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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0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2

상대방의 기대에 부흥하느라 나다움을 잊고 살았다.

감당할 수 없으면 관심도 짐이다.




어느 신부님의 은퇴식에서 오래전 인연들을 다시 만났다. 신부님 덕분에 들어가게 된 어느 청년 단체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과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했으니 나에겐 가족과 다름없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던 그곳을 떠난 후, 실제 만남은 오랜만이었다.

20여 년의 세월만큼 다들 나이가 들어있었다. 반가운 만남이라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주말엔 역시나 빈자리가 없어서 바로 옆 파리바게트로 갔다. 빵집은 역시 포장 손님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빈자리가 많았다. 이미 밥을 먹은 뒤였지만 진열대의 빵을 보자 흥분되었다. 집에서 간단하게 만들어 먹은 빵 외에 제대로 된 빵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달콤한 디저트를 먹을 기회가 많았는데도 살이 찐다고 안 먹었던 지난 시절이 가장 후회스러웠다. 지금은 먹고 싶어도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언니, 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반가움에 소란스러워졌다. 빵집 안에 있던 손님마저 나가자 우리 세상이 되었다. 거의 20년 만에 얼굴을 보는 터였지만 자신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었고 자식 문제, 직장 문제에 대한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갈비탕 한 그릇에 떡과 과일을 후딱 해치우고 온 뒤였지만 따뜻한 카페라테와 페스트리 빵을 또 맛있게 먹었다. 그러자 다들 부러운 듯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날씬해서 좋겠다!"

'평소에 다이어트를 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맛있게 먹자'는 주의라 오늘 하루 살찔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이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습관적으로 체중 조절을 하면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맛있는 걸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핑계 대고 빠지기 바빴던 회식자리가 문득 그리워지기도 했다. 집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명절이라고 선물세트 한 보따리 들고 가는 직장인들이 은근히 부러웠다. 그래서 그걸 받기 위해 잠시 일을 하기도 했었다.

한 언니가 '어디에서 약을 지어먹었더니 살이 빠지더라'는 이야기를 꺼냈고 다들 거기가 어디냐며 관심을 가졌다. 그 약값으로 나는 차라리 맛있는 걸 사 먹겠노라 생각했지만 그 또한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니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먹은 만큼 살이 찌고, 안 먹으면 살이 빠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많이 안 먹는데도 자꾸 살이 찌는 것 같으면 그보다 더 적게 먹으면 되는 거였다. 어쩌면 다들 먹는 양을 남에게 맞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 기준을 남이 아닌 나에게 맞추고 나서야 비로소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도 평생을 다이어트에 열광이셨다. 몇 년에 한 번 만날 때마다 어머니의 육체는 더 비대해져 있었지만 갱년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곧 빠질 거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딸에게도 숨기고 싶으셨는지 보정 속옷에 살을 감추셨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만큼만 먹는데도 살이 찐다고 하소연을 하셨지만 내가 볼 땐 많이 드시고 있었다. 많이 드신다고 직언을 하니 이 정도도 안 먹고 어떻게 사느냐며 짜증을 내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요즘엔 입맛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셨다. 그 핑계로 다이어트하는 셈 치라고 하니 화를 내셨다. 투정하고 싶어서 하는 소리란 건 알겠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려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도 내 투정을 받아준 적이 없으셨으니 우린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입맛이 좋으면 맛있는 걸 먹는 낙으로 살면 되는 거였고, 입맛이 없으면 다이어트하는 셈 치면 되는 거였다. 나의 오랜 다이어트 경험에 비추어 그게 답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입맛이 너무 좋으면 살이 쪄서 걱정이라고 하셨고, 입맛이 없으면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거라며 걱정하시니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지금 헬스장에 다니고 계시지만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셨다. 입맛이 없으면 식욕이 억제되었으니 좋아하시면 되는 게 아닐까?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아침밥은 꼭 먹어야 한다며 챙겨서 드셨고 소화가 안 되었다고 하시면서도 점심시간이 되면 또 밥을 차리셨다. 어머니는 다이어트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을까? 체중이 줄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그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30년 넘게 다이어트를 강요받으며 살았다. 독립을 하고도 조금만 살이 오른 것처럼 부해 보이면 어머니는 다이어트하라고 성화셨다. 어릴 적엔 살이 쪘다는 이유로 맛있는 반찬을 못 먹게 하셨다. 내가 정말 살이 찐 게 아니라 아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딸이 먹으니 그게 못마땅하신 거였지만 그 덕분에 나는 자발적인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성인이 될 무렵이었다. 이젠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어머니는 나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셨다. 미움을 받지 않으려 시작한 거짓 채식이었지만 어느새 내 몸은 진짜 채식주의자가 되어있었고 고기를 소화시키지 못했다. 그날 밤 밤새도록 토하고 며칠 동안 설사로 고생했다. 아버지는 나의 편식이 못마땅하다며 밥상에서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셨다.

