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다고 생각되면 내려놔. 막상 내려놓으면 그 무게를 알게 되는 것 같아. 내가 들고 있던 게 가벼운지 무거운지.
언제나 당당하고 싶었던 나는, 아니 솔직히 내 옆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겁이 났던 나는 그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처럼 당연한 듯 음식값을 지불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가끔은 집으로 불러서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모임의 장을 열었으니 한동안은 그렇게 시끌벅적한 삶도 재미있었다. 힘든 시기에 쉬었다 갈 수 있는 그런 편안한 공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게 나의 보금자리는 모든 것이 타인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음식 재료 하나를 사더라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대부분 누군가를 위한 것들이었다. 나도 처음엔 어머니처럼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했지만 힘들게 준비한 음식이 남기라도 하면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며칠 동안 먹어야만 했는데 그것이 되려 힘들었다. 그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지 나를 위한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할 맛있는 음식을 잔반 처리하듯이 먹어치우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뜸하다 싶어 먼저 연락하면 바빠서 못 온다던 사람들이 맛있는 것을 준비했으니 먹으러 오라고 하면 이상하게도 시간을 내어서 바로 왔다. 처음엔 그렇게라도 와줘서 고마웠지만 점차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무것이 없어도 찾아와 주는 사람은 없는 걸까?'
먼저 부르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연락이라도 해보던 사람들도 차츰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자 정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난 이런 존재였구나.'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림에 익숙해지면 그것도 좋았다. 그러다 다시 혼자가 되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환경에 곧잘 적응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버틸 수 있었다.
나만의 삶이 이어지자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닌 나에게 필요한 것들만 구입하게 되었다. 그러자 삶이 한결 편해졌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보자.'
그래서 세상과의 문을 닫아걸었지만 그럼에도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코로나 시대가 되었고 모두에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라고 했다.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함께 한 우리는 삼총사처럼 붙어 다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각자 다른 학교에 다녔지만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자주 만나곤 했다.
1남 2녀 중 둘째였던 한 친구는 가족들과 가족처럼 지내던 해맑은 아이였다. 집안도 괜찮은 편이었고 가족들과도 여느 집처럼 아웅다웅 재미있게 지냈다. 예뻤던 만큼 주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친구는 성격도 참 밝았다.
1남 2녀 중 막내였던 다른 한 친구는 아버지가 편찮으셨는데 산소통에 의지해 침상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려서부터 오빠가 가장 노릇을 했고 여동생들에게 유독 혹독하게 대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오빠는 장남이라서, 언니는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공부를 잘했던 그 친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은행에 취업해서 사회생활을 바로 시작했다. 가족들은 막내딸이 벌어오는 돈으로 거의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생의 희생으로 대학을 졸업한 언니는 직장생활 대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친구가 언니의 생활비까지 떠안고 살았으니 언니와 자주 싸웠고 매번 힘들어했다. 십 년 넘도록 매번 시험에 떨어지던 언니는 어느 날 결혼과 함께 출가해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형편이 나아진 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내가 성당에 다니면서도 친구들에게 성당에 가자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교는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해맑았던 친구가 증산도에 다니고 있다고 고백했다. 호기심에 몇 번 다니다 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따라 다른 친구도 함께 다니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는 좀 충격이었다. 똑 부러진 성격의 그녀가 선택했으니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항상 붙어 다니며 도장에 가있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서 내가 투덜댈 때마다 같이 다니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했던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가 아니라 심신을 단련하는 곳이라며 기어이 나를 데리고 갔다. '증산교'가 아닌 '증산도'임을 강조하면서 도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곳은 여느 종교 시설처럼 보였다. 나에게 성당을 그만두고 그곳에 오면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계속 거절하자 증산도 가입서라도 작성하라고 했고 우린 그 문제로 싸우게 되었다. 증산교로도 불리고 있었으니 나름 우리들의 종교전쟁이었던 셈이다. 셋 중 둘이 증산도로 빠지면서 하나 남은 나는, 친구가 아닌 포교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가 서울에 오게 되면서 친구들과 소원해졌고 고향에 가야 어쩌다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에게 특별한 친구였지만, 그들에게 나는 수많은 친구들 중 하나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우린 친구니까.
정작 안내했던 친구는 금방 시들해졌지만 따라갔던 친구는 깊이 빠져들었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친구는 뒤늦게 결혼을 했지만 그 종교의 거점인 대전으로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나와는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셈이지만 마음은 왠지 더 멀어졌던 것 같다.
