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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Dec 1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51

둘이 있을 때 외로운 것보다 혼자 있을 때 외로운 게 차라리 나았다.

그래서 나는 당장 떠나기로 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온몸의 여행 세포가 함께 깨어났는지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여행을 결심했다는 것 자체가 나의 마음에 어느 정도 용기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길어지는 여행 기간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고, 그만큼 걱정도 늘었지만 언제나처럼 하나씩 해결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여행을 떠나고 싶었고 지금 당장 떠나도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가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금 당장, 무작정 떠날 수는 없었다. 매번 봄에 출발했던 순례길은 도착 무렵엔 성수기와 겹치게 되었는데 시간도 많은 내가 굳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숙소 경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7월 초만 되어도 학생들 방학과 직장인들 휴가로 인해 그 길을 걷는 것은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여행 시기가 다시 고민스러워졌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내가 보기 싫어서 가급적 내 생일에 맞추어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연말과 새해를 혼자서 보내기가 싫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감을 가지는 게 싫었던 셈이다. 올해는 반가운 인연들을 많이 만났으니 예전보다 연말 모임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졌고 그래서 실망 또한 더 커질 것만 같았다. 혹시나 싶은 그 마음이 혹여 희망고문으로 다가오지는 않을지 나름 두려웠던 모양이다. 혼자라서 외로운 편이 견디기에는 더 쉬울 것 같았다.

연말에 서울을 그리고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지금은 대부분 하늘길도 열렸으니 떠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여전히 여행 경비가 부담이었지만 앞으로 조금 덜 먹고, 노후에 조금 덜 살기로 했다. 나에게 여행은 항상 그랬다. 하지만 이번 연말 여행은 죽을 것 같아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살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에게 만만한 나라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지만 전쟁 중인 나라라 그런지 하늘 길이 열리지 않았다. 가겠다고 하면 못 갈 법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또다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의 겨울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졌다. 현지인이 안내하는 베트남 맛집에 가고 싶어서 친구가 있는 호찌민에 가려고 했지만 여유가 없다고 했다. 모든 경비를 내가 부담하는 조건임에도 여유를 내세우니 딱히 설득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연인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싶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호찌민에는 특별히 눈에 밟히는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혼자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평화로운 도시도 아니었다. 더더욱 한번 가봤다는 이유로 호찌민을 오롯이 혼자 감당할 자신은 없었으니 그나마 좀 더 익숙한 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베트남 다낭으로 가게 되었다. 따뜻한 나라의 크리스마스가 궁금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면 어디로든 떠나야 했으니 선택의 폭이 좁았고 추운 겨울이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움츠러드는 계절에 굳이 여행을 다니고 싶지 않았다. 특히 추운 겨울에 떠나는 따뜻한 나라로의 여행은, 공항까지 입고 가는 두꺼운 패딩마저 짐이 되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을 가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떠나야 할 이유가 있으니 이미 나는 숙소를 검색하고 있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계 관광지가 많이 변했듯이 베트남 다낭에는 새로운 숙소가 많이 생겼다. 베트남에서 무비자 기간인 15일 동안 체류하자면 무엇보다 숙박비가 저렴해야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싼 곳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혼자 여행은 도미토리가 나았으니 호스텔을 검색했고, 온종일 나가서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었기에 공용 공간과 공용 주방이 있는 곳으로 선택했다. 다낭은 이제 지도 없이도 잘 찾아다닐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 숙소를 선택하기에 한결 수월했다.

내가 첫 번째 선택한 다낭 숙소는 공항에서는 다소 멀었지만 미케 비치에선 가까운 곳이었다. 할 일 없으면 바닷가에서 멍 때리기라도 하자 싶었다. 하지만 밤에 도착해서 숙소까지 택시를 타기는 싫었고 걷기에는 좀 멀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내 쪽에서 잠시 머물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 번째로 선택한 숙소는 주방은 없지만 깨끗하고 저렴했다. 한강 부근이라 공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무엇보다 다낭 빅씨 마트에서 가까웠다. 최소 이틀은 한강 부근을 산책하기 위해 도착하는 날엔 이곳에서 2박을 하기로 했다.

다음 여행을 위해서라도 여러 숙소를 경험하고 싶었지만 반복되는 체크아웃과 체크인에 소요되는 시간 등이 싫어서 매번 한 곳에서만 묵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예약한 숙소가 실망스러우면 머무는 내내 후회하기도 했다. 언젠가 묵었던 토모다치 호스텔, 일본스러운 이름만큼 관리도 일본스럽게 할 줄 알고 일주일을 예약하고 갔는데 시설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좌식으로 꾸민 공용 공간엔 먼지 뭉치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투숙객들이 조식을 먹기 위해 사용하는 좌식 테이블 아래에는 커다란 바퀴벌레 사체가 여러 마리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치워지지 않았다. 주방이 있다고 했으나 투숙객은 사용할 수 없었고 더구나 얼핏 본 주방의 위생 상태를 보니 돈을 내고 조식을 주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가급적이면 여러 곳에서 머무려고 했으나 한번 꽂힌 숙소에 미련이 남아서 남은 일정을 또 한 곳으로 올인하고 말았다.