그러던 내가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 급속도로 아프기 시작했고 이유 없이 살이 빠졌다. 살이 찌든 빠지든 항상 50kg 중후반이었는데 갑자기 40kg 대가 되었다. 내 키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처음엔 기뻤지만 숟가락 드는 작은 힘조차 쓰지 못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러자 맛있는 것은 뺏어가기만 하던 어머니마저 잘 먹으라며 음식을 챙겨주셨다. 포동한 상태에서 아프면 모든 걸 살이 쪄서 그런 거라고 하더니 뼈가 앙상한 상태로 아프니 다들 안쓰러워했다. 그래서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다이어트 걱정 없이 주는 대로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도 좋았지만 그런 격려와 배려에 한번 맛을 들이자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체중을 재면서 벗어난 무게만큼 먹거나 뺐다. 53kg 넘으면 복부의 압박이 시작되어 통증으로 힘들어졌고 반대로 51kg 이하면 빈혈로 고생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적정 몸무게를 유지하면서 거의 십 년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체중계 없이 아침마다 뱃살을 확인하며 몸매를 유지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갱년기가 오면 나도 살이 찔 것이고 그런 살은 의지로 뺄 수 없을 테니 지금부터 부지런히 대비해야만 했다.

지금 나에게 음식이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고 복통 없이 무사히 소화시켜서 잘 배출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맛있는 음식은 나에게 사치였다.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버틴 적이 있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퇴근을 했다. 나름 단식투쟁 중이었지만 그대로 어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계속 굶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직장동료가 일주일째 되던 날, 죽을 사들고 와서 그녀의 정성에 단식은 자동 종료되었다. 웬만큼 굶는다고 죽지는 않았다. 코로나 19로 누워있을 때도 일주일 동안 굶었지만 죽진 않았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만 조용히 있으니 어느 순간 나에게 시선이 쏠렸다. 정기 모임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그 모임에 기꺼이 참여하고는 싶지만 은근히 부담이 되어 대중교통 문제를 얘기하며 확답을 미루었고 이야기가 길어지자 공황장애가 아니냐며,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강요가 이어졌다. 집에는 어떻게 가냐고 걱정을 시작하는데, 이렇게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힘든 것뿐이지 돌아가는 과정까지 충분히 연습한 상태에서만 나올 수 있었으니 돌아가는 길 쯤이야 이미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 완벽한 외출이었지만 그렇게 불필요한 걱정이 이어졌다. 다음에 내가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를 바란다는 뜻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어느새 모두의 걱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졸지에 나에게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내리더니 다음날 바로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서 나를 초대했다. 가끔 연락해서 살아있는지 안부나 물어달라고 했었는데 대화방을 만들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카톡 알람이 울렸다. 반가우면서도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처음엔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개별 톡이 왔고 동참을 호소했다.

'이게 아닌데...'

별 수 없었다. 적당히 답을 하면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적응이 되어 단체 대화방에 익숙해졌는데 이런저런 문제로 흐지부지되면 난 또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사람이 그리워질지도 몰라요.'

자려고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다들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며 나에게 무얼 먹을 건지 물었다. 조금 전에 밥을 먹었다고 답했다. 무슨 반찬이었는지 집요하게 물어서 그냥 밥만 먹었다고 하자 다들 난리가 났다. 이제 곧 자야 하기에 다섯 번째 끼니를 약식으로 만들어 둔 밥 한 덩이를 가져다 먹었던 거였다.

