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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28

어쩌면 죽는 것보다 내일이 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by 안녕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차라리 죽여주세요.




이사 날짜를 정해놓고 날짜에 맞추어 정기예금을 해지했다. 불운이 동시에 들이닥친다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여기서 더 이상의 악운이 있을까 싶은 그런 작은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난 코로나 증상으로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열이 나고 온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목 상태는 엉망이었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집엔 약도 없고, 혼자 살아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라고 했지만 선별 진료소 연락처를 알려주겠다는 답변뿐이었다. 그 사람들이 와서 검사해 줄 것도 아니고 나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 줄 것도 아니었으니 전화번호는 소용없었다. 더구나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신속 항원 검사 (Rapid Antigen Testing, RAT)는 누구나 검사할 수 있고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양성일 경우, 유전자 증폭 검사 (Polymerase Chain Reaction, PCR)를 무료로 검사받을 수 있다.'

2년간 개인 방역 잘 지킨 수많은 사람들마저 뒤늦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었다. 델타 변이, 오미크론, 스텔스, XE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뉴스가 현실임을 직접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 19 검사로 양성 판정을 받기도 전에 증상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증상이 먼저 나타나 버렸다. 혼자서 검사를 받으러 갈 수도 없었고, 검사를 못 받으니 코로나 확진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이용할 수도 없어서 치료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코로나 초기, 개인 방역에 실패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확진이 되고도 의료비며 생활비며 물품 키트까지 수많은 혜택을 누리며 치료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조차도 인권 침해를 당했다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 같이 홀로 아파야 하는 사람은 어쩜 초기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를 감염시킬까 봐 대우받던 그 시절, 그때 아팠어야 했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믿었다. 국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책임지고 보살펴 줄 거란 믿음. 그러나 나는 끝까지 외면받았고 방치되었다.

다음에는 방역 수칙 지키지 말고 초반에 걸려서 대우받으면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일주일 만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지금도 매일 밤마다 열과 기침과 싸우고 있다.




평소에 먹는 약이 없으니 나는 기저질환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코로나에 확진되면 그 수치는 반영되어 '평소 기저질환으로 인해'라는 꼬리표가 붙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오미크론은 열이 많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엔 열이 나면 일단 코로나 증상으로 의심받게 된다. 하지만 난 코로나 시국 이전부터 평소 갖가지 이유로 열이 났으니 단지 열이 난다고 코로나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밤새 열이 들끓다가도 아침이 되면 언제 아팠냐며 다시 멀쩡해졌다. 며칠 동안 지속되는 열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있다. 나에겐 아픈 사람들이 모이는 병원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지난 2월에는 열이 나면서 발진이 생겼고 근육통이 생겼다. 통증이 사흘쯤 지속되자 한계가 왔다.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왔다. 너무 아파서 119를 불러야 하나 고민도 했었고 혹시 나도 감염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무작정 앓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일주일이 지나자 괜찮아졌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코로나를 앓고 지나간 것일 수도 있고 아님 평소의 내가 겪던 어느 일상 중의 하루였을 수도 있다.

국민 네 명 중 한 명 꼴로 코로나에 확진되고 있는 마당에 나만 피해 갈 만큼 운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외출을 하지 않았으니 PCR 검사받을 구실은 없었고 더구나 혼자서 검사받으러 갈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쓰레기 버리러 건물 밖에 잠시만 나갔다 들어와도 그날 밤은 미열로 고생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가긴 하지만 어떤 경로로 감염되는지 알 수 없으니 나의 대비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여부가 궁금하다고 하여 확진자 일지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그 긴 대기시간을 견뎌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돌아오면 그날 밤은 고생할 게 뻔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는데 안 아픈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 감염이 되고 어떤 식으로 전파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나도 언젠가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지 몰라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열이 지속되면 119를 불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작정 참기만 하는 나로서는 어느 정도가 견디기 힘든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정말 심각하다고 느낀 순간에는 전화기 버튼을 누를 기력조차 없을 때가 많았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순간에는 전화기를 놓쳐 버기도 했다.

짐을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최소한의 짐을 미리 챙겨두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은 자가격리도, 재택치료로 전환되었으니 짐을 꾸려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빌라 내에서 기침 소리도 들리고 개인 사정으로 며칠까지는 외출을 못한다는 입주민 소식을 들으니 우리 빌라도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자유롭지는 못하게 된 것 같았다.




