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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33

불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으니 그냥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었다.

by 안녕
화산 폭발의 위력을 줄이려면
여러 번 분화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단다.
어쩌면 불행도 그렇지 않을까?




해가 지면 수면 모드가 되는 생체리듬 덕분에 늦은 시간에 방송되는 드라마는 보기가 어려웠지만 해가 길어지니 늦게까지 버티는 날이 많아졌다.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보기는 했지만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잠드는 걸 보니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피곤한 줄도 모르고 늦게까지 TV를 보다가 모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게 되었다. 그동안은 주로 범죄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었지만 이날은 후지산에 대한 방송을 했다.

천만년 전까지 후지산이 있던 자리는 해저였다. 현재 혼슈의 야마나시현 북부가 당시에는 해안이었다. 필리핀 해판이 점점 북상하자, 먼저 현 후지산의 북쪽과 동쪽에 있는 미사카 산지와 단사와 산지가 혼슈에 충돌하며 융기하였다. 그 후 100만 년 전까지 화산 군도들이 줄줄이 혼슈에 충돌해 현 후지산의 모체가 되는 先 고미타케 화산과 하코네 화산, 아시타카 화산이 만들어졌다. 당시 이즈 반도는 혼슈와 부딪히기 직전인 섬이었다.

수십만 년 전 이즈 반도가 혼슈와 충돌했다. 그 결과 후지산은 압력을 받아 거대한 폭발을 반복해 선 고미타케 화산은 5만 년 전에 古 후지 화산이 새롭게 고미타케 화산 측면에서 분화해 고미타케 화산마저 덮어버렸다. 이 무렵 하코네 화산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칼데라를 생성하였고(이시노 호수), 아시타카 산은 분화를 종료하였다. 하코네 산도 분화를 멈춘 수천 년 전에는 신 후지 화산이 새로이 분화하여 현 후지산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2900년 전에는 고텐바 암설(지반 붕괴) 사태로 고 후지 화산의 산체가 현 고텐바시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후 3000~2000년 전까지 정상부에서 10차례 정도 분화한 이후로는 측면으로만 분화했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조간 대분화(864년)를 비롯하여 여러 번 분화했지만 에도 시대의 호에이 대분화(1707년)를 끝으로 현재까지는 분화가 없다.

상당한 고봉(3,776m)으로 일본 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봉이다. 아시아-환태평양 화산대에서 보면 한라산(1,947m), 백두산(2,750m) 보다 훨씬 높고, 뉴질랜드 아오랑기 쿡 산(3,754m)보다는 조금 더 높으며 타이완의 위산(옥산, 3,952m)보다는 낮다.

후지산의 아래에서 일본 사가미 해곡 대지진이 발생한 원인인 사가미 해곡과 난카이 대지진의 원인인 난카이 해곡, 그리고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 판의 경계인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 이렇게 세 판 경계가 서로 만난다. 즉, 지질학적으로 후지산 일대는 일본 해구와 마주하는 도호쿠 동부 지방과 더불어 일본 최악의 지진 위험 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후지산을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 등재를 추진하였으나 후지산 일대에 쓰레기 불법투기 문제가 있는 데다 화산으로서 세계적으로 특별히 인정받을 만한 독자성이 없다는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 지정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그 후 일본은 후지산이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 많은 순례객을 끌어들이는 점, 각종 그림과 문학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점 등을 부각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꿔 2012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였다. 2013년 6월 22일 유네스코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제37차 세계 유산 위원회(WHC) 회의에서 후지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후지산은 산악 신앙의 대상이자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로 쓰인 일본의 상징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였고 이에 '후지산-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00년 주기로 폭발하던 후지산은 1707년 폭발 후 3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조금씩 분출해 주어야 위력이 약해지는데 300년간 힘을 모은 후지산은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을 거란다.

후지산 기슭에 있는 아오키가하라 주카이 (青木ヶ原樹海)는 9세기 후지산 대폭발 당시 분출된 용암 위에 형성되었는데 무성하고 울창한 이 숲의 면적은 30 km²에 달한다. 다공성 용암 기반암이 소리를 흡수하기 때문에 원시적인 모습을 간직한 이곳은 세상과 더욱 단절된 느낌이 든다. 민간전승에 따르면 사람들의 괴로움을 파고드는 유령 '유레이'가 나타난다고 하여 악명 높은데 우리에게는 자살 숲 또는 주카이 숲으로도 불리고 있다.

