려줄 만큼 서로 친했던가?'라는 생각도 잠시, 오죽하면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싶었다. 형편이 안 좋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요즘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슨 일이 생겼나? 누가 아픈가?'

묻지는 않았지만 다급했는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둘째가 태어났단다. 축하의 말보다 걱정이 앞섰고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형편과는 별개로 아이를 또 낳을 수는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니 집이 좁아서 넓은 평수로 이사 가게 되었단다. 그래서 돈이 부족하단다. 오늘까지 입금해야 한단다.

'What?'

나는 '형편대로 살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힘들면 힘든 대로, 여유 있으면 여유 있는 대로, 자신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서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비싼 명품백을 사든, 유지비가 많이 드는 스포츠 카를 타고 다니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능력도 안되면서 빚을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족을 위해서 조금 더 나은 보금자리를 꿈꾸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형편이 안 되면 돈을 모아서 넓혀갈 생각을 해야지, 전세에서 월세로, 도리어 넓혀간다는 그들이 걱정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지?'

기댈 사람 하나 없으니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나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는 돈을 빌려줄 여력도,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더구나 그런 이해되지 않는 사정이라 단칼에 거절했다.

"백수에게 무슨 돈이 있겠니?"

이 상황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좀 더 계획적으로 살기를 나중에라도 깨닫기를 바랐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희생을 알아달라고 하지나 않았으면 싶었다. 그러자 금액을 낮추어서 다시 부탁했다. 일을 하지 않는데도 먹고살 만하니 돈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빌려달란 거겠지만 한 달에 20만 원만 꺼내 쓴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돈을 벌어도 정작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만 쓰고 있었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고마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내 진심을 알아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상처만 받느니 고생하지 말자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위해서는 돈을 쓰지도 못했다. 나를 위한 사치는 카페라테와 여행이 전부였다.

돌려서 말하는 나의 의중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님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 있어도 못 주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더니 미련 때문인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먹으려고 차려놓은 밥은 통화하느라 이미 식어버렸다.

한참을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제주도 이사는 무슨 돈으로 가냐고 넌지시 묻는다.

"내 '형편'에 맞추어 전세보증금 오천만 원짜리 집을 찾고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

"그럼 오천만 원은 있다는 말이네?"

그의 되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내 포인트는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제주도 이사는 애초부터 있던 나의 계획이었고, 나는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고 계획이 있는 돈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내 성격이 그랬다. 나는 그렇게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것이 편했다.

'있다면 뭐? 너를 빌려주고 나는 이사를 포기하라고?'

설마 그런 의도로 하는 말인가 싶어 순간 당황했다. 아니 황당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묻는 건가 싶었다. '내가 지금 병원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너는 이사를 포기하고 나한테 그 돈을 빌려줄 거니?'라고 묻고 싶었다.

잔금을 입금해야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전화 끊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보통 잔금은 이사하는 날 치르지 않던가?

오죽하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그럼에도 돈 때문에 또 하나의 인연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빌려주면 진심으로 고마워할까?'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었다. 돈은 있으나 이런저런 상황이라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돈이 있다는 사실에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강탈해 가거나 아님 천하의 나쁜 사람 취급을 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제주도로 이사 가기 전에 꼭 갚겠다고 하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솔직히 잘 알지도 못하는 이를 위해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신부님에게 연락해 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진 것 없는 성직자에게 연락할까 싶어 꺼낸 말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전화를 끊고 밥을 먹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정말 신부님에게 연락을 했단다. 마음 약한 그분은 주변의 또 다른 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 대신 빌려다 주겠다고 했단다.

'설마 신부님에게 빌린 돈을 떼먹거나 하지는 않겠지?'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미 많은 돈을 주변에서 빌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면서 앞으로의 월세며 빌린 돈은 무슨 돈으로 갚으려는지 걱정이 앞섰다. 자기가 돈 얘기한 건 주변에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자주 연락하겠다는데 갑자기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순간 내 마음속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좋은 일로 전화해 주면 안 되겠니?"

곧 둘째 돌인데 그때 연락하면 되냐고 묻는다.

'나한테 좋은 일은 없는 거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으니 집 근처로 오면 커피 한잔 사주냐고 묻는다.