3월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코로나에 확진되었다가 며칠 전에 격리 해제되었다는 마리아에게 전화가 왔다. 증상이 미비하긴 했지만 노령의 아버지가 계시는데도 키트는 받지 못했단다. 전화로 진찰받고 처방전을 받아 친구를 통해 약을 전달받았다는데, 혼자 사는 나는 약이라도 제대로 전달받을 수 있는 걸까 슬그머니 걱정되었다.

이번 달에는 생리가 3주 만에 시작되어 2주째 이어지고 있다는 하소연을 했다. 이런 일이 없었던 나는 지난달 열감기가 아니라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아팠던 게 아니었을까 의심한다고 했다. 어쩜 자궁의 출혈은 백신의 부작용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하면서 말이다.

너무 아파서 119 부르려다가 짐을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런 일이 있으면 자기를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 다녀간 지도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바빠서 못 온다고 하는데 내가 선뜻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가끔 카카오톡을 통해서 안부를 전했을 뿐, 이 전화도 거의 2년 만의 통화였다.

그 전화를 끊고 나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늦은 밤, 통화 소리가 다른 집에 피해 줄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화를 했는데, 처음엔 잠시 더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인지 목도 따끔거리고 쓰라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밤은 아픈 날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이불과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고 밤새도록 온몸이 아팠다. 한 달 전의 통증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쉽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의 감기일 수도 있었고 느닷없는 폐경기가 일찍 온 걸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 폐경기라니, 쉰도 안된 마당에 폐경기라니... 하지만 얼굴, 목, 가슴 등에서 열이 나거나 땀이 나고 잠들기가 곤란하다고 느끼거나 피로, 스트레스, 긴장감을 느끼는 경우 등 아이러니하게도 증상은 비슷했다. 낮에 아픈 건 잘 참아냈으니 그렇게 하루를 또 버텨냈다.

하지만 밤이 되니 견디기 더 힘들어졌다. 체온계가 고장 나서 체온을 잴 수도 없으니 현재 열이 몇 도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디지털 체온계는 사용할 때가 되면 매번 배터리가 닳아있어서 오래된 수은 체온계를 계속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 수은 체온계마저 세상을 떠났다.

내 체온은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낮은 편이었다. 입원 중에 한 번은 열이 많이 나서 기절 직전까지 갔지만 막상 열을 재보니 37.3도라 간호사에게 외면받았다가 회진 온 의사에게 구조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수술 부위가 감염이 되어 고름이 가득 차 있었지만 체온계는 고작 미열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원을 앞둔 상황이었지만 결국 일주일 동안 퇴원하지 못했다.

체온이 1도 떨어질 때마다 우리 몸은 면역력이 30% 떨어진다고 한다. 외부의 공격에 그만큼 취약해진다는 뜻이다. 내 체온은 36.5가 채 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몸은 항상 차가웠고 어릴 적부터 감기를 달고 살았다. 감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 마음 하나로 많은 노력을 했다. 외부적인 환경, 생활습관을 바꾸었고 오랜 시간이 걸려 드디어 체온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몸이 더워지니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았다. 면역력 저하라면서도 십 년 가까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게 가끔 신기하기도 했다.

그 대신 내 몸은 각종 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마침 '때가 되어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목을 감싸지 않으면 추워서 감기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목 주변이 너무 뜨거워졌다. 차라리 그냥 추울 때가 더 나았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몸을 따뜻하게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신경 써야 할 게 더 많아졌다.

그래서 열이 나더라도 늘 있는 어느 날의 하루겠거니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온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아파도 너무 아팠다. 비까지 오니 신경통까지 더해졌다. 원래부터 하나의 증상이었는지 몰라도 각각의 증상이 하나가 되어버리니 견디기는 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버텼다.

'오늘은 때마침 신경통이 시작된 것뿐이야.'

드디어 아침이 되었다. 하지만 난 일어나지 못했다. 온몸은 젖었고 등과 다리에는 땀띠가 생겼다. 이 상태로 버티면 땀띠가 염증이 되고 또다시 열이 나는 악순환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발진을 가라앉히기 위해 욕실로 갔다. 온 힘을 다해 버티며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누웠다. 머리가 핑 돌았다. 헛구역질을 했다.

