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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32

기억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리움이다.

by 안녕
이상한 나라 in 오스트레일리아




프리챌을 통해 오래된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있을 때, 20대였던 친구들은 아이 러브 스쿨을 통해 첫사랑 찾기에 공들이고 있었다. 동창들 중에 나의 첫사랑은 없었지만 친구들이 좋았던 나는 꾸준히 모임을 만들어 친구들의 오작교 역할을 했고 커플이 되어가는 그들을 지켜보며 혼자 뿌듯해하곤 했다. 고백하지 못하는 남자 동창들의 연애상담을 도맡기도 했다. 그중에는 결혼을 한 커플도 있었지만 결별을 택한 커플도 있었다. 짝을 찾은 친구들은 모임에 나오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던 친구가 다른 친구의 짝이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모임은 점차 줄어들어 소수의 친구들만 만나게 되었다.

경복궁 서쪽에 살고 있을 때였다. 경복궁 동쪽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집안 형편으로 인해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에서 외국계 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연봉은 나보다 두세 배가 많았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월세를 살고 있었다. 직장생활 기간은 나보다 훨씬 오래되었지만 모아둔 돈이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돈은 여행을 다니며 썼고 결혼을 하게 되면 집은 남자가 해오는 거라 생각했으니 집에 대한 걱정 없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전세에 살고 있었지만 결혼 비용이든 집이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 걱정 없이 자기가 번 돈을 쓸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부러웠다. 그래도 나중에는 내 삶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겠거니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소녀 같은 외모의 친구는 많은 동창들의 첫사랑이었고 커서도 인기가 많았다. 동창과 사귀면서 연락이 뜸해졌는데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나는 당연한 듯 친구 편을 들었고 친했던 남자 동창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혼자가 된 친구와 단짝이 되어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호주로의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혼자서는 불안했는지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일본으로 가려다 서울로 왔던 나는 더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때였다. 나 스스로 정했던 결혼 커트라인이었던 스물아홉, 비혼을 선언했다. 서울에 미련이 없었으니 친구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그 당시 내가 가진 돈은 여느 때와 같이 전세보증금이 전부였다. 그 돈으로 한국을 떠나 어학연수를 받더라도 영주권 취득에 필요한 점수를 얻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했다. 버텨낼 자신은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영주권 취득에 필요한 점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해마다 합격 커트라인은 올라가고 있었으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가진 돈을 모두 쏟아부었는데 점수가 모자라서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처럼 빈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그때는 좀 더 젊었고 절박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빈손으로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만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홍콩은행에 근무했던 그녀는 영어를 잘했지만 영주권 취득에 필요한 점수는 항상 아슬하게 모자랐다. 모자란 점수를 채우고 나면 그만큼 커트라인이 올라갔기 때문에 그녀의 영주권 취득은 사실상 불확실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나이별 점수도 있어서 조금이라도 젊을 때 반드시 취득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리해지고 있는 상황이라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 혼자 떠난 그녀를 멀리서나마 응원해 주었다. 그녀가 영주권 취득을 위해 취업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호주 유학 준비를 도왔던 바로 그 유학센터였다. 그곳에서 진행하는 호주 유학 세미나를 위해 6년 만에 한국에 잠시 왔을 때였다. 가장 친한 친구네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고 했는데 서초동에 살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강남에서 먼 곳에 살았던 친구네에서 잠실 코엑스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출퇴근하기 불편하다며 도움을 청했다. 야근이 잦았던 시기라 친구를 챙겨주지 못할 거라는 양해를 구하고 내 원룸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그녀의 여행용 캐리어 속에는 원래 신세 지려고 했던 친구를 위한 선물이 잔뜩 들어있었다. 내색을 하진 못했지만 막상 그걸 보니 씁쓸하긴 했다.