'지금은 추운 겨울인데, 그 좋은 날들 다 놔두고 굳이 왜?'

사람들은 왜 한파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만나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가한 내가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주다 보니 나의 일 년 중에서 유독 겨울에만 약속이 있었다.

'봄이며 가을엔 다들 뭐 하고?!'

나도 날씨 좋은 그런 날에 외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때 연락하라고 했더니 며칠이 지나자 바로 연락이 왔다. 그날따라 몸이 아파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니?'

여전히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할 사람들만 내 주변에 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집을 떠나본 적 없던 내가 살기 위해 독립을 했고 그런 독립을 반대했던 부모님은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으셨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라 애초에 어떤 기대도 없었던 나는 꼬마 때부터 독립 자금을 모았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돼지 저금통을 거쳐 고스란히 은행에 예금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 재산 오백만 원을 가지고 서울로 왔다. 하지만 그 돈은 쓰지 못했다. 아니 차마 쓸 수 없었다.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으며 20년 가까이 일을 했고 수입의 대부분은 전세보증금으로 들어갔다. 전세보증금 걱정이 없어지니 그때부터는 수입 대부분이 병원비로 들어가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려면, 병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사람답게 살고자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자발적으로 백수가 되었다. 이사가 힘들어서 서울에 집도 하나 샀다. 지난날 힘든 시간을 견뎌낸 나 자신에게 여행이라는 작은 보상을 하며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드리던 용돈은 거르지 않았지만 입원하는 일이 잦아지자 병원비에나 보태라며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지 않았다.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으려 가진 돈으로 알뜰하게 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부모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그 이유가 다시 '키워준 값'을 내놓으라는 뜻도 담겨있었지만 키워준 값은 이미 다 드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제부터는 좀 뻔뻔해지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내가 백수임을 알리면 혼자 사는 삶이 멋지다며 자유로운 삶을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이었나 보다.

주눅 들기 싫어서 사는데 문제없다고 하면 갑작스레 연락해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부자라고 착각했나 보다.

"백수에게 무슨 돈이 있다고 돈을 빌려달래?"

"집이 있으니까..."

"..."

그렇게 나는 또 상처를 받았다. 형편이 좋지 않다며 돈을 빌려달라는 그들이 정작 나보다 잘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돈을 빌려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못 받고 있는 돈도 상당하지만 더 이상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포기해 버렸다.

사정이 그렇고 상황이 그래서가 아니라 애초에 갚을 마음 없이 빌려 간 경우에는 너무 괘씸해서 재판까지 가서 받아낸 경우도 있었다. 오죽하면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까 걱정했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그냥 만만해 보여서 돈을 달라고 했던 거였다.

당장 먹을 쌀이 떨어져도 공과금부터 내고 보는 나는, 신용만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군인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나는 군인들에게 관대했다. 고등학교 때는 우리 반에 할당된 위문편지에 자발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소통할 사람이 없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편지가 그렇게도 좋았다. 주로 군인들이었다. 대부분 한두 번으로 끝나지만 서너 번씩 주고받은 사람도 꽤 있었다. 그들 중 진심을 담아 보내온 편지에는 답장을 꼬박 했다. 곧 제대하니 집으로 편지를 보내라며 집 주소와 집 전화번호를 알려준 사람도 있었다.

서울에 왔을 때 그중 한 명에게 연락을 했다. 흔쾌히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사는 동네로 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그 당시 내 주변의 남자들처럼 백수였는데 지갑을 안 가지고 왔다며 밥값을 나에게 계산하라고 했다. 돈도 없다면서 술을 마시자고 해서 술값까지 내가 계산했다. 직장 다니는 내가 계산하는 것쯤이야 그 당시엔 일상이었다. 군대에 가지 않는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했고 자리를 먼저 잡았으니 형편과는 별개로 내가 밥값을 내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나중엔 남자들이 내겠거니 했지만 한번 들인 습관은 결코 바뀌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느 날 연락 와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오죽하면 고시원에 살고 있는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싶어 어디다 쓰는지 물었지만 되려 화를 냈다. 꼭 갚을 테니 아무 소리하지 말고 빌려달라고 하기에 사용처를 밝히지 않으면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내 전 재산이었던 오백만 원은 차마 쓸 수 없어서 정기예금에 재가입해 둔 상태였다. 그러는 중에 누군가 내 방에 몰래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되어 급하게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월세 보증금 150만 원을 위해 예금 담보 대출을 받았다. 매달 조금씩 갚고 잔금 50만 원이 남아있을 때였다.

