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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26

지금 순간에 충실하고 미래는 최소한의 기대만 걸어라.

by 안녕
불편함이 두려움이 되기 전에




나의 하루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를 정리하고 청소를 다. 장을 비우고, 샤워하고,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는 나의 한결같은 아침 풍경이었다.

갑작스러운 취업으로 그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되자, 그것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도 다시 알게 되었다.

나의 생체 리듬은 해시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뜨면 항상 청소가 먼저여야 했던 나는, 너무 일찍 일어나게 되면 주변에 피해를 줄까 봐 최대한 늦게 일어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해가 뜨면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그래서 지금은 해가 뜨면 잠이 깨고, 해가 지면 자동으로 수면모드가 되었으니 흐리거나 비 오는 어두운 날은 가끔 늦게 일어나기도 했다. 여름과 겨울의 수면시간에 차이가 났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에너지 소모는 되는지 다행히 잠은 잘 자는 편이었다.

숙면을 위해 나름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매번 쉽게 잠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낮잠은 피하고 있었다. 조금 일찍 자더라도 최대한 버티다가 해가 지면 누웠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도 두통이 생겨서 고생했으니 수면시간조차 적당함을 유지해야 했다.

생각이 많아지면 쉽게 잠들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고 그러다 보면 새벽이 되어서 잠이 들기도 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머리를 베개에 댈 수 없어 이마를 또는 얼굴을 베개에 대고 누워야 했다. 머리를 파묻은 베갯속에서 맥박 소리가 울리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배에서 들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손가락 사이에서 울리는 맥박 소리가 잠을 방해하기도 했다. 심장 소리보다 더 빠른 소리 때문에 쉽게 잠들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복부의 통증으로 힘들었다. 복부의 통증이 시작되면 잠을 잘 수도 없고 어렵게 잠이 들더라도 새로운 꿈 속에 갇히곤 했다. 오랜 기간의 경험으로 그나마 터득한 것은 오른쪽 복부를 누르고 있으면 통증이 덜하다는 것이다. 통증이 사그라들 때. 빨리 잠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주먹을 쥐고 오른쪽 배에 갖다 대고 엎드리면 통증이 줄었고 그 틈을 타 잠들었다. 자는 동안 뒤척이기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내 주먹은 아침까지 최선을 다해 제 자리를 지켰고, 덕분에 내 오른손은 퉁퉁 부어있기 일쑤였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다. 처음 보는 의사가 검사 결과를 아주 무덤덤하게 알려주었다. 이번에도 나를 괴롭히던 통증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암이시네요. 당장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그런 일이 있으면 나는 어떠한 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남은 삶에 병원비는 없었고, 그 흔한 보험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빨리 세상과 작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무덤덤하게 바로 일어섰다. 그런데 너무 아파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선생님, 진통제라도 처방해 주시면 안 되나요?"

의사는 치료를 거부하는 나에게 진통제 처방 대신 입원을 권유했고, 당장 그 통증에서 벗어나려면 병원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난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었다. 병원비라니... 10년 전, 최선을 다해 치료받으러 다니던 그때의 정성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아니 그조차도 지나고 보니 쓸데없는 짓임을 깨닫고 내내 후회했었다.

나는 보험을 들지 않았다. 암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이후에는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보험금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남은 가족을 위한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내 장례비용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장의 통증을 위한 약값, 병원비는 있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돈이 절실해지고 또한 욕심이 생겼다.

그건 꿈이었지만 어떡해야 할지 몰라 펑펑 울었다. 병 때문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동안은 아프지 않길 바랐다. 통증만이라도 없이 남은 시간을 잘 버틸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라고 있었다.

나도 한때 체계적으로 삶을 계획하고 싶어서 보험 가입을 하려고 했었다. 서른을 앞둔 어느 날, 여러 보험사의 상품 중에서 고르고 골라 만기 환급되는 상품으로 보험 가입을 했다. 혜택이 좋았던 만큼 간호사가 회사로 방문해서 채혈을 해갔다. 암에 걸리지 않더라도 나중에 목돈을 받을 수 있으니 적금 드는 셈 치고 가입한 거라 기분도 좋았다. 며칠을 고민하며 어렵게 선택한 보험이었지만 며칠 뒤 보험 회사로부터 보험 승인 거절 연락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내가 B형 간염 보균자였기 때문이다.