공동현관 출입 카드키가 하나뿐이라 퇴근이 빨랐던 친구에게 카드키를 맡겼는데 나의 퇴근이 빨라지거나 그녀에게 약속이 생기는 날에는 어김없이 집 앞에서 친구를 마냥 기다려야 했다. 그녀와의 연락이 힘들기도 했고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불편하지 않게 내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서 빌려주었다. 급한 용건 외에는 수신만 하길 바랐지만 친구의 발신통화는 잦아졌고 심지어 호주에 있는 남자 친구와 국제 전화로 매일 통화까지 했다. 그녀는 모처럼의 귀국에 매일 저녁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항상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지내는 2주 동안 우린 함께 지내었지만 단둘이 있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는 야근으로 인해 저녁을 먹고 퇴근하는 일이 많다고 미리 얘기했음에도 먼 곳에서 온 친구에게 집밥 한번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땐 난감하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고 싶었던 그때, 친구의 설득으로 인해 호주 이민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생겼다.




General Skilled Migration / 독립 이민

● 18~44
● 영어 IELTS 5.0~7.0
● Skilled Independent (Subclass 175) : 120P

1. Points for Age
•18~29 : 30P
•30~34 : 25P
•35~39 : 20P
•40~44 : 15P

2. Points for Skill
•60점 직업군 전공자 : 60P
•50점 직업군 전공자 : 50P
•40점 직업군 전공자 : 40P

3. Points for English Language Ability
•IELTS 7.0 (Proficient English) : 25P
•IELTS 6.0 (Competent English) : 15P
•IELTS 5.0 (Vocational English) : 15P
•IELTS 평균 5.5 (Concessional Competent English /SRS) : 15P

4. Points for Experience
•60점 직업군 소지자로 최근 4년 중 3년 이상의 연관 경력 소지자 : 10P
•50/40점 직업군 소지자로 최근 4년 중 3년 이상의 연관 경력 소지자 : 5P

5. Points for Australian Work Experiences
• 최근 4년 중 1년 이상 호주 내에서 직업군/전공과 연관성 높은 경력이 있을 경우 (Skill Level, Paid Work, 29 hrs/w) : 10P
•최근 4년 중 1년 이상 Professional Year에 참여한 경력이 있을 경우 : 10P

6. Occupation in Demand / Job Offer
•Nominated Occupation이 MODL에 속하고 최근 4년 중 1년 이상의 해당 경력이 있고 최소 1년 이상의 고용 계약을 받았을 경우 : 20P
•Nominated Occupation이 MODL에 속하고 최근 4년 중 1년 이상의 해당 경력이 있을 경우 : 15P

7. Points for Australian Qualifications
•호주 내에서 2년 이상의 Full Time 박사 과정을 수료한 경우 : 25P
•호주 내에서 총 3년간의 학업을 통해 1년 이상의 Bachelor 과정 + Master 과정을 수료한 경우 : 15P
•호주 내에서 총 3년간의 학업을 통해 1년 이상의 Bachelor 과정 + Honour 과정 수료한 경우 : 15P
•호주 내에서 2년 이상의 Diploma / Trades Certificate / Bachelor 과정을 수료한 경우 : 5P

8. Points for for Regional Australia
•호주 이민성 정부가 지정하는 저밀도 지역 내에서 2년 이상 거주 및 공부한 유학생의 경우 : 5P

9. Points for Spouse Skills
•배우자의 학력 및 기술, 영어, 연령 등이 독립 이민의 기본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 주 신청자와 마찬가지로 호주 직업 평가기관에서 자격 평가 : 5P

10. Points for Designated Language
•호주 지역사회 언어 능력 점수 또는 NAATI Level 3 Interpreter 소지자 : 5P

11. Points for Nomination
•State / Territory의 Sponsorship을 받은 경우 : 10P

12. Points for Designated Area Sponsorship
•1년 이상 호주 Regional Area에 거주한 사촌 이내의 친인척(만 18세 이상의 호주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이 있을 경우 : 25P




지금은 더 높아지고 까다로워졌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 각 항목에서 120점을 받아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커트라인이 상향 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주에서 다시 교육을 받으면 가산점이 있기 때문에 유학을 동반한 이민이라고 봐야 했다. 언어가 안 되는 경우 어학연수부터 시작하게 되면 기간은 더 길어졌다. 지방에 거주할 경우 포인트가 가산되었지만 대신 전공 관련 업종에서 취업하기 힘들어서 해당 포인트를 포기해야 했다. 취업은 해야 했으니 지방은 포기했다.

