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Sep 2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4

혼돈은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

때때로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도 한다.




무얼 해도 안 되는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것들을 하며 살았다. 드라마를 보거나 옛날 영화를 보거나 그조차도 힘들어지면 책을 읽으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일거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이 정도쯤이야 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지만 무얼 해도 안 되는 시기가 있었다.

내 모든 과거는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었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데이터를 날린 적도 있었고 가상공간은 해킹을 당했다. 노트북도 마찬가지였으니 모든 자료를 외장하드에 저장해 두었지만 그마저도 문제를 일으켜서 데이터를 몽땅 날리기도 했다. 어디든 안전하지 않았지만 외장하드에 보관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비우고 포맷을 해서 다시 저장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복사 도중 저장장치에 문제가 생겼다. 웬만한 문서는 폰에도 저장되어 있었지만 사진은 용량이 너무 커서 따로 저장해 두지 않았다. 매거진을 위해 폰에 따로 저장해 두었던 사진도 며칠 전에 모두 지웠다. 원본이 있으니 휴지통까지 싹 비웠는데 외장하드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자 가장 아쉬운 게 사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될까 봐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 시도가 악몽이 되었다.

한동안 부정하고 있었다. 여전히 복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장장치가 열리지는 않지만 인식은 되고 있으니 언젠가는 열리겠거니 아니, 기술이 발전하면 개인적으로 복구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컴퓨터를 빌려 쓰던 때에는 컴퓨터로 일기를 써서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했다. 나의 첫 저장장치였던 플로피 디스크는 여전히 불안했으니 프린트를 따로 해두어야 안심이 되었다. 한동안 별문제가 없어서 불필요한 프린트가 필요할까 다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만 일기를 저장해 둔 플로피 디스켓에 문제가 생기면서 몇 달치 일기를 몽땅 날려버린 일이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 기술이 좋아지면'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수십 년을 보관해 왔지만 내가 원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았다.

지난 시간 내가 거쳐온 그 모든 순간들이 열리지 않는 저장장치에 영원히 묻혀 버렸다.




직장 생활은 나에게 또 다른 지옥이었다. 12년을 몸 담았던 두 번째 직장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창업 초기에 입사해서 근무하고 있었으니 그 회사에서 나는 터줏대감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또 한 명의 직원이 있었지만 암 투병으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웠을 때의 일이다.

음악 관련 회사였기에 직원들 대부분은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거나 밴드 활동을 하는 직원도 있었다.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업소에서 투잡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가 안정이 되면서 직원을 충원했는데 그때 '그녀'가 입사했다.

예쁘고 친절했던 그녀는 금세 회사에 적응했다. 같은 구역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서로 업무가 달랐으니 그녀와 대면할 일은 거의 없었다. 눈치가 빨랐던 그녀는 회사 내에서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금세 파악한 것 같았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이사급 이상의 임원진들과 친했으니 자신보다 직급이 높다 한들 나 정도야 오가다 마주쳐도 은근슬쩍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도 인사하기 시작했다. 종종 내 자리로 와서 말을 걸었고 친하게 지내자고도 했다.

나는 휴가도 제때 써보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했던, 더구나 오랜 기간 함께 근무하면서 의지하던 직원마저 병가 중이라 혼자서 외롭게 버티고 있던 나약한 직장인이었다. 내 위치가 무언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에는 나도 회사에 이골이 났고 둘이 하던 일을 오롯이 혼자서 도맡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여차하면 사직서를 내던질 각오를 하고 있던 터라 무서울 게 없을 무렵이기도 했다. 더구나 회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어떤 위험과 잠재력을 안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회사에서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이기도 했다.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자주 했다. 라이브 카페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는 그녀는 그곳에서 피아노만 쳤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도 그 카페에서 만난 거라고 했다. 헌팅이라도 당했냐고 하니 그 가게에 자주 오던 단골손님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자리에 가서 술을 마시다 눈이 맞아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응? 피아노만 쳤다며!'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친하자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굳이 손님에게 술도 따랐었냐고 묻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런가 보다며 지나쳤다.

