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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Nov 2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9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밤에 잠들기 전에 감사하면
그날 하루가 행복했던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보는 하늘에는 항상 별이 있었다. 서울은 공기가 안 좋아서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내 눈에는 항상 별이 보였다. 다른 지역과의 차이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 보이는 별이 그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 싶었다. 아님 이 정도의 별로는 부족한 거였을까?

별자리는 잘 몰라도 사다리꼴 모양에 오리온 벨트라고 불리는 점처럼 찍힌 세 개의 별 민타카(Mintaka), 알니타크(Alnitak), 알닐람(Alnilam)은 항상 추운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별들이 어느 순간 내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구로동 고층 아파트에 살 때만 해도 늘 보이던 그 별이 목동 빌라로 이사하고는 본 기억이 없었다. 다른 별들은 보였으니 탁한 공기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날씨가 추워지면서 유심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별들을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이제는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이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구별조차 쉽지는 않았지만 사다리꼴을 이루는 그 별만큼은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 별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어쩌면 하늘을 보지 않아서 그 별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늘 하늘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내가 보는 하늘의 전부였다.

우리가 별을 보지 못했다면, 하늘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끔은 하늘을 보라던 말이 이제야 실감 났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일까? 자식이 실종되거나 혹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선가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에, 부모는 때때로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전국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그런데 자식이 그 아이 하나가 아니어도 그랬다. 다른 아이는 어딘가에 맡겨두고 그 아이만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그 아이만 자식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다른 아이까지 잘못되면 그제야 이 아이에게도 미안하다며 후회했다.

'가족이란 참 미묘했다. 가끔은 죽일 듯이 밉다가도 힘들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남보다도 못한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새 가장 가까운 사람처럼 내 곁에 있는, 그게 정이든 애증이든.'

부모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가끔은 맹목적이기도, 가끔은 무모하기도 한 부모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와의 논쟁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씹히는 식감을 싫어했던 어머니는 늘 흰쌀밥을 드셨다. 잡곡을 장려해서 강제로 혼식을 해야 했던 학창 시절에도 어머니는 절대 잡곡밥을 해주지 않으셨고 그래서 나는 늘 점심시간 때마다 담임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독립을 하고서는 잡곡을 먹었다. 백미보다 현미 가격이 저렴해서 현미밥을 먹었고, 콩이 저렴할 때는 콩을 섞어서 먹었다. 건강에 좋다고 붐이 일어나도 나는 그런 것들을 사 먹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급이 늘어나면 아무리 비싼 슈퍼푸드라 해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쌀보다 저렴해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장의 흐름에 따라 내가 먹는 밥이 달라지곤 했다.

현미밥을 먹을 때였다. 어머니는 당신이 싫어하는 현미밥을 먹는 딸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나에게 왜 현미밥만 먹느냐고 물으셨다. 어머니의 질문에, 돈이 없어서 쌀보다 저렴한 현미밥을 먹는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냥 건강에 좋으니까 먹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현미가 싫었던 어머니는 내가 현미를 먹는 게 늘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도정이 덜 된 현미는 농약 잔류량이 많다더라, 어떤 사람이 현미만 먹어서 건강이 나빠졌다'더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현미는 사람을 천천히 죽이는 독약이다. 우리 조상들은 현미를 절대 먹지 않았다. 현미에는 독성이 있어 유기농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이를 제초제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쌀겨 농법이다. 또한 현미를 오래 먹으면 치아가 삭고, 몸이 여위며 빈혈·골다공증·간염·아토피 같은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심지어 다이어트를 위해 현미를 9개월 동안 먹었던 한 여성은 괴혈병과 영양 결핍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는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현미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괴담을 믿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탐사보도에서 다루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내세우던 당사자들은 막상 취재가 시작되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자 자신은 그렇게 주장한 적이 없다며 발뺌을 하기도 했다. 그 사람도 나름 이름 알려진 전문가였지만 관종이 되어버렸던 모양이다. 언론에서 질타를 받고서야 자신의 말이 과장되어 전해진 거라는 해명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선조들은 현미의 부작용을 알고 먹지 않았을까? 괴담 작성자는 스스로를 ‘약초 전문가’로 소개한 최 씨였다. 그는 현미의 독성을 경고하며, “당장 드러나는 것보다 천천히 몸에 쌓여가는 독이 무섭다. 어릴 때부터 독이 쌓여 50~60대에 부작용이 나타난다”라고 주장했다.

“무조건 현미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뚱뚱한 분들에겐 체중 감량의 효과가 있고 당 수치를 떨어뜨리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현미는 영양소 흡수를 심각하게 방해합니다. 특히 뼈와 신장, 뇌 기능 강화에 도움이 되는 미네랄의 흡수를 막기 때문에 건강 음식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우리나라 벼농사의 시작은 3천 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였다. 하지만 도정이 시작된 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며, 그 형태도 백미보다는 현미에 가까운 불완전한 도정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와서야 지금과 같은 최신 기계 도정이 가능했으니 선조들은 자연히 현미 상태의 쌀을 먹었던 것이다.

