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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27

저 바닥 아래에서 꿈틀대는 불길한 무언가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by 안녕
그래서 때로는 진실이 불편하다.




의미 없이 다녀오는데 급급해진 나는 더 이상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 해외여행은 잠시 중단하기로 했고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국내로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었던 제주 올레길과 한라산 등반이 생각났다.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일정에 숙박비가 부담스러웠고 여유 있는 삶을 위해 제주도로 이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계약을 하기 직전인 2020년 1월, 한국에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게 되었다.

국내여행을 시작하지도 못해서인지 해외여행에 대해서 아쉬워할 틈은 없었고 사진 속 풍경을 보면서도 언제가 다시 가면 되는 곳이라 생각했으니 별다른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상황을 지켜보자며 버틴 시간이 어느덧 2년이 넘었다.

요즘 문득문득 소소한 것에서 그리움이 자꾸 묻어났다. 어쩜 그곳에, 다시는 못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라고 있었나 보다.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는 곳에서, 이제는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니 이대로 영영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냥 미루어 두었던 일들이 후회되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십 년이 지나도 이대로 일 것 같았다.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이사부터 강행하기로 했다. 내 불운이 동시에 들이닥친다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멍하니 살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집에 틀어박혀 글만 쓰게 되더라도 무조건 떠나기로 했다. 오래도록 눈 여겨두었던 제주도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요즘 들어 가장 생각나는 스페인은 어느새 나에게 가장 익숙한 나라가 되었다. 3번의 방문으로 4개월 정도를 체류했으니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나라가 되었다. 그곳에 못 간지도 어느새 5년이 되었다.

내가 가 본 유럽은 독일이 처음이었다. 출장으로 간 독일에서는 시차 적응에 실패하여 업무 외의 시간은 졸기에 바빴고 잠깐 자려고 누웠다 일어나면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11월 함부르크는 너무도 추웠다. 독일에서의 기억은 추위, 그것뿐이었다.

그다음 해에 스페인을 갔다. 두 번째 유럽이었지만 혼자서는 처음으로 갔던 첫 번째 유럽이었다.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면서 이유나 알아보자며 열심히 병원을 다니던 때였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 스페인에 파견 나가 있던 신부님의 초대로 스페인을 방문하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었다. 플라시보 효과라 할지라도 그 순간을 이용해야 할 만큼 많이 지쳐있었다. 물론 출국 하루 전날에 듣게 된 검사 결과로 인해 심적인 부담은 있었지만 마지막일지 모르니 최선을 다해 쉬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던 곳이었다.

스페인은 쉬려고 갔으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갔다. 현지에 계시는 스페인어 유창한 신부님이 도움을 주기로 하셨기 때문에 공항에서 시내까지 어떻게 가는지 최소한의 정보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에 계신 어느 수녀님이 한국에서 누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부님을 통해 부탁을 해오셨다. 수녀님의 휴대전화가 교체할 때가 되어서 한국에서 가져다 드리기로 했는데 바르셀로나에 계시던 수녀님은 주말에 마드리드에 오신다고 그때 달라고 하셨다.

나의 체류기간이 너무 길어서 수도원에서 머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신부님이 숙소를 따로 알아봐 주셨다. 한인민박을 운영하다 지금은 개인 작업을 하는 지인 집에 남는 빈방 하나를 내어주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그냥 신세 지기는 미안해서 한국에서 가져갈 것이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갑자기 잡힌 유럽 회의 일정 때문에 바빠진 신부님은 그 준비로 정신이 없으셨고 답을 주지 않으셨다.