그런데 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 입으로 공공연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지금 별거 중인데 곧 이혼할 거래요!"

유부남들이 늘 변명처럼 하는 레퍼토리처럼 그 남자도 그녀에게 지금 '아내와 별거 중이고 곧 이혼'할 거라고 말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녀와 친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직원의 사생활에 대해서 참견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자기 인생이니 자기의 선택에 책임만 지면 되는 거야.'

어느 날은 살이 쪄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며 택이 달린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를 가져왔다. 아마도 내가 '회사에 꽤 큰돈을 투자했다더라, 그래서 대표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더라'는 소문을 믿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녀는 나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과감했지만 남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았다. 예쁘게 차려입고 다니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짧은 스커트 차림으로 회식 자리에 참여했다. 예약한 식당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룸이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녀의 스커트 속이 훤히 보였다. 모르고 있을까 봐 남몰래 문자로 알려주었는데 처음엔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하지만 주변에 술을 권하고 수시로 일어나 자발적으로 술을 따르는 바람에 그녀의 치마 속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무릎을 꿇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니 은밀한 부분까지 그대로 드러났다. 너무 놀라서 문자로 다시 알렸지만 그때부터는 도리어 나를 불편한 듯 대했다.

'응? 아닌 거야?'

내버려 두어야 하는 건가 싶어 그 후로는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내 자리 양옆으로 앉아있던 남자 직원들의 반응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은근히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왜 저러냐'며 대놓고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며 눈짓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데님 스커트 안으로 하얀 팬티가 그대로 드러나자 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녀와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근무시간에 수시로 자리를 비웠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것 치고는 너무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고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처리해야 할 하루 업무량을 채우지 못하고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되면 다음날 그 곡을 받아서 작업할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지게 되는 그런 구조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대표와 술을 마시고 온 거였다. 알코올 중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식사 때마다 반주를 즐기는 대표는 술을 유독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음주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임원진들 대부분은 은근히 그런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는 나까지 불려 간 적이 있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 한들 나도 가급적이면 그 자리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술을 좋아하는 그녀와 같이 한번 마시고는 재미가 들렸는지 그 후론 대표는 저녁식사뿐만 아니라 점심식사도 따로 했고 그때마다 그녀도 함께 사라지곤 했다.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몰라도 될 일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남자들은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조자도 술자리에서는 자랑하듯 떠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소문은 한순간이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근무시간에 그녀가 술 냄새를 풍기며 사무실로 복귀했다. 남들 시선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도 않는 듯 보였다. 이번에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근무시간은 지켜달라'라고 말하니 대표님이랑 같이 나갔다 왔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듯이 쏘아붙였다.

대표가 식사를 못했다고 해서 따라갔을 뿐이고 같이 소주 한잔 했을 뿐이라고 했다. 좀 쉬다 가자고 해서 차에서 잠깐 쉬다가 왔다며, 마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말했다.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했으니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 그렇게 최선을 다해 애써 모른 척하고 싶었다. 술이 취한 대표가 들어왔고 작업이 펑크 났는데 직원을 자꾸 데리고 나가면 어쩌냐고, 근무시간은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알았다고 하면 그뿐인걸 대표는 갑자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밥을 못 먹었다고 하니 그녀가 따라가 주겠다고 해서 몇 번 같이 나가서 밥을 먹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반주를 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잠시 차에서 자다가 술이 깨면 오려고 했다. 주차장으로 가는데 그녀가 따라왔고 자는 동안 옆에 있겠다고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니 그녀가 덮치려고 했고 술김에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아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큰일 날 뻔했다'라고 했다. 자신이 아주 대견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후 대표는 그녀를 피했고 그녀는 대표를 계속 찾았으니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직원들은 따로 회식을 자주 했는데 술자리에서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남자 친구는 몇 년째 이혼하지 않고 있어서 그 문제로 계속 싸우기만 해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러다 대표와 마음이 맞는 것 같아서 잘해 보려고 했는데 대표가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단다.

