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놀던 어린 시절에는 보이는 모든 것을 읽었다. 낡은 신문이나 버리려고 쌓아둔 책도 가져다 읽었는데 그중에는 정기간행물도 있었다. 영웅담이나 기적과 같은 특별한 내용을 소개하는 글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눈이 내리는 강 위에 비상 착륙한 비행기는 흑백 사진이었음에도 당시 춥고 긴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때가 80년대쯤이었으니 그 사건은 아마도 그 이전이었던 것 같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2016년 9월에 개봉된 미국의 영화. US 에어웨이스 1549편 불시착 사고 기장 체슬리 설런버거의 이야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작 및 감독 톰 행크스, 아론 에크하트, 로라 리니 출연.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어릴 때 읽었던 그 기사의 내용이라 생각하고 반가웠다. 하지만 이 영화는 2009년에 있었던 사건을 영화화했단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성인이었을 때는 그런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흑백사진일 리도 없었다. 겨울의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비행기, 기장의 빠른 판단으로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구조된 비행기 사고. 처음엔 오래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보다며 열심히 검색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21세기 기사뿐이었다. 동일한 조건으로 일어난 사고가 또 있었다고 해도 이상했다. 혼란스러웠다.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왜곡된 기억들 중의 하나일까?
나는 왜곡되거나 까맣게 잊고 있는 일들이 많았다. 대부분 애써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었다. 어릴 때 고양이와의 에피소드도 그랬다. 한 방에 같이 있던 나비가 나와 기싸움을 하다가 나에게 펀치를 날렸다고 기억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글을 쓰고 난 후,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평소에도 고양이 나비는 내 몸 곳곳을 할퀴어 상처를 내곤 했는데 그날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나비는 나를 노려보다가 나에게 달려들어 내 손을 물어버렸다. 물리는 순간,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어린 마음에 그날의 일이 공포가 되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왜 고양이를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어쩜 스스로 지워버렸는지 모른다.
따뜻한 어느 날이었다. 집에서 도망치듯나와 독립했지만 몇 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던날이었다. 자해 흔적들이 사라진 내 손목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나비가 할퀴고 물었던 상처들마저 말끔히 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내 손을 바라보던 그날.
'어른이 되니 어릴 때의 상처들은 다 아무는구나.'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동시에 지워버린 어린 날의 기억도 함께 생각났다. 나의 기억은 때로는 왜곡된 기억을 진실이라 믿기도 했다.
멘털 에너지를 회복하는 방식에 따라 외향적, 내향적으로 나눈다는데 난 극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의 약속이 취소되어도 실망이 아니라 왠지 안도하게 되는, 그런 성격이었다.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굳이 끌어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자포자기 상태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에게도 나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집 밖이 무섭기도 했으니 차가 있는 지인과의 약속이 있을 때는 집 앞으로 데리러 오라고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가끔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얼마나 귀하게 자랐으면 모시러 오라고 하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표적이 되었다. 지금은 범죄로 인식되고 있는 일이 그때는 재수 없는 일상의 일들이었다. 그래서 버스나 지하철 그리고 택시는 점점 기피대상이 되었고 무리해서라도 걸어 다니는 쪽을 택하는 일이 점점 늘어만 갔다.
예전에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나 정장을 입었을 때는 택시를 이용했었다. 그런데 택시 기사는 얼굴을 보지 않고 어정쩡하게 뒤돌아다 보며 인사했다. 조수석 뒷자리에 타게 되면 운전석에서 스커트 속이 보였던 모양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탈 때마다 택시 기사를 지켜보았다. 역시나 그들의 시선은 대부분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스커트를 입은 날은 택시 이용이 꺼려졌고 결국 스커트를 입지 않게 되었다.
붐비는 지하철 즉 '지옥철'을 타게 되면 치한은 항상 존재했고 왜 매번 나만 따라다니나 싶을 정도였다. 보통 초중고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정받는데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초중고가 다 있었다. 초등학교에 이어 그 옆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히 고등학교도 바로 옆에 있는 학교에 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새로운 지역이 개발되면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곳의 학생들이 다닐 학교가 부족하자 파도처럼 지역별로 밀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버스를 타고 집에서 먼 학교로 등교를 하게 되면서 '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탈 곳이 없지만 밀어붙여서라도 타야 했던 지옥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그 버스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다.