내가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전에 신부님은 스페인을 떠나야 했고 대신 숙소 주인이 공항으로 마중 나와주었다. 신부님은 끝내 답이 없으셔서 내 소신대로 면세점에서 홍삼세트를 사 갔다. 11월 마드리드 밤거리는 제법 쌀쌀했지만 숙소 주인이 이끄는 대로만 따라가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4층이었던 숙소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열쇠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시험 삼아 한번 열어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싶을 정도로 쉽게 열었지만 이후로는 한 번에 문을 연 적이 거의 없었다. 홍삼세트를 선물로 꺼내놓자 숙소 주인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거절했다. 그런데 이 분의 거절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시 가지고 오기도 민망하고 홍삼세트가 하나 더 있어서 그냥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나에게 수납장을 열어 보여주는데 그곳에는 먹지 않고 방치된 홍삼 제품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본인은 홍삼이 싫은데 누군가 올 때마다 다들 홍삼만 그렇게 사 오더란다. 차라리 한국에서 가져오는 라면 한 박스가 더 유용하다고 했다.

'혹시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라면 두 박스 가져다 드릴게요.'

아무런 계획 없이 갔지만 혼자서도 마드리드 시내를 잘 돌아다녔다. 처음엔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역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고 골목길 사이사이에 의미를 두는 편이라 매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숙소 주인을 따라 근처 한인 성당에도 갔다. 그곳에는 한인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이민 온 가족, 사업차 온 사람, 유학 온 학생 등 각각의 이유로 모인 사람들이었고 그곳에서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먼 타국에서 모인 한국인은 늘 그렇듯이 한 가족 같았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며칠 동안 소소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슬그머니 녹아드는 게 너무 좋았다. 다들 너무도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신부님이 돌아오셔서 수도회로 초대해 주셨다. 수도회 근처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나 싶어 일찍 도착했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연락만 가능한 상태라 따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지하철 역 안에서 길이 엇갈렸던 건데 서로 상대가 일이 있어서 늦는 거라 배려하다 보니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시간이 지체되자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하신 신부님이 뒤늦게 찾아오셨다. 수도회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구경도 하고 빠에야도 먹었다. 남자 수사들만 지내는 곳이라 그곳에서 신세를 진다는 생각은 애초에 무리였던 거였다.

마드리드의 자랑, 프라도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입장료가 있지만 월요일 저녁엔 무료 관람이 가능했다. 관람 시간을 기다리다 미술관 앞에 있는 규모가 큰 오르골 상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하는 음악을 고르고 원하는 디자인의 틀을 고르면 완성체로 구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오르골 중에서 Moon Rive 음악을 몇 번이고 들었다. 음악이 연주되는 오르골 부품만 사고 싶었다. 어릴 때 태엽 인형 속에 들어있던 오르골을 본 적이 있다. 부피가 크지 않으니 갖고 다니면서 음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 따로 구입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기가 난감해 한참을 망설였다. 그냥 들고 가서 계산해 달라고 하면 그뿐이었지만 외부 틀은 왜 같이 구입 안 하는지 물어볼 것 같았고 그럼 구입은 힘들어질 것 같았다. 망설이는 와중에 미술관 관람시간이 되어서 일단 나왔다. 프라도 미술관 관람을 하고 아쉬움에 가이드북 한 권을 샀다. 관람을 마치고 다시 가보니 상점은 문을 닫았고 다시 사러 갈 기회조차 없었다.

숙소 주인에게 저녁을 사기로 했다. 둘이서는 어색해서 초대해 주신 신부님과 한인성당 신부님도 함께 하기로 했다. 차이니스 레스토랑 '웍'에서 만나서 즐거운 시간,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와인도 적당히 곁들였다.

하지만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여느 때처럼 큰돈은 숙소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빨리 돈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숙소 주인이라 그에게 잠시 돈을 빌려달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진땀을 흘렸다. 방을 빌려주었더니 고맙다고 밥을 산다고 해서 나왔더니 돈을 안 갖고 왔다며 집에 가서 갚을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그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결국 한인성당 신부님이 모자란 와인 값을 채워주셔서 다음날 갚기로 했다. 한인성당 신부님이 톨레도(Toledo)에 데려다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스페인 중부의 도시이다. 톨레도 주의 도시이며 카스티야 라 만차 Castilla-La Mancha 자치지역에 포함된다.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언되었으며 단연 문화적인 스페인의 유적지이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유적이 공존하는 장소이며, 스페인의 옛 수도이기도 하다. 스페인 역사상 수많은 유명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다.