아침 7~8시쯤 첫 끼니를 시작으로 거의 두 시간마다 먹고 있었으니 오전에 이미 두 끼를 해치우고 오후에 남은 끼니를 챙겨 먹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식사는 대부분 종료하고 해가 지면 수면모드에 들어갔다. 무언가 허전하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잠들기도 했다. 이날은 다섯 번째 끼니로 그 약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조절했는데도 계속 그대로면 조절 방식을 점검해 보라며, 방식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나는 식이요법을 하는 게 아니었다. 잘 유지하던 나도 어느 순간 폭식을 하고 있었다. 아니 눈을 뜨고 있는 동안 계속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밥을 먹고 설거지하면서 다음 먹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설거지한 그릇을 불 위에 올리며 바로 무언가를 만들어 먹었다. 위가 찢어질 것 같은 데도 음식을 만들었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다시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살은 찌기 시작했고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멈추어야 했다. 냉장고를 비우고 팬트리를 비웠다. 그리고 하루 먹을 양을 다섯 번으로 나누어서 먹었고 6시 이후엔 무조건 침대에 가서 누웠다. 해가 지면 수면모드로 돌입하니 두세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자고 있었다. 계속 먹으면 살이 찌니 나누어서 먹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 잘 챙겨 먹어요!"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던 한 동생마저도 그들의 말에 동참하고 있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나를 공감하지 못하려나 보다.

"넌 너무 말랐어!"

자신들은 비싼 약을 먹어서라도 살을 빼고자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면서 나는 말랐으니 무조건 잘 챙겨 먹으라고 하니 이내 설명을 포기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평소에 끊임없는 다이어트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살이 잘 찌는 체질임을 알리기 위해 그들이 먹으라는 대로 먹었고 단 며칠 만에 포동한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다.

"어, 너도 살이 찌는구나. 알았어!"

그뿐이었다. 나는 다시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며칠 만에 찐 살을, 몇 달에 걸쳐 간신히 아주 간신히 뺐었다. 결국 나만 손해였던 그 일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매일 같이 무얼 먹었는지 묻고 또 묻는 그들이 점차 버거워졌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들이 바라는 대로 따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낙오자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나를 위해 살기로 했고 그렇게 사는 동안 아무런 불편이 없었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또다시 딜레마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이런 작은 모임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운데 앞으로는 영영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두려워졌다. 그렇게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고 있었다.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나도 사람이니 당연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혼자라서 편할 수밖에 없는 수만 가지 이유를 생각해 낸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나를 설득하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삶이 익숙해졌을 때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불편해졌다. 누군가를 자주 만나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함께여서 좋은, 수만 가지 이유를 생각해 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그들이 편하다고 느끼고 실제로 편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일이 끝나버리고 다시 혼자가 되면 더 큰 외로움에 사무치게 된다. 살기 위해 그 과정을 되풀이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지내던 그 시간이 그리워 홀로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껏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디서든 적응은 잘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힘들었다.

지난 일 년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집으로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물론 코로나라는 시국이 초래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어쩌 나의 집으로 놀러 오는 일이 재미없고 시시한 일이 되었을 무렵, 코로나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이웃의 방문객이 실수로 나에게 인터폰을 했다. 종교단체의 방문이 잦았으니 정말 이웃집에 찾아온 사람이 맞을까 걱정했지만 인터폰으로 실랑이를 할 수 없어 그냥 공동현관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음날도 나에게 인터폰을 했다. 잘못 눌렀다고 말하자, 알았으니 '오늘은 그냥 열어달라'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에게 인터폰을 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반복했고 심지어 방문객이 많은 위집, 아랫집 인터폰이 울릴 때마다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그들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래서 난 인터폰을 아예 꺼버렸다.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인터폰은 장식용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을 그렇게 살았나 보다.

어느 날,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 내버려 두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면 불안해졌다. 나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이라면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던 적이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놓고 떠들썩하게 지내는 것이 좋았다. 큰집으로 이사 가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나의 집이 그들에게 또 하나의 휴식처가 되길 바랐다. 방송인 박나래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공감되었다. 하지만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음식 장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나를 위해서는 아꼈지만 남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았던 탓에 무리한 지출이 이어졌다.

한동안 여행을 다니며 버텼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마저도 힘들어졌고 오래도록 혼자였다. 기회가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다시 사람이 그리웠고 더 자주 만나고 싶어졌다. 단체 톡방에서 그들의 모든 것에 공감하지 못하고 가끔은 겉돌기도 했지만 그들 속에서 웃고 떠들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던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포트럭 파티를 제안했다. 각자 음식을 챙겨 오면 호스트 입장에서도 부담이 줄어서 좋을 것 같았다.

다들 좋다고 했다. 두 명이 기혼이라서 명절 연휴에 모이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는데 의외로 그녀이 연휴 때 모이자고 제안했다. 다른 사람들도 연휴 때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집에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대화는 거기서 끝나버렸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더니 아무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만들어 줄 음식을 생각하던 나는 그대로 멈추어야 했다. 어쩌면 그들은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인사치레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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