코로나 증상이 있으면 병원에 가지 말고 질병관리본부 1339나 다산콜센터 120에 연락하라고 했는데 상황이 많이 달라진 지금도 여전히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발진이 가라앉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와 몸은 열이 들끓는데 발이 차가웠다. 종아리와 무릎까지 얼음이 되어 있었고 발톱이 새파랗게 변해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추웠다. 두꺼운 솜이불에 구스 이불까지 두 개나 덮고 있었지만 몸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내복을 꺼내 입고 양말을 신었다. 이럴 때 해열제를 먹어도 되는 걸까?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저녁이 되자 다리는 따뜻해졌지만 대신 몸의 열은 더 심해졌다. 머리는 터질 것 같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이스팩을 목 뒤에 대고 누우니 정신이 들었고 조금 살 것 같았다. 오늘 밤만 버티면 내일 아침에는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다시 멀쩡해질지 모른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이스팩은 금방 녹았고 밤이 되자 통증은 더 심해졌다. 기침은 가끔씩 나는 정도였지만 대신 토악질로 이어졌다. 목안 깊숙한 곳의 무언가를 뱉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119, 120, 1339. 하지만 전화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할 수도 없었다. 문자라도 보내볼까 싶어 메시지를 작성했지만 보내지는 못했다. 이 밤중에 괜한 일로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약이 필요했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진료를 받을 수 없으니 처방전을 받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난 코로나 확진자가 아니니 그런 시스템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해열제라도 빌려달라고 해볼까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뒷일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에는 대형병원 간호사가 있었는데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코로나 앞에서는 그 무엇도 조심스러웠다.

잠깐 조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약봉지가 문 앞에 놓여있었다. "아, 이제 살았다"며 약봉지를 집어 드는데... 꿈이었다.

통증이 잦아들 때 간신히 잠이 들었지만 갑자기 시작된 새로운 통증으로 다시 잠이 깼다. 팔과 다리의 근육과 뼈마디가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허벅지에서 시작한 통증은 무릎, 정강이, 발목, 발가락까지 이어졌다. 그 통증이 견디기 힘들어 주먹으로 내려쳐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고 두 무릎을 끌어안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마다 깨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밤에는 답이 없을지도 모르니, 그래서 되려 용기가 생겼다. 막상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전화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리의 통증처럼 팔뚝에서 시작된 통증이 팔목, 손목, 손가락까지 이어졌다. 손가락은 이미 굳었고 애써 움직이려고 하면 너무 아파서 전화기 자판 두드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미리 작성해 둔 메시지를 간신히 보냈다. 꿈처럼, 누군가 약이라도 갖다 주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지만 답은 없었다. 질병관리본부 1339는 문자 접수 시스템이 안 되나 싶어 다산콜센터 120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 다산콜센터는 24시간 문자에 답해주었다. 늦은 밤, 응답을 해준 그 직원의 존재에 울컥했다.

'신속 항원 검사 실시하고 있는 호흡기 전담 클리닉 및 의원이나, 보건소 선별 진료소 방문 가능합니다. 주소지 말씀하시면 관할 보건소 상황실 연락처 안내 가능합니다. 증상이 위증한 경우 119 이용이 가능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누구에게나 이렇게밖에 보낼 수 없었겠지만 매뉴얼대로 보냈을 그 답변은 다소 사무적이었다.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해서 보냈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라는 소리에 다시 무너졌다. PCR도 아닌 RAT를 받으라고? 그래서 양성이 나오면 다시 PCR을 받으라고? 도와달라는 사람이, 이렇게 문자로 밖에 보내지 못한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더 이상의 배려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버티고 나가서 신속 항원 검사(RAT)를 받는다고 해도 양성이 나와야 유전자 증폭 검사(PCR)를 받을 수 있으니 그 시간을 버텨낼 자신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선 119만이 최선이었다. 아직 확진되지 않았으니 응급실에서 거부당할 리는 없겠지만 코로나 의심 증상만으로 거부당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코로나 확진자를 위한 병상이 없다고 여러 병원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뉴스를 봤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길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도 감당해야 했다. 반대로 응급실에서는 검사부터 시작할 텐데 만약 코로나가 아니라면, 검사비와 병원비를 내가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 큰 부담이었다. 그 와중에 그것까지 고민이 되었다.