셰어하우스 가격으로 멜버른 시내 친구네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지만 그마저도 숙박비가 상당했고 이런저런 준비 과정에서 다시 좌절하고 말았다. 이미 6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였고 예전에 비해 나이 점수에서 이미 5포인트가 깎였으니 커트라인을 통과할 가능성은 더 낮아졌다.

친구는 호주로 돌아가자 회계사인 남자 친구와 결혼했다. 호주 이민 상담센터에서 일했으니 영주권 정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음에도 그녀는 결국 호주 시민권을 가진 인도 남자와 결혼을 하고서야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그녀도 힘든 과정이었는데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뻔히 예상되었다.

친구는 다음 해에 예쁜 딸을 낳았고 한국을 떠난 지 8년 만에 영주권을 취득했다. 어렵게 취득한 영주권에 문제가 없을 때 가족과 함께 한국에 놀러 오겠다고 했다.

구로동 두산위브 아파트에 살고 있을 때였다. 열흘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친구는 이번에도 나에게 숙박을 부탁했다. 친구 혼자가 아닌 아이가 포함된 가족이라 더 부담이 되었다. 가족이 사는 집에 한 명이 방문하는 것과 한 명이 사는 집에 여러 명이 방문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호주에 놀러 가면 나의 숙박을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거절하면 이전의 일까지 모두 잊을 것 같았다. 호주에 가면 나도 신세 질 예정이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이 모두 뜯어말리고 있었다. 결국엔 그녀의 전 직장인 홍콩은행에서 가족을 위한 레지던스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나는 그들이 불편하지 않게 수시로 편의를 봐주었고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족을 데리고 가서 식사를 대접했다.

친구는 멜버른 근교에 집을 구입했다며 나를 초대했다. 나에게 또 다른 지옥이었던 직장에 사직서 같은 휴가를 내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드디어 호주에 가게 되었다. 그녀가 내 집에서 지낸 기간만큼만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고 친구네 가족을 위한 선물을 사들고 호주로 날아갔다.

입국심사 때였다. 직원이 내 여권을 들고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갔다. 기다리고 있던 아주 뚱뚱한 직원에게 나를 인계하고 그는 가버렸고 그곳에서 개별 인터뷰가 다시 이어졌다. 그녀에게 입국 목적 등등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는 공항 밖으로 나가면 친구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생존 영어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대부분 알아듣지 못한 채 그렇게 붙잡혀서 질문 세례를 받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이 불법적인 목적으로 호주에 입국하고 있는 상황이라 혼자 입국하는 여성 중, 특히 아시아계 여성은 감시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그 모든 상황을 감수하고 있었지만 호주를 다녀온 내 또래 친구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 '왜 나에게만?' 이러는가 싶어 모멸감이 들었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내가 여기에서 불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난 서울에 집과 직장이 있고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그렇게 30분가량 이어진 인터뷰는 다음 사람이 붙잡혀 오자 중단되었고 그만 가라고 놓아주었다. 그것이 꿈꾸던 호주의 첫인상이 되었다.