신입 직원들이 대거 입사했을 무렵, 그 직원들 사이에서 또 다른 소문이 돌고 있었다. 대표와 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있음을 함께 오래 일했던 직원이 알려주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회식할 때마다 그러니 이제는 걱정된다고 했다. 신입들이 많은 자리에서 그러니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는 이도 생겼고 다른 직원에게 정말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팀장과 실장에게 확인하니 자신들도 들었는데 그러다 말겠거니 했단다. 왜 가만 놔두었냐고 하니 술 취해서 하는 말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단다. 마음이 통했다고 느꼈던 대표가 갑자기 돌변한 것은 대표에게 여자가 있기 때문이고 대표에게 할 말 할 수 있는 여자는 한 명뿐이니 내가 그 상대라고 확신했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날은, 그녀가 월차를 내고 회사에 나오지 않은 날이었다. 출근할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그날 하루가 너무도 지옥 같아서 일단 메시지를 보냈다.

"쉬는 날에 미안하지만 확인할 게 있으니 오늘 만났으면 합니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니 그녀를 만나서 확인하기 전까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곧 답이 오리라 생각했고 전화든 메시지든 연락이 오면 물어볼 참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그런데 퇴근 무렵,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보냈기에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느냐며 팀장이 와서 따져 물었다. 그래서 내가 보낸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왜 그렇게 나오는지 내가 더 궁금했다. 나는 한마디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알고 보니 그녀는 몇 명의 직원에게 전화를 해서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고 그러다 누가 '그 말'을 전한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내가 만나자고 한 의도를 깨달았던 모양이다.

"이쯤 되면 자기가 잘못을 인정한 거나 마찬가진 거죠?"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당사자인 나에게 먼저 물었어야 했다. 잘못한 게 있으면 진심으로 사과하면 끝날 일을, 내가 무슨 협박이라도 한 것처럼 무서워서 회사에 못 나오겠다며 울면서 그만두겠다고 했단다. 이게 정상인 걸까?

그녀에겐 끝내 연락이 없었다. 이대로 지나가면 또 흐지부지 되고 말 것 같았다. '이미 상황을 아는 것 같은데 오늘 중으로 매듭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안 되어 못 오는 거라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보냈다. 그래도 끝내 연락은 없었다. 어차피 연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과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지각이 일상이던 그녀는 그날따라 일찍 나와서 짐을 싸놓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지 않고 기다린 걸 보니 나를 기다린 건가 싶어 그녀의 자리로 갔다. "이야기 좀 하죠?"라며 다가가자 갑자기 "네가 뭔데 감히..."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지?' 싶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짐을 들더니 나를 밀치며 입구를 향해 갔다. 화는 났지만 저런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싶어 그냥 내 자리로 돌아왔다.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회사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면 두 개의 사무실로 나뉘는데 우리가 있는 A 사무실 쪽에 대표이사 사무실과 팀장이 있는 녹음실 그리고 실장과 직원이 있는 믹싱룸 3개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반말에, 욕설을 퍼붓던 그녀는 문 앞에 다다르자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세요!"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녀는 회사 출입문 앞에서 B 사무실로 출근하던 직원들과 마주치자 도와달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B 사무실 직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나왔지만 A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곤 이내 다시 흩어졌는데 그러자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정말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라고 오해할까 봐 걱정이 되어 마냥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자 나에게 그러지 말라며 울기 시작했다.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 분위기라 순간 멍해지는 느낌이었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울고 불고 난리라 내가 진짜 무슨 짓을 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점점 두려워졌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내 손을 뿌리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내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거울을 꺼내더니 자기의 목을 살폈고 작은 생채기를 발견했다. 처음엔 피가 보이지 않는 까진 정도였지만 손으로 피를 짜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내 핏방울이 맺혔다. 자세히 보아야 보일 정도였지만 이제 증거가 생겼다며 의기양양해진 그녀는 더 이상 가만 안 놔둔다며 나를 폭행죄로 고소하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뒤늦게 나와서 지켜만 보던 팀장이 보다 못해 그녀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러자 이제는 팀장에게 대들더니 노동부에 회사를 신고하겠다고 했다. 복도에서 소리를 질러대니 다른 회사 직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복도로 몰려나왔다. 이미 전날에 그녀는 팀장에게 전화해서는 다짜고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먼저 통보를 했고 오늘은 짐을 챙기러 온 거였다. 그런데 회사가 무단으로 자기를 해고했다고 신고하겠단다.