톨레도 대성당의 내부 설명을 해주셨다.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재미도 있고 신기했다. 그냥 봐도 넋을 잃고 봤을 텐데 전설과 역사가 적당히 어우러진 재미난 역사기행이 되었다. 대성당에 이어 톨레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로 갔다. 차량이 없으면 가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잠시 카페에 들렀다. 스페인에서 먹고 싶었던 초코 라테와 추로스를 먹고 싶었으나 품절이라는 아쉬운 소식에 카페라테를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브라질 레스토랑에 들렀다. 1일 관광 가이드를 해주신 보답으로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고 고기 전문 음식점에서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다. 기다란 꼬챙이에 끼워져 통째로 구워진 고기를 종류별로 맛볼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마드리드는 또 하나의 추억의 도시가 되었다. 11일짜리 휴가라 스페인 마드리드에만 있어도 모자란 시간이었지만 수녀님의 요청으로 갑자기 바르셀로나에 가게 되었다. 주말이면 마드리드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지만 물건을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으셨는지 바르셀로나로 오라고 요청하셨다.

숙소 주인이 바르셀로나행 Renfe 티켓을 예약해 주었는데 11월 14일 하필 그날에 스페인 철도 노조 파업이 예고되어 있었다. 혹시 몰라 기다려보았지만 당일이 되자 예약한 렌페는 취소되었다. 마드리드에서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주말이면 마드리드로 다시 돌아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떠나기엔 너무 아쉬워서 바르셀로나는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으신 수녀님은 그럼에도 혹시 운행하는 기차가 있을지 모른다며 기차역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신부님이 역까지 와주셨고 상황을 알아봐 주셨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드디어 바르셀로나행 기차가 있대서 새로운 티켓으로 교환받았다. 기차가 정말 출발할지는 장담을 할 수 없대서 일단 들어가서 플랫폼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취소가 될 수도 있으니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신부님이 역에서 기다려 주시기로 했다. 기차의 출발이 확정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너무 기뻐서 신부님에게 이 소식을 알리려 다시 나왔는데 그곳은 들어갈 때도 보안검사를 해야 했으니 번거롭게 다시 왜 나왔냐며 신부님이 어이없어하셨다.

그렇게 스페인 철도 노조 파업 때 힘들게 바르셀로나로 갔는데 관광을 간 것이 아니라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 수녀님이 시내 관광과 숙박을 해결해 주신다고 해서 비싼 렌페 티켓 비용을 들여가며 바르셀로나에 갔지만 막상 수녀님은 나를 수녀원이 아닌 한인민박에 데려다주셨다. 늦은 시간이라 일단 인사하고 잠을 잤다.

다음날 수녀님이 오셔서 민박집 가족을 위한 선물은 안 가져왔냐고 물으셨다. 아마도 아저씨, 아주머니의 불평이 수녀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난데없이 낯선 곳에서 신세를 지게 되어 밤새 눈치가 보였던 참이었다. 난 수녀님 부탁을 들어드리는 조건으로 이틀 동안 수녀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줄 알고 왔고 더구나 바르셀로나에 갈 계획은 애초에 없었으니 그 가족들을 위한 선물은 준비할 수도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내가 어디에서 머무는지는 알지도 못했고 한인 민박하시는 분이 수녀님을 따라 왜 나오셨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녀님에게 드리려던 홍삼세트를 그분들에게 드리기로 했다. 나중에 드리려고 마드리드 숙소에 두고 왔는데 주말에 수녀님을 통해 보내드리겠다고 양해 말씀드렸다. 하지만 왠지 실망하는 분위기라 여전히 불편했다.

