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Sep 1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3

남은 생은 나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던 나에게,
그렇게라도 벌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래서 가장 슬프고도 외로운 추석을 보내게 되었다.

포트럭 파티를 하겠다는 의견에는 동의하면서 날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계획적인 내 성격을 잘 아는 마리아가 언제가 좋을지 날짜를 정하자고 다시 언급을 했지만 여전히 결론은 나지 않았다. 어떤 결정도 내리려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만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모두를 집으로 초대한 호스트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지만 '그때 가봐서'란 말은 여전히 힘든 말이었다. 차라리 취소가 되면 좋을 텐데, 다들 말이 없다가 갑자기 오겠다고 하면 그 또한 난감할 것 같았다.

연휴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보다 못한 내가 날짜라도 정해놓고, 상황에 따라 변경하는 게 어떨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니라면 그냥 속 편하게 취소해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명절 전날엔 어머니와 제사 음식 준비를 했고, 명절 당일엔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큰집이 있는 시골에 바로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들렀다가 친척들을 만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추석 당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 그 후 이틀 중에 하루를 디데이로 정하자고 했다. 마지막 날이 좋을 수도 있지만, 연휴 마지막 날에는 집에서의 휴식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시금 의견을 물어보았다.

가장 나이 많은 R이 추석 다음날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K도 그때가 좋겠다고 했고, 그렇게 가까스로 날짜가 정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연휴 때 집에 있을 거라고 하면서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S 자매가 자기들은 산소에 가야 하는데 언제 가게 될지 모르니 그때 가서 시간 되면 오겠다고 했다.

자매들은 이 모임이 좋다고는 하지만 누군가 얘기를 꺼내고 대화가 길어져야 한 두 마디씩 거들뿐, 왠지 의무감으로 동참하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그녀들에겐 가상공간에서의 대화만이 좋았던 건 아니었을까?

자매 중 첫째는 싫어도 좋다고 말하는 성격이었고 필요 이상으로 과한 리액션을 했다. 빈 말을 너무도 싫어하는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면 자기는 진심이라며 온몸으로 나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티가 나서 왠지 안쓰러웠다. 분위기상 무언가 말하긴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대충 둘러대다가 무심코 한 말이 진심이라고 우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둘째는 그런 언니를 따라다니다 우리와 안면을 튼, 굳이 따지자면 우리 모임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덜렁거리는 언니를 따라다니며 수습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일면식도 없던 그 동생과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단체 대화방에서 자매들은 '좋아요'만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흔쾌히 좋다고는 하지만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어서 그녀들이 정말 오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명절이면 무조건 자식들을 소환하셨는데 나는 쉬고 싶어도 대꾸 한번 하지 못하고 매번 불려 갔었다. 그녀들도 쉬고 싶은데 분위기상 마지못해 오겠다고 한 건 아닌지 걱정이라, 굳이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던 언니들은 자매가 올 수 있는 날에 다 같이 만나자고 못을 박아버렸다. 그 자매들은 꼼짝없이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자매들의 스케줄에 따라 '그때 가서 결정하자'며 또다시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만 자매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 사람들에겐 이 모임이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니 날짜를 정한다 하더라도, 다른 약속이 생기면 그대로 취소될 수도 있었다. 또한 자매가 끝까지 침묵해 버리면 그걸로 끝이었으니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가 함께 활동했던 한 신부님을 초대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모임 핑계, 명절 핑계로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신부님에게 아직 연락하지는 않았으니 그분이 시간이 되실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좋다고 하면 그때 연락을 드려서 의중을 물어보면 되고, 이들이 싫다고 하면 그뿐이었다. 신부님이 오신다고 하는데도 날짜를 정하지 않고 흐지부지할까 싶었으니, 어쩌면 신부님 핑계를 대서라도 날짜를 결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좋다는 반응이었지만 갑자기 R이 '신부님 힘들게 하지 말고, 평신도로서 거리를 지키라'며 충고했다. 남들에게 불미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지만 단둘이 만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 초대하겠다는 것이 무슨 불미스러운 일일까 싶었다. 그리고 일단 의중을 물어보았을 뿐이니 우리끼리 보자고 하면 그만이었을 일을 그렇게까지 발끈할 일일까 싶었다.

