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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Dec 0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50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




목동에 거주한 지도 어느덧 9년째 접어들었다. 환절기 때는 이유 없이 힘들어서 초저녁에 잠들 때가 많았다. 아침까지 푹 자고 일어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러 있었다.

어느 날 새벽 3시쯤,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깼다. 내가 무얼 하는 지도 깨닫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 없이 거실 창을 열었고, 이내 창틀에 올라서서 몸을 내밀었다.

세상이 모두 잠든 깜깜한 밤이었다. 어느 순간, 며칠 전에 발견했던 그 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반쪽자리 하늘이 아닌 그냥 하늘을 보고 싶었던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동네를 한번 둘러보았다. 내가 살고 있는 거실은 남향이지만 거주하고 있는 빌라는 동향으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건물 뒤로 빌라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동네였다. 그런데 작은 빌라 수십 채가 가득 차 있어야 할 그 공간에 낯선 가로등이 보였다. 가로등이 있을 정도의 골목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그 가로등에 비쳐 하얗게 빛나는 벽이, 실은 골목길 바닥이라는 사실에 더 기가 막혔다. 심지어 그 벽은 아니, 그 바닥은 차가 다닐 정도의 크기라 더 당황스러웠다.

그 새벽에 내가 왜, 자다 깨서 거실 창을 열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호기심은 이내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침대로 돌아와 스마트 폰에서 지도 앱을 실행시켰다. 당연한 듯 건물로 들어차 있어야 할 그 공간에 정말 작은 길이 있었고 심지어 그 길은 보건소가 있는 언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골목 안쪽에 있었던 그 보건소에 갈 때마다 큰길로 나가서 한 블록을 돌아서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집 앞 건물 사이 샛길로 들어가면 보건소까지 몇 초 컷이었다. 분명 그 샛길은 건물 뒤쪽, 막다른 곳에 위치한 작은 주차장 공간으로 이어진 통로였다. 언젠가 눈으로도 확인했었던 막다른 그 길에 새로운 길이라도 생긴 걸까? 자다 깨서 일어난 그 상황들이 다소 황당했지만 내가 모르는 사실들이 내 주변에 또 얼마나 더 있을지 사뭇 궁금했다.




잃어버린 지난 시간, 좋은 시절을 추억할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상심이 컸나 보다. 지나온 시간 속 사진들을 따로 저장해 두었던 외장하드가 제 기능을 잃어서 더 이상 그 사진들을 꺼내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문득문득 '그 사진!'을 떠올리며 회자하던 일이, 이제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사진이라는 사실 깨닫게 되었다. 이미 타격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매 순간, 상실감은 더 크게 다가올 것 같았다.

가장 아쉬운 사진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의 사진들이었다. 첫 번째 까미노 때는 힘든 와중에도 풍경사진을 많이 찍었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라 생각했으니 힘들어도 사진 찍기를 멈출 수 없었다. 내 마지막 까미노를 그렇게라도 사진으로 남겨서 추억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걷게 된 두 번째 까미노에서는 그다지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은 풍경이고, 앞으로도 계속 올 곳이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 여행을 위한 정보를 사진으로 틈틈이 남겼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모든 정보가 사라진 셈이다.

마지막이란 생각을 했을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

베드 버그라는 변수로 2017년 유럽여행을 망치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해외에서의 장기 여행이 두려웠다. 여행 초반 시작부터 문제가 생기자 남은 여행 기간 내내 고통이었다. 그래서 2018년, 2019년에는 짧은 여행만을 다녔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위축이 되어 행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여행 같은 일상을 즐기기 위해 제주도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2020년 1월, 제주도 원룸 전셋집 계약을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그래서 서두르지 말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는 도중에 코로나 문제로 발이 묶였으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기간이 생각보다 너무 길었다. 남들과는 다른 의미로 꽤 힘든 시간이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 3년 동안에도 제주도에 가기 위해 나름 노력은 했다. 하지만 난 결국 서울을 떠나지 못했다.

다음을 위해 아끼고 아끼던 아시아나 마일리지 유효기한이 코로나 덕분에 연장되었지만 그마저도 올해가 지나면 사라지게 되었다. 티켓이 아까우니 당일치기 제주도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고민하기도 했고 아니면 제주공항 구경만이라도 하고 바로 돌아올까도 싶었지만 그만 포기해 버렸다. 그런 식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티켓이 아까워도 할 수 없었다.