일단 수녀원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버스 티켓을 끊어야 된다고 하는데 10장 묶음으로 구입하라고 했다. 기껏해야 왕복이면 될 텐데 싶었지만 다른데도 가야 한다고 해서 구입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 점심을 먹고 시내 한 바퀴 돌고는 민박집으로 돌아왔는데 이제 쓸 일이 없으니 남은 버스 티켓을 달라고 하셨다. 기념으로 한국에 가져가겠다고 하니 다 쓴 수녀님의 티켓을 주고 가져가셨다. 본인이 쓰시려고 굳이 묶음으로 사라고 하신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여러 곳에 데리고 다니시려나 싶어 기대만 잔뜩 하고 있었던 참이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조금만 친해지면 지갑이 활짝 열리는 나에게 이런 식의 강탈은 마음을 닫아버리게 했다. 나를 마냥 기다리시던 수녀님은 이제 와서 바쁘다고 하셨고 내일은 한인민박 부부와 몬세랏에 다녀오라고 했다. 우리는 모레 마드리드행 기차에서 보자며 수녀님은 그냥 가버리셨다.

몬세랏은 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산이다. 아서 왕의 성배 전설에 등장하는 베네딕트의 산타 마리아 몬세랏 수도원이 있는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처음엔 괜찮다고 거절했으나 아주머니가 함께 가신다고 해서 기꺼이 따라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니 아주머니는 몸이 안 좋다며 나 혼자 몬세랏에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니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며 바르셀로나 시내 관광 대신 그들이 선택한 곳이었다.

혼자서는 가기 싫다는 나를 굳이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시고 버스기사에게 얘기도 해주셨다. 계속 걱정하는 나에게 버스에서 내리면 사람들을 따라가면 된다고 안심시키고 가버리셨다. 버스기사 좌석 뒤에 앉았지만 그날 그 커다란 버스에 탑승한 승객은 나 혼자였다. 중간에 기사가 사탕을 건네주었지만 잔뜩 긴장한 나는 불안해서 차마 먹지 못하고 가는 내내 겁에 질려있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안개가 자욱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버스 승객은 나 하나였으니 내려서 따라갈 승객도 없었다. 버스기사는 나를 혼자 남기고 이따 보자며 그냥 가버렸으니 나는 몬세랏 주차장으로 추정되는 곳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었다.

바로 눈앞의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그런 지독한 안개는 처음이었다. 몇 시간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야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생각에 길을 잃을까 봐 그곳을 차마 떠나지도 못했다. 관광지에 있을 법한 이정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안내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 근처에 보이는 문이 입구인가 싶어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짙은 안개에 옷이 젖고 있었다.

30분쯤 떨고 서 있었을까? 노란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아이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을 따라 꼬마들 행렬에 함께 섰다. 혹시라도 안개에 휩쓸려 놓칠까 봐 아이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 건물들이 하나씩 눈에 보였고 성당이 나타났다.

성당에 들어가서야 안심이 되었다. 이곳에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주차장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안전한 곳, 앉을 수 있는 곳,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왠지 분주한 듯하더니 이내 미사가 시작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앉아있다가 시작된 미사, 그제야 버림받은 기분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난 그곳에서 통곡을 하고 말았다. 동양인 여자라 가뜩이나 눈에 띄었을 텐데 난데없이 미사 중에 통곡을 하고 있었으니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내가 온다는 소식에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던 이가 며칠 빨리 받겠다고 바르셀로나로 오라고 했지만 물건만 받아가고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넘기고 그 사람마저 귀찮다는 듯이 나를 팽개쳐 버려서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어느 산속 성당에 앉아있었다.

너무 서럽고 서러운 그 시간, 미사 시간 내내 울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도 오래도록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무렵, 바깥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사방 어디나 그림 같은 풍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몬세랏이었다.





몬세랏 (Montserrat)

스페인 동북부 카탈루냐 주에 있는 몬세랏은 스페인 3대 순례지로 꼽힌다.

몬세랏은 ‘톱니 모양의 산(Mons serrtus)’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톱으로 썬 듯한 거대한 바위 기둥들이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성 베네딕도회 산타마리아 데 몬세랏 대 수도원 그리고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는 검은 목각 성모상으로 인해 유명해진 장소다.

