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31
불행을 피한다고 행복해질 것 같니?
벗어나려고 잘 살아보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데!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나는 꼬마일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간호장교를 꿈꾸었다. 찾아보면 경찰대학도 있었고 또 다른 곳도 더 많이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간호장교였을까 싶었지만 어렸던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 군대에 갈 수 있는 방법은 간호장교 밖에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그대로 믿었던 모양이다.
나의 전부였던 그 꿈이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되자 남은 방법은 결혼뿐이었다. 처음엔 그 집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없으면 내가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현모양처가 되기로 했고 좋은 아내까지는 몰라도 좋은 엄마는 될 자신이 있었다. 차별하지 않을 자신, 이유 없이 때리지 않을 자신.
조급한 마음에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평생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의 상대와의 로맨틱한 만남을 꿈꾸기도 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지 않겠다.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를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다는 어른들은 주변에 많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을 소개해 주지는 않았다. 차라리 집안에서 점찍어 둔 정인과 결혼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힘든 시기에는 의지할 누군가가 절실했으니 학창 시절부터 같이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연애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결혼을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였고 결혼은 각자 벌어서 가라고 하셨으니 결혼 또한 취업을 해야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연애 상대가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안 나타날지 모를 누군가를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그런 나 자신이 왠지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고 있을 때, 과 총무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총학생 회장 선거를 돕게 되었다. 지지하던 후보가 총학생 회장으로 당선되자 총학생회에서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차장으로 시작하여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사회 부장이었던 그는 러시아어과 학생이었고 여학생 부장이었던 나는 일어과 학생이었다. 해병대를 전역하고 복학했던 그는 나보다 네 살이 많았다. 믿고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던 나는 동갑이나 연하는 남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매주 수요일마다 내 책상에 장미꽃을 가져다 두며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누군가를 짝사랑만 하다가 그런 관심을 받으니 좋았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끌리게 되었고 우리는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던 그는 막상 연인이 되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의 대외활동을 막았고 총학생회 활동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람들과도 충돌했고 총학생회에서 퇴출되자 나에게도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총학생회와 자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내 편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바로 후회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신축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유난히도 가구가 없었다. 짐도 별로 없어서 너무나 깨끗하게 느껴졌는데 그에게 들은 바로는 그의 어머니가 사고를 쳐서 집안에 딱지가 붙었고 이른바 빚잔치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간신히 마련한 빌라에서 남동생과 함께 모두 네 가족이 살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사실상 별거 중이었고 거의 매일 싸우는 분위기였다. 내가 집으로 놀러 가면 싸움은 중단이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근처 친척집에서 지내다 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두 분 다 나에게는 친절하게 대해 주셨으니 그 집이 우리 집보다는 훨씬 편하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그의 누나는 근처에서 살았는데 아이를 맡기러 친정에 자주 들렀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김밥을 말고 있었는데 김밥 하나가 완성되기 무섭게 그의 누나가 김밥의 양쪽 가장자리를 입으로 베어 먹고는 몸통만 쟁반에 내려놓았다. 가족만 있는 것도 아니고 손님인 내가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김밥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의 누나가 입으로 베어 물어 침에 젖은 김밥은 끝자락까지 몽땅 썰어져 내 접시로 올라왔다. 맛보다도 위생을 더 중시하는 나에게 그 김밥은 견디기 힘든 음식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친구들을 종종 만났는데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동네 친구들은 뭔가 이상했다. 커플 데이트를 하자며 데리고 온 여자들은 그들의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자신의 남자 친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 또 다른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만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어쩜 나도 이 남자의 가짜 여자 친구가 아닌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그중 한 커플과 함께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따라다닌다는 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뻔히 상황을 아는 입장이라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자주 간다는 민박집에서 방 하나를 빌려서 놀았고 한방에서 다 같이 자게 되었다.
한밤중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는데 그들은 우리가 있음에도 바로 옆에서 성관계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아서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남자 친구도 잠이 깬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던 그 자체가 나에겐 충격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고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남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위험해 보였고 역겨웠다. 결국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항의 표시였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청바지만 입고 다녔지만 한 번씩은 어머니가 사주신 원피스나 스커트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그런 날이면 나의 옷차림을 은근히 못마땅해했고 나중에는 바지만 입고 다니라고 요구했다. 또한 내가 졸업여행을 가거나 어쩌다 동네 친구들을 만나는 일에는 극도로 예민하게 굴었고 친구들 중에 남자라도 끼어있으면 분노했다. 처음엔 짜증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욕설이 되었고 결국엔 주먹이 날아왔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서야 그는 놀라서 멈추었고 실수였다며 사과했다. 나는 그걸 또 진심이라 믿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모님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억압하고 구속했다.