3년을 노력했는데도 가지 못했다면, 제주도는 나와 인연이 아닌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오라고 반기는 곳도 눈치를 보던 나였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레 내가 먼저 포기하고는 했다. 억지로 가겠다고 해서 무작정 갈 수 있는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점점 버거워졌다. 수시로 숨이 막혔다. 어디든 가고 싶었다. 아니 가야 했다. 여권의 만료일자가 나를 더 부추겼고 이제는 내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결심했고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먼 곳으로 여행 갈 때는 보통 일 년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출발하기 반년 전엔 대부분의 준비를 마치곤 했다. 전반적인 일정이 나오고,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로 입국해서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로 출국할지 결정되면 보통 6개월 전에는 항공권부터 구입했다. 구입한 항공권은, 비싼 위약금을 물어가며 취소하는 일은 내 사전에는 있을 수가 없으니 그때부터는 출발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되어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세부 일정이 정해지면 3개월 전에는 현지 교통수단 예매까지 모두 마쳤다. TGV나 유로스타 등은 3개월 전에 가장 저렴한 티켓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입한 모든 티켓의 일정대로 차근차근 계획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먹을지는 현지에 가서 결정해도 된다.

까미노를 통해서 여행 개념이 많이 바뀌었고, 두 번째 까미노에서는 그야말로 리얼 순례자가 되었다. 유럽여행이, 반드시 많은 돈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비용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방법도 있음을 알리고 싶었고 나의 다소 무모한 방식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물론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것이 여행의 낙이라면 어쩔 수 없다.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거란 생각에, 혼자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나를 위해서는 잘 쓰지 못했으니 아끼는 것 자체가 습관이 되어 어렵지도 않았다. 나에겐 항공권 티켓과 숙소만 있으면 충분했다.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해서 그렇게라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동행하고 싶었다.

두 번째 까미노 때는 저렴한 직항 항공권을 구입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항공권이 비싼 만큼 한 번의 여행에 모두 올인해야 했다. 유럽은 무비자 체류 기간인 90일에 최대한 맞추고, 쉥겐조약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를 추가하여 최소 100일을 계획했다. 여건이 되면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집에서 뒹굴거리느니 나가서 뒹굴거리자. 이렇게라도 결정하고 나니 조금은 숨이 트였다.

체류기간에 비례하여 부담되는 것이 숙박비였다. 그래서 숙소가 지원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봉사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좋은 명소를 보기 위해 여행 가기보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나는 길을 나섰다. 그곳에서 무얼 먹고, 무얼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캄보디아 외진 마을, 그곳조차 좋았던 거였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스페인이었다. 유럽 여행 중에 파리, 니스, 리옹, 루르드에서 각각 일주일씩 체류하며 프랑스에서 한 달 살기를 한 것처럼 스페인에서도 각 도시마다 일주일씩 지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마드리드와 톨레도, 세비야, 말라가, 그라나다, 발렌시아, 사라고사, 바르셀로나와 몬세랏 등 그 도시에서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고 싶었다. 지브롤터, 모로코를 거쳐서 여행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힘들 수도 있었다.

여행 준비를 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프랑스 길이 아닌, 다른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세비야에서 일주일을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에서 시작하는 은의 길에 도전해 보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프랑스 길에 비해 은의 길은 정보가 너무도 없었다. 일정을 짜기 위해 필요한 텍스트로 된 마을 리스트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우선 마을 리스트부터 작성해 보기로 했다. 지루하고 지루하지만 내가 잘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Vía de la Plata / Vía del Plata