이곳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십자군 전쟁 때 이 산에서 아랍인들과 전투를 벌인 위프레도 백작이 은 수처에 대한 내용을 남긴 것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후 1023년 위프레도 백작의 증손자 리폴 신부가 은 수처를 확장해서 수도원을 설립했고 12세기에 목각 성모상을 모신 성당이 건축됐다고 한다.

몬세랏에 있는 성모상은 검은 얼굴빛으로 인해 ‘흑인 성모’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전승에 따르면 복음서의 저자인 루카가 조각한 것을 사도 베드로가 스페인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후 8세기경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이 지배할 때 동굴 속에 감춰졌던 것을 880년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이다. 12세기경 성모 발현과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번지면서 남유럽 각지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몬세랏 성모에 대한 신심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던 시기 국론을 모으는 구심점이 됐으며 몬세랏 출신의 보일 신부가 중남미에 선교사로 파견됨으로써 몬세랏은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기도 했다.

몬세랏은 스페인 국왕들 대부분이 방문한 순례지라는 점에서도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외에 프랑스 루이 14세와 오스트리아 페르난도 3세 등도 직접 방문했다고 한다. 또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및 괴테, 실러, 바그너 등 유명 예술가들이 몬세랏 성모상 순례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서른아홉 그 해, 나는 통증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있었다. 복부의 통증은 골반의 통증으로 이어져 다리까지 아플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내 배에서 덩어리가 만져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대장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통증의 원인을 알 수 없어 산부인과 검사를 받기로 했다.

나의 생리 주기는 너무나 일정하여 한번쯤은 걸러주길 바라기도 했지만 언제나 주기가 정확했고 대신 생리량이 끔찍할 정도로 많았고 아팠다. 규칙적인 생리 주기와는 달리 극심한 생리통과 엄청난 생리양이 힘겨워서 마흔을 앞두고서야 산부인과 검사를 받게 되었다.

자궁에 근종이 있단다. 크기가 불규칙하고 너무 커서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궁근종(uterine fibroid, uterine leiomyomas, fibroids)의 성장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에 의존하므로 대부분의 근종은 치료가 필요하지 않았고 폐경기 이후에 근종이 줄어든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자궁을 체크하러 갔지만 초음파 검사 중에 난소 낭종을 발견했다. 난소 낭종(Ovarian cysts)은 난소에 물이 찬 혹이 생긴 것을 의미하는데 대개 양성이며 암은 아니다. 난소 낭종은 크기가 크지 않으면 대부분 자각하지 못하지만 간혹 복부 팽만, 복부 압박 증상, 복통, 소화불량, 대소변 볼 때의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간혹 출혈이 발생하기도 한단다. 난소 낭종은 무증상인 경우가 많아 나처럼 골반 진찰, 골반 초음파 검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주로 발견된다. 난소 낭종이 물혹인지 암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CT나 MRI 등과 같은 추가 검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난소 낭종은 수 주에서 수개월 이내에 저절로 사라진다. 따라서 난소의 물혹이 암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경우 일단 경과를 관찰한다. 난소 낭종이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경우 크기, 형태상의 악성도, 임상적 양상을 토대로 수술의 필요성을 판단한다. 난소 낭종이 계속 커질 경우, 가족력이 있거나 유방암, 난소암을 앓았다면 수술을 진행한다. 특히 폐경 여성에게 난소 낭종이 새로 생긴 경우 수술을 고려한다. 복강 내 출혈이 지속되거나 난소 낭종이 꼬이거나 복강 내에서 터지는 경우 복강 내 출혈이나 급성 복통이 발생할 수도 있다. 복통이 심한 경우 복강경 수술이나 개복 수술을 시행한다.

난소 낭종은 매우 흔하게 발생하고 대개 무증상이며 양성이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현재 난소 낭종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리 주기나 생리 양상(양, 기간, 통증)에 변화가 생기면 진찰을 받는 것이다. 이런 증상이 없더라도 주기적으로 정기 검진을 받으면 초기에 난소 낭종을 발견할 수 있다.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여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난소에 문제가 있으면 생리주기가 불규칙하고 그런다는데 어쩜 그렇게 규칙적인 주기로 잘 숨기고 있었을까. 그렇게 난 일명 물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술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세 군데의 병원에서 수술을 권유했다. 뭐라도 하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 때문에 순순히 수술을 받았다.

