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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2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55

무한대로 속도를 올리면 그 존재가 사라진단다.

내 존재가 사라지려면,
도대체 속도를 얼마나 올려야 할까?




나는 살아오면서 죽을 뻔한 상황도 많았지만, 죽고 싶었던 순간들 또한 참 많았다. 비겁하게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아서 그마저도 계획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었으면 싶었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그 순간이 되었을 때,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이 생각났다. 죽기로 결정했으니 죽기 위해, 그 일을 서둘러 매듭지었다. 그렇게 미련이 사라지면 세상과 작별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이 오자, 무언가 또 해결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뭐라도 미련이 남아 있으면 죽지는 않겠구나!'

어쩌면 아직은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죽으려던 것뿐이었다. 뭐라도 하면서 버티면 그래도 살아는 있겠구나 싶었다.

지나고 보니 주변 정리를 모두 끝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죽을 마당에 누가 밉고, 뭐가 거슬릴까? 그 무엇도 마음 쓰이지 않았고 그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끝을 정해두면, 그전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그래서인지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다. 그런 행복이 반복되면서 다시 삶에 의욕을 가지기도 했지만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다시 힘들어졌다.

유난히 힘들었던 지난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살이 계속 빠졌고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조차 외면하고 있었다. 뒤늦게 몸무게를 확인했을 땐, 그저 체중계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개의 체중계 모두 같은 숫자를 가리키자 그제야 믿을 수밖에 없었다. 10년 ,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기록했을 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록마저 경신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면서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니 스스로를 위해 애써 여행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마지막 여행을 위한 준비가 거의 끝났을 때였다. 무언가 할 일이 생겼다는 이유 때문인지 난 다시 활력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외출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다. 무언가를 위한 목적이 있는 만남은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이 그리웠을 뿐이었다.

평소 나에게 조언을 해주시던 수사님을 뵈러 마리아와 함께 찾아갔다. 봉사자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와서 일해 달라고 늘 요청하던 곳이었지만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엔 여러모로 많이 버거웠다. 그곳에 가는데만 두 시간이 걸렸고 네 시간을 서서 일하고 나면 다시 두 시간이 걸려서 돌아와야 했으니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직원이었으면 부근으로 이사를 갔을지도 모른다. 초창기부터 봉사자를 구한다는 말을 계속 들어서인지 그곳에는 봉사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직원도 채용해서 쓰고 있었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다른 지점이 생겼을 때 봉사활동을 시작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요즘 청년들은 쉽게 일을 그만두어서 수시로 직원을 뽑아야 하는  힘들다며, 꾸준히 일해줄 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를 직원으로 채용하면 끈기 있게 잘 해낼 자신이 있었지만 그런 요청은 따로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볼까 싶은 적도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백수에서 오는 선입견을 주기 싫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지낼 만하다고 했던 말이 오히려 또 다른 선입견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일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하니, 커피를 좋아하니 바리스타 자격증이라도 따놓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이미 바리스타 자격증은 있다고 답했다. 커피전문점에서 일하고 싶어서 이력서를 제출해 보기도 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이미 여러 번 거절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니, 계속 도전해 보라며 다들 격려해 주었다. 거절당하더라도 계속 지원서를 내면 언젠가는 받아줄 거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날, 대화 도중에 제주도에 지점이 생긴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제가 갈게요."라고 외쳤다.

순간 적막이 흘렀고 모두의 걱정이 앞섰다. 캄보디아의 그들처럼 나의 건강을 먼저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공식적으로 건강했다. 마음이 아픈 것이지, 몸이 아픈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아프기는 해도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필요하다면 아픈 것과 상관없이 일은 해야 했다. 처음 제주도에 가려고 준비했을 때는 비용이 은근히 부담되었다. 딱히 무언가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으니 남는 시간에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원봉사에 대한 시선이 따가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비용을 받고 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 현지에서 직원을 따로 뽑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에게 기회를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도 익숙한 이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그곳에 간 것은, 그 기회를 얻으려던 것이라 생각하며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매사 예민한 내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나조차도 불안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절실했다. 지금 나에게는 새로운 일이 필요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연말 여행까지였다. 절실함에서 나온 용기로 나는 모처럼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나에게도 그 기회가 올진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언제나처럼 버텨낼 자신은 있었다. 막연함으로 가는 무모함보다는 일을 하러 가는 편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더 절실했다.