만성 B형 간염 보균자
보통은 급성 B형 간염 바이러스 간염 후 90% 이상에서 B형 간염 항체(HBsAb)가 생기지만, 10% 정도에서는 6개월 이상 B형 간염 표면항체(HBsAb)가 생기지 않고 B형 간염 표면항원(HBsAg)을 가지고 있게 된다. 이렇게 B형 간염 간염 표면 항원이 6개월 이상 양성인 사람 중에서 간 기능이 정상인 경우를 만성 B형 간염 보균자라고 하고, 간 기능에 이상이 있는 경우를 만성 B형 간염이라고 한다.

만성 B형 간염 보균자의 경우 대개는 15년~30년 정도 특별한 증상이나 간 기능의 악화 없이 지내다가 만성 간염으로 진행하게 된다. 만성 간염이 잘 치유되지 않으면 간경화나 간암으로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는 만성 간염 보균자라 해도 언제 만성간염, 간경화, 간암으로 악화될지 모르므로 주기적으로(6개월에 1회) 혈액검사와 간초음파를 통해서 경과 관찰을 해주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몸속에 있는 B형 간염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B형 간염 보균자에서 중요한 것은 정기적인 검사를 해서 합병증의 발생 유무를 관찰하는 것이다. 만성 간염의 증상으로는 전신 무력감, 피로감, 피부의 가려움증, 목이나 어깨에 거미줄 모양의 붉은 반점, 황달 등이 있으니, 정기 검사 중간이라도 이러한 증상이 있으면 의사와 반드시 상의하시기 바란다.

1. 만성 B형 간염 보균자는 B형 간염의 예방접종을 실시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벌써 B형 간염 바이러스가 몸속에 있어서 B형 간염에 대한 예방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2. 보균자 가족은 간염 검사를 하시고, 필요하면 예방접종을 받는다.
3. B형 간염의 감염 경로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분만 시 산모로부터 태아에 전염되는 수직감염이다. 따라서 이의 예방을 위해서 보균자인 산모는 출산 전에 보균자임을 의사에게 반드시 알려주어, 태어나는 신생아가 간염에 전염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받는다.
4. B형 간염 보균자는 혈액, 침, 정액, 월경혈, 모유 등의 인체의 분비물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간염을 전파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접촉(식사, 목욕, 악수 등)으로는 B형 간염균이 전염되지는 않는다.
5. 만성 보균자나 만성 간염 환자는 일부에서 합병증(활동성 간염, 간경화, 간 종양 등)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기적인 진찰 및 간 기능 검사를 6개월에 1회 정도 실시하여 합병증을 조기에 발견하여 미리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6. 만성 보균자는 간의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약물이나 한약, 음주를 피한다.




중학교 때 성당에서 헌혈 행사를 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헌혈에 동참하고 싶었다. 하지만 헌혈에는 나이 제한이 있었고, 나는 아직 중학생이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당했다. 키가 컸으니 체중도 적합하고 건강했지만 의사는 안 된다고 한사코 말렸다. 정말 헌혈에 동참하고 싶었던 나는 파견 나오신 의료진들 중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의사에게로 갔다. 경험 많으신 분의 생각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분은 나의 신체 조건을 확인하시고는 헌혈을 허락해 주셨다. 처음이라 떨렸지만 주사 따위에 겁을 먹은 적은 없었으니 막상 해보니 정말 별거 아니었다. 그렇게 생애 첫 헌혈증을 받았고, 앞으로도 꾸준히 헌혈을 하기로 다짐했다.

헌혈을 하고 나면,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알려주었는데 그때 나는 B형 간염 보균자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어렵게 헌혈한 피는 이미 폐기 처분되었고, 앞으로도 헌혈하면 안 된다고 통보받았다. 100번을 채우겠다는 내 작은 포부와 달리 그 헌혈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물론 지금은 빈혈로 인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헌혈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날이 의료기술이 좋아지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도 헌혈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여러 해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절망의 순간에는 내 피라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여전히 불가능했다. 피가 부족하다는 뉴스, 헌혈 동참을 호소하는 안내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울적했다. 그래서 조혈모세포 기증을 신청하기로 했다. 정보 등록을 위해서는 채혈을 해야 했다. 한마음 한 몸 운동본부 근무시간 내에 방문해야 하지만 주 6일 근무를 하던 때라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정성을 기특하게 생각하셨는지 직원 한분이 회사까지 찾아와 주셨고 채혈해 가셨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와 맞는 수여자는 없는지 연락은 없었다.