그때 수술 소식을 들으신 부모님은 내가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한동안 결혼 얘기가 쏙 들어갔었다. 하자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지만 딸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하고 있다가 의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하셨고 그제야 나에게 임신할 수 있는 거였냐며 재차 확인하셨다.

복강경 수술이라고 하지만 수술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꼽 주변이 새까맣게 변해서 흉터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검진 시 수술 자국 제거에 좋다며 더마틱스 울트라 연고를 처방해 주었다. 약국에 가서야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사만 원짜리 연고라는 걸 알았다. 몇 달이 지나도록 수술 자국이 보이지 않으니 수술을 하기는 했을까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신마취 후유증으로 죽다 살아났으니 수술을 하기는 했겠지 싶었다. 일 년이 지나자 새까맣던 피부가 벗겨지며 원래 피부색을 드러내었고 드디어 수술 자국이 보였다. 그 후로도 내 배꼽은 주기적으로 새까맣게 변하곤 했고 그때마다 연고로 피부를 녹여서 벗겨내야 했다.

대학병원으로 옮기고 나서 진행한 검사에서 자궁근종이 아닌 자궁 선근증으로 진단받았다. 난소 낭종이라는 급한 불을 끄고 나니 의사는 나의 자궁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한차례 수술을 거쳤지만 내 복부의 통증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자궁선근증(Adenomyosis) 혹은 자궁선종은 자궁 내막 조직이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자궁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자궁이 커져서 임신 시의 자궁처럼 커질 수 있다. 자궁선근증의 원인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자궁 내막 조직이 자궁 근층으로 스며들어 발생한다는 가설도 있고 자궁 근층의 조직이 변화하여 자궁내막과 유사해진다는 가설도 있다.

자궁 선근증의 증상은 빈혈을 동반한 생리 과다 및 생리통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골반통도 주요한 증상이다. 하복부에서 만져지는 덩어리로 병원을 찾기도 한다. 40~50대 여성에게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 1/3은 별다른 증상이 없다. 불임증이 발생할 수 있다. 생리 과다나 생리통을 호소하는 여성을 내진할 때 자궁이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골반 내진, 질 초음파 검사, 자기 공명 영상(MRI) 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수술 전에는 정확한 조직학적 진단을 내리기 어렵다. 수술을 통해 절제된 자궁을 조직 검사하여 자궁 내막 조직의 증식을 확인하면 자궁선근증으로 진단한다.

내 자궁은 계속 커지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장기를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내 배에서 만져지던 덩어리가 내 자궁인 셈이다. 오른쪽이 더 심해서 내 배꼽은 왼쪽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였다. 자궁선근증의 가장 확실한 치료법은 자궁 전체를 절제하는 외과적 수술이었다.