다시 연락이 왔다. 또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번엔 오피스텔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고시원에서 단칸방으로 막 이사한 사람한테 오피스텔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거절했다. 그러자 며칠 뒤엔 차 사고가 나서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했다. 돈도 없는 사람이 차는 왜 몰고 다니는지 이해되지 않아 거절했다.

그러자 어느 날 다시 전화가 왔다. 부친이 외도를 해서 어머니의 속을 썩이고 있다고 했다. 장남으로서 부친을 대하기 싫어서 독립해야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월급을 받을 때마다 얼마씩 갚을 것이고 늦어도 석 달 이내에는 반드시 갚겠다고 다짐했다. 집안의 불우한 내막까지 털어놓는 터라 마음이 흔들렸다. 갚을 의지도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가진 돈이 없으니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은행에서 한차례 대출을 받아 잔금 50만 원이 남아있는 상태라 추가 대출이 어렵다고 하자 50만 원을 줄 테니 400만 원을 대출받아 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망설이자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선물로 보냈다. 이자뿐만 아니라 매달 원금 일부도 갚겠다고 하니 나는 대출을 받아 400만 원을 입금해 주었다. 힘들 때 도와주었으니 내 편 하나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을 요구할 때는 매일같이 전화하더니 돈을 빌려간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이자 내야 하는 날이 되어 연락을 하니 나중에 한꺼번에 주겠다며 되려 화를 냈다. 하지만 대출 만기일이 되어도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갚지 않았다.

차용증조차 없었다. 받기로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써주지 않았다. 차용증을 받기 위해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몇 달 만에 간신히 만났고 내가 미리 써놓은 차용증에 자필 사인을 받아냈다.

그러다 결혼식장에서 패싸움이 있었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대며 또다시 돈을 요구하기에 단호히 거절하였다. 빌려간 돈이나 갚으라고 하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월급을 받지 못했다며 형편이 어려우니 돈을 더 빌려달라고 했다. 이자까지 쳐서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더 이상 줄 돈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더니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구하라는 직장은 안 구하고 입학했다고 하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돈으로 등록금을 냈을까 싶었다.

애초에 돈을 갚을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는 연락처도 바꾸고 아예 잠수를 타버렸으니 그렇게 꼬마 때부터 모아 왔던 그 돈은 고스란히 사라져 버렸다.

몇 년이 지나자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비퍼, 삐삐를 나에게 인수하라며 연락이 왔다. 아마도 어떤 사정으로 가입을 했는데 요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떠맡길 누군가가 필요했고 만만했던 내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이전비용은 자신이 낼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서류를 보내라고 했고 신분증 복사본으로 명의 이전을 했다. 모처럼의 연락이라 원금만이라도 갚으라고 사정했고 몇 달에 걸쳐 30만 원, 25만 원, 20만 원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후 다시 연락처를 바꾸고 잠수를 타버렸다.

그리고 4년 후, 간신히 연락이 되어 300만 원만 갚으면 이자도 원금도 모두 변제한 걸로 하겠다고 하니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사정이 안 된다며 100만 원만 입금했다. 이마저도 내가 아닌 친구를 시켰더니 마지못해 입금한 거였다. 나머지는 또다시 시간을 달라고 하였으나 50만 원만 입금한 후 나머지는 모르겠다며 연락을 끊고 다시 번호를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7년이 지났다. 누군가에게 천만 원이란 거금을 빌려주고 또다시 멘붕이 왔을 때였다. 남은 돈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여전히 통화는 되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모친이 전화를 받았고 의심 없이 아들의 바뀐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간신히 통화가 되어 언제 갚을 것인지 물었더니, 뜬금없이 전화해서 돈을 달라고 한다며 화부터 냈고 갚을 수 없다고 했다. 잔금 150만 원으로 끝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못 갚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소송하기로 했다. 소송까지 가면 그동안의 이자를 포함하여 제대로 받을 테니 소송 전에 갚을 것을 마지막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법대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 홀로 재판 준비를 했다. 민사로 가자니 승소 판결이 나더라도 지금처럼 안 갚으면 그뿐이었다. 어차피 내가 만만해서 안 갚는 거라 무언가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법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때 법조인이라도 된 것처럼 열심히 알아보고 다녔다. 지금처럼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던 시절도 아니었다. 반드시 받아낼 수 있다는, 지급 명령을 신청하기로 했다. 지급 명령은 명확한 증빙 자료가 있으면 바로 판결이 난다고 했다. 차용증과 신분증 사본이 내 손에 있었으니 문제없어 보였다.