난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단체로 B형 간염 백신을 맞았다. 의무적으로 접종했던 백신들 중 하나였지만 혹시나 싶어 기록을 찾아서 확인도 했다. 백신을 맞으면 당연히 항체가 형성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백신은 맞았지만 항체 여부를 따로 검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내 몸에 B형 간염 바이러스가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하니 백신으로 주입받은 바이러스가 내 몸을 감염시킨 건 아닌지, 아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던 것 같다.

그때 난 집에서 격리당했다. 가족들이 먼저 밥을 다 먹고 난 후에 남은 반찬으로 혼자서 밥을 먹었다. 어떤 때는 누군가 남긴 밥을 먹기도 했다. 처음 그 일을 겪었을 때는 어린 나이에 충격이었고 남몰래 울기도 많이 했지만 어느새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밥상뿐만 아니라 수건도 따로 썼으니 가족으로부터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알기 전까지 그동안 함께 생활해 왔으니 당장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보였지만, 어머니는 그때부터라도 소중한 두 아들을 나로부터 보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는 B형 간염 환자였다. 간경화로 진행되어 몇 년을 입원하셨고, 그때 아버지 병간호는 어머니와 내가 돌아가며 맡았었다. 두 아들은 병원에 오지도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방과 후에 나만 병원에 가니까 다른 환자 가족들이 외동딸로 오해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퇴원하고 집으로 오시자 다른 가족과 함께 당연한 듯 식사하셨다. 나만 격리하기 애매한 상황이 되니 어머니는 그제야 간염 보균자는 별거 아니라면서, 나의 격리 생활도 자연스럽게 해제해 주셨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일상 속에서 은근한 압박은 이어졌다. 딸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그런 걱정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원인이 아버지일지도 모르는데 아버지는 일상을 살아가는데 나만 차별받는 게 조금은 억울했었다.

예전에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기본 혈액 검사에서 B형 간염 보균자라는 결과가 나오면 내 식판에는 빨간 스티커가 붙었다. B형 간염 보균자들을 거쳐간 식판은 별도로 관리된다고 했다.

지금은 일상생활을 함께 해도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전까지는 여러 곳에서 필요 이상으로 그런 취급을 받았다. 이제는 입원을 해도 내 식판에 스티커가 붙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B형 간염 보균자임을 밝히면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졌다. 그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는 게 병일지도 모른다. 2년마다 건강 검진을 받으라고 하지만 결과만 통보를 해줄 뿐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는 어느 기관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간 기능 검사 및 초음파 검사를 하여 혹시 간염이 생기지 않았나 확인해야 하며, 그 사이라도 상기에 간염과 관련되어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 나타난다면 즉시 의사와 상의해야 한다.'

1년에 두 차례 간 초음파 검사를 받으라고 하지만 그조차 검사 결과만 통보받을 뿐이다. 간 초음파 검사는 배에 젤을 바르고 기계를 갖다 대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검사지만 나에겐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잘 보기 위해 숨을 참아야 하는데, 난 그게 너무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한번 진행 후에는 한참 동안 숨 고르기를 해야 했고 그러다 간신히 진정되면 다시 진행하기를 반복했다. 몇 분이면 끝날 검사가 30분 이상은 걸렸지만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이번에도 지방간이 있고 담낭에 용종이 있다지만 한번 생긴 것들이 쉽게 없어질리는 없고, 그래서? 역시나 지켜보자고만 했다. 그래서 건강 검진을 받고 싶지 않아 회피하기도 하지만 독촉 문자가 계속 왔다.

몇 년 전, 건강검진 결과와 함께 대사 증후군 대상자라며 안내장을 받았었다. 성인병을 요즘엔 이렇게 불렀다.




대사 증후군(Metabolic syndrome)
대사성 증후군, 성인병, 신진대사 증후군, 인슐린 저항성 증후군

대사 증후군은 여러 가지 신진대사(대사)와 관련된 질환이 동반된다는 의미다. 고 중성지방혈증, 낮은 고밀도 콜레스테롤, 고혈압 및 당뇨병을 비롯한 당 대사 이상 등 각종 성인병이 복부 비만과 함께 발생하는 질환을 의미한다.