코로나 시대가 되면서 친구들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그 친구에게도 연락을 했다. 잘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에 그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서먹하더라도 일단 반가운 척할 수도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답은 없었다. 싸웠던 친구라 하더라도 오랜만에 연락하면 좋았는데 그 친구는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우린 커서는 싸울 기회조차 없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힘들다더니 은근히 신경 쓰였고 친구의 대답이 그리웠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너에게 무슨 큰 잘못을 한 거니? 만약 그런 거라면 사과할게."
그제야 그 친구는 무슨 말이냐며 아니라고 했다. 단순히 바빠서 답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미 나의 메시지를 읽은 지 며칠이 지난 상황이라 그렇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그게 그 친구의 변명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런 셈 치기로 했다. 무언가 미안했는지 내 생일에 축하 인사를 보내와서 고맙다고는 했지만 이미 그 친구의 눈치를 보게 된 나는 더 이상 먼저 연락할 수는 없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려 줄 것 같았던 친구라고 내 맘 같지는 않았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난 가끔 과거에 갇혀 옛 친구를 떠올리기도 했다.
모임의 주선은 주로 내가 했었지만 모임에 나온 대부분의 친구들은 각자의 남편들 이야기만 했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 이야기만 했다. 그러자 공통 관심사로 통하는 친구들끼리 모이게 되었고 난 어디에도 끼어들 수 없었다.
그렇게 속마음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이 지낸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내 옆에서 친구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의식하지도 못했다. 외국에 나가서 알게 되는 인스턴트 친구가 전부였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들에게 털어놓는 그 순간들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난 여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날 옆집에 살던 이웃과 친구가 되었다. 각자의 공간에 살면서 아침에 잠깐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그 상황이 너무 좋았다. 따로 외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추운 날에도 외투가 필요 없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중국인과 결혼해서 몇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 왔었다. 젊은 중국인이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고 소문이 났었다. 언젠가부터 조용하다 싶더라니 뇌종양에 걸려 수술을 받았단다. 아직 언어능력이 회복되지 않아 단어를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와의 대화에서 주로 내가 말을 했다.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로 대화거리였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그녀가 '사...'라고 하면 '사과? 사이다?' 이런 식으로 단어를 먼저 나열해 주어야 했다. 우린 많은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같이 있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녀는 자기 병원비 때문에 남편이 일을 하기 위해 중국에 갔고 코로나19 때문에 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믿었지만 내가 본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진열된 액자에도 남편 사진이 없는 걸로 보아 짐작은 되지만 그녀가 얘기하지 않으니 나도 묻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종종 딸이 중국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는 걸 보면 끝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남편 얘기가 빠지니 그녀도 혼자 사는 또래 친구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녀는 이사를 가고 싶어 했다. 정확히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했다. 그녀가 병이 든 것이 이 집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라의 맨 위층은 다른 층과 구조가 달랐고 복층이었다. 위층과 복층에는 각각 외부로 드러난 마당 같은 베란다가 있었고 바닥에는 타일이 깔려있었는데 그 타일마저 깨져있었다. 큰방의 절반 정도가 위층 베란다의 아래라 결로가 심했다.
나도 처음엔 창마다 일명 뽁뽁이, 에어캡을 붙였지만 습기가 너무 차서 일주일 만에 제거했다. 얼음이 녹는 2월 즈음엔 환기를 제때 시키지 않으면 외부에 노출된 베란다가 있는 딱 그 천장에만 곰팡이가 생기곤 했다. 바닥에 스며든 빗물이 겨울 동안 꽁꽁 얼어있다가 봄에 녹으면서 물기가 바닥으로 스며든다고 했다.
처음 문제가 생겼을 땐 우리 층 집들이 다 같은 문제를 겪고 있어서 하자보수비로 처리했다. 외부로 노출된 바닥에 깔린 타일을 제거하고 방수포를 깔았다. 대신 5년 정도가 지나면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때는 각자 알아서 관리하기로 했다. 공사 덕분인지 미리 환기를 시킨 덕분인지 몇 년 동안은 문제가 없었다.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팔고 이사 나갔고 새로운 사람들이 위층으로 이사 왔다. 나는 큰방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방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는데 재작년 2월쯤 방심한 사이 곰팡이가 생긴 걸 뒤늦게 발견했다. 벽지가 제법 훼손되었지만 무작정 도배를 할 수 없었다. 초기의 상황에 대해서 모르는 위층에 알려주려고 단체 톡방에서 결로 부분을 설명했다. 혹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걸로 오해할 수 있어서 도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대신 그전에 위층 베란다 바닥 점검과 관리를 부탁했다.