호주는 여전히 나에게 힘든 나라였다.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호주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였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또다시 친구의 요청이 있었다. 둘째 아들을 낳은 친구는 자신의 산후조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또한 그녀가 요청한 물품을 조달할 겸 호주에 가기로 했다. 나의 요양도 겸한 일정이었고 여유도 있었으니 한 달간 신세를 지기로 했다. 긴 기간만큼 친구가 요청한 물품은 거절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방문이니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다. 대부분 호주 시드니로 입국을 해서 멜버른의 악명 높은 입국 심사를 거친 친구는 없었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호주에 다녀온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친구의 집주소가 아닌 멜버른 시내 호스텔 주소를 체류 장소로 적었다.

출발부터 힘들었다. 인천공항을 이륙하면서 터뷸런스로 고생했다. 놀이기구라도 타는 듯한 아찔한 곡예가 이어졌다. 이러다 말겠거니 싶었지만 급강하가 계속되자 속은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경유지였던 홍콩 공항에 도착하자 주변 시선 따위 살필 여력 없이 의자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비행시간을 체크했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이미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었고 그대로 홍콩에 발이 묶였다. 비행 스케줄이 오픈되어도 출발시간이 되면 다시 지연되었고 호주 멜버른행 비행기는 언제 떠날지 모른다고만 했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비상식량이 지급되었다. 오전에 도착했지만 자정이 넘어서도 홍콩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비행기 스케줄을 확인하고 마중 나오라고 간신히 연락했다. 홍콩 공항에서 대기한 지 12시간 만에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멜버른에 도착했지만 입국심사대의 직원은 또다시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이민국 직원인 그녀를 2년 만에 다시 보니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꼬투리 잡힐 요건이 많았다. 기간이 한 달이니 직장인이 어떻게 한 달씩이나 올 수 있냐는 것이고 체류 장소로 적은 호스텔의 바우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친구 남편이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숙소는 친구 부부가 알고 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한국 내 신분증을 제시하란다.

'여권을 들고 오면서 주민등록증을 왜 가지고 와야 하지?'

없다고 하자 신용카드를 제시하란다. 비상용으로 챙겨간 카드를 건네주니 사진이 붙어있는 신용카드여야 한단다. 사진이 붙어있는 내 여권이 나를 증명하고 있고 신용카드의 영문명이 여권과 일치했으니 분명 내 명의의 신용카드가 맞지만 내 것인지 어떻게 증명할 거냐고 물었다.

'사진 붙은 신용카드를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학생증 겸용으로 예전에 발급받았던, 사진이 붙어있지만 유효기간이 지난 국제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그냥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질문이 이어지다 친구의 연락처를 달라고 해서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연락처 프로필에 저장된 친구네 가족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친구의 이름을 보고 나와 가족이냐고 물었다. 친구 이름의 끝자리가 나와 같았기 때문에 패밀리 네임으로 착각했나 보다.

직원은 친구에게 전화했고 질문을 쏟아부었다.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취급했다.

"당신 친구에게 무슨 문제 있는 거야? 공항에서 왜 전화 온 거야?"

공항에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던 친구 남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미 공항에 도착했으니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외곽에 위치한 그녀의 집은 기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출발은커녕 자고 있었던 거였다.

직원은 친구와 한참을 통화했고 그렇게 간신히 입국할 수 있었다. 공항 밖에서 친구의 남편이 오길 기다렸다. 그래도 이제는 걱정할 일이 없으니 그것으로 안도했다.

태풍으로 인해 비행기 멀미를 했고 비행기 결항으로 이틀에 걸쳐 고생 끝에 간신히 밟은 호주 땅이었는데 입국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다.

친구 남편은 스포츠카를 몰고 왔다. 아내가 자신의 생일에 선물로 사주었다고 했다. 가족 소유의 차량이 있었지만 세컨드 카로 스포츠카를 구입한 셈이다. 회계사 남편 덕에 친구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들의 형편이 나아진 모양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

친구는 내가 보고 싶어서 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형편이 나아진 친구는 해외직구를 통해 한국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국제 배송비를 내고서라도 쇼핑하던 그녀의 목적은 내가 대신 구매해서 들고 갈 쇼핑 물품에 있었다. 처음엔 저렴한 것 위주로 부탁을 했지만 점점 금액이 높아졌다. 몇만 원 짜리라 해도 여러 건이 되니 거의 백만 원에 육박했다. 친구는 호주에 오면 돈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애초에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일정 중에 친구의 생일이 있어서 면세점에 들러 그녀를 위한 핸드백을 깜짝 선물로 사갔다.