더블룸도 저렴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갈까 하고 잠시 고민도 했으나 갔던 곳을 또 간다는 타박과 함께, 두꺼운 겨울옷 처리 문제로 인해, 여행 시작 전부터 싸우게 될 것이  보듯 뻔했다. 그리고 아직은 코로나를 경계해야 했으니 감기라도 걸리게 되면 베트남 현지에서 손발이 묶일 수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고령의 어머니는 감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정대로 혼자 떠나기로 했다.

숙소가 정해지자 항공권을 검색했다. 베트남 무비자 기간 15일을 채우려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14일 일정으로 예약하기로 했다. 한강 부근 숙소에서 일단 2박을 하고 크리스마스 전에 미케 비치 부근 숙소로 옮겨서 10박을 하면서 베트남 다낭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하노이를 거쳐서 돌아올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우기라 그런지 연말인데도 베트남은 할인 항공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치솟은 달러만큼 유류 할증료는 어쩔 수 없었다. 연말에 가는 할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는 뱀부 항공으로 결정했다. 저가 항공사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할인항공권을 구입했지만 위탁수하물 30kg이 무료였다. 이런 횡재가! 이번에는 여행용 캐리어를 가져가도 되겠다 싶었다. 게다가 기내식을 준단다. 기내식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유럽 여행 이후, 저가항공사만 이용해서 기내식은 오랜만이라 너무 반가웠다. 이 또한 설레었다. 맛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았다. 조식이 먹고 싶어서 호텔에 묵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마치 그런 기분이었다. 숙박비가 저렴하니  여행에서 쓰고 남은 베트남 동으로 여행기간 동안 버티려고 했는데 캐리어를 채우려면 더 환전해야 할 것 같았다.

환율이 좋기로 유명한 다낭 롯데마트 환전소 환율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들렸고 없어졌다는 말도 있었다. 혹시 모르니 달러를 가져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서 다시 다낭으로 가게 되었다. 베트남은 벌써 네 번째 방문이고 다낭은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날씨가 중요했던 나로서는 비가 많은 시기에는 굳이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 처음에는 5월 말에 갔는데 이미 햇볕은 뜨거웠다. 밤에는 굳이 돌아다니지 않았으니 낮동안에 다녀야 했는데 더워도 너무 더웠다. 비가 잘 오지 않아서 여행을 하기에는 불편하지 않았지만 숨이 막혔다.

그래서 두 번째는 5월 초에 갔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걷기에도 편했고 여행 다니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미케 비치에서 모래찜질을 하기에는 추웠다. 모래를 파고 들어가서 누워있으니 은근히 추워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도 소나기는 왔다. 그래서 습하고 더 힘들었다. 무덥고 습한 베트남에서 2km 걷는 것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스페인에서 20km를 걷는 게 훨씬 더 나았다. 12월의 베트남은 기온이 적당하다고 하지만 우기라서 많은 불편을 감수하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한 겨울의 베트남은 어떨까?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 꽁화싸회쭈응이어 비엣남), 약칭 베트남(Việt Nam 비엣남)은 동남아시아의 국가이다. 주요 도시로는 하노이, 호찌민시, 다낭, 하이퐁, 호이안, 사파, 후에 등이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접해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세계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나라의 명칭인 비엣 남(Việt Nam)은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하였던 옛 베트남 왕조인 남월(Nam Việt)의 명칭을 거꾸로 쓴 것이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이고, 정부 형태는 사회주의 공화제이며 공산당이 유일당이다. 고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 꾸옌(Ngô Quyền)이 오대 십 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베트남의 왕조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국경을 넓혀갔으며, 이러한 영토 확장은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트남의 국명 비엣남(Việt Nam 越南)은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렀던 기원전 2세기의 고대 국가 남 비엣에서 유래하였다. 비엣(월, 越, Việt)은 백월(Bách Việt, 百越)족을 뜻하는 말이다. 비엣 남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베트남의 시인 응우옌빈끼엠의 시 삼짱찐(Sấm Trạng Trình, 讖狀程)이다. 이후 비엣 남은 점차 베트남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어, 1905년 베트남의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월남의 식민지화에 대해 나눈 대담은 《월남 망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비엣남은 194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이후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다.

한국어권에서는 윁남과 베트남이라는 표기가 쓰이고 있는데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한민국 표준어에서는 1965년까지 비에트남과 베트남으로 불렸다. 이 중 베트남이라는 표현이 관습상 용례로 인정되어 표준 국어 대사전에 등재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반해 문화어에서는 이곳의 언어에 대해 윁남어란 표현을 사용한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 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92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동단에 남북으로 약 1,600km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해에 연해 있으며 최대 너비는 약 650km로 이 길이는 라오스와 맞닿은 북부 국경에서 통킹 만에 이르는 거리이다. 국토는 크게 북부 고원 지대, 홍강 삼각주, 안남산맥, 해안 저지대, 메콩강 삼각주의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 북부 고원 지대
북서부에 있는 산악 지대로 중국과 라오스 영토 안까지 뻗어 있다. 이 지역의 산들은 대부분 숲이나 밀림으로 덮여 있어 인적이 드물거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산인 판시팡산(3,143m)도 이 지역에 있으며, 몽족 등 소수민족이 경작하는 계단식 논과 판시팡산으로 운행하는 케이블카가 있는 사빠 등이 위치한 라오까이 성도 있다.