000km/967km Sevilla 0km
005km/962km Camas 5km
009km/958km Santiponce 4km
022km/945km Guillena 13km
040km/927km Castilblanco de los Arroyos 18km
068km/899km Almaden de la Plata 28km
082km/885km El Real de la Jara 14km
102km/865km Monesterio 20km
113km/844km Fuente de Cantos 21km
133km/824km Puebla de Sancho Pérez 20km
137km/820km Zafra 4km
141km/816km Los Santos de Maimona 4km
157km/800km Villafranca de los Barros 16km
179km/788km Almendralejo 12km
193km/774km Torremejía 14km
209km/758km Mérida 16km
223km/744km El Carrascalejo 14km
226km/741km Aljucén 3km
245km/722km Alcuéscar 19km
253km/714km Casas de don Antonio 8km
259km/708km Aldea del Cano 6km
282km/685km Cáceres 23km
293km/674km Casar de Cáceres 11km
314km/653km Garovillas de Alconétar 21km
326km/641km Canaveral 12km
334km/633km Grimaldo 8km
354km/613km Galisteo 20km
360km/607km Aldehuela del Jerte 6km
364km/603km Carcaboso 4km
368km/599km Oliva de Plasencia 4km
403km/564km Aldeanueva del Camino 35km
409km/558km Puerto de Bejar 6km
412km/555km Baños de Montemayor 3km
433km/534km Valverde de Valdelacasa 21km
437km/530km Valdelacasa 4km
445km/522km Fuenterroble de Salvatierra 8km
473km/494km San Pedro de Rozados 28km
496km/471km Salamanca 23km
496km/471km Aldeaseca de Armuna 0km
501km/466km Castellanos de Villiquera 5km
506km/461km Calzada de Valdunciel 5km
533km/434km El Cubo de Tierra del Vino 27km
546km/421km Villanueva de Campean 13km
564km/403km Zamora 18km
571km/396km Roales del Pan 7km
583km/384km Montamarta 12km
596km/371km San Cebrian de Castro 13km
600km/367km Manganese de la Lambreana 4km

■+94km
614km/353km Santovenia de Esla 14km
620km/347km Villaveza del Agua 6km
621km/346km Barcial del Barco 1km
626km/341km Villanueva de Azoague 5km
630km/337km Benavente 4km
637km/330km Villabrazaro 7km
644km/323km Maire de Castroponce 7km
649km/318km Alija del Infantado 5km
657km/310km Quintana del Marco 8km
664km/303km Villanueva de Jamuz 7km
669km/298km La Bañeza 5km
673km/294km Palacios de la Valduerna 4km
682km/285km Riego de la Vega 9km
688km/279km Cuevas 6km
690km/277km Cerada de la Vega 2km
694km/273km Astorga 4km

■+367km
606km/361km Granja de Moreruela 6km
624km/343km Faramontanos de Tábara 18km
631km/336km Tábara 7km
645km/322km Villanueva de la Peras 14km
652km/315km Santa Croya de Tera 7km
654km/313km Camarzana de Tera 2km
665km/302km Calzadilla de Tera 11km
681km/286km Rionegro del Puente 16km
690km/277km Mombuey 9km
698km/269km Cernadilla 8km
706km/261km Asturianos 8km
710km/257km Palacios de Sanabria 4km
722km/245km Puebra de Sanabria 12km
751km/216km Lubían 29km
759km/208km A Mezquita 8km
775km/192km A Gudiña 16km
794km/173km Castrelo do val 19km
809km/158km Laza 15km
828km/139km Vilar de Barrio 19km
844km/123km Xunqueira de Ambía 16km
849km/118km Paderne de Allariz 5km
855km/112km San Cibrao das Viñes 6km
864km/103km Ourense 9km
875km/092km Amoeiro 11km
885km/082km Cea 10km
895km/072km Dozón 10km
912km/055km Lalín 17km
927km/040km Silleda 15km
944km/023km Boqueixon 17km
947km/020km Vedra 3km
967km/000km Santiago 20km




은의 길이라 불리는 그 길은 정보가 별로 없어서 나만의 마을 리스트를 만들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한 글자씩 입력을 했고 번역기에 넣고 올바른 철자인지 다시 한번 확인을 거쳐서 리스트를 채워갔다. 어플 정보를 참고해서 마을 간의 거리도 채워 넣었다. 각 마을의 명소나 유적지 등도 챙겼다.

그러나 은의 길은 역시 알베르게가 변수였다. 알베르게를 찾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숙박비도 나로선 감당되지 않았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프랑스 길의 알베르게 비용이 다소 올랐다고는 하나 그래도 비싸 봐야 10유로에 불과했다. 애초에 스페인 여행에서 순례길을 걸으려던 가장 큰 이유가 숙박비 절감이었다.

어차피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의 모든 사진들을 잃어버린 터라 프랑스 길조차도 처음인 것처럼 걸으면서 그 모든 풍경을 다시 남기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 길을 걸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래, 프랑스 길을 다시 걷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익숙해서 편한 그곳으로 다시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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