내 친구들 중 세 명이 결혼과 출산 후 자궁근종으로 고생하다 자궁 적출술을 받았다. 생리에서 벗어나서 좋을 줄 알았으나 얘기를 들어보니 수술 후에도 생리는 진행 중이라고 했다. 자궁내막 조직이 다른 부위에서 자궁을 흉내 내고 있었다. 난소가 정상인 경우엔 생리는 어떤 식으로든 진행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극단적으로 그 조직이 간에 붙으면 간이 매달 피를 흘리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환절기 때마다 편도선이 부었다. 편도선 양쪽 다 이미 고름이 가득 차 있는 상태라 편도선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더 이상 편도선이 붓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목에는 편도선을 대신하여 크고 작은 혹들이 주렁주렁 생겼고 그걸 처음 본 그날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편도선을 제거하셨네요? 그런 환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라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 혹들은 편도선보다도 더 크게 부었다가 작아졌다가 며칠 만에 사라지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어쩜 이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자궁 적출을 염두에 두었으나 혹시 임신 계획이 생길지도 모르니 일단 미루고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호르몬 치료로 자궁이 커지는 것을 막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겪었다. 졸음을 유발할 수 있으니 자기 전에 복용하라고 했으나 치료받는 60일 동안 단 하루도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두 달 후, 호르몬 치료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갔는데 검사에서 자궁이 더 커진 것을 확인한 의사가 효과가 없다고 먼저 중단을 결정했다. 생리 횟수를 줄여서 자궁이 커지는 것을 막는다고 했으니 피임약으로 불리던 그 호르몬제를 복용하면 생리가 멈추는 줄 알았지만 치료 기간에도 생리는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생리 과다나 생리통은 피임용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자궁 내 장치를 삽입하여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설명만 들어도 끔찍했고 호르몬 치료처럼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 겁이 났다. 그래서 의미 없이 두 달마다 정기 검진을 다녔지만 자궁이 더 커졌다는 얘기만 들어야 했다. 초음파 사진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자궁은 내 눈에도 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병원에 가다가 한 번은 최악의 컨디션으로 간 적이 있었다. 긴 대기시간을 버티지 못한 내 배가 결국 만삭의 임신부처럼 거대해졌고 그 상태로 검사를 받으니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임신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배가 부어오르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자연스레 허리에 손을 짚고 걸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임신부로 종종 오해를 받기도 했다. 무의미하게 검사만 받으러 다니는 게 더 고통스럽다는 판단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가 보험 적용이 되지 않던 때라 진료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선택 진료 비용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난 통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생리통뿐만 아니라 생리 전 증후군이 생기더니 그 기간이 점차 늘어났고 배란통이 생기더니 그 기간이 늘어나서 한 달 중 절반은 자궁과 관련한 통증과 함께 살아야 했다. 그날이 아니어도 시시때때로 장염 등과 같은 복부의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술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수술 후 후유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란이 시작될 무렵, 내 몸에는 크고 작은 염증들이 시작되는데 생리가 시작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레 치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매번 듣는 면역력 문제였지만 생리 덕을 보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니 내가 선택할 방법은 없었다.

생리는 어쩔 수 없으니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었다. 의사들은 말했다. 여자들이 저마다 생리양이 많다고 느끼지만 실제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라고 했다. 10~80cc 혹은 20~120 정도로 평균 35cc 정도라고 했다. 너무 적은 양이라 의구심은 들었지만 직접 확인해 볼 수 없으니 그런 거라 믿었다.

내 생리는 3일에 모든 걸 쏟아붓고 하루 쉬었다가 하루 더 왈칵 쏟아진 후에 멈추었다. 일주일 치를 3일 만에 쏟아내려니 감당하기 힘들었나 보다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대 80~120cc 라니 어디선가 들었던 생리 컵이 생각났고 한번 장착하면 하루 정도는 편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생겼다.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아 외국에 나가면 찾아보기도 했지만 결국 몇 년이 지난 후에 드디어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리 컵도 탐폰처럼 최대 8시간이었다. 둘째 날이라도 심적인 부담을 덜어보겠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게 어떻게 들어가나 싶었다. 탐폰처럼 여러 번 시도한다고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차가운 욕실에서 수십 번은 시도하고 있었다. 포기할까 싶은 순간에 왈칵 쏟아졌는데 그 생리 컵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쳤다. 내 눈으로 직접 내 양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한 번의 왈칵이 이 정도라면 이렇게 힘들게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한 달에 하루 정도만 생리 컵의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나에겐 한 시간짜리인 셈이다. 그걸 시간마다 꺼내서 세척하고 장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대감에 시도한 그 일은 성공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날로 포기해 버렸다.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설명과 달리 조기 발견한다고 달라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검사하지 말 걸 싶은 후회만 생겼다. 폐경만이 답이지만 그때는 또 어떤 문제들이 생길지 두려웠다. 생리와 함께 해결되던 내 염증들은 어떻게 치유가 될까? 이제는 익숙해진 지금이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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