바위가 많은 화산 지대에서 나침반을 들고 있으면 천연 자성에 반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숲에 들어가면 길을 잃고 헤맨다고 하여 이 지역 대부분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희귀한 야생 동물들이 살았다.

이 숲 한가운데는 864년 후지산 북서쪽 나가오 산이 폭발하면서 생겨난 나루사와 얼음동굴 (鳴沢氷穴)이 있다. 용암이 지하로 흘러가 거대한 동굴을 만든 것인데 계단을 따라 낮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온도가 조금씩 낮아진다. 여기에서 솟아난 얼음 기둥은 겨울에 더욱 커지며 이따금 종유석과 석순이 실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굴 온도가 연중 섭씨 0도 내외로 유지되며 예전에는 씨앗과 누에고치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일부 얼음 기둥은 30m가 넘는 길이를 자랑하며 동굴에서 가장 낮은 지점의 깊이는 지하 21m, 8자형 통행 코스를 걸으며 터널을 둘러볼 수 있다.

일 년 내내 만년 얼음으로 뒤덮여있던 동굴은 현재 얼음이 거의 녹고 없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땅속의 열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얼음동굴에서 도보 약 20분 거리에는 후가쿠 바람 동굴이 있다. 지하로 200m가량 이어지는 후가쿠 바람 동굴은 인상적인 모양의 용암이 특징으로 특이한 밝은 색 이끼 군락이 천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해 준다. 동굴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현무암으로 된 벽이 소리를 흡수하기 때문에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14년, 일본 온타케(御嶽山) 화산이 분화했을 때, 살아남은 한 등산객이 찍은 영상을 보니 모든 게 한순간이었다. '만약 누구든 화산재를 보게 된다면 그것이 살아서 보는 마지막 모습'이 될 거라는 말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킨 모습이 영상에 남아있었다.

후지산의 분화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후지산이 폭발해도 우리나라에는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지만 간접적으로는 영향이 있을 거라고 했다.

영화 '백두산'이나 영화 '반도'처럼 다 같이 위협받는 일에는 왠지 차분해졌다. 결코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예전에 그런 영화를 보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두렵기만 했다.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세상이 끝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벗어날 수 없으니 그냥 다 같이 끝나버리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으려고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 사람들조차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휘청거리면 '아, 죽을 뻔했다.'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나도 그랬었다. 아직 여행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죽으면 억울하다고 나름 핑계를 대 보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런 일을 겪어도 마찬가지였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비행기를 타면서 살고 싶은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익숙해졌고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이젠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다. 추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데 가는 길이든 돌아오는 길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 '오늘, 죽어도 된다.' 그런 심정으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나에겐 집을 떠나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되었다.

가끔은 여행지에서의 낭만을 꿈꾸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에 가서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한 일이지만 아니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가더라도 거창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여행이란 그랬다.




직장 생활 중에 처음으로 여행 간 곳은 일본이었다. 해외 전시 출장을 기대하고 입사했지만 그해 IMF 사태가 일어났다. 내년에는 함께 가자며 관장 단독으로 출장길에 올랐다. 그러나 내년이 되어도 또 내년이 되어도 기회는 없었고 기약 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부분의 돈은 전세보증금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조금은 '오기'로 떠난 여행이었다. 휴가 중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은 가까운 일본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기회가 많지 않은 만큼 짧은 일정에 많은 곳을 다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맑은 날에는 100km 떨어진 도쿄에서도 보일 정도로 엄청 큰 후지산은 예부터 일본의 상징이자 고대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 년 중 7월이나 8월에만 입산이 가능하고, 본래 여성의 입산이 금지되었다가 1868년부터 가능해졌단다.

신주쿠역에서 JR 주오선 고속열차를 타고 오쓰키 역에서 내려 후지 큐코 선으로 갈아타고 후지산역이나 가와구치코 역에서 내린다. 후지산 도큐 고속열차를 타면 45분이 걸리고, 정규 노선 열차를 타면 가와구치코 역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 후지산역이나 가와구치코 역에 도착하면 버스를 타고 후지 스바루 라인까지 가면 되는데 후지 스바루 라인까지는 신주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두 시간 반이 채 되지 않아 도착한다.