R의 남편은 예전에 내가 만나던 남자 친구에게 나와 헤어지라고 강요하던 사람이었다. 남편이 그럴 때 침묵을 지키며 동조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깊은 상처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 친구가 나의 마지막 남자 친구가 되고 말았다. 이십 대를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결혼을 위한 만남을 포기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R이 은근히 불편했다. 그럼에도 이 상태로 끝낼 수는 없으니 한 번은 만나서 풀고 싶은 마음에 몇 년 전, 용기를 내어 만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함께 여행을 다닐 정도로 친했던 언니가 어떤 마음으로 잠자코 있었는지 묻고 싶었고, 정말 내 생각이 맞다면 사과받고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와도 좋다던 R은 막상 약속을 정하려고 하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더니 결국 만남은 매번 불발되고 말았다. 그냥 내가 싫었던 걸로 자체 결론지었다.

그 상태로 지금까지 온 거라 다른 사람들이 그 언니와 같이 만나자고 할 때도 사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오래 망설였다.

초대하려던 신부님은 모두와 같이 활동하던 분이었다. 예전에는 친구였지만 이제는 편할 수 없는, 그래서 혹시라도 민폐가 될까 봐 신부님을 칭할 때도 이름 대신 세례명으로 부르며 존칭 했다. 마지막에 종부 성사를 해 주실 유일한 성직자라 오래도록 서로 불편하지 않게 인연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으니 영적인 도움을 받을 때만 연락했다. 다른 이들을 만날 때에 함께 만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가 코로나 이전이니 벌써 3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 되었다.

R은 성직자와 여신자가 친하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거였는데 개인적으로 만날 정도로 친하지도 않았고 누군가 만날 사람이 있을 때만 다 같이 만났을 뿐인데, 오해는 정작 언니가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의 모임이니 편한 자리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R 자신은 다른 신부님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서 성직자에 대한 불편함이 없나 보다며 제안했는데 그분은 되지만 이 분은 안 된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만약 K가 똑같은 말을 했으면 나는 그렇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R의 뉘앙스는 내가 결혼한 성당 오빠를 부른다고 했으면, 유부남과는 거리를 두라고 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 언니는 남편의 말에 침묵한 것이 아니라 동조한 것이었을까?'

이십 대의 나는 결혼이 목표였고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다. 남편도 성당을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 성당에서 상대를 찾았지만 결혼하지 않은 내 또래는 많지 않았다. 3개월이면 결혼상대인지 아닌지 파악이 되었지만 대부분 썸만 타다가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졌다.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 친구가 R의 남편과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어느 순간, 연락이 안 되고 자꾸 피하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가 뭐냐고 하니, 그 형이 헤어지라고 했단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친한 형이 매일 그러니까 힘들다고 하면서 형과 관계를 끊을 수 없으니 우리가 헤어지자고 했다. 어쩌면 내가 싫어진 찰나에 형 핑계를 댔을 수도 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때는 성당 언니, 오빠들이 무서웠던 것 같았다. 나는 이별 통보보다도 그 사람의 아내가 된 R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다른 남자들을 만났었다는 이유로 친한 동생에게 이별을 강요했던 그 사람도 성당에서 R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했다. 그렇다고 성당에서 그 언니만 만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는 잊은 채 그러한 발언을 한 걸 보면 '내로남불'인가 싶었다. 아니면 '남자는 되는 일이, 여자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였을까?

그 사람은 R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몇 번 본 게 전부였으니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의 평가 따위는 상관없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언니에게 나는 친한 동생이 아니라서, 아니면 언니도 남편과 같은 생각이라 잠자코 있었나 싶어서 힘들었던 것 같다.

극복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는 스물아홉 이후로 내 인생에서 결혼은 지웠고 좋은 가정을 꾸리려던 내 꿈도 포기했다. 물론 그 모든 게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한 것들이었다. 그때는 나조차도 나를 믿어주지 못했고 모든 게 처신을 잘못한,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또다시 내가 만났던 과거의 남자들을 소환할 것 같았고 뒤에서 수군댈 것만 같았다.

그때는 따질 용기도 없었고 나만 조용히 있으면 모두가 불편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긴 시간 혼자서 마음을 추스르고 지나쳤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고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주변 시선 때문에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계속 불편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만 '꿈틀' 해 버렸다. 그리고 모든 미련을 버리고 그 단체 대화방을 나왔다.




나는 아직도 사람 만나는 게 힘들었다. 한 명을 만나든, 열명을 만나든 나에겐 똑같았다. 아무리 친해도 힘든 건 변함없었다. 가족을 만나는 것도 힘든데 남은 오죽했을까? 이런 나 자신을 보는 건 더 힘들었다. 그래도 사람을 만나다 보면 사람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지만, 시간 되면 자연스럽게 보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누구를 만나든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항상 필요했다.