그녀가 가고 나서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냥 상관하지 말 것을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아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든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녀가 기어이 나를 고소했단다. 상해진단서를 제출했으니 폭행치상죄로 조사받게 될 거라며 경찰서로 출석해 달라고 했다. 앞이 깜깜해졌다. 그녀의 비방에 당한 것은 나였고, 오늘도 사과는커녕 그녀의 할리우드 액션에 당하기만 했다. 그런데 도리어 그녀가 나를 고소했단다.

원인을 제공한 대표도, 밤새 그녀와 싸운 팀장도 나 몰라라 하니 혼자서 경찰서로 가야 했다. 나도 그녀가 뿌리치면서 부딪힌 손목의 멍과 미세한 까임 등으로 2주짜리 진단서를 발급받아 경찰서로 갔다. 파출소에도 안 들어가 봤는데 경찰서라니 막막했다.

그녀가 목에 대일밴드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왔다는데 요즘엔 병원에서도 저런 밴드를 붙여주나 싶었다. 나는 이미 패닉 상태였지만 너무 겁에 질리면 티가 나지 않는 표정 탓에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분하다는 듯이 씩씩대며 앉아 있었다.

자신이 짜 놓은 스토리대로 이미 진술한 그녀는 많은 자료를 준비해서 제출했다는데 2주짜리 상해진단서 외에도 직원들과 나눈 사적인 카톡 내용을 캡처해서 프린트도 해왔다.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직원들에게 따로 연락해서 유도신문을 했고 사적인 대화라 생각한 그들은 적당히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소문을 낸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만들어 왔다. 아직까지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소문을 냈냐?'는 질문을 하지도 못했고, 전날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말을 꺼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자신을 협박했다고 했다.

형사는 그녀의 진술을 토대로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자포자기 심정으로 전날의 상황부터 설명했고 휴대전화를 제출해서 전날에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왜 그랬냐고 질문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내가 자기를 협박했다고 했다.

내가 진단서를 제출하자 형사는 우리에게 쌍방폭행으로 조사할 거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흥분했고 나와 충돌이 없었는데 어떻게 내가 진단서를 제출할 수 있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형사가 충돌이 없었는데 본인은 어떻게 다친 거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당황해하며 이내 조용해졌다. 나는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을 뿐이고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혔고 그녀의 뿌리침으로 인해 내 손톱에 그녀가 긁힌 것 같다고 답했다.

'폭행이란, 신체에 대한 일체의 불법적인 유형력의 행사를 말하며 유형력의 행사는 물리적인 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옷을 잡았지 폭행은 하지 않았다고 하자 형사는, 사람을 붙잡는 행위도 폭행이라고 했다.

'폭행은 신체에 대한 일체의 불법적인 유형력의 행사를 말하지만 반드시 상해의 결과를 초래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불법하게 모발이나 수염을 잘라버리는 것, 손으로 사람을 밀어서 높지 않은 곳에 떨어지게 하는 것, 사람의 손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 등도 폭행이 된다. 또한 구타 등과 같이 직접 행위에 의한 경우뿐만 아니라 널리 환자의 머리맡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마취약을 맡게 하거나 또는 최면술에 걸리게 하는 등 사람의 신체에 대한 일체의 유형력의 행사 즉 물리적인 힘의 행사에 한하지 않고, 예컨대 담배연기를 상대방에게 뿜거나 강제로 키스하는 것도 폭행에 해당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경험으로 또 하나 알게 되었다.

'단순 폭행죄는 사람의 신체에 대해 폭행을 가한 경우로 2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해진다. 다만 폭행죄는 피해자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에 해당한다. 단순 폭행죄와 같이 피해자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는 사건의 경우, 처벌을 희망하는 의사표시의 철회는 제1심 판결의 선고 전까지 할 수 있으며 처벌 희망 의사표시를 철회한 사람은 다시 고소할 수 없다.'