일본 여행의 첫 코스는 후지산이었다. 온라인 예약 시스템이 없어서 아침 일찍 신주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후지산 고고메까지 가는 버스 티켓은 있었지만 돌아오는 티켓이 없단다. 당일치기로 후지산 정상까지 가고 싶어서 가장 늦은 시간에 도쿄로 돌아오는 티켓을 구입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연기할까 했으나 가와구치코 역에서 신주쿠로 돌아오는 티켓은 있다는 말에 강행하기로 했다. 버스 시간 내에 돌아와야 했으니 오르는 도중이라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등산을 중단하고 내려와야 했다.

초반의 후지산 등반은 힘들지 않았다. 지루하고 지루한 길이 이어졌다. 산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뻗어있는 길이 아니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그재그로 길이 이어졌다. 바로 다음 길이 2미터 담장 위로 이어져 있었는데 바로 윗길까지 가려면 한참을 돌아서 가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었지만 고도는 출발지와 다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오르고 싶은 욕심에 담장 같은 길을 수직으로 기어오르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떨쳐내고 있었다. 평탄한 길에서는 등산화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근처 신사에서 무슨 굿을 했는지 아님 무슨 행사를 했는지 길에 방울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방울 하나를 챙겨 왔다.

어느 순간부터 비탈지고 험난한 바위산이 시작되었다. 자잘한 돌멩이가 신발에 쓸려 길이 미끄러웠다. 좀 더 올라가고 싶었지만 신발도 불편했고, 미리 예매해 둔 버스 시간에 맞춰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왔다고 격려했지만 어느 정도 올라왔는지 알 수 없었고 모험을 하기엔 무리라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본 옛 속담에 '후지산을 한번 오르면 현자, 다시 오르면 바보'라는 말이 있단다. 그래도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일본에 함께 여행 다녀왔던 언니는 성당에서 만난 남자와 비밀연애 끝에 결혼했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언니가 결혼한 후엔 형부라 부르며 자주 보게 되었는데 내가 성당 누군가와 만난다는 걸 알고는 나를 극구 말렸다. 그 사람이 과거에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이유였다. 그 남자와 동기였던 다른 언니들에게 의논하니 처음엔 다들 말렸지만 이제는 달라졌을지도 모르니 지켜보라는 응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우린 헤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헤어진 걸 꼬투리 잡았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또한 눈치가 보여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그러다 그중 한 명과 사귀게 되었다. 그러자 형부는 자신과 친한 성당 동생이 나와 사귄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번에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연애하려고 성당에 다니냐고 비아냥거렸고 심지어 남자 친구에겐 헤어지라고 압박했다.

정작 본인은 성당 언니와 비밀 연애 끝에 결혼했고 그렇다고 그 언니 한 명만 사귄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당 내에서 만나서 사귀고 결혼했다. 그들은 되는 일이 나는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 일로 그 친구와 헤어졌다. 그러자 또 헤어졌냐며 비난이 이어졌다.

자신의 남편이 나를 비난할 때 언니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실연의 상처보다 언니의 태도가 더 가슴 아팠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후지산을 보면 그 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때의 일들이 꼬리처럼 물고 함께 떠올랐다.

그는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주는 자상한 친구였다. 하지만 연인이 되는 순간부터 왠지 소홀해졌고 일요일에 성당에서 마주치면 그게 데이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다정해졌다. 그 형과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우린 다시 사귀게 되었지만 그는 다시 바쁘다고 했다. 정말 바쁘게 사는 거라 믿었지만 직장 때문에 바쁘다고 하던 그는 그 시간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성당 동생이었던 그 여자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성당에서 만나는 것 말고도 그들은 평일의 대부분을 함께 있었다. 서로가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지만 끝까지 오빠 동생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나와 헤어져야 그들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하겠구나 싶어 헤어졌다. 그러자 아무 사이도 아니라던 그들은 결혼했다.

나는 스물아홉 살까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석 달이면 사람이 보였고 남편감이 아니다 싶으면 빨리 헤어져야 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거절이 반복되었을 때의 좌절감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었다. 계속되는 거절은 간절함을 무뎌지게 만들곤 무기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반면에 상처가 깊을지라도 치유는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은, 기대했던 이들의 도움보다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불행은 잘게 쪼개서 맞아야 하는 걸까? 크든 작든 불행은 언제나 힘드니까 한 번에 크게 맞는 편이 나은 걸까?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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