[지급 명령]

●개념 및 효력

• 지급명령의 개념
• "지급명령"이란 금전, 그 밖에 대체물(代替物)이나 유가증권의 일정한 수량의 지급을 목적으로 하는 채권자의 청구에 대해 이유가 있다고 인정되면 변론을 거치지 않고 채무자에게 일정한 급부를 명하는 재판을 말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62조)

• 지급명령의 요건
• 지급명령은 금전, 그 밖에 대체물(代替物)이나 유가증권의 일정한 수량의 지급을 목적으로 하는 청구에 한정됩니다. (민사소송법 제462조 본문) 또한 대한민국에서 공시송달 외의 방법으로 송달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62조 단서) 예를 들어 채무자가 외국에 있거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등의 경우는 지급명령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 지급명령의 효력
• 지급명령에 대해 이의신청이 없거나, 이의신청을 취하하거나, 각하 결정이 확정된 경우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인정됩니다. (민사소송법 제474조)

●신청 절차

• 지급명령 신청서 제출
• 지급명령 신청서에는 당사자와 법정대리인, 청구 취지와 원인을 적어야 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64조 및 제249조 제1항) 관할은 채무자의 보통 재판적이 있는 곳의 지방법원, 제7조(근무지의 특별재판적), 제8조(거소지 또는 의무 이행지의 특별재판적), 제9조(어음․수표 지급지의 특별재판적), 12조(사무소․영업소가 있는 곳의 특별재판적) 또는 제18조(불법행위지의 특별재판적)의 규정에 의한 관할법원에 신청하면 됩니다. (민사소송법 제463조)

• 지급명령의 결정
• 법원은 지급명령 신청서가 접수되면 이를 신속하게 심사한 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바로 지급명령을 결정합니다. [독촉절차 관련 재판 업무 처리에 관한 지침 (대법원 재판 예규 제1543호, 2015. 8. 21. 발령, 2015. 8. 21. 시행) 제4조 제1항]

• 지급명령은 채무자를 심문하지 않고 결정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67조)

• 지급명령에는 당사자, 법정대리인, 청구의 취지와 원인을 적고, 채무자가 지급명령이 송달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덧붙여 적어야 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68조)

●송달

• 채무자에 대한 송달
• 지급명령 정본은 독촉절차 안내서와 함께 채무자에게 먼저 송달해야 합니다. (독촉절차 관련 재판업무처리에 관한 지침 제4조 제2항)

• 보정명령
• 채무자에게 지급명령 정본의 송달이 불가능한 경우 (다만, 법원이 직권으로 사건을 소송절차에 부친 경우 제외) 법원은 채권자에게 보정명령을 합니다. (독촉절차 관련 재판업무처리에 관한 지침 제4조 제3항)

• 채권자에 대한 송달
• 법원의 법원서기관·법원사무관·법원주사 또는 법원주사보 (이하 '법원사무관 등'이라 한다)는 지급명령이 채무자에게 적법하게 송달되어 지급명령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지게 되면 송달 일자와 확정일자가 표시된 지급명령 정본을 바로 채권자에게 송달합니다. (독촉절차 관련 재판업무처리에 관한 지침 제5조 제2항)

• 이의신청
• 채무자가 지급명령을 송달받은 날부터 2주 이내에 이의신청을 한 경우 지급명령은 그 범위 안에서 효력을 잃습니다. (민사소송법 제470조 제1항)

●소송의 제기

• 채권자에 의한 소송 제기
• 채권자는 법원으로부터 채무자의 주소를 보정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우 소송 제기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466조 제1항).