그러자 대뜸 자기가 왜 책임져야 하냐고 큰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사 왔는데 바닥 관리에 대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으니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이혼한 전남편까지 동원해서 개인적으로 항의 전화를 했다. 그 남자는 빌라 건축을 하는 업자라며 건축에 대해 잘 안다고 큰소리쳤다. 그럼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지만 하자보수 처리 당시에 주워 들었던 용어들을 언급하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건물 옥상은 공용 공간이지만 우리 빌라의 옥상은 위층만 출입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되어있었다. 초기에도 이런 상황 때문에 하자보수비를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렸었다.
개인 공간이라 알아서 관리해 달라고 한 것인데 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관리해 줄 테니 집을 오픈하라고 했다. 그제야 알겠다며 주기적인 바닥 관리를 약속했다.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오간 내용까지 모두 단체 톡방에 고스란히 전달하자 더 이상 개인적인 전화는 없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면 헤어진 남편까지 앞세우는 걸까?'
단체 톡방이 한동안 시끄러웠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자 옆집의 그녀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기 집은 정말 심각하다고 해서 가봤었는데 곰팡이가 큰방 전체를 덮고 있었다. 처음 바닥 공사를 하고 안정되었을 때 그녀가 옆집으로 이사를 왔었고 몇 년 동안은 문제가 없었단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렇게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단다. 게다가 그 와중에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수술로 인해 병원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집은 더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아픈 것이 다 그 곰팡이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갈 때마다 창을 열고 환기를 시켰지만 창문에 붙여둔 뽁뽁이는 끝까지 떼지 않았다. 건넛집에서 들여다본다며 큰방 창문은 아예 열지도 못하게 했다. 외출하는 동안만이라도 창을 열어두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보았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근처에 사는 친정어머니가 그녀의 매 끼니를 챙겨주러 오시는데 그런 환경을 보고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도 제습기 대신 공기청정기만 틀어놓고 있었다. 수시로 비워야 하는 물통을 비울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크고 작은 화분이 가득한 거실도 습해서 내가 갖고 있던 성능 좋은 제습기를 가져다 틀어주었다. 물통도 수시로 비워주겠다고 했지만 소리가 시끄럽다고 꺼버렸다.
맞는 구석은 없었지만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갔다. 하지만 나의 참견이 계속되자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눈치를 보게 된 난 더 이상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는 쪽에서 원치 않으면 그건 조언이 아니라 잔소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잘 지내는지 봐주는 게 전부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온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2년 살고 2년 자동 계약 연장한 상태에서 집주인에게 얘기를 했단다. 집주인은 흔쾌히 방을 빼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어느 집주인이 계약기간 전에 위약금 없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겠냐며, 중개수수료는 부담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집이 문제가 있어서 나가는 건데 왜 자기가 내야 하냐고 발끈했다. 집의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고는 하지만 집주인이 와서 직접 보면 중개수수료뿐만 아니라 도배까지 요구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번 와서 보겠다고 했다는데 그런지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이사를 가고 싶다면서도 집주인의 방문만을 기다리고 있어서 좀 더 강력하게 얘기하라고 했다. 방문을 차일피일 미루던 집주인은 그녀가 이사를 강력하게 주장하자 그제야 집으로 찾아왔다. 역시나 집을 보더니 대뜸 화를 냈다고 한다. 집을 원상태로 복구시키고 나가라고 했고 언쟁이 생겼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중개수수료뿐만 아니라 도배까지 해주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것이 내가 말했던 대로 흘러가자 그녀는 나에게 다시 조언을 구했다. 그런 민감한 상황에선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를 잘 알고 있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맡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받는 중개수수료에는 그런 중재 또한 포함되는 값이라 생각했다. 부동산 중개인은 그녀 가족의 집 또한 계약 만료 때마다 중개해 주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그녀의 편에 조금 더 기울어 있었고 그녀의 부담 없이 결국 잘 마무리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근처 아파트로 이사 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처럼 자주 놀러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그녀를 케어하고 있으니 가족들 입장에선 내가 반갑겠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무에게나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가족이 더 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이웃 친구와는 그대로 안녕이 되었다.
조금만 인연이 쌓이면 나는 정이 들었다. 사람 만나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믿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막상 만나고 친해지면 간이고 쓸개고 다 떼어줄 것처럼 대했으니 '나'는 없었다. 나로선 어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으면 좋을 뿐, 밀고 당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 그 상황, 그 느낌으로 판단해서 조건이란 것은 굳이 따지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정이 들어 생긴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 하나가 무너지면 그 자체로 끝나버렸다. 몸이 힘든 건 참아도 마음이 힘든 건 못 견디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은 그게 후회가 되었다. 조건이라도 봤으면 마음이 끝나버리더라도 그 조건 때문에 실낱같은 미련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종종 후회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