담당 형사는 둘 다 상해진단서를 제출했으니 폭행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상해에 이르게 된 폭행치상죄로, 상해죄의 처벌절차와 동일하게 곧 검찰로 송치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둘 다 처벌받을 거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서로 합의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형사에게 물었다.

'상해를 일으키지 않은 단순 폭행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지만 폭행치상죄의 경우에는 상해를 동반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처벌의사와 관계없이 가해자는 처벌된다. 다만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한 경우에는 처벌의 수위가 낮아질 수는 있다.'

형사는 상해진단서가 없었으면 여기서 합의로 끝낼 수도 있었지만 진단서가 제출된 이상 고소 취하는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전과자가 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형사가, 검찰로는 송치되겠지만 그래도 서로 합의를 하면 처벌은 면하도록 합의서를 잘 써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잠시 얘기를 하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형사가 그러라고 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당연한 듯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근처로 가서 의자에 앉고 보니 유치장 안이었다. 아무도 없어서 유치장 문이 활짝 열려있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던 거였다.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도 씩씩대던 그녀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서로 고소를 취하하자고 했다. 그래야 검찰에 송치되더라도 처벌 안 받을 수 있다며, 둘이 같이 들었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며 나를 설득했다. 나도 내심 바랐지만 칼을 뽑았으면 끝까지 가는 게 내 방식이었다. 겁은 나지만 그냥 쳐다만 보고 있으니 그제야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우리 그동안 사이 참 좋았잖아요? 언니처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합의해요, 우리." 라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물었다. '왜 그랬냐고.' 그러나 끝까지 자기는 그런 말 한 적이 없고 자기도 직원들에게 들은 얘기라고 했다. 누구에게 들었냐니까 그건 기억나지 않는단다. 그러면서 미안하단다. 자기가 한 것은 아니지만 미안하다는 그 말이 또 어이없었지만 못 이기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알았다고 하니 자기 목에 상처 낸 것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렇게라도 동등한 입장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의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처 냈으니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형사에게 고소 취하서를 제출하고 절차를 밟았다. 신분 확인을 위해 지문 인식을 하니 커다란 모니터에 그녀의 주민등록증 사진이 떴다.

'응? 누구...?'

차마 누구냐고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담당 형사가 본인이 맞냐고 물었다. 그녀가 맞다고 했지만 형사는 정말 본인이 맞냐고 재차 물었다. 그녀는 난처해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성형 전 사진'이라고 답했다. 눈과 코만 성형한 줄 알았는데 완전히 뜯어고쳤는지 이미지조차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어느 병원에서 성형 수술을 받았는지 물을 뻔했다.

모든 절차는 끝났다.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형사에게 잘 부탁한다며 인사하고 나란히 돌아섰다.

복도로 나서자 그녀가 다시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 눈물로 호소하던 사람은 어디 갔나 싶었다. 어이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니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봤었던 그녀의 유부남 애인이었다.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갔던 모양이다. 아님 애초에 헤어진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가 경찰서에 함께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냐고 묻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욕을 하며, 어쩔 수 없이 고소 취하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바로 뒤에 내가 서 있는데도 말이다.

그녀가 왜 그런 소문을 내서 지금 이 상황까지 왔는지, 그녀와 대표와의 일에 대해서 그 남자에게도 모두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 지쳐있어서 더 이상은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돌아섰다.

그녀는 자신을 무단 해고했다고 회사를 노동청에 신고했다. 이제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할 모양이다.

그리고 몇 주 후, 검찰청에서 우편물이 왔다.

'공소권 없음.'

비록 기록은 남겠지만 처벌은 면했으니 담당 형사에게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당연히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메시지가 바로 왔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으니 그냥 액땜했다 치고 빨리 잊으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야 하는 말인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라고 전하며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몇십 년을 함께 일한 회사 사람들에게도 받지 못한 위로를, 그날 처음 본 형사의 말에 따뜻함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