대사 증후군의 발병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인슐린 저항성(insulin resistance)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추정된다. 인슐린 저항성은 혈당을 낮추는 호르몬인 인슐린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감소함으로써, 근육 및 지방세포가 포도당을 잘 섭취하지 못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고자 더욱 많은 인슐린이 분비되어 여러 문제를 유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강 내의 내장지방은 대사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며 여러 물질을 분비한다. 이러한 물질은 혈압을 올리고 혈당 조절 호르몬인 인슐린의 역할을 방해하는데 이는 고 인슐린 혈증, 인슐린 저항성, 혈당 상승을 초래한다. 당뇨병과 심혈관 질환의 발생 위험성을 높이고, 혈관 내 염증과 응고를 유도하여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이렇게 유발된 고혈압, 당뇨병, 고 인슐린 혈증은 심혈관 질환이 발생할 위험성을 높인다.

대상 증후군의 주요 증상으로는 복부 비만이 있다. 이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 구성 요소나 합병증으로 인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래의 기준 중 세 가지 이상에 해당하는 경우에 대사 증후군으로 진단한다.
① 허리둘레 : 남자 90cm, 여자 80cm 이상
② 중성지방 : 150mg/dL 이상
③ 고밀도 지방 : 남자 40mg/dL 미만, 여자 50 mg/dL 미만
④ 혈압 : 130/85 mmHg 이상
⑤ 공복 혈당 : 100mg/L 이상

대사 증후군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체지방, 특히 내장지방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식사 조절과 규칙적이고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대사 증후군을 구성하는 질환은 생활습관병이다.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과 금연, 절주 등으로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한다면, 대사 증후군을 치료하고 이로 인한 합병증을 예방하여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대사 증후군이 있는 환자는 허혈성 심장병, 뇌졸중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이 발생하여 사망할 확률이 대사 증후군이 없는 사람에 비해 4배 정도 높다. 대사 증후군 환자가 당뇨병에 걸릴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3~5배 정도 높다. 그 외에 대사 증후군은 지방간, 폐쇄성 수면 무호흡과 관련이 깊고 각종 암에 의한 사망률 역시 높아진다.

대사 증후군이 있는 환자의 고지혈증, 고혈압, 혈당 상태가 생활습관을 개선한 후에도 목표치에 도달하지 않는 경우, 치료 원칙에 따라 각 질환에 대한 적절한 투약을 시행해야 한다. 많은 환자가 투약을 받는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생활습관이 개선되었음에도 건강 상태가 바람직해지지 않다면, 마땅히 현대 의학에서 검증을 거친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보건소에서 '대사증후군 만성질환 예방관리사업'을 하고 있단다. 체계적으로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얘기에 근처에 있는 목동 보건지소를 찾아갔다. 혹시 몰라 몇 년 치 건강 검진 결과지도 챙겨갔다. 최근 기록을 보곤 고혈압 약을 먹는지 물었다. 다들 일시적인 거라고 했다고 하니 그럼 그럴 거라고 했다. 그래서 지난 15년 동안 그 이야기를 들었다며 가져간 검사 기록을 모두 보여드리니, 고혈압이 맞는데 그동안 왜 치료를 받지 않았냐고 했다. 어디서도 치료를 받으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증상이 있으면 내원하라는데 그 증상이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드러기, 가려움증, 염증, 포진, 무기력감,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 호흡 곤란, 복통, 설사, 장염, 두통, 기절, 체력 저하, 현기증, 만성피로 등등 나는 이미 수많은 증상들과 일상을 함께 하고 있었다. 미세먼지 나쁨인 날엔 집에만 있어도 숨이 차고 종일 힘들었고 며칠 동안 가래가 들끓었다. 대부분 중복되는 증상이기 때문에 그중에 무엇이 고혈압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설령 알았다고 한들 쉽게 단정할 수도 없었다.

혈압뿐만이 아니었다. 중성지방, 고밀도 지방, 단백뇨, 공복 혈당 장애까지 있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거라는 소리를 매번 들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건강검진은 왜 받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조기 발견하면 좋다더니 지켜보자는 얘기만 수없이 들었다.