오픈이 확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나에게 일을 겠다고 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듣자, 그제야 겁이 났지만 살아야 할 이유가 다시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냥 기뻤다. 나의 절실함이 하늘에 닿은 기분이 들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확인하고 싶어서 서울에서 먼저 일을 해보기로 했다. 봉사활동이긴 하지만 직원들과 똑같이 하는 일이라 체력 회복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며 일주일에 이틀씩 일하게 되었다. 온종일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매장이 생각보다 넓어서 그 자체도 꽤 힘들었다. 하지만 하루 일을 무사히 끝내자 안도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리고 뿌듯했다. 직원들과 똑같이 일을 했으니 눈치 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준비하라고는 했는데 연락이 없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도록 그 어떤 '계약'조차 하지 않았다. 직원으로 가겠다고 했으니, 나에게 근무조건 등을 알려주면 나는 오픈 날짜에 맞추어서 이사하고 준비하면 되는 거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직은 유동적이라, 모든 것이 불확실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일반 회사가 아니니 내가 잘 모르는 이곳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계획하고 미리 준비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집 계약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조급해 하기보다는 찜질방을 전전하며 출근하게 되더라도 집은 가서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오픈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으니 그저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연락하니 나중에 연락하겠단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불안했지만 그날은 끝내 연락이 없었다. 그날 하루가 정말 길게만 느껴졌다. 다음날 다시 연락하니 바빠서 잊고 있었단다. 하지만 이내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제주도점은 이미 오픈했고 직원도 뽑아서 일을 시작했단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무엇을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리 뽑아두었던 직원이 출근하지 않겠다고 해서 급하게 직원을 다시 뽑느라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자, 그제야 화가 났다.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으니 내가 원하면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가면 일을 할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직원이 그만두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한 달이 되기도 전에 그만둘 수도 있지만, 1년이 지나도록 일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제주도에 가서 미리 거주하고 있으면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차라리 애초에 제주도 거주가 조건이었다고 미리 얘기해 주었다면 기꺼이 가서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상황에서 먼저  있으라고는 차마 요구할 수 없었단다. 나 또한 그랬다. 무작정 가서 기다릴 수 없었으니 확정되기만을 기다렸던 셈이었다.

제대로 따질 수 없었다. 그만큼 그 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언제 올지 모를 그 기회라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 기회라도 잡으려면 제주도에 가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집을 구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여행을 간 것이 아니니 가서 뭐라도 돕고 싶을 테고 그러면 나는 봉사자로서의 보람조차 느낄 수 없는, 무보수 일꾼으로 계속 일만 하고 있을  같았다. 그러다 결국 기회를 얻지 못하면 감정만 상한 채, 그곳에서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

기회가 온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은 혼란이었다.




누군가가 10억을 주면서 대신 감옥에 다녀오라고 한다면?

젊었을 때의 나라면, 거부했을 테지만 지금은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과자가 되었을 때, 주변의 시선 등을 생각하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선을 신경 쓸 주변인이 없다. 젊었을 때라면 앞으로의 무한한 가능성에 다소 기대를 걸었겠지만 지금은 그 어떤 기대조차 없으니 그 돈에라도 기대를 걸어야만 했다. 그 돈이 있다면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그래서 바르게 살고자 노력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만큼 쓸데없는 일이 있었을까 싶어 가끔은 씁쓸하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누군가에게 쉬운 일이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도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뛰는 맥박이 몇 군데 있었다. 불안과 함께 떠난 베트남에서 한 곳이 추가되었다. 왼쪽 눈 주변에서 느껴지던 경련은, 마그네슘 부족으로 생긴다는 그것인 줄 알았다.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그 떨림은 어느새 한 곳으로 모여들었고 눈꺼풀 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가끔씩 뛰는 다른 곳과 달리 눈 주변의 떨림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입술을 움직이거나 밥을 먹으면 덩달아 함께 움직여서 불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젊을 때는 돈 버느라 건강을 잃고, 늙어서는 건강을 되찾느라 평생 번 돈을 다 쓴다'는 말이 있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평생 번 돈을 다 쓸 때가 바로 죽을 때라는 말이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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