• 법원에 의한 소송 제기
• 법원은 지급명령을 공시송달에 의하지 않고는 송달할 수 없거나 외국으로 송달해야 할 경우 직권에 의한 결정으로 사건을 소송절차에 부칠 수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466조 제2항)

• 채무자에 의한 소송 제기
• 채무자가 적법한 이의신청을 하면 채권자가 지급명령을 신청한 때에 이의 신청된 소가로 소송이 제기된 것으로 봅니다. (민사소송법 제472조 제2항)

• 인지 등의 보정
• 소송이 제기되면 지급명령을 결정한 법원은 채권자에게 상당한 기간을 정해 소를 제기한 경우 소장에 붙여야 할 인지액에서 소제기 신청 또는 지급명령 신청 시에 붙인 인지액을 뺀 액수의 인지를 더 첨부하도록 명령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73조 제1항)

• 채권자가 기간 이내에 인지를 보정하지 않은 경우 법원은 결정으로 지급명령 신청서를 각하해야 합니다. (민사소송법 제473조 제2항 전단) 이 결정에 대해서는 즉시항고를 할 수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473조 제2항 후단)




지급명령의 핵심은 상대방의 이의가 없으면 바로 판결이 나지만 상대방이 이의신청을 하면 다시 원점이 된다는 점이었다. 사소한 이유로도 이의를 제기하면 상황은 달라졌다. 이 상황을 모른다면 승소 가능성이 있었으니 소장을 작성하고 차용증과 신분증 사본 그리고 대출 통장 사본과 거래내역을 증빙 서류로 첨부했다.

상대방이 소장을 송달받지 못해도 문제가 되는데 다행히도 소장은 제대로 전달되었단다. 하지만 나에게 줄 돈은 없다면서 변호사 비용은 있었는지, 아님 나에게 주는 돈은 아까워도 변호사 비용은 아깝지 않았는지 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았고 이의를 제기해 버렸다.

그동안 2회에 걸쳐 원금을 변제하고 있었는데 휴대전화를 분실해서 연락을 하지 못했단다. 오히려 연락처를 알고 있는 내가 연락하지 않아서 못 주고 있을 뿐이지 원금 잔액은 당장이라도 지급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단 이자를 준다고 말한 적도 없었고 그런 내용이 적힌 차용증에 서명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한 달에도 여러 번 전화번호를 바꾸던 사람인데 전화번호를 바꿀 때마다 휴대전화를 분실하였던 것인지 그리고 보통 사람 같으면 휴대전화를 분실해도 자신의 번호는 계속 유지하여 사용하는데도 매번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쓸데없는 전화가 자꾸 걸려와서 전화번호를 바꾸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법원에서 보정을 명령했다. 이의 신청에 대한 반박도 조목조목 적어서 다시 접수했다. 이자 부분에 대한 이견이 핵심이라 차용증의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공판 기일이 잡혔다.

드넓은 법정에는 사람이 많았다. 재판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건지 구경하러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자 앞으로 나갔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떨렸으나 작정하고 나온 이상, 정신을 가다듬었다.

혹시라도 차용증을 내가 작성해서 무효라고 주장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자필 서명임을 강조했다. 차용에 대해서도 부정할까 봐 안 갚는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니 갑자기, 본인은 안 갚으려고 한 적이 없다며 지금까지도 잘 갚고 있었으니 시간을 주면 반드시 갚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자에 대해서는 약속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여러 가지 정황에 대해서 물었다. 결국 본인이 차용증에 스스로 서명한 것이 맞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차용증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자와 원금의 상환 계획이 적힌 차용증에 서명은 했으나 이자를 준다고 한 적이 없다고 계속 우겼고 그러다가 판사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내가 제출한 서류들을 모두 인정받았고 판사는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채무자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호통까지 치니 그제야 안도의 눈물이 쏟아졌다.

'내 편 들어주는 사람도 있구나.'