나는 다섯 가지 항목 중에서 허리둘레를 제외한 4가지 항목이 해당되어 대사 증후군에 속한다고 했다. 보통은 비만인 경우 성인병이 있다지만 나는 체중미달이었다. 아침마다 체중을 재고 기록하는 나는 매일 배변을 하지 않으면 압박이 심해져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배가 푹 꺼질 정도로 유지해야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정해진 체중을 초과하면 통증이 심해졌고 부족하면 빈혈로 고생했다. 평소에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쌀밥을 먹으면 통증이 심해져 잡곡 외에는 먹을 수도 없었고 음식에 소금으로 간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라면이 왜 맛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먹을 리도 없었다.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했던 나의 몸은 탄수화물과 지방 섭취와는 상관없었다. 나의 체중 유지 비법은 염분 조절이었다. 라면 2개 먹는 사람과 1개 먹는 사람의 염분 섭취가 같을 수는 없었고 물을 많이 넣어 싱겁게 먹었다고 우겨본들 그 속에 들어있는 염분이 다를 리 없었다. 매 끼니가 아닌 하루 기준으로 염분 양을 조절했고 하루에 고추장 한 스푼, 간장 한 스푼, 된장 한 스푼을 넘기지 않았다. 한 끼를 간이 충분한 음식을 먹었으면 다른 한 끼는 간을 하지 않아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살은 저절로 빠졌고 부기도 빠져있었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보다 먹어서 아프지 않고 무사히 배출시켰던 음식을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대중교통을 타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자연스레 왕복 10km 거리는 걸어 다녔다. 내 몸에 맞는 규칙을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여기서 무언가를 더 강요한다면 다 내려놓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보건소에서도 더 이상 개선할 생활 습관은 없다고 했다. 더 지켜보자며 6개월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여기서도 결론은 같았다. 검사 상, 정상으로 나오는 건 하나도 없지만 모두 일시적인 증상일 거라는 소견에 나는 오늘도 건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보험 회사처럼 기록으로만 보는 곳에서는 환자로 차별을 받았다. 암 환자였던 사람들조차도 완치가 되면 보험 가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혜택 좋은 그런 보험은 들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보험사로부터 보험 가입 거절을 당했다. 거절했던 보험사에서 나름 배려라면서, 거절 기록조차 남지 않게 하려면 보험 신청 자체를 취소하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마음이 힘든 건 못 견디지만, 몸이 힘든 건 잘 참았다. 그래서 죽을 만큼의 통증이 아니라면 굳이 애쓰지 않았다. 항생제나 항히스타민제가 필요하다거나 어디를 꿰매야 한다거나 어디가 부러졌거나 하지 않은 이상, 병원은 찾지 않았다.

'약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일주일'이라는 감기 따위로는 병원에 가지도 않았다. 생활습관을 바꾸고부터는 오래도록 감기에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열이 났을 뿐이니 열감기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동안 열이 떨어지지 않아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되어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용량 초과된 해열제를 처방받았는데 처방전을 본 약사가 걱정했다. 설마 의사가, 이 약 먹고 죽으라고 내린 처방은 아닐 테니 그냥 의사를 믿고 먹었다. 하지만 약을 다 먹고도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며칠 더 고생하다가 결국 '때가 되어서' 나았다. 아무리 아파도 잠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약 먹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대부분 먹어도 효과는 없었다.

더구나 나는 오래전 타이레놀 부작용을 겪었었다. 수술 후, 왼쪽 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날카로운 두통이 머리를 강타하자 서있기가 힘들었다. 일주일쯤 지속되자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마침 연휴가 시작되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수술받은 병원에 연락하니 그냥 타이레놀을 사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타이레놀을 먹자 갑자기 입술이 퉁퉁 부었는데 연휴가 끝나고 근처 병원에 가니 타이레놀 부작용이라고 했다.

의사들은 방법이 있는 것처럼 검사를 받으라고 하지만 검사 후의 말은 다 똑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르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푹 쉬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기검진은 강행했고 다시 가서 검사받으면 더 안 좋아졌다는 말과 함께 해결책 없이 또 두 달 후에 오라고 했다. 방법은 없는데 무책임하게 검사만 요구하는 병원에 안 간지 10년이 넘었지만 한 달 생활비 중 절반은 여전히 건강 보험료로 나가고 있다.

조금은 무모한 삶일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등짝 스매싱을 날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내가 안 가서 그렇지 병원에 가면 다 나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끝내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고 버텼을 때보다 약을 먹었는데도 전혀 듣지 않았던 경우가 더 힘들었다. 나에게 그건 절망이었다. 그래서 약을 먹어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불안이 생기면 그냥 참았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애써 위로했다. 내가 약을 안 먹어서 더 오래 아픈 것뿐이라고.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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