• 홍강 삼각주 (송코이 강 삼각주)
북부 고원 지대에서 통킹 만까지 뻗어 있으며 거의 전역이 해발 3m 이하의 저지대이다. 홍강 삼각주는 베트남 북부에서 주요한 농경 지대로 예부터 베트남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 안남산맥(쯔엉썬 산맥)
북부 고원 지대에서 서부 지역을 가로질러 호찌민시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지점까지 뻗어 있다. 중부 지역은 대부분이 안남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야는 해안에 접해서 대상(帶狀)으로 좁게 달리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산맥이 해안으로 바싹 다가서 있으므로 좋은 항만이 없다. 이 산맥의 고지에는 타이족 이외에 먀오족·모이족·몬타냐족 등 많은 부족이 살고 있다.

• 해안 저지대
베트남의 중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산지에서 남중국해 쪽으로 비스듬히 비탈져 있고 송코이강 삼각주에서 메콩강 삼각주까지 펼쳐져 있다. 해안 저지대 거의 전역에서 쌀을 생산한다.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 메콩강 삼각주
베트남의 남부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메콩강 삼각주는 해발 3m 요 농업 지대이다. 베트남 민족은 17세기에 들어와서 선주민인 크메르족을 쫓아내고 이 미래의 곡창 지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열대 계절풍으로 5월부터 10월까지는 많은 비를 몰고 오며, 11월부터 4월까지는 동북 건조기간이 된다. 북부 일부 지역은 사계절이 나타나고 습도가 90%의 비중을 차지한다. 남부 지방은 일 년 내내 건조하고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중부 지방에는 베트남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과 가장 습한 지역이 자리 잡고 있다. 산악 지방은 삼각주나 해안 저지대보다 대체로 기온이 낮고 비가 더 많이 온다.




항공권도 결재했고 숙소도 예약했다. 특별히 무엇을 하러 떠나는 여행이 아니었으니 출발할 때까지 일상으로 돌아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한통의 메시지를 받고 한순간 지옥이 되었다.

항공 티켓 발행 수수료가 아까워서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결재를 하곤 했는데 Bamboo Airways는 자체 시스템을 이용해도 왕복 15,000원의 수수료를 청구했다. 그래서 최저가 사이트를 통해 마이 트립에서 결제했다. 미리 봐 두었던 뱀부 항공 일정으로 예약했고 원화 342,920원이 결제되었음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결제되었다는 문구가 왠지 거슬렸다. 몇천 원 아끼겠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해외에서 원화로 승인되면 수수료가 더블로 발생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원화 금액을 통보받았으니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설령 어떤 식으로 수수료가 붙더라도 15,000원보다는 저렴하겠지 싶었다. 달러가 워낙 강세라 원화를 달러로 환산하면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 무엇이 유리한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695,000원이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 너무 놀라서 해외 승인 내역을 확인하니 342,920원이 아닌 246.74 달러가 최종 승인되어 있었다. 원화가 아닌 달러로 승인되긴 했지만 금액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금액이 나올 수 있지? 한동안 멍해졌다.

외국에서 날아온 그 승인 메시지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드번호 네 자리 중에 별표 처리된 두 자리를 제외한 남은 두 자리가 일치했다. 이건 그냥 막 던지고 보는 보이스피싱 메시지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항공권 결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거라면 여행 취소도 각오하고 있었다. 티켓이 저렴한 만큼 위약금이 비쌌지만 70만 원을 들여서 베트남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즉시 은행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해외 승인 내역은 한 건뿐이었고 원화 환산 금액도 35만 원 정도라고 했다. 그럼 이 메시지는 무엇일까?

은행 직원은 보이스피싱 메시지 같으니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카드번호가 일치하니 계속 찝찝했다. 베트남 숙소 예약을 위한 디포짓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주로 부킹닷컴에서 무료 취소 가능한 숙소로 예약하곤 했는데 그중에는 디포짓을 위해 신용카드 번호를 요구하는 숙소가 더러 있었다. 어차피 부킹닷컴 시스템을 이용하는 결제였으니, 실제 카드 승인은 되지 않는다는 안내를 믿고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했었다. 하지만 내 신용카드로 부정 사용 정황이 발견되었다며 즉시 재발급받으라는 부킹닷컴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그런 연락은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찝찝해서 은행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존 신용카드는 분실 신고하고, 새 신용카드로 재발급을 받겠다고 요청했다. 그제야 그 은행 직원은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며 카드 담당 직원에게 안내해 주었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문제는 생기지 않았지만 여행 자체의 설렘이 한풀 꺾이고 말았다. 괜히 여행을 가겠다고 한 건가 싶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싶어 후회했다. 무사히 떠날 수 있을까?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이 여행, 잘한 선택이었을까?

살고 싶어서 떠나기로 한 여행이 과연 나에게 어떤 식으로 '갚음'을 할지 내내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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