첫 방문 때는 그녀가 요청한 물품도 저렴한 것들 위주였고 내가 선물로 사 간 것을 합쳐도 몇십만 원 수준이었다. 친구네 형편이 별로였을 때라 뭐든 아쉬워하는 게 보여서 주겠다는 돈도 받지 않았다. 친구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했는데 그래서 돌아올 때 입을 옷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고 빈 손으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불할 능력이 되는 만큼 요구사항이 늘었다. 한국 제품이 좋다고 딸의 이불까지 주문하려고 할 때는 솔직히 난감했다. 더 이상은 구입할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친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구입했지만 그 후로도 친구의 요구는 이어졌다. 도저히 가져갈 수 없을 정도의 양이 되었지만 모처럼의 기회에 그녀의 '조금만 조금만'은 계속되었다. 내가 돈을 받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던 친구는 금액이 커져가자 "돈 줄게"라며 쇼핑을 이어갔지만 난 돈 받을 생각이 없었으니 마냥 부담스러웠다.

28인치 화물용 캐리어는 그녀가 주문하고 내가 결제한 택배 물품들로 이미 가득 찼다. 포장을 빼고 최대한 부피를 줄였지만 내 물건은 넣을 수 없어 가방에 따로 담았고 이불세트 꾸러미는 손에 들어야 했다. 이불 꾸러미를 들고 입국심사를 받았으니 흡사 이민이라도 온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총금액이 백만 원에 다다르자 이번에는 그냥 돈을 청구할까도 생각했지만 주급으로 생활하는 친구에게 과연 이 큰 금액이 있을까 싶었고 어쩌면 친구조차 청구 금액에 놀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혹여나 돈 때문에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길까 봐 숙박비 대신이라 생각하기로 했지만 어쩌면 그냥 맘 편하게 호스텔에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살이 많이 찐 친구는 내 옷이 맞지 않았고 이번에 챙겨간 옷들은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다.

얼마 후, 친구네는 호주의 버거킹인 헝그리 잭스 매장을 인수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인 ‘버거킹 (BURGER KING)’은 호주에서는 ‘헝그리 잭스 (HUNGRY JACK'S)’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1971년 ‘버거킹’이 호주에 첫 진출하려던 당시 이미 동일한 이름의 상표가 등록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호주에서만 ‘헝그리 잭스’라는 이름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30년 뒤 기존에 있던 호주 버거킹 상표권이 만료되자 미국 버거킹은 ‘헝그리 잭스’에게 ‘버거킹’으로 돌릴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호주 사람들이 헝그리 잭스란 이름에 익숙해졌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하여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법정은 ‘헝그리 잭스’ 편을 들어줬고 계속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버거킹’은 포기하지 않고 버거킹이란 이름을 걸고 호주로 진출하지만 ‘헝그리 잭스’를 이기지 못하고 호주에서 영영 철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는 자기네 햄버거 매장을 구경하러 다시 오라고 했다. 하지만 호주는 나에게 여전히 힘든 곳이라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아내의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면 남편도 불편할 테고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야 할 딸도 불편할 텐데 가족 모두가 동의한 일인지 의문이었다.

멜버른에서의 일상이 좋아 그곳에 자주 가려고 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평소 절약이 몸에 밴 나로서도 그곳에서의 생활이 편하지는 않았다.