그렇지만 만나기로 결정했으면 만나는 것에 집중해서 빨리 적응하려고 했고 그렇게 한번 마음이 열리면 '이런 기회'에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뿐이었다. 누군가를 초대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 너무도 한정적이라, 만나는 김에 다 같이 만나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날짜를 정하겠다는 욕심에 초대하려고 했던 신부님은 산티아고 순례 중이라 한국에 계시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신부님께 먼저 물어봤더라면 이런 분란애초에 없었을 텐데' 하고 후회도 잠깐 했다. 하지만 대신에 지금도 여전히 눈치 보며 끌려다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잘했다 싶기도 했다.

R은 자신이 뭘 잘못했냐며 도리어 반문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냥 잡아뗐으면 내 속은 뒤집혔어어쩌지 못했을 텐데, 자신이 만나는 신부님은 나이 많은 분이니 상관없지만 내가 초대하려는 신부님은 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라고 딱 잘라 꼬집었다.

'도대체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눈 뜨고 잠들 때까지 기도는 일상이었다. 나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안 하면 삶이 지옥이라... 그런 내가 하느님을 상대로 도전할 수 있었을까? 감히 하느님의 사람을 넘볼 수가 있었을까?




고작 여섯 명이 모인 단체 대화방이었다. 언니들은 내가 걱정이 되어 만든 대화방이라고 늘 말해왔다. 하지만 나는 개별 대화가 좋았고 의무감으로 동참해야 하는 단체 대화는 늘 불편했다. 그 자리에 억지로 데려다 앉힌다고 될 일이 아니었지만 언니들은 그 자체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잠자코 있었다.

어쩌다 연락해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면 충분했지만 언니들은, 매일 대화를 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생들은 적당히 눈치 보며 따르고 있었으니 모두가 불편해 보였다.

받고 싶은 사람의 의중은 상관없이, 주고 싶은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흘러가는 분위기가 싫었지만 이마저도 따르지 않으면 그들이 실망할까 봐 나도 애써 동참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모른 척 넘겼으면 그뿐이었을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러기 싫었다. 어쩌면 도움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성당 사람들끼리는 누구든지 서로 반가워할 거라는 착각이 있었나 보다. 격 없이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 만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때, 몇 년에 한 번 다 같이 만났을 뿐이다. 지나고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서 그마저도 되게 조심스러웠다. 성직자에 대해서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운을 떼긴 했지만 우리끼리 보자는 한마디면 단숨에 이해하고 넘어갔을 일을 평신도 운운까지 했어야 했나 싶다. 예전 기억까지 다시 떠올라서 가슴이 참 아프네.'

단체 대화방을 나와서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K가 전화를 했지만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가까스로 진정이 되었을 때 뒤늦게 톡을 확인한 마리아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전화를 했고 나는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S 자매는 그때까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니들끼리 싸우니 끼어들지 말자는 듯 보였다.

상황이 이쯤 되면 R에게  따로 전화라도 올 줄 알았다. 그랬다면 싸우든, 풀든 했을 테지만 끝까지 자기 말 때문이 아닐 거라며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몰아가고 있었다. 우울증이 심한 한 사람의 일탈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이번에도 발뺌할까 봐, 보란 듯이 남긴 마지막 글도 정작 당사자만 모른 체하고 있었다. K가 다시 톡을 보내왔다. 걱정된다며 답이라도 보내라고 했다. 계속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톡을 보냈다.

"다음에 밥이나 먹어요."

그러자 K도 한시름 놓았는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건 나의 빈 말이었지만 언니도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나 보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싫었으니 거짓으로라도 마무리를 해야 했고, 그건 꽤 성공적이었다.

그들과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내가 다시 연락할 일은 없을 테니 또한, 그들도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생각할 테니 우린 정말 안녕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가장 힘든 연휴를 보내게 되었다.




나의 남자 친구들은 바람을 폈고 대부분 그렇게 헤어졌다. 바람이 아니라고, 친동생같이 챙겨주고픈 가족 같은 사이라고 우기던 남자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생'과 결혼해서 가족이 되었다. 뱃속에 소중한 혼수까지 장만해서 말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나는 그것에 익숙해, 헤어진 것도 내 잘못이고 남자가 바람을 피운 것도 내 잘못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문득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하기도 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미워했고 끊임없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정신을 차렸다.

'나의 잘못이... 뭐지?'



관련 글 #42.

매거진의 이전글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