강한 독성 때문에 현미 껍질이 제초제로 사용되었을까? 실제로 벼를 제외한 잡초를 억제하기 위해 쌀겨를 이용하는 농법이 존재했다.

“현미에 아브시스산이란 성분이 있는데, 이 성분으로 쌀겨가 일종의 피막을 형성해 태양광을 차단한다. 이런 원리로 태양광에 의해 발아되는 잡초 종자의 발생이 억제되는 것이지 현미의 독성 때문에 잡초가 죽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9개월간 현미를 먹다 사망에 이르렀다는 그 여성은 어찌 된 일일까? 그 여성은 마크로비오틱의 대부인 조지 오사와의 현미식을 실행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오틱(Macrobiotic)이란 그리스어로 ‘크다’라는 마크로(Macro)와 ‘생명’이라는 비오틱(Biotic)의 합성어로, 식재료를 뿌리부터 껍질까지 통째로 먹는 것을 말한다.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섭취해야 식품이 가진 고유 에너지를 고스란히 섭취할 수 있다는 원리에서 탄생했다.

마크로비오틱에서는 현미를 가장 중요한 식재료로 여긴다. 조지 오사와 박사의 현미 식단은 현미밥에 제철 냉이 된장국, 표고전에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집밥에 가까웠다. 이걸 먹고 사망에 이르렀다는 괴담은 사실이라고 믿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마크로비오틱으로 다이어트식이나 환자식을 하더라도 극단적인 방법을 무리하게 강요하지는 않는단다. 자연 그대로 일상에서 먹는 음식과 식단을 차려 먹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건강을 해친다는 건 있을 수 없단다.

현미에 포함돼 있는 피틴산이 체내의 영양소 흡수를 방해한다는 말은 사실일까? 피틴산은 쌀 껍데기에 실재하는 성분으로, 콩류, 나무 열매, 곡류의 외피에 많이 분포돼 있는 물질이다. 2013년 발표된 〈김치로부터 피테이트 분해 유산균 선별 및 현미에서 반응 특성〉이란 논문에 따르면 ‘피틴산이 칼슘, 마그네슘, 철과 같은 무기질의 체내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것이 영양학적으로 중요하다’고 한다. 또 2012년에 발표된 〈β-propeller phytase에 의한 골다공증 예방, 치료 효능 규명〉이란 의학 논문에선 “동물 실험 결과, 곡물에 다량 함유된 피틴산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경우 골다공증을 유발할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현미를 먹었을 때 피틴산 성분은 체내에서 칼슘, 철, 마그네슘 같은 무기질들과 결합을 하게 되는데, 이 상태로 우리 몸에 흡수되지 않고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것이다. 현미와 백미의 피틴산 차이는 얼마나 될지, 또 배출되는 무기질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보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쥐에게 분도 별로 도정된 쌀을 먹인 후 배설물을 분석해 배출된 무기질의 양을 비교해 봤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칼슘의 손실량을 비교해 보니 현미에 가까울수록 체내에 흡수되지 못하고 배출되는 양이 증가했고, 인의 경우는 백미와 현미의 배출량이 1.5배나 차이가 났다. 마그네슘도 백미보단 현미에 가까울수록 배출량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칼슘 섭취량은 전 연령에 걸쳐 권장량보다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다. 특히나 성장기인 10대 청소년층과 65세 이상 노년층의 경우엔 권장량에 비해 50% 정도만을 섭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이 칼슘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분이나, 노인분들, 환자분들은 현미 섭취로 인한 칼슘 배출을 우려해야 한다. 현미식을 할 것이라면 칼슘제를 보충해서 드시고, 마그네슘이 많이 들어 있는 해조류 식품도 매일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장의 허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정리해서 어머니께 보여드렸지만 시간이 지나면, 같은 상황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에게 한번 각인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지만 남편에 대해서는 이상한 논리를 이어가셨다.