요리 하나에 양파 하나를 모두 사용하려고 하자 양파가 비싸니 조금만 사용하라고 했다. 언제 다시 사용할지 모르는 양파는 자투리를 남기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의 말대로 조금만 잘라서 최소한으로 썼다. 말라비틀어진 양파 조각들이 냉장고 속에서 잔뜩 나왔는데도 말이다. 나에게 아끼라고 했던 양파도 더 이상 쓰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되었다.

친구의 딸이 즐겨 먹는 간식 중에 빨대에 초코가 들어있는 우유가 있었는데 초코를 남겨서 아이에게 다 먹어야 된다고 했더니 친구가 그런 건 버려도 된다고 했다. 아이가 있으니 유기농 위주의 식단이 되었다가 어쩔 때는 가격을 따졌다. 그곳의 물가를 모르니 무엇을 얼마나 사용해야 할지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음식 대신 청소나 설거지 등을 도맡아 하기로 했다. 호주는 전기세가 비싸지만 물세도 비싸다고 했다. 친구는 물 사용량이 더 적을 것 같다는 이유로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물을 마냥 틀어놓고 설거지하는 사람들과 달리 헹굴 때만 물을 틀어서 사용하는 나만의 절수 방식이 있었지만 친구의 집이니 친구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전기를 아끼기 위해 하루치 설거지를 모아서 한 번에 돌렸다. 가끔은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는 게 싫기도 했고 급하게 써야 할 식기가 있으면 그때그때 설거지를 하기도 했는데 친구는 그걸 보고 짜증을 냈었다. 어차피 밤에 식기세척기를 돌려야 하는데 도중에 설거지를 하면 낭비가 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친구는 매일 아침마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그대로 보관하고 마셨는데 그래서 주전자에는 항상 물이 들어있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 물을 따라놓고 다시 끓이려고 하니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물은 하루에 한 번만 끓여야 한다고 했다.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나는 따뜻한 차를 자주 마시곤 했지만 친구가 물을 끓이는 아침에만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어서 그게 은근히 힘들었다.

나는 매일 청소기를 돌려 청소했지만 그곳에서는 전기요금이 신경 쓰여서 친구에게 청소해도 되냐고 매번 허락받아서 청소했다.

그렇게 서로가 불편한 일일 지도 모르는데 친구는 한국에서의 쇼핑 리스트가 늘어나자 멜버른에 오라고 다시 독촉했다. 한번 움직이는데 필요한 최소 비용이란 것도 있고 항공편 가격도 있고 해서 한 달 정도 머물러도 되냐고 하니 그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호주 입국 과정이 순탄치 않은 데다 친구네에서 신세 지는 비용 때문에 받지 못하는 그녀의 쇼핑 비용 등 그것만으로도 '잠깐 다녀오기'엔 큰 부담이었다. 자신의 집에 다른 누군가가 와서 같이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친구가 오라고 하는 상황이지만 잠깐 다녀가라는 것은 물건만 건네주고 가라고 하는 말인 것 같아 고민 끝에 거절했다. 그러자 친구는 다른 동창에게 대리 쇼핑을 부탁했고 더 이상 연락은 없었다.

멜버른에 자주 가기 위해 호주 달러를 환전해 두었지만 호주는 그때가 마지막이 되었고 어떻게 하다 보니 친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의 연락은 따로 없었고 내가 먼저 연락해도 예의상 전하는 영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한 번은 왜 먼저 연락을 하지 않냐고 농담 삼아 전하자 친구는 되려 발끈했다. 우리 관계는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각자의 삶에 충실한 채 서로의 소식을 전하지 않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배려는 기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주면 나중에 너도 이렇게 해주겠지?'

그런 생각으로 한 일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어쩌면 나도 그런 보답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혹시라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보상 심리를 기대했다가 상처받기는 싫었다. 어차피 단 한 번의 거절만으로 그동안의 친절은 잊히는 게 세상이었다.

요즘엔 친구들이 자주 생각났지만 애써 연락하지는 않았다. 평생 연락 없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내가 기억날 때, 친구들이 나를 찾아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야,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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