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Oct 0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5

우리는 그냥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거였다.

(당)신이 버린 아이




나도 한 때는 스노보드에 열광했었다. 당연히 꿈꾸지 못하는 스포츠라 생각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년 기회를 엿보았지만 솔직히 현실에선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셔틀버스란 것이 있었다면 혼자서  봤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가려면 비용은 곱절이 들었고 게다가 혼자서 리프트 공포증을 극복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스노보드를 탔을 때였다. 오랜만에 스키장에 가서인지 그날따라 코스가 많이 길게 느껴졌다. 중반 정도 내려가고 있을 때 허벅지에 무리가 왔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도중에 멈출 수가 없으니 끝까지 버티며 무사히 내려오긴 했지만 언젠가는 힘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허벅지의 터질 듯한 느낌이 좋았고 여러 번의 반복으로 익숙해지는 그 과정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스노보드 타러 스키장에 다시 갈 수 있을까?'라던 생각은 어느새 '내가 스키장에 가서 스노보드를 제대로 탈 수 있을까?'란 걱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느덧 나도 중년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고 말았다.

'하체의 힘으로 버티며 눈을 가르며 달리는 스노보드를 다시 탈 수 있을까? 나의 두 다리가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나는 항상 집에 있었지만 늘 바깥 활동을 원했고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 주변에 있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용은 항상 나의 몫으로 돌아왔으니 감당하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부추기는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라도 스포츠가 일상이 되길 원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찾게 되었다.

인라인 스케이트가 우리나라에 많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 의욕만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구입하게 되었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스케이트를 잘 탄다는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레슨비 대신에 인라인 스케이트를 하나 더 구입해 주기로 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양재천으로 연습하러 갔다. 지인은 스케이트를 잘 타니까 인라인 스케이트도 문제없을 거라고 했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왠지 힘들어했다. 금방 탈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부추겼지만 막상 자신이 타지 못하자 이내 싫증을 냈다. 결국 나를 도와주지 않고 그대로 '먹튀' 해 버리고 말았다. 연습할 수 있는 적당한 곳과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느라 오래도록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오랜 기간 방치로 이어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방치되어 있던 인라인 스케이트가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빌라 주차장이 비어있지만 사방에 깔린 CCTV 앞에서는 누가 볼세라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집안 거실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기본을 익히고 혼자서 서게 되자 가을, 겨울에는 거의 매일 연습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밖에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코로나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다시 가을이 오고 있었지만 인라인 스케이트는 여름을 넘기지 못했다. 바깥에서 달리게 될 날만을 기대하며 연습하고 있었지만 인라인 스케이트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잠금장치가 바스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20년, 너무 긴 시간이 지나버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올 줄 알았던 그날은 결국 오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던 모든 것들이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 또한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으니 나조차도 나를 기다려주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제주도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청소로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는 생활이 되어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주변 정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이 생겨도 내 삶에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며 애써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이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가구로 채우고 새로운 가전제품을 구입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가지고 있던 것들도 대부분 처분하고 지금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집에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대신 처리할 수 있는 것들만 남아있었다.

오빠는 분양받은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임시로 3년을 거주하게 된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도 모든 걸 새로 구입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포장이사를 맡겨도 이사를 하게 되면 가구들이 파손되는 것을 알게 되자 이사와 함께 새로 구입한 가구는, 집과 함께 남겨두고 굳이 가져가지 않았다. 고작 2~3년을 쓰게 되리란 것을 알면서도 비싸고 좋은 것으로 구입하지만, 비교적 쉽게 처분해 버리는 오빠와 달리 나는 무엇이든 쉽게 구입하지도 못했고, 버리지도 못했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던 오빠는 아쉬운 것 없이 자라서인지 물건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랜 고민 끝에 구입했고 쉽게 버리지도 못했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처음으로 구입했던 전자레인지는 16년째 별 탈 없이 잘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가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전자레인지를 버리겠다고 했다. 유행 타지 않는 주방기기는 오빠도 그나마 오래 쓰고 있었는데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이제는 전자제품들도 모두 교체한단다. 용달비가 만만치 않아 대형 가전들은 포기하고 승용차에 실을 수 있는 소형 가전들만 챙겨서 가져왔다.

전자제품은 오빠가 다니는 회사 제품만 쓰고 있었는데 전자레인지는 내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내가 가진 전자레인지도 여전히 잘 쓰고 있었지만 이미 16년을 사용한 터라 당장 고장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일단 챙겨가지고 돌아왔는데 둘 곳이 없으니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 내 것은 20세기 제품이었고 오빠 것은 21세기 제품이었다. 오빠는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았으니 겉보기엔 내 것보다 더 멀쩡해 보였다. 그래서 오빠가 쓰던 것을 쓰기로 하고 내 것을 처분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전자레인지의 램프가 나가버렸다. 생각해 보니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는 싱글남이라도 인스턴트식품은 먹었을 테니 전자레인지 사용 빈도는 오빠가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괜히 버렸나 싶어 후회도 했다. 그래도 작동은 되기에 완전히 고장 나면 그때 새로 장만하려고 했는데, 그 상태로 지금까지 8년을 더 쓰고 있었다. 24년을 사용했으면 그만 보내줘도 될 텐데 이런저런 문제로 구입은 미루게 되었고 이제는 놓지 못하고 있었다. 사용빈도가 낮으니 굳이 구입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던 내가 가진 것들을 처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 사용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팔 수 있을 때 팔아버리고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일 때 넘겨주었다. 지금도 뭔가 거슬리면 처분했고 그러다 보니 집은 휑해지고 방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인 셈이다.