나는 그것조차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의 요구대로 따랐지만 내가 오롯이 그 남자만을 바라보게 되자 그는 수시로 잠수를 타버렸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하루가 지나면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을 하게 되었고 며칠이 지나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먹지도 못하고 마냥 기다린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때가 되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아 싸우기도 했지만 그의 약속과는 달리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잠수를 탈 때마다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배신감에 분노했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잘못을 비는 그를 용서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는 범죄자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능력도 없었지만 나의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참고 기다렸다. 이 남자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자만했다. 내가 믿고 기다려주면 언젠가는 이 남자도 나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습관성 거짓말과 잦은 잠수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배려하면 할수록 그는 더 지독하게 변하고 있었고 폭력까지 일삼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결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별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힘들게 이별을 통보하면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용서를 구했고 난 그때마다 흔들렸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 일은 반복되었고 그는 수시로 사라졌다. 결국 마음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별을 택했다.
늦게까지 마냥 걷다 간신히 막차를 탔다. 이별은 나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 마냥 넋을 잃고 앉아 있다가 내릴 버스정류장을 한참 지나쳐서야 정신을 차렸다. 택시비가 없어서 몇 킬로미터를 걸어서 되돌아오느라 자정이 지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이미 집에선 난리가 났고 다들 벼르고 있었지만 나의 심상치 않은 몰골을 보고는 어머니만 방으로 따라 들어와 무슨 일인지 조용히 물으셨다.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고 지금까지 붙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헤어졌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웬일인지 어머니는 별말씀 없이 방에서 나가셨다. 그날은 부모님께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더 이상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으셨다.
헤어지고 나서야 취업할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했던 어느 날,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전 남자 친구가 되어버린 그가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료들은 수군대고 있었고 사무실 공기는 왠지 싸늘했다. 내 남자 친구라고 했다는 그 남자는 직원들의 제지에도 막무가내로 사무실에 들어왔단다.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간신히 그를 데리고 나갔는데 다시 만나 줄 것을 요구했다. 단칼에 거절하자 매일 회사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회사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묻자 며칠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그날은 간신히 돌려보냈지만 다음날도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 직장 동료 중에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던 사람이 있었는데 도와주려고 나서다가 둘이 무슨 사이냐는 오해를 받았고 나에게는 그 직원이랑 바람이라도 피웠냐며 소리를 질렀다. 졸지에 난 양다리를 걸친 여자가 되었고 싸늘해진 직원에겐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그 남자의 화를 돋워 상황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 혼자서는 수습이 불가능했다. 나를 믿고 이해해 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버텨낼 자신도 없었다. 그다음 날도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고 인턴사원이었던 나는 그 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도 그 상황은 반복되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나타나 여기 사장과 무슨 사이냐, 여기 직원과 사귀냐는 등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냈고 정상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집을 떠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지만 옮기는 곳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벼랑 끝에 내몰린 나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남자는 내 친구들 연락처가 적힌 수첩을 노렸고 결국 빼앗아갔다. 조용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 모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내 불안했는데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로 모든 남자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던 모양이다. 대부분 욕설 또는 이간질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았으니 며칠이 지나도록 난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자신의 음성 사서함을 들어보라고 알려주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도 이미 마음의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니 나를 믿는다면서도 혹시나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문득문득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관계 또한 예전 같지 않았고 그는 나에게서 가장 친한 친구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연락이라도 오면 해명을 하고 사과라도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수첩이 유일한 연락처였으니 외우는 번호가 아니면 연락처를 알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 남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연락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버텼다.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어떤 남자가 자기에게 나와 헤어지라며 음성 메시지를 남겼단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난 할 말을 잃었다. 그 친구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연락처를 적을 때 이름만 적었는데 그중에는 남자 이름 같은 여자도 있었고 선생님 또는 지인도 있었다. 친한 친구들에겐 내가 그들의 험담을 해왔다며 이간질을 했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나의 남자 친구인 척 행세하며 더 이상 나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나 때문에 그런 일을 겪게 한 이들에게 미안하고 창피해서 그 후로도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그 남자의 말만 믿고 판단한 사람도 있었으니 그 남자가 쳐놓은 덫에 걸려 나는 수많은 지인을 잃어야만 했다.