어느 날 내 엉덩이에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착 들러붙었다. 돌아다볼 수도 없어서 고개만 겨우 돌려보았지만 내 주변에는 여학생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손'은 여전히 내 엉덩이에 붙어있었다. 내 손으로 그 손을 잡아떼어냈다. 그런데 떨어졌던 그 손은 그대로 내 엉덩이에 다시 착하고 붙었다. 반복되는 그 상황에서 학교에 도착했다. 끝까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그 일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내 엉덩이뿐만 아니라 그 남자의 손을 떼어냈던 내 손이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엉덩이를 만졌다는 나쁜 기억을 내 손까지 고스란히 기억해 버렸다. 그날의 사건은, 그 손을 떼어냈던 일마저 후회되었다. 몸이 기억하는 나쁜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한 번은 주말에 친구네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노선이라 지하철은 텅 비어있었다. 오래가야 해서 사람이 없는 빈자리에 앉았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앉았다. 남자였다. 빈자리도 많은데 굳이 왜 붙어 앉나 싶었지만 말끔한 차림이라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자 엉덩이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겨울이라 스팀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왠지 기분 나쁜 온기였다. 옆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자세가 조금 어정쩡하기는 했지만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남자의 두 손은 자신의 겨드랑이에 끼고 있으니 아닌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그 남자의 자세가 수상쩍었다. 허리로 앉은 듯이 엉덩이를 빼고 좌석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있었다. 그래서 붙어있던 그 남자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 순간 내 몸이 있던 자리에 그 남자의 손이 있었다. 이상한 자세로 성추행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내가 알아차리면 도망가거나 민망해할 줄 알았지만 그 남자는 당당하게 계속 앉아있었다.
내가 피하자 싶어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그 남자도 따라왔다. 그래서 아예 지하철 옆칸으로 이동해서 사람이 몇 명 앉아있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그 남자도 또다시 나를 따라왔고 마치 일행인 듯 자연스럽게 내 옆에 탁 붙어 앉았다. 짜증이 났지만 내가 피하자 싶어 다시 자리를 옮겼다. 빈자리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어느 아주머니 옆에 붙어 앉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또 따라와서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앞에도 사람이 있고 내 옆에도 사람이 있으니 이번에는 그러지 않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시 엉덩이를 빼고 앉았다. 불안해서 이번에는 내 허벅지 쪽을 대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뒤쪽 엉덩이를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다보니 그 남자의 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 남자는 '그 일'을 얼마나 저지르고 다녔는지 아주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팔을 자기 허리 뒤로 넣어서 남들 모르게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몸을 움직이자 이번에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내가 몸을 비틀어서 그 남자의 손을 떼어내자 그 남자는 거칠게 내 엉덩이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눈을 감고 말하는 그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는 너무 섬뜩했다.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웠고 도망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일단 내리기로 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적한 지하철 내부만큼 승강장에도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라 그 남자와 같이 내리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했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찰나 간신히 그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안도했다. 나를 놓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멍해있을 그 남자를 확인하려고 돌아다보았다. 당연히 의자에 앉아있을 줄 알았던 그 남자는 닫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내 뒤에 서 있었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였다. 나를 따라 내리려고 했으니 어디까지 쫓아올 셈이었던 걸까? 그 후로 지하철 이용도 힘들어졌고 특히 비어있는 좌석은 더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종류의 '그들'을 만나면서 시간은 흘렀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그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신고를 하면 물증이 없어도 범인을 잡아주기도 하고 처벌을 하기도 했다.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나에게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는 도망치지 말고 반드시 신고하자고 다짐했다.
몇 년 전, 갑작스럽게 광화문 교보문고에 갈 일이 생겼다. 모처럼의 약속이라 602번 버스를 탔다. 익숙한 노선이었고 평일 오전 시간대라 버스 내부도 붐비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맨 뒷좌석에 여자 둘이 앉아있어서 바로 그 앞 좌석에 가서 앉았다.