나는 여느 여자들처럼 한 번은 양문형 냉장고를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새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꼭 구입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사 온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구입하지 못했다. 살다 보니 집을 팔고 멀리 이사 가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갈 때 가더라도 구입해 보자며 드디어 마음을 먹었지만 냉장고가 현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사다리차를 동원해야 했는데 구입할 때는 그 비용이 지원되지만 이사 가게 되면 그 비용이 고스란히 발생하게 되었다. 사다리차를 동원할만한 큰 짐이 없으니 단순히 냉장고 하나를 옮기기 위해서 부르기엔 그 비용이 아까웠다. 더구나 사다리차를 쓰려면 옆 주차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위치라 그 주차장 사용료까지 지불해야 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시골에 작은 집을 장만하셨고 주말에는 그곳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가족의 모든 것이 불만이었으니 웬만한 살림살이를 채워 넣고 혼자만의 만족스러운 노후를 보내고 계신 셈이다. 일 년 전에 구입했던 냉장고가 작다고 계속 불만을 토로하신다더니 기어이 큰 냉장고로 바꿀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냉장고는 혼자서 쓰기엔 충분한 용량이었지만 계속 채워 넣다 보니 부족하다고 했다. 팔순의 나이엔 있는 것도 정리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지만 되려 큰 냉장고를 거리낌 없이 구입하겠다고 하니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집 문을 통과했더라면 양문형 냉장고를 구입했을지도 모른다.

가족은 각자의 모습으로, 제대로 갖추고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비우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내게 짐이 많다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래서인지 내게 남겨진 것은 책과 옷 그리고 추억들뿐인데도 여전히 비우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용 캐리어를 채울 정도의 짐이 남을 때까지 계속 정리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쯤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구입할 수 없는 큰 가구 대신 작은 가구들이 많았다. 테이블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원형 유리 티 테이블이고 다른 하나는 2인용 나무 식탁이었다. 쓰임은 달랐지만 혼자서 테이블 두 개가 왜 필요하냐는 지적이 이어지더니 어머니가 2인용 식탁을 달라고 하셔서 의자까지 세트로 가져다 드렸다. 부모님은 2인용이면 충분하다고 하셨지만 정작 식탁에는 각종 약과 영양제가 식탁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식탁의 남은 공간에 밥과 반찬 그릇을 올려놓고 편치 않은 모습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방받은 약을 먹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고 영양제는 먹지 않아 쌓여있었다. 절대 치우지 않았다. 나는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그것들이 불편했던 나는 부모님의 약병들을 선반으로 치우고 식탁을 비웠다. 그러자 보이는 곳에 두어야 약을 챙겨 먹는다고 나무라셨지만 내가 보기엔 그 약을 먹기 싫은 거였다. 처방받아 온 약은 무조건 제때 먹었던 나와 달리, 부모님은 그 약조차 드시지 않았다. 파스조차 아꼈고 결국 약효가 모두 사라진 접착제가 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한 잡다한 것들이 보기 싫었으니 부모님 집에 가면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된 모습이 좋았으니 정리에 집착하고 있었다. 청소해서 깨끗해졌을 때, 정리해서 정돈되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아무리 닦아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가장 싫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가난한 집의 풍경에는 항상 무언가 잡다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언가 널브러져 있으면, 가난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난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잡다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부자였다면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는 부자가 아니었으니 부자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신중하게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노력했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도 내 삶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이렇게 살았어도, 저렇게 살았어도 '최악 어디쯤'이었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볼까도 싶었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최악이 남아있을까 봐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살았으니 이 정도로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직도 우리가 단란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당신의 딸이 지난 시간을 힘겹게 살아온 것에 대해 가끔은 마음 아파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을 동원해서 나를 설득하려고 했을 때는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이해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만 생각을 달리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눈물에 굴복해서 또다시 원하지 않는 사과를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고 더 이상의 설득은 거부하겠다고도 했다.

솔직히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평생 동안 자식 핑계를 대면서 이혼을 거부하셨고 나에겐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조차 모르겠다고 하신다. 평생 동안 폭력적이었던 남편을, 이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편이라 우기고 있었으니 그 폭력에 상처받은 딸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딸이었으니 어머니에게 그런 딸의 상처 따위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사돈 보기에 부끄럽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딸의 상처보다 주변의 시선이 더 중요한 어머니와의 대화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 지 너무 오래된 나는 그런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딸'로는 남을 텐데, 이제는 '나쁜 딸'로도 남지 못할 것 같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이 생의 인연이 모두 끊어진다니, 그럼 죽어야 하는 걸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면 그것은 수십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정이었을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결정했다면 그것은 절대 충동적이지 않은, 오로지 이성적인 판단으로 내린 결론이다.

'이제 그만 버티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