결국 그에게 그만하라고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항의 전화를 받으면 내가 연락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어서 수위를 점점 더 높이고 있었단다. 수첩을 돌려주겠다는 말에 만나러 나가기도 했지만 집에 두고 왔으니 같이 가지러 가자고 하기도 했고, 다른 곳에 두고 왔다며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해서 도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끝내 돌려받지는 못했다. 수첩을 핑계로 만남을 계속 유도하자 지인들의 연락처를 포기하기로 하고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빌고 빌어도 더 이상 받아주지 않자 마침내 그가 포기했다며 나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싶단다. 한 번만 만나주면 깨끗이 헤어져 주겠다는 말에 마지막으로 나간 자리였다. 뜻대로 안 되면 또다시 폭력을 쓰지 않을까 싶어 불안한 마음에 시내 한복판에서 만났지만 그 남자는 조용히 얘기하자며 옆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에게 순결을 바치면 조용히 헤어져 주겠다고 했다. 헤어진 마당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돌아서는데 나를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골목 안 막다른 곳에는 모텔이 있었다. 나는 버티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았고 나는 소리치며 길에서 버텼다. 부근에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들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둘이서 알아서 하라며 그들은 외면했다. 한 시간가량 울고 애원하며 완강히 버티자 그는 마침내 질렸다며 포기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어디선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고 언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 사건은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아무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가족에겐 더 숨겨야 했다. 어떻게 처신했길래 그런 일을 당했냐는 질타만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소개한 적 없는 이 남자를 어머니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어머니의 말은 다소 충격이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이미 헤어졌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다시 만나라고 강요하기까지 하셨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어머니는 그 사람을 직접 부르셨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이 집으로 전화를 해서 어머니와 따로 만났다고 한다. 나에게 책임질 짓을 했는데 내가 헤어지자고 했다며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으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단다. 내가 잘못을 했는데도 이해하고 넘어가 주겠다는 그 남자의 말을 믿은 어머니는 나에게 결혼하라고 강요한 거였다. 두려움에 떨던 나는 그제야 그날의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순결을 바치면 헤어져 주겠다고 했었다니까 어머니는 그제야 그 사람에게 사실 관계를 물으셨고 그 남자의 거짓말에 농락당한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분노하셨다. 그 남자를 향해 손이 올라갔지만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그 남자를 집에서 내쫓으셨다.
결혼도, 독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결혼은 또 다른 지옥이 되어 버릴 것이 뻔했다.
자신의 작전이 실패했지만 그 후에도 그 남자의 집착은 이어졌고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밤마다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으면 끊었다. 한 시간 동안 반복한 적도 있었고 같은 상황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골드번호였던 집 전화번호를 포기하지 못하고 코드를 빼놓는 걸로 버텼지만 몇 달 동안 계속 이어지자 결국 집 전화번호를 해지해야 했다.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는지 매일같이 집 마당으로 돌을 던지기도 했다. '딸이 행실을 잘못하고 다녔지만 자신이 구제해 주겠다'는 내용의 쪽지를 집 안으로 던지기도 했다. 대부분 내가 먼저 발견했지만 언제 또 날아올지 몰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 일이 계속 반복되자 결국 어머니도 그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가족이 보면 어쩔 거냐고 나무라셨고 그런 사람을 만난 나를 꾸짖으셨다.
결국 그에게 그만하라고 다시 연락하기에 이르렀지만 어머니가 그 쪽지를 읽었을 리 없다며 비웃었다. 그의 집요함은 점점 더 악랄하고 위험해지고 있었으니 단순히 집에서 벗어나려던 지난날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곳에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디든 도망쳐야 했다.
내가 아는 먼 곳은 일본이었지만 집을 떠나본 적 없는 내가 다른 나라에서의 홀로서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돈이 많이 든다며 하고 싶은 공부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일본 유학은 가당치도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로 지방 대학조차 허락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서 공부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갔지만 떠나고 싶은 의지는 더 확고해졌다. 그 남자의 위험한 집착은 가족에게로 확대되었다. 떠나고 싶을 만큼 버거워하던 가족이라 하더라도 나로 인해 피해를 주기는 싫었다. 그런 가족을 위해서 내가 떠나야 했다.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이라면 환율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자 우리나라가 조금은 만만해졌고 서울이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고향에서 가장 먼 곳인 서울로 도망쳤다.
몇 년 후, 고향에 갔다가 버스 안에서 손자와 함께 앉아있는 낯익은 할머니를 보았다. 그 남자의 어머니와 누나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난 또다시 공포에 휩싸였고 결국 그 버스에서 도망치듯 내리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가 아니었다.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기울었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셨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잠수를 탈 때마다 나를 다독여 주셨다. 그래서 그 남자의 횡포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도움을 부탁드렸지만 자신의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나에게 화를 내셨다. 그 집 앞에서 내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볼까 봐 서둘러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던 분이었지만 내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는 얘기를 아들에게 전해 들었다며 도리어 나를 나쁜 여자라고 욕하셨다.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나를 도리어 질타하셨고 나에게 잘못이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냐고 하셨다. 아들의 화가 풀릴 때까지 벌을 받으라던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의 가족은 모두 공포의 대상이었다.
십 년쯤 지나고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였다.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서 그 남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심장이 터질 듯했고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남자도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려고 했던 일이 그제야 생각났다. 다행히 그 남자는 나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갔지만 나는 한동안 공포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디에선가 다시 마주칠까 싶어 불안했고 여전히 두려웠다. 고향이든 서울이든 그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가 편하지 않았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딱 반년 동안만 연인이었고 그 후 일 년 반 동안은 지옥에서 살았지만 그런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지옥을 보았다. 이번에는 십 년이 넘는 아주 긴 시간 동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