7년을 기다렸으니 더 이상은 기다려 줄 수 없다며 판사가 나서서 2주 후로 날짜를 지정해 주었고 그날까지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으라고 판결했다.

'이제 끝났다!'

법정을 나서는데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라도 사과를 하려나 싶었다. 사과를 받으면 또 흔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나지막하게 욕을 하고는 누가 볼세라 서둘러 도망가버렸다. 난 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힘들 때 도와준 대가가 고작 이런 거였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정해진 기일이 되어도 모두 입금되지 않았다. 본인이 계산한 원금의 잔액만 입금하고 잠수를 탔다. 아마도 그냥 버티면 되는 민사로 알았던 모양이다. 지급 명령을 신청한 이유는 민사 재판과는 달리 강제 집행을 할 수 있어서였다. 살고 있는 집에 가서 일명 '빨간딱지'를 붙이는 거였다.

판결문을 들고 강제 집행을 신청하러 갔는데 집행 장소인 집까지 내가 안내해야 한단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은 위문편지 덕분에 주소만 알고 있을 뿐이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주소로 보낸 소장을 잘 받은 걸로 보아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처럼 지도 어플이 있던 때가 아니었으니 무작정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아침, 주소 한 장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일단 송파로 갔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선 그 넓은 송파구 일대를 물어물어 종일 돌아다녔다. 그래도 근처까지는 잘 찾아갔으나 똑같은 2층 주택이 즐비한 곳에 다다르자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수많은 골목을 뒤져서 번지수에 다다랐다 싶으면 전혀 다른 번지수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빨간 벽돌집 수백 채 중에서 그 남자 집을 간신히 찾아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드디어 강제집행 신청을 했고 며칠 후 집행하러 갔다. 증인 두 명이 필요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문을 강제로 열어야 했는데 법원 전문 열쇠 수리공에게 오만 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단다. 저렴한 곳을 찾으려고 했더니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법원에서 내세우는 열쇠 수리공을 불러야 한다고 했다. 결국 그렇게 문을 따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가족사진을 통해 그 남자의 집임을 확인했다. 부친이랑 같이 살기 싫어서 독립하겠다더니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얹혀살고 있는 부모님 집에 일명 빨간딱지를 붙였다. TV, 냉장고, 김치 냉장고 등 주로 가전제품 위주로 붙였고 압류 리스트에 하나씩 입력되었다. 돈을 받지 못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상황을 보고 놀랄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통쾌했다. 놀란 부모님이라도 아들 대신 입금하거나 아님 가족 모두 다 같이 배 째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로 입금되었다는 법원의 연락을 받았다. 제 날짜에 입금했으면 원금과 7년 치 이자로 끝났겠지만 강제 집행을 통해 입금한 거라 20%의 지연 이자와 그동안의 소송 비용 그리고 강제 집행 비용까지 모든 금액을 물어내야 했다.

승소로 끝난 재판이지만 꽤 긴 시간이 걸렸고 나에게도 적지 않은 힘든 싸움이었다.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나 혼자 준비한, 처음이자 마지막 재판이었다. 힘들었던 만큼 소송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돈은 빌려주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이미 천만 원이란 거금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난 이후였다.

위문편지에서 시작된 악연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이 났다.




내 주변 사람들은 그랬다. 공과금이 밀려서 전기 수도 가스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고 해서 대신 내 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집에서 반팔 반바지를 입고 보일러를 빵빵 틀어놓고 살고 있었다. 답답해서 집에서는 긴팔은 입지 못하겠단다. 앞으로 쓰는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니 끊기기 전에 많이 쓸 거라고 했다. '아껴서 쓰는 게 아니라?' 그런 친구들을 많이 봤다. 배달 음식 한번 시켜보지 못한 나와는 달리 그들은 매 끼니 치킨이며 피자를 시켜 먹었다. 그러면서도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돈 없다며?"

"그래도 먹고 싶은 건 먹고살아야지."

"차라리 그 돈으로 공과금이나 내!"

"그렇게는 못 살아!"

어쩌자는 것일까? 그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이 다른 것일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왜 다른 생각으로 사는 걸까?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들으면 순간 흔들리곤 했다.

'어려울 때 도와주면 나중에라도 은혜를 갚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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