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저 조용히 지내다 가는 거야. 그러면 된 거야.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난, 기억도 나지 않던 할머니가 자꾸만 생각났다. 명절 외에는 만난 적도 없었고, 따로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분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끝으로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외가와 친분이 많았지만 나는 친가가 훨씬 마음이 편했다. 가까운 만큼 함부로 대하는 외가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친가에서는 상처받은 일이 별로 없었다.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볼 때마다 어색해서 자연스럽게서로 매너를 지키는 사이였다.
할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시는 양반이셨으니 언행에도 늘 조심하셨다. 여자라고 업신여기는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평생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분이셨다. 어머니도 좋은 시어머니였다고 인정하셨다.
어떻게 보면 아들만 사람 취급을 받던 시기였고 우리 집이 그랬듯이 친가든 외가든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친가의 그 누구도 내가 여자라서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인간답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반면 친하게 지내던 외가는 이제는 다가가기 힘든 곳이 되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었던 외삼촌들에게선 특별한 차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아저씨들이었으니 집에서는 달랐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느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이모들은 오빠와 남동생과 나를 늘 차별했다. 명절에 주는 용돈도 달랐다. 항상 나이 순서대로 용돈을 주시던 큰 외숙모가 나에게만 유독 차별을 두는 이모들에게 대신 물었다. 그러자 이모들은 오빠는 나이가 많으니까 나보다 많이 주는 거고, 동생은 어리니까 나보다 많이 주는 거라고 했다. 오빠가 성인이 되자 이제는 어른이니까 푼돈을 줄 수 없다고 용돈을 많이 주셨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되자 용돈은 아이들이나 받는 거라면서 푼돈조차 주지 않으셨다.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모들과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런 다툼도 없었다.
작년, 둘째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제주에서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안부차 한 전화였지만 거의 몇십 년 만의 일이었다. 이모에게는 늘 자식이 우선이라 조카에게 신경 쓰지는 않았으니 그저 사무적인 안부인사로 통화는 끝이 났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한참 동안 통화를 이어갔다. 어머니와는 도무지 안 되는 수다였다. 이모와 나눈 대화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이야기였지만 그걸로도 서로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가능했다. 어머니와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레퍼토리는 늘 똑같았고, 모녀의 대화는 결국 싸움으로 끝이 나곤 했다. 어머니의 그런 말들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배짱이 생겼지만 그런 후에는 주변의 누군가를 붙들고 당신의 못된 딸에 대해서 하소연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결코 바뀌지 않으셨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했지만, 지나온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겐 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우선이었다. 지인들이 흉을 본다면서 나를 바꾸려고 하시지만 어머니 스스로 그들에게 딸의 근황을 알리고 계신 탓이 아닐까? 자랑거리가 없는 딸은 그냥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걸까?
이번 여름은 유난히 힘들었다. 남들 휴가 떠나는 시기엔 집에 있어야 한다는 고집에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장기간 숨 막히는 열대야를 겪었고 땀띠와 두드러기를 겪으면서 몸도 마음도 무너졌다.