어쩜, 약 하나면 해결될지도 모르는데 119를 불러야 되나 한참을 고민했다. 약만 갖다 달라고 한번 떼를 써볼까 싶다가도 그 사이 정말 위급한 환자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었다. 그냥 구급차를 타고 갈까 싶다가도 돌아올 때를 생각하니 또 답답해졌다. 누운 채로 실려가면 내복 입은 채로 실려갈 테니 겉옷도 못 챙기고 신발도 못 신고 갈 텐데, 그러면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하지? 그것까지 생각하니 또 아찔해졌다. 구급대가 오기 전에 최소한의 물품을 내가 챙겨두어야 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급대원에게 이것저것 챙겨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프면 그냥 뒷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실려가면 되는데 난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 걸까? 아직 덜 고생했는지 모르지만 난 숨이 넘어가는 직전까지도 버티고 있을 것 같았다. 응급실 1회 무료 사용권 같은 혜택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내 손으로 119를 부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자꾸 참기만 하고 포기하는 일이 늘어나자 한평생 딱 한 번은 불러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지니 그 상황을 감당하기 싫었나 보다. 머리가 터질 것 같더니 주소를 보내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




일요일 아침, 눈을 떴다. 그렇게라도 잠깐 잠을 자고 나니 살 것 같았지만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시도해 보았다는 기분 때문인지 전날보다는 통증의 횟수가 줄어들었다. 잠이라도 잘 수 있게 되니 살 것 같았다. 그럼 됐다.

지나고 보니 그날 밤이 가장 큰 고비였던 모양이다. 그 순간엔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싶었다. 말로 표현할 수없이 너무 고통스러웠고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몰라 무서웠다. 도와달라고 할 수 없으니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어느새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었다.

지금도 매일 밤마다 열과 싸웠지만 새벽이면 한기와 싸우고 있었다. 체온은 수시로 변했고 이제는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자 더 이상 해열제가 의미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가 아니면' 이라거나 '그때도 버텼는데 이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내 후회했다.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응급실에 갈 걸 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6일째가 되자 기침 발작이 시작되었다. 현재로선 이게 가장 무서웠다. 나올 것은 없는데 무언가를 꺼내서 뱉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계속 토해냈다. 목 안, 깊은 곳 어딘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열흘째가 되자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마시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고 자다가 봉변당하기 싫어서 자기 전엔 항상 뜨거운 물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발작이 시작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 건 힘들었다. 공항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기내에서 기침 발작으로 헛구역질을 해대는 한 승객 때문에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이사에 들떠서 식재료를 비우고 있는 중이어서 장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이사 때 쓰려고 사두었던 컵라면 3개와 먹다 남은 밥 한 그릇으로 일주일을 버텼다. 무얼 가릴 상황이 아니었지만 씹는 것도 힘들었다. 열량이 되면 무조건 입에 집어넣고 삼켰다. 그렇게 매일 밤 허기와도 싸워야 했다.

8일째가 되어서야 내 손으로 밥을 지었다. 여전히 서 있을 기력은 없었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쌀을 꺼내놓고도 한참을 주저앉아있었다. 또 한참 걸려 쌀을 씻었고 또 한참 걸려 밥을 지었으니 밥을 완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따뜻한 밥이 너무 오랜만이라 첫술을 뜨는데 손이 떨렸다. 굶어서 죽을 뻔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미각은 잃지 않았다. 대신 모든 음식에서 특유의 맛이 느껴졌다.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셔도, 따뜻한 허브티를 마셔도 쓴 맛이 났다. '쓰다'는 표현만으로는 다소 애매했지만 날카로운 금속의 맛이 느껴졌다.

조금 괜찮아지면 약이라도 사러 나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애매해졌다. 열흘을 생으로 아팠는데 이제 와서 해열제를 먹기도 그렇고 진통제를 먹기도 그랬다. 지금도 여전히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솔직히 외출할 정도로 체력을 회복한 것도 아니었다. 일어나서 조금만 움직여도 식은땀이 흘렀고 한계점에 이르면 그대로 쓰러졌다. 위급한 상황이 올 것 같으면 그대로 주저앉았다. 집 안에서도 아슬한 상황이 많았는데 집 밖은 어떨지 두려웠다. 나가기 무서워졌다.