현미가 비싸서 귀리쌀을 먹고 있는 지금도 어머니는 뜬금없이 현미밥을 먹지 말라는 이야기를 종종 꺼내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현미밥 먹지 마라"는 그 말을 들으면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다짜고짜 하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제발 그만하시라"라고 하면 마치 내가 맹목적인 '현미 찬양론자'라도 되는 듯이 어머니는 나를 비난하며 또다시 그 주장을 이어가셨다. 지금은 현미를 먹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는 또다시 불쑥 현미 이야기를 꺼내서 나를 힘들게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릴 적부터 백미밥을 먹었지만 독립하고 나서는 값싼 곡류를 사 먹었다. 백미가 비싸면 현미를 사서 밥을 지어먹었고 현미가 비싸면 귀리로 밥을 지어먹었다. 돈이 없어서 현미밥을 지어먹었을 때 분명 처음부터 맛있다고 느끼진 않았다. 먹어야 하니 먹었고 다들 건강에 좋다고 하니 그런 이유로 조금 포장했을 뿐이다. 까끌함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톡톡 터지는 씹는 맛이라고 스스로 입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괴롭히던 복통이 혼식을 하면서 사라지기도 했다. 나는 왜 흰쌀밥을 먹으면 배가 아픈 건지 늘 궁금했었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인도인은 일본 쌀밥을 먹기 싫어서 점심때마다 밥 먹자는 동료 일본인들을 피해 다녔단다. 인디카 쌀밥을 먹고 살아온 그에게, 차진 자포니카 쌀밥은 목구멍에 들러붙어 넘어가지도 않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밥이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먹고 나면 몰려오는 더부룩한 느낌까지 너무 싫어서, 이 인도인은 한동안 점심 끼니를 포기해야만 했단다.

한국인은 인디카 쌀밥을 먹으면서 ‘밥이 풀풀 날리고 힘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못 먹을 만큼 맛이 없다’고 한다. 반면 인도인은 자포니카 쌀밥을 먹으면 ‘입천장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너무 들러붙는다, 그래서 입안에 넣기조차 두렵다’고 한다.

한국인은 자포니카 쌀밥을 먹고 나서 든든하다고 하며 밥심을 칭찬한다. 하지만 인도인은 인디카 쌀밥을 먹고 나서 가뿐하다고 하며 알곡 그대로 지은 밥의 개운함을 칭찬한다.

한국인은 인디카 쌀에서 묘한 향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맛이 거슬린다고 한다. 하지만 인도인은 자포니카 쌀은 아무런 향이 없다고 했고 그래서 자포니카 쌀은 좋은 향이 없는 싸구려 쌀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차진 밥이 누군가에게는 숨 막히는 밥이 될 수 있다. '든든하다'를 뒤집으니 '더부룩하다'가 되었다. '냄새난다'와 '향기 있다'도 그랬다. 자포니카 쌀은 자포니카 쌀의 속성과 맛이 있고, 인디카 쌀은 인디카 쌀의 속성과 맛이 있다. 그러니 '맛이 없다'는 말은 '내게 익숙지 않다'라든지 '잘 모른다'로 고쳐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배가 프다고 느낀 것이 속이 더부룩함을 그렇게 표현한 건지도 모른다. 백미가 저렴해지면서 쌀밥을 먹으면 다시 배가 아팠다. 그리고 가끔은 찰기가 있는 밥이 생각나서 먹었지만 속은  불편했다.




지난 시월에는 우리 가족에게 넘고 가야 할 숙제가 있었다. 어머니의 생신과 함께 아버지의 팔순이 있는 달이었다. 한 달에 백만 원씩 그렇게 열 달을 적금 부어서 천만 원으로 아버지 팔순잔치를 하자고 올케가 작년에 제안했었다. 나는 집에서 쫓겨나 고향에 안 간지 몇 년이 지나있었다. 덕분에 때마다 불려 가지 않아서, 이제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백수인 나에게 그 일에 동참하라는 말이 부담되었다. 자신도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컸다며 나를 이해한다는 올케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없었다. 그냥 맞았던 거였지 지금도 할 말 다하는 해맑은 아이였다.

팔순 잔치를 앞두고 어머니는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나를 설득할 것을 지시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오로지 이해한 남동생만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오빠도 핑계 김에 전화를 하긴 했지만 다행히 나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가서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꺼냈다. 며느리인 올케도 전화는 했지만 어머니의 작전만 나에게 실토했을 뿐이다.

그제야 아프다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의 작전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나무라기 시작했다. 사돈 보기에 부끄럽다며 당장 내려오라는 강압적인 모습에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원치 않는 강요 전화는 끊어도 된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팔순잔치는 며느리와 두 아들에 의해 치러졌다. 나는 나쁜 딸로 남기로 했으니 끝까지 애써 모른척했다.

친하다고 믿는 순간에는 큰돈도 아깝지 않았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나는 작은 돈조차도 아까웠다. 사람이 싫어지면 그 모든 것이 아까워졌으니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의 누군가를 향한 애정의 측도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도 아까운지 아깝지 않는지로 구별하게 되었다. 참 씁쓸했다.

모든 의욕을 잃은 나였어도 가끔은 뭘 사고 싶기도 하고, 무얼 먹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하는 거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욕적이었던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죽기로 결심했던 순간이었다. 살려고 몸부림칠 때는 끊임없이 나와의 의견 충돌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리를 끝내고 죽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마치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처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끝이 있는 인생이니 그때까지는 어떤 식이로든 살아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거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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