타고난 후 얼마 가지 않아서 한 남자가 버스에 올랐다. 사람 얼굴을 잘 보지는 않지만 그날따라 느낌이 이상해서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 남자는 버스에 오르면서 혼자 히죽 웃고 있었다. 언젠가 보호자와 함께 버스에 탄 정신지체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매번 주변 여성 승객만을 불편하게 하는 장난을 치곤 했는데 정신 연령은 어렸지만 몸집은 성인이라 보호자가 말리기엔 항상 역부족이었다. 히죽 웃으며 타던 이 남자를 보는 순간 그 남자가 보호자 없이 혼자 탔나 싶었지만 그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 나쁜 느낌이었고 이 남자는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왠지 돌발 행동을 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불안하게도 그 남자는 버스 맨 뒷자리로 갔다. 그래도 내 뒷자리는 아니라 안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뒷자리 여성 승객은 모두 내렸고 누군가 내 뒷자리로 옮겨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온 신경은 뒷좌석으로 향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 머리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머리카락 끝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긴 머리카락이 의자 뒤로 넘어가서 그 남자의 무릎에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서 하나로 묶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더 이상 어떤 반응도 없으니 순간 내가 너무 예민했나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몸을 움직이다 보니 머리카락이다시 뒤로 넘어갔지만 의자 뒤로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몸으로 힘겹게 누르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빼내려는 아주 미세한 시도가 있었다. 아주 조심히 신경을 쓰는 듯한 그 남자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난 온몸에 힘을 주어 머리카락을 등으로 눌렀다. 뜻대로 안 되니 이번에는 묶고 있는 위쪽, 뒤통수를 살짝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점점 더 강하게 왔고 어느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건 분명히 뒤에 앉은 남자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거였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었고 세상은 변했으니 신고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 버스 내부에 CCTV는 있었지만 뒷좌석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다. 화질에 따라 안 보일 수도 있었고 내 몸에 가려서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내가 모르는 더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느낌이 올 때 딱 뒤를 돌아보면 현장을 잡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차마 그걸 할 수 없었다. 정말 나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라면 저지르는 그 순간에 그 남자와 얼굴이라도,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순간이 평생 각인되고 말 것 같았다. 여고 때 버스에서 만난 그 치한의 손을, 아니 그 손을 떼내려던 내 손의 느낌을, 그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이 남자를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니 폰으로 내 뒤를 비쳐보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떨려서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내 뒤의 남자가 얼굴이라도 들이밀면 어쩌나 싶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넋이 빠져있는데 광화문이라는 안내 방송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내리려고 벌떡 일어서서 문쪽으로 다가갔는데 주변 풍경을 보니 한 정거장 전이었다. 그래서 출입구 부근의 좌석에 일단 앉으려고 보니 그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가 먼저 내리면 다행이겠다 싶어 안도했다. 하지만 내가 좌석에 앉으니 그 남자도 내 뒤쪽 좌석에 와서 앉았다. 버스에서 그만 둘 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따라 내릴까 봐 무서워서 내리기도 싫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가장 많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싶어서 용기를 내어 버스에서 내렸다.
교보문고로 가려면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무서워서 바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서 의미 없이 횡단보도를 이리저리 건너 다녔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가버렸겠지 싶어서둘러보니 보이지 않았다. 계단으로 내려섰다. 뒤따라오는 이가 없음을 안도했고 그냥 여기가 목적지여서 내렸던 것인데 내가 끝까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무심코 위쪽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남자가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치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도 거리가 있으니 안심을 했고 최선을 다해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가 갑자기 주먹을 들어 보이며 위협을 했고 난 너무 놀라서 꼼짝할 수 없었다. 제자리에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서 있었는데 그것이 그 남자를 자극했는지 갑자기 달려오기 시작했다. 난 무조건 달렸지만 하필 그날따라 지하에는 사람이 없었다. 교보문고 출입구 부근에 항상 있던 노점상조차도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다. 난 죽어라 뛰었고 교보문고가 보이는 지점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넘어질 듯 아슬했지만 끝내 다다랐고 무사히 그 문을 통과했다.
그 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고서야 안도를 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을 닦아내느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자장가처럼 편하게 들려왔다.
그 남자는 나에게 무슨 짓을 했고, 위협했고, 나를 따라왔다. 신고를 하고 싶었지만 난 결국 신고하지 못했다. 딱히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정황을 찾았다고 해도 기껏 경범죄로 처벌받는 게 전부일 텐데 그 후에 그 남자가 어떤 보복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쯤이면 내 이름까지 알고 있을 테고 심지어 내 연락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사건을 신고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신고하게 되면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잊어버리면 그냥 이상한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말 테지만 신고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이름은 물론 얼굴을 봐야 할 테니 두고두고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억해 내지 말아야 할 수많은 얼굴이 하나 더 느는 것이 싫었다. 성인이 되었고 이제는 인식도 많이 달라져서 신고를 하면 경찰도 도와주려고 하겠지만 우선은 나를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신고할 수 없었다.여전히.
간신히 타기 시작하게 된 버스는 다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난 여행이 좋았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대중교통이 불편했으니 거기서는 나의 불편함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느껴졌다. 집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냥 빌라를 사서 살았더라면 빨리 정착했을 테고 좀 더 빨리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집을 사버리면 사무실이 이전하게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으니 나에겐 그 대중교통이 여전히 버거웠다. 직장을 그만두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자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대중교통에서의 끔찍한 일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고 있지만 아닌 척 애써 숨기며 살았다. 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겉으로 드러나 보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