마리아의 전화번호를 한참 동안 바라본 적이 있었다. 바쁘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제는 무얼 도와달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령의 아버지를 두고 무작정 오라고 할 수는 없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전화기가 손에서 떨어지며 버튼이 눌러졌다. 신호 가는 소리에 너무 놀라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오면 뭐라고 하지? 잘못 눌렀다고 해야지 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지만 콜백은 없었다.

검사를 받을 수 없었으니 아직 코로나 확진자는 아니지만 증상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지금도 여전히 자가격리를 하고 있다. 밤마다 열이 다시 오르기도 하고 기침 발작으로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내곤 하지만 지금은 잠이라도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심하게 아프고 나니 웬만한 걸로는 힘들지도 않았다. 난 잠만 방해받지 않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문득 까미노가 생각났다. 프랑스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시작하는데 처음이라는 긴장감,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무거운 배낭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산을 넘어야 하는 체력 등 첫날에 모든 고통을 다 느끼게 되다 보니 그다음부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 후로는 길이 힘든 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 뿐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양성일 지도 모르고 거동을 못한다는데 절차대로 선별 진료소 가라는 안내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의 감염 여부가 궁금하기는 했으니 계속 고민이 되었다. 선별 진료소 가서 신속항원검사라도 받을까 하다가도 만약 코로나 증상이 맞다면 이대로 자가격리를 하는 편이 안전할 것 같기도 했다.

나와 남을 동시에 배려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다시 물어보니 증상이 있어도 마스크 쓰고 나가면 외출은 가능하단다. 사실상 집 밖은 누구나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만약 아직도 양성이면 자가격리를 또 해야 할까? 절차대로라면 또 자가격리를 해야겠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검사를 거부했네 어쩌네 나중에 눈총을 받게 될 것 같아 지금이라도 검사받으러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싶다가도 콜록거리면서 검사받으러 가면 '어딜 나오냐, 양심이 없네, 어쩌네' 힐난할 것 같았다.

이 사회는 생계를 위해서 검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비난하고 있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받고 싶은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주었으면 싶었다. 지원금보다도 검사받을 수 있는 기회라도 주었으면 싶었다.

초기의 미국은 방역과는 먼 행보로 전 세계의 질타를 받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길거리에서 누구나 쉽게 진단 키트를 사용해서 검사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었다. 심지어 무료였다. 잠깐의 실수였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제자리를 되찾아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대한민국은 돈이 있어야 했다. 돈이 있으면 간단히 끝날 수도 있었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절차대로 견뎌야 했다. 심지어 증상이 있어도 PCR은 받을 수 없고 RAT만 가능했다. 그래서 나도 검사를 받아보려고 알아보았지만 결국 받지 못했다. 너무 멀어서 검사받지 못하겠다고 공식적으로 항의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할 줄 알았지만 '도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답을 받았다. 심지어 증상이 있다는데도 아직 확진자가 아니라서 얼마든지 외출해도 된다는 말에 깊이 실망했다. 이러니 단순히 확진자가 되기 싫어 검사를 거부하는 사람이 나오는 거겠지. 검사받고 싶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검사받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할 테니 앞으로는 공식 확진자 수도 확연히 줄어들 것 같았다. 매일 발표하는 공식 집계 브리핑이 의미 없다고 생각되면 그마저도 사라지겠지?

조만간 위드 코로나 시대가 올 것이고 야외뿐만 아니라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날이 오겠지만 정말 상황이 괜찮아져서일까 싶어진다.

치열하게 살아내면 내일이란 선물이 있다지만 난 매일 새로운 통증과 싸우며 오늘 하루 무사히 잘 버텨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이,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면 가끔 지루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걸 행복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통증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으면 그것만으로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달이 지나서야 쓰레기봉투를 버리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어느새 따뜻한 봄날이 되어있었다. 언제 피었는지 모를 목련 꽃잎이 모두 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지금도 매일 밤마다 열이 나서 땀에 젖어 눈을 뜨고 있으니 외출은 여전히 힘들었다.

나는 정말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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